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렌의 서양식 진단서
최초 조선인 의사(박서양)의 유리 필름 근대의료유물 문화재 지정
| |||||||||||||||||||||||||||||||||||||||||||
가위를 건네주는 모습을 담은 유리원판 필름
대한제국 당시인 1904년, 세브란스병원 원장 올리버 R 에비슨이 수술하는 모습을 담은 유리원판 사진을 보면 유독 눈에 띄는 인물이 한 사람 있다. 머리에 탕건을 쓴 채 에비슨에게 가위를 건네주고 있는 키 작은 조수, 이 사람은 조선 최초로 의사 면허증을 받은 7명 중 한 명이자 훗날 독립운동가로 활동한 박서양(朴瑞陽, 1885~1940)이다. 박서양은 드라마틱한 인생을 살았다. 가장 비천한 신분인 백정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기독교인 아버지를 통해 에비슨과 인연이 닿아 1908년 세브란스 의학교를 제1회로 졸업했다.
세브란스 간호원양성소 교수 등으로 활동하던 그는 1918년 만주로 건너가 독립군을 도와 의료 활동을 펼쳤다. 워낙 흥미로운 이야기이다 보니, 그의 삶을 소재로 한 드라마도 만들어지고 있다. 오는 11월 SBS에서 방영 예정인 '제중원'이다. 박서양이 에비슨을 도와 수술하고 있는 모습을 찍은 유리원판 사진이 문화재가 된다. 대한제국 당시의 수술장소와 도구, 복장 등을 보여주는 희귀한 사진으로 사료적 가치를 인정받았다.
문화재청은 국내 최초의 근대의학 교육기관인 '의학교(醫學校)' 설립 110주년을 맞아 이 사진을 비롯한 근대 의료 관련 유물 6건을 문화재로 등록예고한다고 18일 밝혔다. 근대 의료 관련 유물이 문화재가 되는 것은 처음이다. 의학교는 1899년 대한제국의 칙령에 의해 만들어진 기관으로, 지석영이 초대 교장을 맡았다.
문화재 목록에 오른 의료 유물 중 가장 오래된 것은 의사 알렌의 진단서다. 1885년 생긴 국내 최초의 근대식 국립병원 제중원의 의사 알렌이 그해 9월 13일 옛 세관인 해관(海關) 직원 웰쉬에게 발행한 이 진단서는 국내 최고(最古)의 근대 서양식 진단서다. '1, 2주의 요양이 필요하다'는 간단한 내용이 담겨있지만, 근대기 서양의학의 도입을 알리는 상징적 문서다. 알렌은 갑신정변 당시 칼에 찔린 민영익을 살려내 고종의 총애를 얻은 의료 선교사로, 외교관으로도 활동해 우리 근대사에 큰 영향을 미친 인물이다. 그가 제중원의 첫 해 활동을 기록한 '제중원 1차년도 보고서'도 당시의 질병 양상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가치를 인정받아 문화재가 되며, 그가 사용한 안과용 기구인 검안경도 목록에 포함됐다. 1901년부터 5년간 고종의 서양의학 전문 어의였던 독일인 리차드 분쉬가 사용한 핀셋과 가위, 칼 등 외과도구도 문화재가 됐다. 알렌 등 이전의 서양인 의사들이 선교사를 겸한 데 비해 분쉬는 대한제국 설립 이후 의사로서 정식 초빙된 첫 사례다. 1908년 대한의원 개원일에 순종 황제가 내린 '대한의원 개원 칙서'는 백성에게 의료 혜택이 미치도록 하라는 내용과 함께 국새가 찍혀있어 의학사적, 상징적 가치가 크다는 평가를 받았다.
- 문화재청 / ⓒ 인터넷한국일보 - 2009-08-19
한성(漢成)의 제동(齊洞)에 왕립으로 세운 광혜원(廣惠院)의 새로운 이름.
환자수가 늘면서 앨런과 함께 W. B. 스크랜턴, J. H. 헤런, A. J. 엘리스 등이 진료했으며,
특히 엘리스는 새로 설치된 부인부(婦人部)를 담당하는 이외에
왕녀(王女) 및 왕실부인들의 진료에도 종사했다.
제중원은 개설 이후 환자수가 계속 늘어나자 1887년 장소를 넓혀
한성 남부 동현(銅峴:지금의 을지로)으로 옮겨가게 되었다.
앨런이 1887년 가을 본국으로 돌아가자 제중원의 일은 헤런이 맡게 되었으며,
엘리스도 결혼하면서 L. S. 호턴이라는 여의사와 교체되었다.
그후 헤런이 죽자 캐나다 토론토대학교 그리스도교 청년회에서 파견된 C. C. 빅턴에게
왕립병원의 업무가 맡겨졌다.
그러나 정부의 무능, 재정상의 어려움 등으로 인해 의료사업이 제대로 시행되지 못했기 때문에
에이비슨은 제중원의 사업에 열정을 기울여 서양의학에 대한 한국인들의 신뢰도를 높였으며,
나아가 1899년(광무 3)에 제중원의학교를 설립하고 학생들을 뽑아 의학교육을 실시했다.
10년이 지난 1908년(융희 2) 6월에 처음으로 제1회 졸업생 7명을 배출했는데,
이것이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의 전신인 세브란스 의학교의 시초였다.
에이비슨이 본국에서 구한 기금으로 1904년 9월 4일 세브란스 병원을 신축하고
진료를 시작했는데, 이때부터 제중원의 명칭은 실질적으로 세브란스병원으로 바뀌게 되었다.
한국의 서양의학은 왕립병원인 광혜원 · 제중원 시대를 거쳐
세브란스 병원을 설립하기에 이른 것이다.
문화재청은 올해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의학 교육기관인 의학교(醫學校) 설립 110주년을 맞아, 근대의료 관련 유물 6건을 등록문화재로 등록 확정했다. (등록예고기간 : 2009.8.19-9.17)
이번에 등록문화재로 등록되는 근대 의료유물 6건은 우리나라에 서양의학이 도입되던 근대시기의 진료도구 2건, 의료관련 서류 3건, 유리건판 필름 1건으로, 근대기 서양의학의 도입 · 발전과 관련하여 역사적 · 상징적 가치가 큰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등록문화재 제445호 <알렌의 진단서>는 제중원(濟衆院)에서 의사로 활동한 알렌(H. N. Allen, 1858-1932)이 발급한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근대 서양식 진단서이다. 이 진단서는 1885.9.13. 알렌이 해관(海關, 옛 稅關) 직원 웰쉬(C. A. Welsch)에게 발급한 것으로 1-2주간의 요양이 필요하다는 내용이 적혀있다. 알렌은 갑신정변 당시 7군데에 칼을 맞은 명성황후의 조카 민영익을 살려내어 고종의 총애를 얻은 의사이자 선교사였으며 외교관으로도 활약하며 우리나라 근대사에 큰 영향을 미친 인물이다.
등록문화재 제447호 <제중원 1차년도 보고서>는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국립병원인 제중원(濟衆院)의 첫 해(1885.4.10- 1886.4.10) 활동 보고서로, 알렌이 제중원 개원 1주년을 맞아 작성한 것이며 19세기 후반 우리나라 사람들이 앓던 질병의 양상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될 뿐만 아니라, 표지 상단의 ‘Compliments H. N. Allen’이라 적은 알렌의 서명이 있어 의학사적 · 사료적 가치가 크다.
등록문화재 제448호 <에비슨의 수술장면 유리건판 필름>은 에비슨(O. R. Avison, 1860- 1956)이 제중원의 후신인 세브란스병원에서 한국인 조수 박서양의 도움을 받아 수술하는 장면을 담은 유리원판 필름이다. 특히, 박서양(朴瑞陽, 1885-1940)은 백정(白丁)의 아들로 태어나 1908년 세브란스의학교를 제1회로 졸업하고 세브란스 간호원양성소의 교수 등으로 활동하다 1918년경 만주로 건너가 독립군을 도와 의료활동을 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등록문화재 제449호 <대한의원 개원 칙서>는 1908.10.24. 대한의원 개원일에 황제 순종이 내린 칙서(勅書, 임금이 훈계하거나 알릴 내용을 적은 글)로, 백성들에게 의료 혜택이 미치도록 하라는 황제의 뜻이 담겨 있으며, 가로 세로 11cm 크기의 [勅命之寶] 국새(國璽)가 찍혀있다. 이 칙서는 대한의원이 대한제국의 공식 기관임을 선포하는 가장 높은 수준의 공식 문서로서 의학사적· 상징적 가치가 크다.
그밖에 <알렌의 검안경>, <분쉬의 외과도구(동은의학박물관 소장)>도 의학사적 가치가 인정되어 각각 제446호, 제450호 문화재로 등록되었다.
이번에 의료 관련 유물의 문화재 등록은, 문화재청이 2008년도에 실시한 근대문화유산 의료분야 목록화 조사 용역을 바탕으로 유물에 대한 일괄 조사를 통한 비교 · 평가, 관계전문가 현지조사와 검토회의 등 충분한 검토 · 논의 과정을 거쳐 추진되었다.
앞으로도 문화재청은 근대시기 주요 분야에 대한 심층적 조사 · 연구를 통해 문화재적 가치가 큰 유물에 대하여 문화재로 등록 · 보존해 나갈 계획이다.
□ 등록문화재 유물 목록
□ 주요 연혁 및 특징
1) 등록문화재 제445호 『알렌의 진단서』 < 규격 : 205mm×140mm, 재료 : 종이, 제작시기 : 1885.9.13, 제작자 : H. N. Allen >
ㅇ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병원인 제중원(濟衆院)의 책임을 맡았던 알렌이 발행한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근대 서양식 진단서이다. 1885.9.13. 알렌이 해관(海關, 옛 稅關) 직원 웰쉬(C. A. Welsch)에게 발급한 것으로 1-2주간 요양이 필요하다는 내용이 적혀있다.
ㅇ 알렌(H. N. Allen, 1858-1932)은 1884년 9월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로 한국에 부임하여 미국공사관 촉탁의사로 활동하다 제중원의 설립을 건의했고, 1885년 4월부터 1887년 9월말까지 제중원의 책임을 맡다 외교관으로 전직하여 주미한국공사관 참사관을 거쳐 주한 미국 공사(公使)를 역임했다.
2) 등록문화재 제446호 『알렌의 검안경』 < 수량 : 1건(기구 1점, 함 1점), 규격 : 42mm×180mm, 재료 : 금속, 제작시기 : 1870-80년대 추정, 제작사 : GALL&LEMBKE OPTICIANS社 >
ㅇ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병원인 제중원(濟衆院)의 책임을 맡았던 알렌이 사용하던 검안경(檢眼鏡, 눈의 내부를 들여다볼 수 있게 만든 안과용 기구)이다. GALL&LEMBKE OPTICIANS社사에서 제작한 것이며 1870년대 미국 뉴욕에서 개발되어 상용되던 것으로 알렌의 유족이 1984년-1985년 사이에 연세대학교에 기증한 것이다. 한국 근대 의료사 및 외교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알렌의 의료 관련 유물로서 우리나라 근대 서양의학 도입사와 관련하여 사료적 가치가 크다.
3) 등록문화재 제447호 『제중원 1차년도 보고서』 < 규격 : 135mm×195mm, 38쪽, 재료 : 종이, 제작시기 : 1886년 4월, 제작자 : H. N. Allen >
ㅇ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병원인 제중원(濟衆院)의 첫 해(1885.4.10-1886.4.10) 활동 보고서이다. 제중원 의사 알렌(H. N. Allen, 1858-1932)과 헤론(J. H. Heron, 1856-1890)이 제중원 개원 1주년을 맞아 작성한 것으로, 19세기 후반 우리나라 사람들이 앓던 질병의 양상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되며 표지 상단의 ‘Compliments H. N. Allen’이라 적은 알렌의 서명이 있어 의학사적 · 사료적 가치가 크다.
ㅇ 보고서에는 제중원의 도면, 병원 개원 경위, 조선에 흔한 질병, 1년 동안 진료한 외래 · 입원환자의 통계, 재정상황 등이 실려 있고 특히 환자 통계는 근대의학의 질병 분류법대로 상세하게 구분되어 있다.
4) 등록문화재 제448호 『에비슨의 수술장면 유리건판 필름』 < 규격 : 83mm×82mm, 재료 : 유리, 제작시기 : 1904년, 제작처 : 세브란스병원 >
ㅇ 세브란스병원에서 에비슨이 한국인 조수 박서양의 도움을 받아 수술하는 장면을 담은 유리건판 필름으로 대한제국기 당시의 수술실, 수술도구, 수술인력, 수술복장 등을 보여주는 희귀한 사진의 원판필름이라는 점에서 사료적 가치가 크다.
ㅇ 에비슨(O. R. Avison, 1860-1956)은 캐나다 토론토의대를 졸업한 북장로교 선교의사로 1893년 7월부터 제중원에서 진료를 시작하여, 제중원을 세브란스병원과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로 확대 개편하는 등 우리나라에 근대서양의학이 도입 · 보급되는 데 중요한 기틀을 마련한 인물이다. 필름에서 에비슨에게 가위를 건네고 있는 박서양(朴瑞陽, 1885-1940)은 1908년 6월 세브란스병원의학교를 제1회로 졸업한 인물로 모교의 교수 등으로 활동하다 1918년경 만주로 건너가 병원, 교회, 학교를 설립하는 등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힘쓴 인물이다.
5) 등록문화재 제449호 『대한의원 개원 칙서』 < 규격 : 595mm×430mm, 재료 : 종이, 제작시기 : 1908.10.24, 제작처 : 대한제국 >
ㅇ 1908.10.24. 대한의원 개원일에 황제 순종이 내린 칙서(勅書, 임금이 훈계하거나 알릴 내용을 적은 글)로, 가로 세로 11cm 크기의 [勅命之寶] 국새(國璽)가 찍혀있다. 선왕인 고종대부터 추진한 일을 매듭지은 것임을 밝히고 백성들에게 의료의 혜택이 미치도록 하라는 황제의 뜻이 담긴 이 칙서는 대한의원이 대한제국의 공식 기관임을 선포하는 가장 높은 수준의 공식 문서로서 의학사적 · 상징적 가치가 크다.
ㅇ 1906.1월 설치된 통감부는 기존 대한제국의 의료기관인 광제원, 의학교, 대한국적십자병원을 병합하기로 결정, 관제 제정 및 병원 신축을 통해 1908년 대한의원을 개원했으며, 이후 대한의원은 한국 최고 수준의 서양의학을 시술하는 병원인 동시에 식민지 보건의료의 중추기능을 담당했다.
6) 등록문화재 제450호 『분쉬의 외과도구』 < 수량 : 1건(기구 10점, 함 1점), 규격 : 197mm×72mm×32mm, 재료 : 금속 · 목재, 제작시기 : 1900년대 초반 추정>
ㅇ 대한제국 초빙 공식서양의학 전문 어의(御醫)인 분쉬(Richard Wunsch, 1869 -1911)가 사용하던 외과도구로 금속제 핀셋, 가위, 칼, 바늘 등과 목제 함으로 구성되어 있다. 분쉬의 손녀가 2004.11.25. 동은의학박물관에 기증한 것으로 보존상태도 매우 양호하다. 조선말 전통의학과 근대서양의학의 교량역할을 한 선구자로 평가받는 분쉬의 유물로서 우리나라 근대의학사 연구에 있어 사료적 가치가 크다.
ㅇ 분쉬는 1901.11월-1905.5월까지 고종의 어의(御醫)로 일하면서 당시 세계 의학의 선도적 위치에 있던 독일의학을 우리나라에 전파했다. 대한제국 설립 이후 황제국에 걸맞은 어의 초빙 계획에 따라 독일에서 정식 초빙된 의사로 이전까지 선교 의사를 임시로 어의로 활용했던 것과 다른 의학사적 맥락에 있는 인물이다.
|
제중원 ‘황정’의 실존인물 - ‘박서양’을 아십니까?
백정 아들→의사→기자 · 독립운동가로 파란만장한 삶 SBS 드라마 통해 화려하게 부활 |
![]() |
SBS 월화드라마 ‘제중원’이 장안의 화제다. 드라마의 주 테마는 구한말 최초의 근대식 병원 ‘제중원(濟衆院 · 광혜원)’을 배경으로 신분의 차를 극복하고 진정한 의사로 성공한 황정(박용우 분)의 일대기다.
드라마 속 황정(黃丁)이 실제 역사 인물임이 드러나면서 시청자의 궁금증과 호기심이 더욱 커지고 있다. 황정은 백정(白丁) 출신이면서 한국 최초로 의사면허를 받고 독립운동까지 한 ‘박서양’을 모델로 하고 있다.
사람 대접 못 받던 어릴 적 이름은 ‘개새끼’
의사 박서양은 한국 기독교 역사에서 ‘백정의 아들이 의사가 됐다’라는 정도로만 구전돼왔을 뿐, 지금껏 그의 진가가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던 인물이다. 최근 들어 그가 세상에 알려지고 제 가치를 인정받은 데는 연세대 의대 박형우(54 · 해부학교실) 교수의 숨은 노력이 큰 몫을 했다. 박 교수는 박서양의 일대기를 사료 고증을 통해 밝혀내 논문으로 엮었으며, 그가 쓴 ‘제중원’이라는 책은 드라마의 모티프를 제공하기도 했다. 박 교수가 드라마의 의학 자문을 맡은 것도 이 때문이다.
박서양은 과연 어떤 인물이었을까. 박서양의 일대기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드라마에서 황정의 어릴 적 이름은 ‘소근개’로 근수가 적게 나가는 개, 즉 ‘개새끼’라는 의미다. 그만큼 당시 백정은 사람 취급을 받지 못했다.
최하층 신분인 박서양이 의사가 된 것은 박서양의 아버지 박성춘과 제중원 의사 에비슨(O. R. Avison · 제중원 4대 원장)의 ‘운명적 인연’ 덕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장티푸스에 걸려 사경을 헤매던 박성춘을 에비슨이 신분을 차별하지 않고 헌신적으로 치료했기 때문. 이에 깊은 감명을 받은 박성춘은 기독교로 개종하고 그를 스승처럼 따랐다고 한다.
콜레라도 박서양이 의사가 되는 데 한몫했다. 1895년 6월 콜레라가 만연하기 시작하자 조선 정부는 에비슨을 방역책임자로 임명하였다. 에비슨의 노력 끝에 콜레라가 어느 정도 진정되자 조선 정부는 에비슨에게 감사를 표했고, 그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지방 백정들의 해방을 탄원했다. 박성춘을 비롯한 다른 백정들의 탄원도 함께 제출됐다. 결국 1896년 2월 백정들에게도 면천(免賤)이 허용되기에 이르렀다. 즉, 박서양에게 의사가 될 길이 열린 것이다.
박서양은 결혼 이후 본격적으로 의학 공부를 시작했다. 하지만 그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에비슨은 박서양의 결혼식장에서 “아들놈을 병원으로 데려가 사람 좀 만들어달라”는 박성춘의 부탁을 받고도 제중원의학교 입학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 대신 박서양을 병원으로 불러 청소, 침대 정리 등 온갖 궂은일을 시켰다. 박서양이 힘든 일을 아무 불평 없이 처리하자 에비슨은 비로소 그에게 의학 책을 읽게 했다. 뒷날 밝혀진 일이지만 에비슨은 박서양의 사람됨을 알기 위해 일부러 그를 시험했다.
결국 박서양은 다른 6명과 함께 1908년 졸업시험을 통과해 한국 최초의 의사면허를 받았다. 박형우 교수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의학 공부에서 필요한 덕목은 ‘성실성’으로, 박서양의 인간됨을 알아볼 수 있는 대목”이라고 설명했다.
2. 제중원 수술 장면. 박서양(가운데)이 탕건을 쓰고 에비슨을 보조하고 있다. 3. 박서양.
만주 무대로 의료활동, 동아일보 기자로도 활약
학교를 졸업한 박서양은 모교 제중원의학교의 전임교수로 화학, 해부학 등을 가르치며 외과 환자를 진료했다. 그러나 그는 의사로서의 안락한 삶에 안주하지 않고 돌연 간도로 이주했다. 그곳에서 그는 구세병원과 숭신학교를 세우고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또한 간도 지역의 조선인 자치기구이자 독립운동 단체인 대한국민회에서 군의(軍醫)로 임명돼 의료를 담당했다. 박서양은 이때 동아일보 간도지국 기자로도 활약했다.
만주를 무대로 독립운동에 힘쓰던 박서양은 1936년 귀국길에 올랐다. 박형우 교수는 “1931년 만주사변 이후 간도에서의 독립운동이 사실상 어려워지고, ‘불온사상을 고취한다’는 이유로 그가 설립한 숭신학교가 폐교당하자 귀국한 것으로 보인다”며 “이미 50대가 돼 여생을 고향에서 보내고 싶었을 것”이라고 설명한다. 박서양은 광복을 5년 앞둔 1940년 55세의 나이로 자택에서 영면했다.
박서양의 일대기는 2006년 박형우 교수의 논문 ‘박서양의 의료 활동과 독립운동’을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 박서양의 업적이 뒤늦게 밝혀진 것에 대해 박 교수는 “최근 독립운동사 자료에 대한 접근이 쉬워진 덕에 박서양이 간도에서 활동한 내용을 개략적이나마 확인할 수 있게 됐다. 또한 박서양의 손자 박연수 씨가 2005년 연세대학교를 방문했을 때 입수한 호적등본 등 여러 자료와 당시 ‘동아일보’ ‘신동아’의 기사도 큰 도움이 됐다”고 말한다.
노블레스 오블리주 몸소 실천한 대의(大醫)
2008년 광복절을 맞아 박서양은 ‘건국포장’을 받고 독립유공자로 추서됐다. 박형우 교수는 “첫 의사면허를 받은 7명 중에서 4명이 독립유공자”라며 “수많은 조선의 엘리트들이 근대 지상주의의 미명 하에 일제 침략을 용인했던 것과는 달리, 이들은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몸소 실천하며 대의(大醫)의 모습을 보여준 지식인”이라고 설명했다.
이기원 작가의 각색을 통해 황정으로 거듭난 박서양은 드라마 ‘제중원’에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많은 시사점을 던져줄 것으로 기대된다. 현재까지 진행된 드라마 내용을 보면 에비슨이 광혜원(廣惠院 · 제중원의 전신)의 초대 원장이자 한국에 최초로 서양의학을 전파한 H. N. 알렌으로 설정됐고, 아버지와의 인연 부분은 박서양과 알렌의 개인적 친분으로 설정됐지만, 극 전개의 흐름은 박서양의 실제 일대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전망이다. 칠레에 살고 있는 박서양의 손자 박연수(74) 씨는 “극의 재미를 위해 억지로 각색한 부분이 있어 좀 아쉽다”고 전했다.
- 최영철 기자 ftdog@donga.com - 박영목 주간동아 인턴기자 연세대 의학과 4학년 - 주간동아, 2010.01.26. 721호(p58~60) |
'알아가며(자료)'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도자기 - 청자의 쇠퇴기 : 화장(化粧)을 하기까지 (0) | 2009.09.09 |
---|---|
용두보당(金銅龍頭寶幢) (0) | 2009.09.09 |
'석학과 함께하는 인문학강좌' - 박은정 서울대교수(법철학) (0) | 2009.09.07 |
금석문이란? (0) | 2009.09.06 |
김육의 '대동법시행기념비(大同法施行記念碑)' (0) | 2009.09.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