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주짱의 하늘꿈 역사방

알아가며(자료)

용두보당(金銅龍頭寶幢)

Gijuzzang Dream 2009. 9. 9. 13:23

 

 

 

 

 

 

 금동 용두보당(金銅龍頭寶幢)   

 

 

 

  

원래 당번(幢幡)은 모두 기(旗)이며,

당(幢)은 범어로 '박야(縛若, Dhvajaa)', 번(幡)은 '파탁가(波탁迦, Pataka)'라고 한다.

 

당간은 당을 높게 걸기위한 오늘날의 깃대와 같은 건조물로 대개 돌이나 철로 만들었다.

『대일경소(大日經疎)』에 의하면,

당간의 윗부분에 갖가지 비단으로 장엄하고 그 정상에 여의주(如意珠)를 배치했기 때문에

'보당(寶幢)'이라고 하며, 불보살이 가지는 항마력을 상징한다. 

  

 

당(幢)은 언제부터 있었고 그 형태는 어떠했을까?

 

당(幢)의 기원에 대해서는

부처의 입멸과 그 전후사정을 밝히는『반니원경(般泥洹經)』(東晋 때 漢譯)에

“벽돌을 모아 탑을 쌓았는데 크기가 모두 1장 5척이 되었다.

금 항아리에 사리를 담아 그 속에 넣고 장간을 세워 법륜을 표시하고 그 위에 비단을 달았다”고

설하고 있어 석가모니 입멸 당시부터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1)

 

당(幢)의 형태에 대해서는

『불설관무량수불경(佛說觀無量壽佛經)』의 제2관에서

“밑에는 금강과 칠보와 황금으로 된 깃대(金幢)가 있어 유리로 된 땅을 받치고 있는데

그 깃대는 팔방과 팔각(八楞)을 다 갖추고 있다.”고 했다.

또 제7관에서도

“석가비릉가마니보로 되어있는 연화대 위에는 자연히 4개의 기둥인 보배의 당번(幢幡)

세워져 있다”2) 고 하므로 매우 화려한 장식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당간은 사찰입구에 세워져 멀리서도 신성한 사역(寺域)임을 알려줄뿐더러

경내로 들어오는 불도들에게 장엄한 불세계와 사찰의 위상을 보여주는 상징적 조형물이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언제부터 당간이 세워졌을까?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의하면

565년에 진(陳)에서 불경을 보낸 이후 절과 탑이 많이 조성되었으며

“법당(法幢)을 세우고 범종을 달았다”3)라고 기록되어 있어

삼국시대에 이미 당간이 있었음을 시사해준다.

 

당간의 높이에 대해서는

753년 큰 가뭄이 들자 경덕왕의 요청에 의해 대현법사(大賢法師)가 금강경을 설하던 때

“잠깐 사이에 우물이 솟아나왔으며 그 높이가 7장 가량으로 찰당(刹幢)의 높이와

가지런히 되니..”4) 라고 했으므로 대략 20m 정도였음을 알 수 있다.

이는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된 공주 갑사(甲寺) 철당간(鐵幢竿)과 비슷한 크기이다.(그림 1)



그림 1) 공주 갑사 철당간                    그림 2) 중초사지 당간지주 
        통일신라 보물 제256호                         통일신라 827년, 보물 제4호
 
 

 

당간은 점차 직경이 작아지는 원통형들을 철로 만들어서

기단부 가운데에 있는 간공(杆孔)에 세우고 좌우의 돌기둥인 지주(支柱)에 고정시킨 것이다.

통일신라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 대부분의 사찰에서 건립하였으나,

현재 당간까지 남아있는 예는 8기 정도뿐이고,

당간을 지탱하기 위한 당간지주는 중초사지 당간지주를 비롯하여 100여 기 정도 남아있다.5)

 (그림 2) 

  

고려시대 당간으로는 칠장사 철당간(그림 3) 등이 있으나

간두(竿頭)가 없어 정확한 형태를 알 수 없는데

1123년에 고려에 온 서긍(徐兢)이『고려도경高麗圖經』에서

당시의 당간모양을 상세히 전해주고 있다.

즉 “뜰 가운데 동으로 부어 만든 번간(幡竿)이 세워져 있는데,

아래 지름이 2척, 높이가 10여 장(丈)이고, 그 형태는 위쪽이 뾰족하며

마디에 따라 이어져 있고 황금으로 칠을 했다.

위는 봉수(鳳首)로 되어 있어 비단 표기(錦幡)를 물고 있다.”6) 고 했으므로

당간은 금동이며 용두 대신 봉수로도 조성되었음을  알게 해준다.


그림 3) 안성 칠장사 철당간      그림 4) 용두보당          그림 5) 청동보탑보당문판 
고려, 경기도유형문화재 제39호   
  고려, 국보 제136       고려, 국립중앙박물관



그림 6) 용두보당의 용두부분             그림 7) 청동보탑보당문판의 용두부분 
             
 

삼성미술관리움에 소장된 국보 제136호 용두보당(金銅龍頭寶幢)

고려 10~11세기에 제작된 것으로서

높이 73.8cm, 기단 20.9×16cm 크기의 소형 금동당간지주이다.

 

그 크기로 보아 아마도 내불당에서 사용했을 이 유물은

신라시대 이후 성행한 당간(幢竿)의 형식을 알려주는 귀중한 예로서

정상에 용두가 장식되어 있어 용두보당이라고 한다.

 

이러한 당간을 모방한 삼성미술관리움 소장 금동용두보당(金銅龍頭寶幢)은

소형 번(幡)을 매달 수 있도록 축소 제작해 실내에 안치했던 것으로서,

우리나라 당간지주의 실체를 전해주는 유일한 유물이다.(그림 4) 

 

형태는 장방형의 이중기단 위에 두개의 지주를 배치하고

그 사이에 여덟 마디로 된 당간을 세운 후 맨 위에 용두를 장식했는데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청동보탑보당문판에 선각된 보당의 모양과 똑같아서

당간의 전형(典型)임을 알 수 있을뿐더러 번이 걸렸을 때의 형태도 유추된다.(그림 5)

 

용두는 뿔이 힘차게 뻗쳐 있고 목에는 비늘이 조각되어 있어

생동감이 넘치는 사실적인 모습이다.(그림 6)

 

 

번(幡)은 용두에 어떻게 매달았을까?

 

8세기에 제작된 영주 출토 금동제 용두의 입안 여의주 뒤에 감춰진 도르래나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청동보탑보당문판(1233년)에 선각된 보당을 참고하면

이 보당도 용의 입에 달린 도르래 장치로 번(幡)을 매달았을 것이다.(그림 7)

  

장방형 기단은 복련(覆蓮)과 앙련(仰蓮)으로 된 상, 하대와 중대로 구성되었으며,

위에는 세워진 주두(柱頭)가 밖으로 곡선형을 이룬 지주와

당간을 받치는 연판을 조각한 간대(竿臺)가 있다.

표면 전체에는 금을 올릴 때 접착제 역할을 하는 옻칠을 엷게 입히고 도금한 흔적이 남아있다.

 

10~11세기에 제작된 이 금동용두보당은

삼국시대이후 발달해 온 당간지주의 정확한 형태를 알려주는 유물로서

세련된 고려 금속공예미를 보여주고 있을 뿐 아니라

내불당용이어서 고려시대 불교의식의 성행을 유추해 볼 수 있는 귀중한 예이다. 
 
 


1) 失譯, 『般泥洹經』卷下,『大正藏』第1卷, No.6, p.190,

“集用作塔,. 高及縱廣. 皆丈五尺. 藏黃金?. 舍利於其中置. 立長表法輪. 枰蓋懸繒”

 

2) 疆良耶舍 譯,『佛說觀無量壽佛經』,『大正藏』第12卷, No.365, pp.342~343,

下有金剛七寶金幢. 擎琉璃地. 其幢八方八楞具足. 一一方面百寶所成.” 및

“釋迦毘楞伽摩尼寶以爲其臺. 此蓮花臺. 八萬金剛甄叔迦寶. 梵摩尼寶妙眞珠網. 以爲交飾. 於其臺上. 自然而有四柱寶幢. 一一寶幢如百千萬億須彌山. 幢上寶?如夜摩天宮. 復有五百億微妙寶珠. 以爲映飾.”

 

3) 一然,『三國遺事』3卷,「興法」,〈原宗興法厭?滅身〉條,

天嘉六年陳使劉思幷僧明觀奉內經幷次. 寺寺星張, 塔塔雁行, 竪法幢, 懸梵鐘.”

 

4) 一然, 앞 책, 4卷,「義解」,〈賢瑜?海華嚴〉條,

“景德王天寶十二年癸巳, 夏大旱, 詔入內殿, 講金光經..... 及晝講時, 捧爐?然, 斯須井水湧出, 高七丈許, 與刹幢齊.”

5
) 엄기표,『한국의 당간과 당간지주』, 학연문화사, 2004, pp.16~17

 

6) 徐兢,『宣和奉使高麗圖經』卷第17,「祠宇」,〈興國寺〉條,

“興國寺. 在廣化門之東南道旁. ... 庭中立銅鑄幡竿. 下徑二尺 高十餘丈. 其形上銳 逐節相承 以黃金塗之. 上爲鳳首 銜錦幡. 餘寺或有之.”


- 안귀숙, 문화재청 인천국제공항 문화재감정관실 감정위원

- 문화재청, 문화재칼럼 2009-09-08

 

 

 

 

 

 

1976년 1월 어느날, 경주역 한 플랫폼으로 연기를 뿜으며 기차가 달려들어 온다.

이윽고 기차의 거친 숨소리가 멈추고 화물칸에서 누런 가마니로 싼 커다란 수화물이 내려진다.

인수할 사람들이 그곳으로 웅성웅성 모여들었다.

몇몇이 가마니를 풀어헤쳐보니 황금빛 찬란한 용의 머리다.

그 순간 어둠에서 풀려난 황금빛 용은 커다란 숨을 내쉬며 몸을 들썩인다...

 

이 용두당간 장식을 보면 언제나 이 장면이 한 편의 영화와 같이 떠올랐다.

이 유물을 다룬 한 논문의 초두에서 기차편으로 이 유물을 인수받았다고 읽은 내용이

꽤 인상적이었던 듯하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언제나 연상되는 이 장면에서

기차는 시커먼 증기기관차이고 기차가 내뿜는 연기는 용의 커다란 입에서 뿜어나오는

숨소리로 화하여 이 유물은 내게 늘 살아있는 한 마리의 용으로 생각되는 것이다.

 

이 용두당간 장식은

당시 영주군 풍기읍 성내2동 236번지에서 하수도 공사 중 발견되었다고 한다.

이 유물을 통해 그림으로만 보던 보당(寶幢)의 실제모습을 복원해 볼 수 있었고,

현재 국립대구박물관 광장에는 복제된 용두장식을 올린 10m가 넘은 실제 보당이

대구 하늘을 가르며 위풍당당하게 서 있다.

 

그런데 실제 대구박물관 전시실에서 만난 이 유물은

늘 상상하던, 거친 숨소리를 내뱉던 용의 모습만은 아니었다.

사실적으로 보아온 용의 머리에는 공예적인 장치가 숨겨져 있었다.

이 용은 입안 가득 문 여의주 뒤로 줄을 거는 도르래가 감추어져 있다.

도르래에 걸린 줄이 용의 턱 아래 뚫린 구멍으로 내려져

깃발을 올리고 내릴 수 있게 고안되었다.

이러한 장치는 매우 과학적이고 이 유물의 쓰임을 알려주는 귀중한 단서가 됨에도 불구하고

나에게는 가마니 속에서 숨쉬던 그 상상의 용의 모습을 반감시키는

실망스러운 장치가 아닐 수 없었다.

 

이 용두당간 장식이 발견된 곳은 절터가 아니었다고 하는데,

인근 사찰에서 옮겨진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이만한 보당을 세울만한 인근 사찰로는 숙수사나 비로사, 부석사를 생각할 수 있다.

여기에는 모두 당간지주가 서 있다.

 

이들 사찰 중에서 부석사에는

용과 얽힌 선묘낭자와 의상대사의 애련한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의상을 사모한 선묘는 의상이 중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할 때 함께 동행하지 못하게 

되자 끝내 바다에 몸을 던지고 만다.

선묘의 가없는 사랑은 용으로 변하여 의상의 귀국 배편을 돕는다.

또한 의상이 부석사를 차건하고자 할 때 선묘는 다시 용으로 변신하여

공중에 큰 바위가 뜨게 하여 창건을 방해하는 무리를 항복시키고

부석사 창건을 이룰 수 있게 한다.

그리하여 부석사 무량수전 본존불 아래로부터 앞마당 지하에까지

돌로 만든 용을 묻어 영원한 수호신으로 삼았다고 전하고 있다.

 

그러고 보니 이 용의 커다란 눈망울이 선묘의 못다 이룬 사랑이 투영된 듯

슬프게 보인다. 드넓은 천상을 장엄하는 이 용은 용맹무쌍한 모습이 아니라

사랑하는 이를 지키고자 노심초사 가슴 졸이며 안타까운 시선으로 먼 하늘가를 떠도는

안쓰러운 모습이다.

선묘낭자의 설화로 인해 이 용두 당간 장식은 다시 나에게 새로운 유물로 살아난다.

- 강삼혜(국립대구박물관)

- 국립중앙박물관, 박물관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