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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역사박물관] <은평발굴, 그 특별한 이야기> - 둘

Gijuzzang Dream 2009. 11. 6. 20:18

 

 

 

 

 

 

 

 

(1) 은평뉴타운 제2지구 C공구 내 유적

    : 조선시대 한양 북서쪽 지역의 집단묘역 확인 등 

 

 

은평뉴타운 제2지구C공구 내 은평 진관동 분묘군Ⅰ-  

ㅇ조사 - 2009.01.08 ~ 2009.01.17

서울시 은평구 진관외동 산134-1번지 외 88,881㎡

통일신라 - 석실묘 1기

조선시대 - 토광묘(명기, 청동접시 등), 수혈주거지(분청접시 등), 수혈, 추정건물지(조선통보 등)

시대미상 - 가마 1기

근대 - 석축 2기 

발굴조사보고서 - 중앙문화재연구원(2008.10-2009.9까지 Ⅰ,Ⅱ,Ⅲ,Ⅳ권 발행)        

 

 

2지구는 은평뉴타운 도시개발사업지구의 중심부에 해당한다.

발굴조사 지역은

북한산에서 서남쪽으로 뻗어 내려온 가지능선(해발 139m, 이말산)의 남사면에 위치한다.

조사결과 한강문화재연구원에서는 조선시대 분묘 494기, 수혈 4기,

중앙문화재연구원에서 조선시대 분묘 3,459기, 건물지 2기, 주거지 3기, 수혈유구 4기 등

모두 3,966기의 유구가 확인되었다. 유물은 백자 ․ 명기 ․ 분청사기 등 도자기류, 구슬류,

숟가락 ․ 젓가락 ․ 거울 등의 청동류, 벼루, 철기류 등이 출토되었다.

 

 

은평구 진관외동 일원의 은평뉴타운 제2지구 C공구 내 유적에 대해

현재까지의 조사결과와 향후 발굴조사 방향에 대한 자문을 구하기 위한

관계전문가 지도위원회 및 문화재에 관심이 많은 일반인 대상 현장설명회가

2007년 6월 22일 개최되었다.

또 은평뉴타운 제2지구(C공구) 사업부지 내 유적 발굴조사 내용 및 성과 등을 소개하는 현장설명회를

2007년 10월 10일 발굴현장에서 개최하였다.


전문조사기관인 중앙문화재연구원은 서울시 진관외동 산134-1번지 일대의

은평뉴타운 제2지구 사업부지 88,881㎡에 대하여, 

2006. 9. 6.에 착수하여 현재까지 발굴조사하여 3,000여 기의 조선시대 분묘가 확인되었으며,

1,800여 기에 대한 조사를 완료하였다.

 

  

 

서울시가 신시가지를 추진하는 은평뉴타운 예정지 일부인 제2지구 C공구 중

녹지가 들어설 공간을 제외한 3만3천457㎡에서 무려 3,400기에 달하는 조선시대 무덤이 발굴되었다.
한정된 공간에 워낙 많은 무덤을 조성한 결과

10m×10m 가량 되는 어떤 구역에서는 무덤 수가 36기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발굴조사결과, 삼국시대의 석실분 1기, 조선시대 토광묘 3,199기, 건물지 1기, 주거지 3기 등이

확인되었고, 각종 명기 등  2,140여 점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인골은 1,800여 기에서 430여 개체가 확인되어 23.8% 이상에서 노출되고 있다.

그 가운데 기 조사가 완료된 Ⅰ지구(42개체)와 Ⅴ지구(47개체)에 대한 분석이

성별, 나이, 신장, 건강상태, 방사선, 기생충, 골조직 등을 중심으로 진행 중에 있으며,

이를 통해 인구학적 패턴과 건강상태 및 당시 먹거리와 관련된 증거들을 확보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이러한 발굴성과는 조선시대 한양 북서쪽 지역의 집단묘역 확인 및

600여 개체의 인골자료 확보를 통한

조선시대 사람들의 체질정보와 사회상 접근에 대한 자료를 확보하게 하였다.

또한, 다양한 분묘양식이 확인되었으며,

그에 따른 치장(治葬)방식의 다양성과 일반성을 확인하게 되었다.

 

분묘는 특히, Ⅲ-2지구서 높은 밀집도를 보이는데,

10m×10m 범위에 최대 36기까지 중복되어 있으며, 평균 25기에 이른다.

이러한 양상으로 볼 때,

발굴 조사된 지역의 북쪽의 녹지지역에서도 이와 동일하거나 보다 더 높은 밀집이 예상되며,

지표에 산재된 석물이 이를 반증하고 있다.

 

가장 특징적인 점은 좁은 범위에 중복되어 밀집된 양상으로 분묘가 조영되고 있다는 점이며,

이는 이 지역이 무덤 입지로서 적합한 환경을 반영하는 것이다.

중복관계에서 후대 행위자가 선대 무덤을 인식했는지의 여부는 명확히 파악되지 않으며,

회격묘(회곽묘 포함)가 중복의 마지막 단계로 선대 토광묘 위에 조영되어 있다.

 

확인된 유구는 중복되어 밀집된 양상을 나타내며,

분묘는 매장주체부를 구성하는 방식에 따라 토광묘와 회격묘(회곽묘 포함)로 구분되며,

목관(곽)의 유무에 의해 순수 토광묘, 목관 토광묘, 목곽 토광묘로 세분되는데 모든 방식이 확인된다.

규모에서도 대략 너비 80㎝를 기준으로 목관과 목곽의 구조적인 차이가 보인다.

이러한 다양한 분묘는 중복관계에 의해 목곽→목관 , 토광→회격으로 변화되며,

규모의 소형화와 부장품에서의 박장화로의 변천이 확인된다.

이러한 양식의 구분은 피장자의 사회적 신분과 흉례 절차의 변화와 연동되었음을 알 수 있다.

 

<세종실록오례의>에 언급된 명기(明器)와 복완(服玩: 의복과 장신구) 등 부장품과

청동류, 분청매병, 백자사발, 벼루, 연적, 동전 등의 다양한 유물이 수습되었으며,

묘갈, 상석, 고석, 향로석, 문인석, 동자석, 비좌 등 다채로운 석물이 확인되었다.
명기는 백자류, 청동류, 도기류로 세분되며, 백자류는 일괄로 분리되어 출토된다.

청동류는 시저(匙箸)와 합으로 숟가락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도기류는 와정(瓦鼎)과 와증(瓦甑) 등이 보강토에서 출토되었다.

장신구는 구슬로 이루어진 경식과 귀걸이 그리고 가락지 등이 해당 신체부위에서 확인되고,

동곳과 은장도, 청동거울 등이 출토되었다. 문방구는 소형 벼루와 연적 등이 있으며,

기타 청동방울, 철제가위, 손잡이, 인장, 청동동물상 등과 토제 묘지석 등이 출토되었다.

 

이처럼 대규모 분묘가 한양의 북서쪽 약 10㎞ 지점에 위치하는 것은

도성 부근 10리내에 매장을 금하는 <경국대전> 등 국초부터의 규정에 의한 것으로 판단된다.

조선은 유교적 질서를 확립하는 과정에서 五禮가 정비되었으며,

凶禮의 경우, 불교의 영향으로 성행한 화장 문화를 유교적 매장방식으로 실행해 나가게 되었다.
또한, 조사지역은 도성과의 접근성과 북한산과 무악재, 박석고개 등에 의한 격리성을 지닌 지역으로

매장지로 매우 좋은 입지를 지니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진관외동 일대에 분묘가 밀집 축조되었으며,

이의 조사를 통해 조선시대 분묘 축조의 형태와 규범을 확인하고,

이와 함께 인골자료 분석을 통해 당시 도성내의 환경과 사회상을 해결하는 자료를 확보할 수 있었다.

 

명기(도기류/ 자기류)

 

 

 

달걀 항아리

무덤 묘광 중간부분에서 달걀 3개를 넣고 뚜껑으로 봉한 항아리

2지구 C공구 Ⅲ-2지구 378호 무덤의 바닥에는 움푹 파인 구덩이[요갱, 腰坑] 안에서

달걀이 담긴 항아리가 발굴되었다. 달걀은 생명 자체의 무한한 동력과 발전을 상징하는데,

죽은 자의 식량이라는 현실적 생활관념도 찾아볼 수 있다.

문헌 기록상 조선시대에 달걀을 제사상에 올렸다는 흔적은 없다고 한다.

달걀이 부장된 예는 신라 천마총에서도 확인된 바 있는데, 여기에서의 상징으로 미루어

다만 달걀이 저승으로 향하는 혼령을 위한 제수(祭需)의 일종이었을 가능성을 짐작할 수 있다. 

  

2006년 9월6일 이후 은평뉴타운 지역을 발굴 중인 매장전문조사기관 중앙문화재연구원은

"무덤 묘광 중간 부분에서 생달걀 3개를 넣고 뚜껑으로 봉한 항아리 1점을 수습해

현재 보존처리 중이다"고 2007년 7월11일 발표했다.
달걀은 비교적 온전한 모습으로 출현했는데, 이들이 생달걀이었다는 증거로 홍지윤 조사원은

"껍질이 쉽게 바스라지고 내부에 이렇다 할 만한 흔적이 남지 않은 점"을 들었다.

달걀을 삶아 안치했다면 이런 현상이 일어나기 힘들다는 것이다.

 

 

 

조개가 담긴 도기항아리

은평뉴타운 2지구 C공구 Ⅳ-1구역 222호 토광묘에서 출토된 도기항아리에서는

내부에 조개가 담겨져 있었다. 이 조개는 이매패(二枚貝)류에 해당한다.

조개를 넣은 것은 수의를 입히는 습의 절차가 끝날 무렵에

시신의 입안에 쌀, 조개, 옥 등을 넣어 주는 절차인 반함(飯含)과 관련이 있다.

반함은 고인의 입안을 차마 비어 있게 할 수 없는 효심에서 비롯된 절차로,

이때 가공하지 않은 쌀이나 조개, 옥 등을 입에 넣어 주어 다시 소생하기를 바라는 뜻을 가진다.

쌀과 조개는 복생(復生)과 생명력을 상징하고, 玉은 불변불멸의 활력을 상징한다.

 

 

 

 금성당(錦城堂, 중요민속자료 제258호)

: 서울 은평구 진관동 175-836번지

: 은평 뉴타운 도시개발사업지구 2지구 C공구내

: 1880년대 초반 이전(목조 와가)/ 일곽(건축면적 : 180.65㎡(3동))

: 상당(33.13㎡), 하당(16.7㎡), 아래채(41.08㎡), 안채(89.74㎡)

금성당은 세조가 금성대군의 영혼을 위무하려고 세운 굿당으로서

서울과 경기 지역에서 보기 드문 유일한 신당건축이며, 조선후기의 전통적 당집 양식으로서,

19세기 서울ㆍ경기지역 민간 무속신앙의 한 단면을 볼 수 있는 민속문화재이며,

금성대군(1426-1457, 세종의 여섯째대군)의 영혼을 위무하려고 세운 굿당으로서

국가의 태평성대를 비는 나라굿당 중 원형이 잘 보존된 조선시대 마지막 굿당이다.

서울에는 원래 세 곳(진관외동, 망원동, 월계동)에 금성당이 있었는데,

모두 70~80년대 도시개발에 의해 자취를 감춰버렸고

이제는 오직 구파발 금성당만 유일하게 남아 있을 뿐이다.

이 당들은 한 때 서울 지역민들과 유명 만신들로부터 추앙받았던 성스러운 공간이었고

마을 주민들이 대동하여 굿을 거행하는 마을당 역할을 했을 뿐만 아니라

지역 무당들이 개인적 굿을 하는 공공 굿당의 역할도 했던 곳이다.

조선말기 궁중의 여인들도 이곳에서 기복적 신앙행위를 했을 정도로 유명한 곳이었다.

 

은평구 구파발에는 원래 윗 금성당과 아랫 금성당 두 개의 금성당이 있었다.

그러나 윗 금성당은 없어지고 아랫 금성당만이 원래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구파발 아랫 금성당은 서울특별시 은평구 진관외동 272번지에 위치하고 있으며,

대지 392평에 총 네 채의 집으로 구성되어 있다.

금성당은 전면 3칸에 서쪽으로 2칸을 붙여 지은 역 기억자로 되어 있다.

본당 안쪽에는 다락방이 붙어 있었으나 오래 전 촛불로 인해 불이 나는 바람에 다락방 부분이 없어졌다.

그 다락방을 대신하여 방한 칸을 다시 지었다.

본당 정면은 하나로 접을 수 있도록 되어 있는 네 짝의 격자 문살의 분합문을 좌우로 달아 고정하였다.

 

그 내부에는 금성님, 맹인도사(盲人道師), 맹인삼신마누라(盲人三神), 삼궁애기씨, 중불사,

창부광대씨(倡夫廣大), 별상님, 말서낭, 칠성님 두분, 용장군님(龍將軍), 육대신마누라,

용궁부인(龍宮婦人), 삼불제석, 부처님, 삼불사할머니 등 총 16점의 무신도(巫神圖)가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맹인도사, 맹인삼신마누라, 삼궁애기씨, 중불사, 창부광대씨, 별상님, 말서낭,

삼불사할머니 등 8점만 남아 있다. 그 외 각종 무구류(巫具類) 등이 잘 보존되어 있는 등

그 희귀성과 건축사적 중요성도 대단히 높아 문화재적 가치가 높다. 

 

 

 

 

 

 

 

(2) 은평뉴타운 3지구 A, B, C공구 

 

 

 

□ 조사명 : 은평 뉴타운 도시개발사업 3지구 (A・B・C・D공구)내 문화재발굴조사

□ 조사지역 : 총 면적 : 68,752㎡

    A공구(금호) - 서울 은평구 진관내동 429번지 일원 13,402㎡

    B공구(삼성) - 서울 은평구 진관내동 420-6번지 일원 12,298㎡

    C공구(대우) - 서울 은평구 진관외동 산60-2번지 일원 28,842㎡

    D공구(현대) - 서울 은평구 진관외동 209번지 일원 14,210㎡

□ 조사기간 : 2007.12.12~2008.11.5 (조사 완료)

 

  

 

1) A공구 2지점

조사지역은 남북으로 발달한 북한산의 응봉(鷹蜂, 323m)에서 뻗어나간 가지 능선부 하단의

구릉지형에 해당한다.

북쪽으로는 창릉천이 동에서 서로 흐르며 형성된 하상퇴적지역이 넓게 분포하고 있다.

조사지역의 동쪽 경계에는

석불입상이 안치된 자씨각(慈氏閣)과 불두가 소실된 석불좌상ㆍ석탑 기단석 등이 있다.

 

전체적인 지형은 북서쪽에서 이어지는 구릉의 말단부에 해당하며

북→남, 서→동 방향으로 완만한 경사를 이루고 있다.

조사결과 고려~조선시대 건물지 5동과 담장 등 부속시설, 조선시대 분묘 17기 등이 확인되었다.

유물은 건물지에서 다량의 기와와 함께 청자・백자편이 출토되었다.

조사가 완료되고 다량의 출토 기와들을 세척・정리하는 과정에서 명문기와가 확인되었다.

완형으로 발견된 유물은 없지만 전체적인 내용을 연결한 결과 확인된 명문은

「삼각산청담사삼보초(三角山靑潭寺三宝草)」이다.

기와에 명문을 타날 시 글자 좌우가 바뀐다는 것을 고려하지 않은 채

타날판에 명문을 각인해 기와에는 글자 좌우가 바뀌어 있다.

 

 

2) B공구

조사지역은 남북으로 발달한 북한산의 응봉(鷹蜂, 235.1m)에서 뻗어나간 가지 능선부 동북쪽 하단의

谷間지형에 해당한다. 이 지역은 최근까지 화훼단지가 조성되어 있었으며,

지하철 공사 및 군사시설의 설치 등으로 자연퇴적층이 대부분 파괴되었다.

 

조사 결과 조선시대 우물 1기, 수혈 2기를 확인하였다.

수혈은 2기 모두 내부에 불을 피워 발생한 것으로 보이는 피열흔이 확인되었다.

우물은 최하단을 ‘井’형으로 교차하여 마감한 후 석재를 층층이 쌓아올려 만들었다.

석재 주변에 점토를 발라 고정시키고 주변에 굵은 모래를 채웠다.

유구의 형태와 유구 내부에서 출토된 유물의 편년으로 보아 조선시대 후기로 판단된다.

유물은 조선 18세기 이후의 굽다리가 높고 각진 청화백자편, 도기편, 기와 편 등을 수습하였다.

 

 

3) C공구

조사지역은 북한산에서 뻗어 나온 가지능선의 북서쪽 자락에 위치한다.

동쪽으로는 전주이씨 화의군 이영(1425~1460) 묘역과 전주이씨 영산군파 묘역이 위치하고 있으며,

북동쪽으로 약 700m 거리에 한양 근교 4대 사찰 중 하나인 진관사가 위치하고 있다.

 

발굴조사는 위치 상 2・3・4・5・6・7지점으로 나누어 조사에 착수하였다.

조사결과 C공구 전체 지점을 통틀어 토광묘 119기, 회곽묘 44기, 건물지 3동, 석렬 5기, 탄요 1기,

기와가마 1기, 소성유구 1기로 총 174기의 조선시대 유구를 조사하였다.

유물은 토광묘와 회곽묘에서 청동수저, 거울 등 청동기류 38점,

조선백자, 청화묘지명 등 도・자기류 93점, 구슬, 유리류 211점, 철기류 388점, 총 730점이 출토되었다.

 

 

 

 

 

 

(3) 은평뉴타운 3지구 D공구 - '통일신라 가마' 무더기 발굴

    : 기와 가마는 서울서 첫 발견… 조선시대 분묘 741기

 

은평뉴타운 3지구 D공구 건설공사 현장에서

2008년 7월 23일 오후 문화유적 발굴조사 현장이 공개되었다.

매장문화재 전문조사기관인 한강문화재연구원(원장 신숙정)은 2007년 12월부터

서울 진관외동 209 일대 은평뉴타운 도시개발사업지구(3지구) D공구 1만3000여㎡를 발굴조사했다.  

 

 

 

유적명칭

유적명칭

1

2

 3 

4

5

6

7

8

9

10

11

12

진관외동 유물산포지 9

불광동 유물산포지 2

불광동 유물산포지 1

진관외동 유물산포지 8

불광동 유물산포지 3

진관외동 유물산포지 3

전주이씨 화의군 이영 묘역

진관외동 이만산 내시, 상궁 묘

진관외동 은언군 묘역지

진관외동 유물산포지 2

영산군파 묘역, 영산군 이전 묘

진관내동 우봉 김씨 묘역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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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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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18

19

20

21

22

23

24

진관외동 진관사

사현사 석조여래좌상

진관외동 유물산포지 1

진관외동 은언군 사패금표비

구파발역지

진관내동 삼천리곡 사지 1

진관내동 유물산포지 9

석조관음조살입상, 석불 부 대좌

진관내동 은언군 신도비

진관내동 은언군 묘소 석물

금암기적비

대조동 연서역지

 

  

 

발굴조사한 결과 3지구 D공구 내 유적에서는 기존에 조사된 1지점, 2-1지점과 함께

이번에 조사된 2-2지점을 합쳐 현재까지 총 741기(땅에 구덩이를 파고 무덤방을 조성한 토광묘 677기,

석회+황토+세사로 덧널을 만든 회곽묘 65기)의 조선시대 분묘가 조사되었다.

이번 조사에서 은평뉴타운 일대가 조선시대 공동묘지였음이 재확인됐다.

대부분 무덤방 하나에 한 사람을 매장하는 단장(單葬)이었으며

두 사람 이상을 함께 묻은 합장도 21기가 발견됐다.

회곽묘에서는 보존상태가 비교적 양호한 인골 35구가 수습됐다.

 

이번 조사에서 확인된 분묘들은 은평뉴타운에서 기존에 발굴조사된 분묘들과 함께

조선시대 장례 문화와 매장 풍습을 이해하는데 기여할 것으로 보여진다.

아울러 서울대학교 해부학교실과 협조 하에 이루어지고 있는

인골에 대한 해부학적, 병리학적 분석을 통해 기존에 알 수 없었던 조선시대 사람들의 건강 상태 등

생활환경 연구에 의미있는 자료를 제시할 수 있게 됐다.

 

은평뉴타운 예정지에서는 이번에 발굴된 것을 포함해

현재까지 5,000여 기에 달하는 조선시대 분묘가 확인됐다.

 

 

 

무덤군

은평뉴타운에서 발굴된 무덤군

서울 은평뉴타운 도시개발사업지구(3지구) D공구를 한강문화재연구원이 발굴조사한 결과

조선시대 분묘 741기가 확인됐다. 이들은 토광묘가 주류를 이루며 일부는 회곽묘로 드러났다.

 

회곽묘가 이전의 묘 위로 조성된 흔적

이렇게 층을 달리하여 중첩되게 분묘가 발견되어 시대를 달리하여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 합장 무덤

서울 은평뉴타운 도시개발사업지구(3지구) D공구에서 조선시대 분묘 741기가 확인됐다.

토광묘가 주류를 이루지만 360호처럼 일부는 회곽묘로 드러났다. 이 무덤은 두 사람을 합장했다.

 

은평뉴타운 예정지에서 통일신라시대의 가마터(작은 사진),

조선시대 공동묘지(큰 사진)가 발굴됐다.

분묘에서는 인골과 더불어 도자기와 수저, 가위, 구슬 등 1000여점의 유물이 수습됐다.

 

3지구 D공구 내 유적 2-2 지점에서는 통일신라시대 기와가마를 비롯 총 11기의 가마가 조사되었다.

서울지역에서 통일신라시대 기와 가마(10기)가 발굴조사된 것은 이번이 최초이며,

통일신라 도기 가마(1기)는 지난 1976년 서울대 고고인류학과가 발굴조사, 확인된

동작구 사당동 가마터에 이어 두 번째다.

 

북한산에서 흘러내린 구릉 경사면에서 발견된 이 가마들은 절반 가량은 훼손 상태가 극심하지만,

비교적 온전한 상태로 남은 1-4호 유적을 중심으로 볼 때

이 가마들의 평면 형태는 대체로 장타원형이며, 규모는 길이 3~5m에 폭 1~2.8m, 최대 깊이 0.5~0.7m.

 

구조는 아궁이를 점토와 장대석을 이용해 축조하고,

연소실은 바닥을 약간 경사지게 만든 이른바 오름식 가마(등요ㆍ登窯)였다.

기와 가마가 대량으로 발견된 것은 기와를 대량으로 굽던 기와공장이 있던 곳임을 보여주고 있다.

 

1-5호와 10-11호 내부에서는 기와가, 6-9호에서는 도기 조각들이 집중 발견되는 점으로 보아

이 가마들은 기와를 굽던 곳과 도기를 굽던 곳으로 나뉘어 운영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특히 기와 가마가 대량으로 발견된 것은 이곳이 기와를 대량으로 굽던 '기와공장'이 있던 곳임을

보여주고 있다. 

인근 지역에서 최근 통일신라말-고려초의 거찰인 '청담사(靑潭寺)'의 명칭이 새겨진 명문기와가

다수 출토되어 기와가마들이 청담사의 건축자재 공급처 역할을 했을 가능성도 있는 것으로 보인다.

출토유물로는 조선 전기의 분청사기 등 도자기류 119점, 수저 등 청동제품 183점,

가위 등 철기제품 17점, 구슬류 726점을 포함, 모두 1,045점의 유물이 수습됐다. 

 

  

 사진은 3호 가마

 

 7.8.9호 가마

통일신라 기와, 도기 가마터

은평뉴타운 발굴지역(3지구 D공구 2지점)에서 통일신라시대 기와가마터가 총 11기가 확인됐다.

이 가마는 유적의 동쪽에서 경사면을 따라 자리하고 있는데 4기만이 양호한 상태였다.

가마의 형태는 지하 1m 정도까지 굴 형태로 파서 만든 지하식 혹은 반지하식 가마이며,

대부분 평면형태가 직사각형이거나 타원형이다.

크기는 전체 길이가 3-5m 정도여서 비교적 작은 편이다.

불을 지피는 아궁이는 점토와 돌을 사용하여 만들었고, 연소실과는 평평하게 이어진다.

기와나 도기를 구워내는 소성실은 계단이 없이 완만한 경사를 이루고 있다.

일부 가마에서는 기와나 도기를 올려놓고 구웠던 돌이나 기와편 등이 확인되었다.

가마터에서는 통일신라시대~고려시대에 이르는 기와편과 도기편이 출토되었다.

기와는 암키와가 대부분이나 수키와도 소량 출토되었고

사격자문(格子紋)계통의 문양이 시문되어 있는 것이 많다.

도기는 대부분 회색 혹은 회청색을 띤 호(壺), 옹(甕), 병(甁) 등으로 다양하다.

이 유적은 일찍이 서울지역에서 찾아볼 수 없었던 통일신라시대의 대규모 가마터라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

 

 

은평뉴타운의 조선시대 집단묘역

서울 은평뉴타운 도시개발사업지구(3지구) D공구를 한강문화재연구원이 발굴조사한 결과

조선시대 분묘 741기가 확인됐다. 이들은 토광묘가 주류를 이루며 일부는 회곽묘로 드러났다.

 

조사단은 이번 조사를 통해

"조선시대 한양 북서쪽 지역에 자리잡은 집단묘역을 처음으로 확인하고 풍부한 인골자료를

확보함으로써 이 시대 사람들의 체질정보와 사회상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가능해졌다"면서

"아울러 분묘 양식이 다양하면서도 공통적인 특징도 갖고있음을 알 수 있다"고 평가했다.

분묘는 시신이 매장되는 매장 주체부를 구성하는 방식에 따라

토광묘와 회격묘(회곽묘 포함, 회를 다져 축조한 무덤)로 대별되며,

목관 혹은 목곽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른 구별도 가능하다고 조사단은 말했다.

규모에서는 대략 너비 80㎝를 기준으로 그 이하는 목관만 썼고,

그 이상은 목관 외에도 그것을 감싼 또 하나의 널인 목곽을 사용한 것으로 나타났다.

한정된 구역에 장기간 무덤을 축조했으므로, 무덤 위에 무덤을 덮어 쓰는 경우가 다수 발견됐으며,

이런 층위 관계를 통해 목곽→목관, 토광→회격묘로 무덤 양식이 변화된 양상도 아울러 밝혀졌다.
더불어 후대로 내려올 수록 부장품은 빈약해지는 경향도 관찰됐다.

 

조선시대 합장 무덤

3지구 D공구의 360호는 회곽묘로 드러났다. 이 무덤은 두 사람을 합장했다.

서울 은평뉴타운 도시개발사업지구(3지구) D공구를 한강문화재연구원이 발굴조사한 결과

조선시대 분묘 741기가 확인됐다.

무덤 양식으로는 땅을 파고 내려가 무덤방을 조성한 토광묘가 667기이며

그 나머지 65기는 현대의 시멘트에 해당하는 회로 덧널을 만든 회곽묘였다.
이들은 대부분 무덤방 하나에 한 사람을 매장하는 단장(單葬)이었으며

두 사람, 혹은 그 이상을 함께 묻은 합장은 토광묘에서 10기, 회곽묘에서 11기가 각각 발견됐다.

  

 

출토유물

 

이 중 2-86호 분묘에서 확인된 옥제 장식 - 그 모양새가 흡사 가지나 콩깍지 같은 모양이다.

분묘의 토광 바닥 중간 지점에서 발견된 옥제 장신구는 

출토 위치로 보면 허리띠 장식 중 하나로 사용됐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유리제 구슬

유리구슬류

 

 

각종 명기류

 

 

각종 백자류

 

 

 

 

- 토기벼루 출토 

 

토광묘 유물출토 현장

 

 

 

 

 

 

동수저를 비롯한 각종 청동류

 

 

 

 

  

  

 

 

청동거울 X-Ray  

 

 

3지구 D공구 1-336호(토광묘)에서 출토된 청동거울

 

 

대신칼

무당의 동경, 방울, 대신칼

2지구 C공구 385호에서는 굿에 사용된 대신칼과 방울이 출토되어 무덤 주인이 무당이었음을 알 수 있다.

방울은 소리를 내어 신령을 불러들이거나 쫒아내는 힘을 가진 것으로 여겨졌고,

대신칼은 망자를 하늘로 이끄는 굿에서 쓰이며,

무당의 조상으로 알려진 바리공주가 지녔던 무구라고 전한다.

  

 

 - 문화재청 보도자료에서 참고

 - 한강문화재연구원 <은평뉴타운 도시개발사업지구(3지구) D공구 내 유적 발굴조사 자료집>

 

 

 

 

은평뉴타운 발굴조사 지역에서 출토된 유물

(구슬류, 옥, 동전, 토기, 분청사기, 백자류, 청동류, 기와류) 

 

 

 
   
   
   
   

 

 
   

 

동전

동전(銅錢)

토광묘 중에는 무덤 한쪽에 동전(2지구 C공구 Ⅲ구역 895호 등)이나

별전(2지구 C공구Ⅰ지구 199호)을 놓아두거나

무덤 바닥에 동전을 깐 무덤(2지구 C공구 Ⅳ지구 101호 등)이 조사되었다.

동전은 한두 점이나 200여 점까지 다양하게 출토되었다.

동전중에는 조선시대 초기에 주조된 ‘조선통보(朝鮮通寶)’가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한다.

무덤에서 출토된 동전은 흔히 죽은 이의 저승노잣돈으로 해석된다.

동전을 무덤에 넣는 것은 아주 오래된 전통으로 창원 다호리1호묘에서 漢대의 동전이 출토된 예를 비롯,

고려시대 무덤에서도 동전이 출토된 예가 상당히 많다.

화성 둔대리5호 토광묘(39점 출토)에서는 바닥에 동전을 깔고 매장한 무덤이 조사되기도 하였다.

 

조선시대 유교식 상례 절차에서 동전은 반함(飯含)과 관련되어 있다.

반함(飯含)은 죽은 이의 입안을 차마 비우지 못하는 효심의 발로에서 생겨난 절차로

물에 불린 쌀을 버다나무 수저로 세 차례 입에 떠넣어 드리는 것이다.

또한 이 절차에서는 반토막 난 동전 세 닢을 입에 물리거나 주검의 앞가슴 부분에 넣어주기도 한다.

 

 

 

  

 

 

분청사기어문매병          

 

 

 

 

 

 

 

 

 

 

 

 

 

 

  

 

  

 

 

 

 

 

- 은평뉴타운 3지구 D공구 건설공사 현장, 발굴조사 공개(2008년 7월 23일)

 

 

 

 - 서울은평뉴타운 3지구 문화유적지 발굴조사 현장 보고서

 - 카페(http://cafe.daum.net/Ahsrai14/4rZE/2571) 에서 자료 참고

 - 서울역사박물관 특별전 '은평발굴, 그 특별한 이야기' 패널 참고

 

 

 

 

 ***Tip : 조선시대 상례, 장례

 

고려시대에 도입된 유교식 상장례 절차는

조선시대 초기에 법제화 과정을 거쳐 점진적으로 확대, 정착되었다.

그러나 고려시대의 전통이 이어지면서

불교식 상장례나 무속신앙 등에 바탕을 둔 상장례 풍속이 일정 정도가 지속되었다.

이후 조선시대 중, 후기를 거치면서 <주자가례(朱子家禮)>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고

<상례비요(喪禮備)> <사례편람(四禮便覽)>과 같은 의례서들이 보급되었다.

이러한 의례서들이 조선의 실정에 맞게 바뀌어

우리가 오늘날 알고 있는 상장례 전통이 확립되었다.

 

<사례편람>에 의하면 조선시대의 상장례 절차는,

초종의(初終儀)를 시작으로 습(襲)→소렴(小殮)→대렴(大殮)→성복(成服)→치장(治葬)→천구(遷柩)→발인(發靷)→운구(運柩)→하관(下棺)→성분(成墳)→반곡(反哭)→초우(初虞)→재우(再虞)→삼우(三虞)→졸곡(卒哭)→부제(祔祭)→소상(小祥)→대상(大祥)→담제(禫祭)→길제(吉祭)로 끝난다.

 

<주자가례>의 상례는 사례편람에 보이는 마지막 절차인 길제 없이 18개의 절차로 구성되었다.

 

<상장례(喪葬禮) 절차>

1

초종(初終)

‘돌아가시다’라는 의미를 가진다.

군자의 죽음은 ‘종(終=始에 대응하는 말)’

소인의 죽음은 ‘사(死=점점 다해 없어져 남는 것이 없음을 의미)’라 하였다.

2

습(襲)

시신을 깨끗이 씻기고 수의를 입히며, 반함(飯含)하는 절차

3

소렴(小殮)

운명 다음날에 시신을 베로 싸서 묶어 입관할 수 있도록 준비하는 절차

4

대렴(大殮)

3일째에 소렴에서 싸서 묶은 시신을 입관하는 절차, 보통 입관(入棺)이라 하는 절차를 포함하고 있다.

5

성복(成服)

입관절차가 끝나면 오복(五服)제도에 맞추어 상주들이 복을 입는 것을 말한다.

오복이란 참최(斬衰, 3년) 제최(齊衰, 3년) 대공(大功, 9개월) 소공(小功, 5개월) 시마(緦麻, 3개월) 등 5등으로 되어있는데 상복의 재료도 달리한다.

6

치장(治葬)

장사지낼 장소와 시간을 정하는 절차로 토지신에게 사토제(祠土祭)를 지낸 후 땅을 파기 시작하여 광중(壙中)을 만든다.

구덩이를 다 파고나면 석회에 모래를 섞어 관이 들어갈 정도크기로 만드는데 이를 ‘천광(穿壙)’이라 한다.

7

천구(遷柩)

발인 하루 전날 영구(靈柩)를 상여로 옮기는 의식

8

발인(發靷)

영구를 운반하여 장지로 운반하는 행상(行喪)의 절차로 ‘발인제’라 하기도 한다.

9

운구(運柩)

발인제를 마치면 상두꾼들이 상여를 메고 장지로 떠나는 것을 말한다. 묘소로 가는 도중에 노제(路祭)를 지내기도 하는 출상(出喪) 과정이다.

10

하관(下棺)

관을 묘혈중(墓穴中)에 넣는 일이며, 이때 상주들은 곡을 그치고 하관하는 것을 살펴보는 일이다. 영구가 비뚤어지지 않는가를 살피고 흙과 회(灰)로 관 사이를 채운다.

11

성분(成墳)

구덩이를 채우고 봉분을 만드는 일이다. 그 다음 신주(神主)를 쓴다. 성분제를 지낸 후 혼백과 신주를 모시고 집으로 돌아온다.

12

반곡(反哭)

상주가 혼백과 신주를 다시 집으로 모셔오는 것을 ‘반혼(返魂)’이라 하고, ‘반곡(反哭)’은 장지로부터 집에 돌아와 신주(神主)와 혼백상자를 빈소의 영좌(靈座)에 모시고 곡함을 말한다.

13

우제(虞祭)

초우(初虞: 장례지낸 날),

재우(再虞: 장례 이후 첫 유일柔日=乙丁巳辛癸日)

삼우(三虞: 장례 이후 첫 강일剛日=甲丙戌庚壬日)가 있다.

대개 장례 후 3일 내지 4일만에 강일(剛日)이 돌아오는데 삼우제를 지내고 묘소에 가서 떼를 잘 입혔는지를 살펴본다.

14

졸곡(卒哭)

삼우가 끝난 후 3개월이 지난 강일(剛日)날 아침에 지내는 의례로 슬픔을 서서히 줄여나가는 과정이다.

졸곡제를 지낸 이날 이후부터는 무시로 곡하는 ‘수시곡(隨時哭)’을 하지 않고 아침저녁 음식을 올릴 때만 곡을 하는 ‘조석곡(朝夕哭)’을 한다.

15

부제(祔祭)

졸곡을 지낸 다음날 죽은 이의 신주(神主)를 윗대 조상의 신주 곁에 모시는 제사

16

소상(小祥)

소상은 죽은 날로부터 1년만에 곧 첫 기일(忌日) 제사

대상(大祥)

대상은 2년만에, 두 번째 기일에 지내는 제사이며 대상을 지내고 나면 상복을 벗고 소복(素服)을 입는다.

17

담제(禫祭)

대상을 지낸 다음 달에 날을 잡아 복을 완전히 벗는다는 뜻으로 올리는 제사이다. 이후 비로소 상주가 술을 마시고 고기를 먹을 수 있으며 비로소 상복을 벗는다.

18

길제(吉祭)

상례의 마지막 의례인데, 사실상 상례가 아닌 제례의식이다. 담제를 지낸 다음달에 丁日이나 亥日에 사당의 신주를 고쳐 쓰는 제사이며 정규제사인 사시제(四時祭=時祭)와 그 성격이 같다. 5대조 신주를 묘소 옆에 묻고 그 자리에 한 대씩 위로 올라가는 의식이 길제(吉祭)이다.

길제를 지내야만 모든 상장례는 끝난다.

 

이러한 유교식 상장례 절차는 의미상 크게 세 단계로 나뉜다.

임종에서 시신을 입관하는 대렴(大殮)까지를 초종(初終)이라 한다.

이 단계는 갑작스럽게 맞이한 죽음 앞에서 소생하기를 바라는 염원이 담겨 있다.

 

상복을 입는 성복(成服)에서 반곡(反哭)까지는 장송(葬送)의식 단계

죽음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과정이다.

 

시신을 묻고 처음 지내는 우제(虞祭)에서 길제(吉祭)까지는 죽음을 내재화하는 단계이다.

그러나 이러한 절차는 실제 적용되면서 간소화되거나 통합되어

유교식 상장례의 절차가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