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의 문신 이규보(李奎報, 1168-1241)의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卷 第8 古律詩에는
푸른 옥빛을 띠는 아름다운 청자 술잔에 관한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나무를 베어 남산이 빨갛게 되었고 落木童南山
불을 피워 연기가 해를 가렸지 放火烟蔽日
푸른 자기 술잔을 구워내 陶出綠?杯
열에서 우수한 하나를 골랐구나! 揀選十取一
선명하게 푸른 옥빛이 나니 瑩然碧玉光
몇 번이나 매연 속에 파묻혔나 幾被靑煤沒
영롱하기는 수정처럼 맑고 玲瓏肖水精
단단하기는 돌과 맞먹네! 堅硬敵山骨
이제 알겠네, 술잔 만든 솜씨는 ?知?塡功
하늘의 조화를 빌려왔나 보구려! 似借天工術
가늘게 꽃무늬를 놓았는데 微微點花紋
묘하게 화가의 솜씨와 같구나! 妙逼丹靑筆
청자를 굽기 위해 땔나무를 베어낸 산은 벌거숭이가 되었고,
가마에서 오른 자욱한 연기가 해를 가렸으니
가마 주변을 오고갔을 장인(匠人)의 숨결 또한 얼마나 분주했을지 쉬이 가늠할 수 있다.
그토록 발갛고 매케한 혼미함은 ‘수정처럼 맑고 푸른 옥빛의 청자’를 탄생하게 하였으니,
어쩌다 가마 주변에는 청량한 비[綠雨]가 내려 가마의 열기를 곱게 식혀주었을 것이다.
마침내 가마의 문이 열리고 수많은 옥빛 청자 중에 또 하나를 골랐으니
이를 마주한 당대의 문인은 ‘하늘의 조화’라고 노래하였다.
고려시대에 궁궐에 사는 국왕과 그의 가족 그리고 수도인 개경에 삶의 터전을 둔 많은 귀족들이 사용한
아름다운 청자는 대부분 지금의 전라도 강진인 탐진현에 있는 자기소(瓷器所)에서
관리[所吏]의 감독아래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졌다.
박물관 진열장에서 마치 현실에서는 닿을 수 없는 미지의 꽃처럼 피어있는 청자를 바라보노라면
그릇에 표현된 꽃술이 혹여 바라보는 이의 큰 호흡에 흔들려 날아갈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이규보가 노래한 ‘돌처럼 단단하고 수정처럼 영롱한’ 시린 빛의 청자에
어떻게 이토록 예민하고 치명적인 섬세함이 구현될 수 있는 것일까?
현실 속의 아름다운 청자 한 점은 ‘구체화된 비현실의 현실’로써
우리가 부여받은 생명의 시계로는 가늠할 수 없는 시간의 강 건너에 존재한
고려인(高麗人)의 미감을 오롯이 간직하고 있다. (<사진1-1>, <사진1-2> 참고)
<사진1-1> 청자연꽃모양주전자 <사진1-2> 사진1-1의 세부
국립문화재연구소,『미국 부르클린박물관소장 한국문화재』(2006년)에서 인용.
이토록 고운 그릇이 만들어진 때는,
이토록 우아한 그릇에 차와 술 향기가 가득 차던 때에는 사람의 마음도 아름답기만 했을 것 같다.
그 때는 필시 저녁 꽃 시장에 향기로운 바람이 불고,
이별의 눈물을 닦는 옷깃마다 언덕너머에서 들려오는 피리소리가 내려앉았으리라... (<사진2> 참고)
<사진 2> 청자詩명병
국립중앙박물관 소장,『다시 찾은 비취색 꿈』(국립전주박물관, 2006)에서 인용.
어느 곳인들 술 잊기 어렵구나. 靑門엔 이별도 많네.
옷깃을 여미며 눈물을 닦고, 말을 재촉하며 피리소리를 듣는다.
구름 낀 나무가 있는 파릉언덕, 인간세상의 장락이라네.
이 때 술 한 잔 없다면 떠나고 머무는 심정을 무엇으로 달랠꼬.
그러나 영원한 것은 없고, 애틋한 시간은 길기 어렵듯이 시절은 변하여
공민왕(恭愍王)의 안타까운 몸부림으로도 ‘아름다운 나라’ 고려의 사위는 숨결을 살려내지 못하였다.
그가 너무도 사랑하여 죽어서도 함께 하길 바라는 소망으로 자신과 아내의 무덤을 가르는 벽에 구멍을
내게 하였다는 공민왕의 아내 노국대장공주(1374년 사망)의 묘인 정릉(正陵)에서
제사를 지낼 때 사용된 청자대접은 고려 말의 안타까운 상황을 여실히 보여 준다.
(<사진3-1>, <사진3-2> 참고)
<사진3-1> 청자正陵명대접 <사진3-2> 사진3-1의 옆면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왕비의 제사에 사용된 그릇이지만
시인이 노래한 수정처럼 맑고 영롱하던 푸른빛은 회색빛이 감돌아 탁해졌고,
하늘의 조화를 빌린 듯 가늘게 수놓던 꽃무늬는 모양이 헝클어져 엉성하기만 하다.
이뿐인가, 꽃잎이 이내 벌어질듯이 섬세한 그릇의 윤곽은 밋밋하고 둔탁해졌다.
그릇이 변한 것인가, 사람이 변한 것인가 아니면 사람들의 미감이 그릇을 변화시킨 것인가!
고려는 청자가 변하였듯이 끝내 망하고 말았다.
그러나 고려를 딛고 선 나라 조선(朝鮮)이 그들의 참신한 얼굴을 비추일 그릇인 백자를 만들기에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였고,
새로운 나라의 사람들은 한동안 사라진 나라 고려의 잊혀져가는 그릇에 화장을 하듯
분(粉)을 발라 사용해야만 했다. (<사진4-1>, <사진4-2>참고)
<사진4-1>분청사기恭安府명대접 <사진4-2>분청사기인화문대접
조선 1400-1420년, 조선 15세기 전반, 개인소장,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재단법인 세계도자기엑스포,
『조선도자500년전』(2003), 도판 156 인용.
누군가는 말했다.
그 시대를 사는 보통사람들의 밥상위에 오르는 그릇을 보면
한 나라의 살림살이 규모와 문화수준을 알 수 있다고.
그릇은 한 끼의 음식을 담지만 세상에 남겨진 오래된 그릇들은 말한다.
하나의 그릇에 담긴 것은 그 시대를 산 사람들의 얼굴과 마음과 삶이었음을.
돌아볼 일이다. 오늘 저녁 나의 밥상에 오를 그릇을.
- 박경자, 문화재청 청주국제공항 문화재감정관실 감정위원
- 문화재청, 문화재칼럼, 2009-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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