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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석문이란?

Gijuzzang Dream 2009. 9. 6. 18:01

 

 

 

 

 

 

  금석문(金石文)

 

 

 

금석문(金石文)은 말 그대로

철이나 청동 같은 금속성 재료에 기록한 금문(金文)과

비석처럼 석재(石材)에 기록한 석문(石文)을 합하여 일컫는 말이다.

이것은 좁은 의미의 금석문에 관한 정의라고 할 수 있다.

 

백제에서 일본으로 보낸 칠지도(七支刀)는 철검인데

그 몸체의 양면에 글자를 새기고 金을 상감하여 이 칼을 보낸 사연을 기록한 것.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의례용기 바닥에 '호우(壺우)'라는 명칭을 도드라지게 주조한 것,

불상 광배(光背)에 그것을 조성한 이유를 새겨 넣은 것 등은

고대 금문(金文)의 대표적인 예이다.

 

광개토대왕 호우 명문

 

석문(石文)의 예는 무수히 많다.

현재 중국 길림성 집안시 우산하고분군에 자리잡고 있는 고구려 광개토대왕비,

신라의 진흥왕순수비로부터 죽은 이의 신원과 행적을 기록한 고려의 각종 묘지(墓誌),

조선 지방관들의 선정(善政)을 기리는 송덕비(頌德碑) 같은 종류를 들 수 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금석문이라 하면,

위와 같은 금문, 석문뿐 아니라 토기에 기록한 토기 명문(銘文),

잘 다듬은 나무 조각에 쓴목간(木簡)의 기록, 직물에 쓴 포기(布記),

고분의 벽에 붓글 씨로기록한 묵서명(墨書銘), 칠기(漆器)에 기록한 묵서,

기와나 전돌의 명문(銘文) 등을 포괄하여 부르기도 한다.

이는 넓은 의미의 금석문이라 할 수 있다.

 

역사학의 기본 자료는 종이로 만든 서책(書冊)에 기록한문헌 자료이다.

넓은 의미의 금석문은 이러한 문헌자료, 그리고 문자 기록이 없는 고고학 발굴 자료를 제외한

모든 종류의 문자 기록을 의미한다.

따라서 금석문의 대상 범위가 너무 넓어져 그 의미가 모호해지는 문제가 생길 수 있다.

이를 고려해서 서책 이외의 물건에 기록한 것을 명사(銘辭)라 하고,

그것을 연구하는 분야를 명사학(銘辭學), 명문학(銘文學)이라 정의하기도 한다.

명(銘)은 원래 비석이나 금속에 새기거나 두드러지게 양각(陽刻)한 글

혹은 비문(碑文)가운데 운문(韻文) 을 가리키므로,

먹물을 이용해서 쓴 묵서(墨書)는 명사(銘辭)로 보기 어렵고, 이것도 명사의 일종이라고 하면

역시 금석문의 정의처럼 그 외연(外延)이 지나치게 확장되는 폐단을 피할 수 없게 된다.

 

돌, 기물(器物) 등 기록이 베풀어진 대상물의 성격을 주목한 견해도 있다.

문헌기록이 이루어진 서책이나 종이 문서가 그 자체로서는 어떠한 다른 기능도 하지 못하고

오로지 기록만을 위한 수단으로 이용되는데 비해,

금석문의 기록 대상물은 기록의 매체라는 것 외에 별도의 용도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토기 명문이나 각종 조상명(造像銘)을 생각하면 일면 타당하지만,

비석이나 목간의 경우는 다른 용도가 아닌 기록의 대상물로서 이용된 것이므로 적용될 수 없다. 금석문을 특정 장소에 고정된 기록물로 이해하는 견해도

석탑 명문, 청주시 용두동의 철당간 명문처럼 대형 구조물에 기록된 경우는 이에 해당하지만,

소형 불상이나 동경(銅鏡) 같은 소형 유물의 명문은 포괄할 수 없다.

현재로서는 이처럼 금석문을 대체할 만한 용어가 마땅치 않다.

또 워낙 오랜 동안 사용해와서 익숙해진 용어이기 때문에

이를 바꾸는 것이 능사도 아닌 듯 하다.

일단은 종이로 만든 문서나 서책이 아닌 물건,

즉 돌, 금속, 나무, 직물, 토기ㆍ기와 같은 소성품 등에 기입한 전통시대의 문자나 기호, 그림을 금석문이라 부르고자 한다.
단 고대 중국에서 거북의 등 껍질과 짐승 뼈에 기록한 갑골문(甲骨文)은

이를 다루는 별도의 분과 학문이 존재하고,

금속 화폐에 주조한 명문은 동일 화폐는 공통된 내용과 형식을 갖고 있으므로

금석문에서 제외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도장의 인문(印文)은 금석문에 포함시키는 경우도 있다.

금석문에 대한 연구가 진전되면 그 정의나 내포의 범위도 보다 정교하게 규정될 수 있을 것이다. 현재로서는 그것이 어려운 실정이므로, 차선책이긴 하지만

그 하부 유형을 보다 세부적으로, 체계적으로 분류하여 사용한다면

오해의 여지는 줄일 수 있다고 본다.

 

 

 

금석문의 종류

 

(1) 비문(碑文)

단양신라적성비

 

돌을 다듬어서 세운 비석에 새긴 문장으로,

기록된 정보량이 많고 남아 있는 숫자도 비교적 많아 금석문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

비석은 비(碑)와 갈(碣)로 나누기도 하는데,

비는 긴 직사각형 모양 으로 잘 다듬은 것으로 5품 이상 고위 관료만이 세울 수 있었다.

갈은 자연석의 한쪽 면만을 다듬어서 둥글게 만들었으며 6품 이하가 쓰는 비석이었다.

하지만 이 둘은 엄격하게 구분되지 않고 통용되는 예가 많았다.

비와 갈 모두는 중국 한(漢)나라 때 묘비(墓碑)로 부터 출발하여 발달했으며,

원래는 아무런 글자도 새기지 않은 백비(白碑)였다가

역시 한나라 때부터 죽은 이의 공덕을 기록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비석의 종류는 비문의 내용에 따라 여러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어떤 사실이나 인물, 건물의 내력을 기록한 기적비(紀績碑),

  - 이는 다시 기공비(紀功碑), 송덕비, 정려비, 유허비(遺墟碑), 묘정비(廟庭碑) 등으로 나뉜다 -

무덤 앞에 세워 그 주인공의 신원과 약력을 기록한 묘표(墓表),

일종의 묘비로서 능묘의 동남쪽에 세우는 신도비(神道碑),

왕의 순수(巡狩) 사실을 기록한 순수비,

승려의 사리탑 부근에 세워 그 생애와 행적을 적은 탑비(塔碑), 국경비 등이다.

비석의 외형은 일정한 형식을 갖추고 있다.

보통 용의 머리에 거북 몸통을 한 귀부(龜趺)가 몸돌인 비신(碑身)을 받치고,

비신 위에는 이무기가 서려 있는 모양의 이수(?首)가 올려져 비석을 보호한다.

시기가 내려오면 귀부는 기단 형태로, 이수도 지붕 형태로 바뀌게 된다.

이수에는 그 비문의 제목인 제액(題額)을 쓰는데,

한자 서체 중 전서(篆書)를 쓰게 되므로 보통 전액(篆額)이라고 한다.

그리고 비신의 앞면을 비양(碑陽) 혹은 비표(碑表), 뒷면을 비음(碑陰)이라고 부르고,

비음에 적는 글을 음기(陰記)라고 한다.

비문의 작성 방식은 종류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기본 순서는 공통된다.

즉 비문에 들어갈 기초 자료를 수집하여 문장을 짓고, 제목과 내용을 정성들여 쓴 다음

석공(石工)이 이를 받아 다듬은 돌에 대고 정교하게 조각을 한 다음,

귀부, 이수와 맞추어 건립하는 것이다.

특히 통일신라 선종승려 들의 탑비(塔碑)를 보면,

국왕이 명을 내려 최치원(崔致遠) 같은 당대 최고의 문장가에게 비문을 짓게 하고,

신라의 명필인 김생(金生)의 글씨를 일일이 모아서 고급 석재에 조각한 경우도 있다.

조선 중기 사대부 의 묘비 가운데도

당대 문장가요 명필로서 양송(兩宋)이라 불리던 송시열, 송준길의 문장과 글씨로 쓴 것이 있어,

전통시대에 비석과 비문이 갖는 의미와 중요성을 짐작하게 한다.

 

(2) 묘지(墓誌)

묘지는 죽은 이의 신원과 생애, 태어나고 죽은 해 등을 기록한 것이다.

현실(玄室), 즉 무덤방이 있는 경우 그 벽면에 내용을 직접 기록하기도 하고,

석관(石棺) 안쪽면 혹은 별도의 석판에 이를 조각하여 시신과 함께 안치하게 된다.

 

묘지가 묵서명으로 남아 있는 유명한 예로, 안악3호분을 들 수 있다.

이 고분의 서쪽 벽면에 무덤 주인공의 초상화가 그려져 있고

그 앞쪽 문지기상의 위에 묵서가 남아있다.

그 내용은 선 비족 출신 동수(冬壽)란 사람에 관한 것이다.

따라서 안악3호 분을 동수의 무덤으로 보게 되면 이 묵서는 묘지가 된다.

하지만 무덤 주인공을 고구려의 왕으로 보고 동수는 입구에 그려진 수문장을 가리킨다고 하는

반론도 만만치 않다.

이밖에 광개토대돵대 북부여 방면의 지방관으로 활약한 모두루(牟頭婁)의 묘지,

덕흥리고분에 쓰여진 묘지 등은 모두 고구려의 묵서명 묘지들이다.

 

무령왕릉 지석

 

공주 송산리고분군의 무령왕릉에서 발견된 묘지석은

이 무덤 주인공과 백제 왕실의 국상(國喪), 장례(葬禮) 풍습을 알려준 귀중한 자료이다.

사각형의 판석(板石) 2장에 무녕왕과 그 왕비의 묘지를 각각 음각하여 기록했다.

또 그 뒷면에는 왕릉의 위치를 표시한 방위도와

왕릉이 들어설 땅을 땅의 신으로부터 매입했다는 매지권(買地券)이 적혀 있어,

중국 남조(南朝) 장례문화를 백제가 수용한 흔적을 보여준다.

 

발해 문왕의 딸인 정혜공주와 정효공주의 비석도 무덤 안에서 발견되어

일종의 묘지석으로 볼 수 있다. 고려 귀족들도 묘지석을 만들어 사용했다.

현재까지 300여 점의 묘지가 실물로 발견되거나 혹은 문헌 기록에 실려 있다.

그 주인공 가운데는 『고려사』나 『고려사절요』같은 문헌사료에 실려 있지 않은 인물도 있고,

실려 있더라도 새로운 내용이 적혀 있는 경우가 있어 고려시대 연구에 큰 도움을 준다.

 

조선에 들어오면 고려처럼 석판을 이용하기도 하지만,

백자(白磁)를 사각형으로 만들고 그 위에 청색 안료로 묘지를 쓴 예들이 나타난다.

여러 장일 경우는 각각에 번호를 적어 순서를 표시했다.

 

(3) 불상 명문(銘文)

현재 남아 있는 우리나라 금문(金文) 중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불상 명문이다.

일반적으로 금동불이나 철불의 광배 뒷면을 이용하여 불상을 조성하게 된 연기(緣起)를

음각하여 기록하지만, 일부 석불에도 기록이 남아 있는 예가 있다.

연가7년명금동여래입상

 

고구려의 연가7년명 금동여래 입상은 경남 의령에서 발견되었는데,

광배 뒷면에 4행 47자의 명문이 새겨져 있다.

6세기 전반 혹은 말에 고구려 승려들이 천불(千佛) 신앙을 유포하기 위해 이 불상을 만들었다고

하며 이를 위해 공양한 승려의 이름이 적혀있다.

 

통일신라의 감산사 아미타여래입상과 미륵보살입상은 석조상에 명문이 새겨진 예이다.

이에 따르면, 신라의 귀족이었던 김지성(金知誠)이 자신의 토지를 바쳐 감산사란 절을 짓고

돌아가신 부모님의 명복과 국왕, 자신의 가족, 중생들의 복을 빌기 위해 이 불상을 만들었다.

 

강원도 철원의 도피안사 철조비로자나불 좌상은 신라 말에 만들어진 철제 불상인데,

그 등쪽에 이 불상을 만들게 된 유래와 발원문(發願文)을 적었다.

 

(4) 종명(鐘銘)

금문 가운데 불상 명문과 함께 많은 양을 차지하는 것이 종에 새긴 종명이다.

요즘도 마찬가지이지만, 불교식 범종이나 기독교식 종을 제작할 때

그 종교의 교의(敎義)를 상징하는 문양과 함께 종을 만드는 데 참여한 사람들의 명단을 적어

주조하게 된다. 역대로 우리나라에서 만든 종들을 보면, 제작 시기와 유래, 금속 원료의 양,

책임자, 실제 종을 만든 장인(匠人), 제작비를 분담한 사람의 직위와 명단을 적고 있다.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범종은 강원도 평창의 상원사(上院寺) 동종(銅鐘)인데,

특이하게도 종의 윗면에 신라 성덕왕 24년(725) 진골귀족 가문의 시주를 받고

승려들이 참여하여 이 종을 제작했음을 기록했다.

그리고 조남택(照南宅)이라는 귀족의 공방(工房)에 소속된 장인이 실제 주조 기술자로

작업을 맡았다. 이 장인은 국가에서 수여하는 관등(官等)을 갖고 있어

통일신라 수공업체계와 장인들의 활동 양상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성덕대왕신종

 

종명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은 에밀레종이라고 알려진 성덕대왕신종명이다.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 있는 이 종은 771년에 완성되었다.

종 몸통의 바깥면에 비교적 장문의 명문이 적혀 있는데,

그 내용은 종의 이름, 서문, 참여 관원, 완성일자, 장인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성덕대왕 신종은 그 장대한 규모와 아름다운 비천상(飛天像) 조각 때문에

우리 나라의 대표적인 범종이면서, 여기 기록된 명문을 통해 통일신라의 국가 사찰체계,

당시 정치가, 관료들의 면모를 파악할 수 있다는 점에서 사료적 가치도 뛰어난 유물이다.

 

(5) 도검명(刀劍銘)

칼에 새겨진 명문의 예는 많지 않고,

조선시대 도검은 그나마 간단한 길상구(吉祥句. 행운을 가져오고 나쁜 기운을 물리친다는 형식적인 문구)나 별자리 그림을 상감처리(표면에 오목한 홈을 만들고 다른 색깔의 재료로

그 안을 채워넣어 문양이나 문자를 표현하는 방법)한 정도가 많다.

 

하지만 고대 동아시아의 도검 가운데는 꽤 많은 양의 정보가 명문으로 남아있기도 하다.

우리의 경우는 백제의 칠지도(七支刀)가 대표적이다.

현재 일본 천리(天理)시의 이소노가미 신궁에 보관되어 있고

검신 좌우로 여섯 개의 가지가 달린 특이한 형태이다.

칠지도의 위증에 나온 사진

 

이 칼의 앞뒷면에 모두 61자의 명문을 금(金)으로 상감하여 기록했다.

『일본서기』도 이 칼에 관해 기록하고 있어, 백제가 이것을 일본에 내려준 것인지,

아니면 일본에 바친 것인지, 그 시기는 언제인지 등에 대해 아직도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6)목간(木簡)

잣대 혹은 막대 모양으로 다듬은 나무 조각에 문자, 그림을 적어 의사를 전달한 것이 목간이다.

묵서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음각하거나 다시 그 홈에 묵서를 덧씌운 예도 있다.

잣대 모양은 앞, 뒷면에 문자를 기록하기도 하고, 막대 모양은 네 면을 모두 활용하기도 한다.

목간은 종이가 발명되어 널리 보급되기 이전에 주로 쓰였지만,

그 후에도 나무 재료의 특성 때문에 표찰, 패찰(牌札) 등의 용도로 오랫동안 사용되었다.

 

그 종류를 내용에 따라서 분류하면 일반 기록용, 문서로 쓰인 것,

물품을 운송할 때 내역을 기록하여 딸려 보낸 것, 제사나 의례를 거행할 때 사용한 것, 낙서 등

기타 용도의 목간으로 크게 나뉜다.

 

그리고 각각의 용도와 내용, 보관 및 운송 방법에 따라 다른 형태로 만들었다.

예를 들어 물품 운송에 쓰인 경우는

한쪽 끝을 뾰족하게 깎아서 짐을 묶은 끈 사이에 끼워 넣거나,

한쪽 끝에 낸 구멍에 실을 꿰어 짐에 묶기도 했다.

 

우리나라는 1970년대 중반 경주 안압지(雁鴨池)의 바닥에서

50여 점의 통일신라 목간이 출토된 것을 시작으로 현재까지 200여 점이 발견되었다.

삼국시대 이면묵서목간

 

그 후 경주의 월성 해자, 황남동, 하남의 이성산성, 부여의 궁남지, 쌍북리, 능산리 절터,

함안의 성산산성, 김해 봉황대 등에서 속속 목간이 발견되어

고대사 연구의 새로운 자료로 각광을 받고 있다.

 

(7)토기명문(土器銘文)

토기는 주로 음식물을 담아 먹거나 조리하고, 저장하기 위해 쓴 용기이다.

신석기시대 이후 중요한 생활용품의 하나였으며 부(富)를 과시하기 위한 수단으로 여겨

수십 점의 토기를 무덤에 부장하기도 했다.

불교식 장례를 치른 다음에는 골호(骨壺), 즉 뼈가루를 담는 용기로 쓰기도 했다.

그리고 제사를 지낼 때 제수용품을 담거나, 그 자체가 제수용으로 바쳐지기도 했다.

 

이렇게 다양한 용도로 사용되었고 고대사회에서는 귀중한 생활용품이었으므로,

경우에 따라 토기에 명문을 기록하기도 했다.

그 가운데는 단순한 기호나 한 글자만 적힌 것, 그림을 그려 넣은 것도 있지만

상당히 긴 문장을 기록한 예도 있다.

기록 방법은 뾰족한 도구로 각서(刻書)하거나 묵서로 썼다.

위치는 토기의 몸통 겉면이 대부분이지만, 바닥, 뚜껑, 안쪽에 적기도 해서 일정하지 않다.

 

기와와 벽돌에 비하여 토기에 글자를 새기는 경우는 그리 흔한 편은 아니다.

그릇을 빚어 가마에서 구운 후에 새기개로 글자를 새긴 경우나 붓으로 글자를 쓴 경우가

많은 편이다.

 

평양의 정릉사지에서 ‘정릉(定陵)’ 등의 글자를 새긴 고구려 토기편을 다수 발견하였고,

 

백제와 가야지역에서도 ‘북사(北舍)’와 같은 관청, 관직, 인명을 새긴 토기들이 발견되었다.

통일신라시대의 명문 토기 가운데 익산의 미륵사지와 경주의 안압지에서 발견된 것들이

비교적 사료적 가치가 큰 편이다.

미륵사지에서 발견된 대중 12년명 토기는 미륵사, 정좌(丁坐), 사(史)라는 관직명을 함께 전하고

있어 주목을 받는다. 

한편 안압지에서 발견된 다량의 토기편에서 다양한 명문이 확인되는데,

이 가운데 ‘세택(洗宅)’과 같은 관직이름, 신앙과 관계된 ‘신심용왕(辛審龍王)’ 등의 명문이

포함되어 있다. 특히 ‘사두오도(四斗五刀)’ 또는 ‘십석입옹(十石入瓮)’ 등의 명문은

신라시대 도량형 이해에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하였다.

 안압사지 출토 명문토기

 

고려와 조선시대에는 자기류에 글자를 새기는 사례가 많이 보인다.

발해 기와 가운데는 한 글자씩 기와 표면에 새겨진 예가 많이 나타나는데

이를 특히 문자와(文字瓦)라고 부르기도 한다.

 

명문을 누가 작성했는지는 그 내용과 함께 명문이 쓰여진 상태를 정밀하게 관찰하면

어느 정도 판별이 가능하다. 예를 들어 서울의 아차산 고구려 보루성에서 발견된 접시 명문은

 그 사용자가 자신의 신원을 적어놓은 것이다.

 

‘정(井)’자는 토기 명문으로 많이 발견되는데,

물을 상징하는 종교적 의미와 함께 제작 집단의 고유한 기호였을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글자가 자연유(自然釉, 인공유약이 아니라 굽는 과정에서 자연히 유약 효과가 생긴 것)

안쪽에 쓰여진 경우는 제작자가 작성한 것이 분명하지만,

바깥에 쓰여졌을 때는 사용자가 기록했을 가능성도 있으므로 판별이 쉽지 않다.

 

(8)와전명(瓦塼銘)

와전명은 기와, 벽돌에 명문을 새긴 것을 말한다. 여러 금석문 가운데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나,

명문 내용이 단순하여 사료적 가치는 비교적 적은 편이다.

 

기와는 지붕에 얹는 건축 부재이고,

전돌은 무덤을 쌓거나 요즘 보도블록처럼 바닥에 까는 재료이다.

기와는 암키와의 내면(볼록한 면)과 배면(오목한 면),

그리고 숫막새기와의 막음 부분에 명문을 음각 혹은 인각(印刻)한다.

전돌은 주로 측면에 명문을 양각 혹은 음각해서 넣었다.

 

전통시대에 기와, 전돌은 왕궁, 관청, 사원 같은 고급 건물만이 사용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건물과 무덤의 용도, 주인공을 알려주는 문자를 와전에 기록하게 되기 때문에

그 내용은 간단한 문구로 구성되지만, 출토 유구(遺構)를 추정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대개 기와와 벽돌, 토기를 만들어 가마에서 굽기 전에 새기개를 이용하여 글자를 직접 새기거나

인각(印刻)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간혹 구운 후에 끝이 뾰족한 도구를 이용하여

글자를 새기기도 하고 또 붓으로 글자를 쓰기도 한다.

직접 글자를 새기거나 쓴 경우 우서(右書)가 많고,

인각(印刻)한 경우 대부분 좌서(左書)에 해당한다.

 

 

기와에 새긴 글자의 내용을 분류하면,

길상어(吉祥語), 기와의 제작처와 제작자, 제작시기, 사용처, 불경 등으로 나눌 수 있다.

고려나 조선시대의 기와에는 시주자(施主者)의 이름을 새긴 것도 많이 보인다.

길상어를 새긴 기와는 낙랑시대부터 발견되며,

보통 천추만세(千秋萬歲), 부귀(富貴) 등의 글자를 새겼다.

 

고대의 기와 가운데 제작처를 밝힌 경우가 다수이고,

또 사용처를 알려주는 명문도 여럿 발견된다.

특히 경주지역에서 사원명(寺院銘) 기와가 다수 발견되는데,

이를 통하여 『삼국유사』등의 문헌에 전하는 신라나 고려시대 사원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다. 이밖에도 전국에서 사원명의 기와들이 적지 않게 발견되나 대부분 고려시대의 것이다.

 

기와 명문 가운데 사료적 가치가 상대적으로 큰 것은

지명(地名)이나 부명(部名)이 포함된 것들이다.

충남 부여와 전북 익산지역에서 5부의 명칭을 새긴 인각와(印刻瓦)가 다수 발견되었다.

이때 5부 명칭의 의미에 대하여 기와집이 있는 부를 가리킨다고 보는 견해,

기와의 제작처를 가리킨다고 보는 견해,

와공(瓦工)의 소속 부를 가리킨다고 보는 견해 등이 있으나 명확하지 않다.

다만 부명의 인각와가 발견되는 지역이 부여와 익산지역으로 한정되고 있는데,

이 점은 사비시대 백제의 기와 공급 체계와

아울러 부도(副都)인 익산의 역사적 성격을 밝힘에 있어 귀중한 자료로 활용될 것이다.

 

공주 대통사지(大通寺址)처럼 명문와(銘文瓦)가 발견되어 옛 절터를 확인하는 예도 더러 있다.

그리고 공주 송산리 6호분에서 발견한

“양나라 관요에서 구운 와를 본보기로 했다(梁官瓦爲師矣)”는 명문전을 통해서

백제와 중국 남조(南朝) 국가와의 문화교류 양상을 실물로 확인할 수 있다.

'양관와위사의(梁官瓦爲師矣)’, ‘중방(中方)’, ‘대방(大方)’ 등의 글자를 새긴 벽돌인데

양관명와는 백제가 양나라의 기술을 모범으로 기와를 제작하였음을 알려주고 있어 주의를 끈다.

 

신라 6부의 명칭을 새긴 기와들은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습비부와 한기(한지)부명을 새긴 기와들은 주로 경주지역에서 발견되며,

그 의미는 제작처를 가리킨다고 보인다.

 

한편 청주의 상당산성, 안성의 비봉산성, 그리고 광주의 무진고성에서도 부명와(部銘瓦)가 발견되었다.

상당산성에서 발견된 와명의 전문은 ‘沙喙部屬長池馹(升達)’이다.

이것은 ‘사훼부에 속하는 장지역에서 (올린 것이다)’

또는 ‘사훼부에 속하는 장지역의 (승달이 만든 것이다)’로 해석된다.

청주는 신라시대 서원경이다. 따라서 상당산성 기와의 명문은 소경도 신라의 수도 왕경처럼

6부로 구획하였음을 알려주고 있어 사료적 가치가 크다.

 

한편 광주의 무진고성에서 발견된 기와명문에서도 훼(喙), 사훼(沙喙)라는 글자가 발견되는데,

이것은 소경뿐만 아니라 주치(州治)도 6부로 구획하였음을 증명해주는 것이다.

안성 비봉산성 출토 본피(本彼)명 기와는 국원경(충주)의 본피부와 관련된 것으로 이해된다.

현재 지방에서 발견된 부명기와들은 통일신라시대 지방통치조직의 연구에서 가장 일차적인

사료로서 적극 활용되고 있는 추세이다.

 

지명을 새긴 기와 가운데 경기도 하남시 선동에서 발견된 것들이 가장 주목을 끈다.

명문의 내용을 조사한 결과

지명+수국(受國) 또는 수(受)+해구선(蟹口船) 또는 해구단(蟹口單)이다.

경기도 포천의 반월산성, 서울시 강동구 암사동 점촌마을, 아차산성에서 동일한 형식의 명문이

새겨진 기와들이 다수 출토되었다. 명문은 해구에 위치한 국영 와요(瓦窯)에서 통일신라시대

한산주의 각 군현에 기와를 공급하였다는 내용으로 정리되는데,

이들은 통일신라 기와공급체계와 아울러 중간 행정기구로서 한산주의 역할을 규명할 때

기초 자료로 적극 활용될 것이다.

 

이밖에 지명+관(官)자를 새긴 명문기와들도 다수 발견되고 있다.

이것 역시 각 지방에 산재한 국영 와요(瓦窯)에서 공급하였던 사실과 관련이 깊다.

또한 연호의 명문이 새겨진 기와들은 기와 제작의 발전과정을 연구할 때 중요자료로 활용된다.

 

 

글자를 새긴 벽돌(銘文塼) 대부분은 일제 시기에 낙랑과 대방의 벽돌무덤(塼築墳)에서 발견된 것들이다.

명문의 내용은 주로 벽돌의 제작시기와 제작자, 무덤의 주인공, 길상어구에 관계된 것이다.

일제 시기에 황해도 봉산군 문정면 소봉리 1호분에서 발견된 '장무이전(張撫夷塼)'이

가장 많은 글자를 새긴 것에 해당하는데, 그 내용은 벽돌무덤을 축조한 시기와 그 책임자,

무덤 주인공의 관직, 애도문(哀悼文)으로 이루어져 있다.

 

집안시의 광개토대왕릉 부근에 있는 대형 적석총에서는

“태왕릉이 산처럼 편안하고 굳세기를 기원한다(願太王陵 安如山 固如岳)”이라 쓴 전돌이

발견되어, 이 무덤을 광개토대왕릉으로 비정하는 중요한 근거가 되기도 했다.

이밖에 관직명을 새긴 벽돌, 낙랑과 대방군 폐지 이후에 만든 것들은

현재 고구려의 낙랑ㆍ대방 고지 지배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사용되고 있다.

 

이외 경주 석장사지나 안압지에서 바닥에 깐 전 가운데 그 위치를 표시한 것이 다수 발견되었다.

한편 신라의 명문전으로 안압지에서 발견된 ‘조로이년(調露二年)’명 전이 가장 유명하다.

내용은 조로 2년(680)에 한지벌부(漢只伐部)의 군약(君若) 소사(小舍)가 3월 3일에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신라 6부 연구의 귀중한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調露二年』銘 보상화문전(寶相華文塼)

 

(9)기타

이밖에 울주 천전리 서석(書石)처럼 암벽에 글자를 새기거나

성벽을 쌓은 성돌 등에 새긴 석각(石刻), 석탑의 탑신부에 각자(刻字)한 석탑기,

금속판이나 석판에 탑 조성에 관한 사항을 적어 탑 안에 넣은 탑지(塔誌),

각종 인장의 인문(印文), 동경(銅鏡)의 명문, 벼루 등 각종 용구에 적힌 묵서 혹은 각자명,

사리함, 청동합 등 각종 금속 제품에 새긴 금문,

낙랑 유물로서 문서 봉함(封緘)에 사용된 봉니(封泥)의 명문, 칠기의 묵서명 등이 있다.

울주 천전리각석

 

 

금석문의 조사와 연구

 

금석문은 문헌사료가 부족한 시대, 특히 고대사를 연구할 때

오랜 가뭄에 단비와도 같은 유용한 자료이다.

그리고 당시 사람들이 직접 글씨를 썼기 때문에 서예사를 살펴보는데도 중요하다.

 

금석문에 대한 조사와 연구, 수집이 이뤄지기 시작한 것은 조선시대에 들어와서이다.

선조의 왕손 낭선군(朗善君) 이우(李俁:1637-1693) 낭원군(朗原君) 이간(1640∼1699)형제는

신라, 고려, 조선의 유명한 금석문 약 300점의 탁본을 수집하고

그 가운데 일부를 <대동금석첩(大東金石帖)>으로 펴냈다.

그 목록과 소재지, 글을 지은 자와 쓴 자, 건립연대는

따로 <대동금석서(大東金石書)>로 정리하였다.

여기에 실린 금석문 중에는 이제 원래 비석이 남아있지 않은 자료도 있어 가치가 크다.

 

영조 때 김재로(金在魯)는 고려, 조선의 탁본을 『금석록(金石錄)』에 실었다.

같은 시기에 활동한 김정희(金正喜)는 청 나라 고증학풍의 영향을 받아

전국의 저명한 금석문을 조사하고 깊이 있는 연구도 내놓은 당대 최고의 금석학자였다.

『금석과안록(金石過眼錄)』『완당척독(阮堂尺牘)』은 그 연구의 성과가 담겨 있으며,

특히 북한산 진흥왕순수비를 판독하고 그 내용을 고증한 바 있다.

 

오경석(吳慶錫)이 지은 『삼한금석록(三韓金石錄)』은 삼국 이래 금석문의 목록과

몇 가지 금석문의 판독문 전문을 싣고 이를 고증했다.

그리고 홍양호(洪良浩)는 그의 문집인 『이계집(耳溪集)』에

삼국, 고려의 주요 금석문 목록을 실었고,

서유구(徐有구)는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에 고대~조선의 유명한 금석문 이름과 소재지,

건립 연대 등과 함께 자신의 의견을 덧붙였다.

 

이밖에 금석문을 수집, 연구한 대표적 인물로

이익(李瀷), 안정복(安鼎福), 조인영(趙寅永), 정약용(丁若鏞)을 들 수 있다.

 

한편 청나라 사람 유희해(劉喜海)는 삼국, 고려시대 금석문의 판독과 이에 대한 고증을

『해동금석원(海東金石苑)』으로 정리했다.

왕창(王昶)의『금석췌편(金石萃編)』에도 일부 우리의 금석문이 실려 있다.

그리고 일제시대에는 조선총독부가 전국의 금석문을 6년 동안 조사하여 탁본 1천여 점을 제작,

조사하고 그 결과 1919년 『조선금석총람(朝鮮金石總覽)』을 간행했다.

이 작업을 주도한 일본인 학자가 갈성말치(葛城末治)로서 한국 금석문에 대한 개설적 연구와

낙랑~고려의 주요 금석문에 대한 연구를 묶어『조선금석고(朝鮮金石攷)』를 펴냈다.

등전양책(藤田亮策)과 금서룡(今西龍), 점패방지진(鮎貝房之進)도 일제시기 중요한

금석문 연구자였다.

 

해방 이후 우리 학자들이 다시 금석문을 본격적으로 정리, 연구하기 시작했다.

황수영(黃壽永)의『한국금석유문』, 이난영(李蘭暎)의『한국금석문추보』,

허흥식(許興植)의『한국금석전문』은 이미 나온 금석문 자료집에서 빠졌거나 새롭게 발견된

자료들을 수록하고, 집대성한 것이다.

이밖에 김용선(金龍善)은『고려묘지명집성』을 펴내 고려 묘지명 자료들을 모았고,

조동원(趙東元)에 의해 일부 지역의 금석문 탁본이『한국금석문대계』로 편찬되었다.

지방자치단체별로 지방사를 정리하면서 그 지역 탁본이 정리된 경우도 있다.

또 금석문 탁본을 주제로 한 전시회가 개최되어 탁본을 실제로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 것도 의미 있는 일이다.

최근에는 단순한 탁본의 정리, 판독문 제시에서 한 걸음 나아가

판독문의 정밀한 비교와 번역, 주석 작업이 이뤄지고 있다.

한국고대사회연구소 편의『역주 한국고대금석문』,

이지관(李智冠)의 『교감 역주 역대고승비문』이 대표적인 연구 업적이다.

 

 

금석문의 가치

 

역사를 연구하는 데는 여러 가지 자료가 활용된다.

문헌, 고고학자료, 미술자료, 금석문, 민속, 구술(口述)자료 등이 그것이다.

이들은 기준에 따라 몇 가지로 분류할 수 있는데

유형과 무형자료, 문자자료와 비문자자료, 당대자료와 후대자료 등의 구분이 가능한 것이다.

이 가운데 당대자료와 후대자료의 구분이 역사 연구에 있어서는 중요하다.

후대의 자료는 그 작성자나 시대적 조건에 따라 왜곡과 윤색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당연히 당대의 자료가 사료척 가치가 높기 마련이고

그래서 전자를 1차 자료, 후자를 2차 자료라고 부르기도 한다.

금석문은 당시 사람이 직접 글을 짓고 써서 남긴 유물이므로 1차 자료이고,

역사연구에서 일급의 자료이다.

 

하지만 금석문이라고 해서 그 내용을 맹신해서는 안 된다.

문장을 짓는 사람의 의도에 따라서 사실의 과장과 왜곡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광개토대왕릉비문을 보면, 왜(倭)의 군사 활동을 부각하여 과장되게 서술하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역사적 사실과 다르고 이를 제압한 광대토대왕의 업적을 과시하려는

정치적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비문의 내용 을 비판적으로 독해하면 그 이면에 감춰진 사실을 읽어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한 면에서 금석문은 후대의 문헌사료보다 솔직한 성격의 자료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금석문은 어떤 인물이나 개별 사건, 사물에 대한 내용을 압축적으로 담고 있기 때문에

내용이 단편적이고 부분적이라는 한계가 있다.

문헌사료가 한 시대, 사회에대 한 종합적인 서술이라는 점과 대비되는 측면이다.

따라서 금석문이 전해주는 사실을 곧바로 일반화시키는 것은 위험하다.

무엇보다 금석문은 오랜 세월 동안 비바람에 노출되어 마멸과 부식이 심하고,

출토 유물의 경우도 훼손이 심하여 판독이 어렵다는 것이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큰 문제이다.

 

목간의 경우 적외선 촬영 같은 첨단기법을 활용하여 묵흔을 찾아내는 경우도 있지만,

그것도 불가능 할 때는 섣불리 글자를 예측하여 내용을 추정하는 것도 위험한 일이다.

 

한편 출토 금석문 자료, 즉 목간이나 토기 명문, 와전명 등은 문자 자료이면서

동시에 고고학 발굴자료 로서의 성격을 갖고 있다.

어떤 층위의 어떤 유구에서, 어떤 유물과 함께 어떤 상태로 출토되었는지는

그 유물의 용도와 묻힐 당시의 상황을 판별하는 데 근거를 제시해 준다.

그리고 이를 통해 명문의 내용을 보다 합리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출토 금석문 자료의 고고학적 측면에 대한 고려가 반드시 필요하다.

- 출처 : 한국금석문종합영상정보시스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