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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도 오딧세이]

[간도 오딧세이] 64. 청국의 백두산 국경 날조사건

Gijuzzang Dream 2009. 7. 24. 22:05

 

 

 

 

 

[간도오딧세이] 청국의 백두산 국경 날조사건  

 

 

 

 

 

 

 

 

백두산 물줄기 약도.

송화강의 지류인 토문강, 정계비 사이에 토퇴와 석퇴가 있다.

오른쪽 강은 두만강으로, 홍토수가 비교적 윗쪽에 있다.

토문강과 홍토수는 연결되지 않으며, 사이로 장백산맥이 지난다.

 
 
 
간도협약이 체결되기 바로 전 해인 1908년 유건봉이라는 청국 관리는
동삼성(봉천성 · 길림성 · 흑룡강성) 총독인 서세창의 명을 받아
백두산과 압록강 · 두만강의 발원지를 조사했다.
조선과 청의 국경 분쟁에서 자신들에게 유리한 근거를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유건봉은 5명의 측량사와 16명의 군인 등 조사단을 이끌고 백두산 인근 지역을 둘러봤다.
최근 간행된 <백두산 국경연구>(여유당 출판사)에서
서길수 서경대 교수는 이들의 조사를 면밀하게 분석했다.
이때의 조사를 서 교수는 ‘청국의 백두산 국경 날조사건’이라고 이름붙였다.

유건봉을 비롯한 조사단은 1908년 3개월동안 백두산과 압록강 · 두만강을 샅샅이 조사했다.
목극등이 세운 백두산 정계비를 포함해 흙무더기(토퇴) · 돌무더기(석퇴),
두만강 원류, 송화강 상류, 압록강 원류 등을 답사했다.
조사 후 유건봉이 ‘장백산강강지략’이라는 보고서를 썼고,
장봉대가 ‘장백징존록’, 이정옥이 ‘장백설치겸감분봉길계선서’라는 보고서를 남겼다.
이들이 1908년에 조사한 보고서는 1987년 출판돼 중국 연구자들의 필수 텍스트가 됐다.
심지어 유건봉이라는 인물에 대한 선양 작업에 들어갔다는 것이 서 교수의 주장이다.

유건봉 일행은 조사 도중에 가장 큰 어려움에 봉착했다.
정계비 인근에서 발원하는 토문강이 두만강으로 가지 않는 것이었다.
1712년에 목극등은 두 물줄기가 만나는 것으로 잘못 알고 정계비를 세웠다.
두 물줄기 사이에는 장백산맥이라는 산줄기가 지나간다. 물줄기는 산줄기를 넘어갈 수 없다.
산줄기를 따라 흐를 뿐이다.
 
여기에서 유건봉 일행의 역사날조가 시작됐다.
유건봉은 백두산 정계비가 옮겨졌다고 주장한다.
정계비가 원래는 소백산 꼭대기에 세워져 있었으나 백두산 남쪽으로 옮겨졌다는 것이다.
이들은 또 정계비 대신 십자계비라는 비석을 만들어냈다.
10개의 비석이 국경선에 있었으나 한국 사람들이 없앴다고 이들은 주장했다.
 
 

주변 강과 산의 이름 마음대로 왜곡
 

비석과 강 이외에도 흙무더기와 돌무더기가 문제였다.
정계비에서 토문강으로 이어지는 토퇴와 석퇴가 그대로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정계비를 세우기 이전인 1674년에
청의 관리인 각라 오목눌이 등산로를 만들기 위해 토퇴와 석퇴를 만들었다고 주장했다.
청의 기록에서 오목눌은 백두산에 며칠 밖에 머무르지 않았다.
그 사이에 토퇴와 석퇴를 만들 수는 없었다.
더욱이 숙종실록에는 토퇴와 석퇴를 만든 과정이 상세하게 기록돼 있다.
 
이들 일행은 또 백두산 주변 강과 산의 이름을 마음대로 왜곡했으며,
압록강 상류인 원지를 청의 발상지라고 주장함으로써 이 일대를 차지하고자 했다.
그래서 자신들이 원하는 국경선으로 만들어 놓았다.

당시 한국의 상황은 어떠했을까.
무너져 내리고 있던 대한제국은 국경에 신경쓸 틈이 없었다.
오히려 일본은 만주 지역을 차지하기 위해 간도 문제를 연구해 청국과 영유권 논쟁을 벌였다.
1908년 청나라도 나름대로 준비를 했던 셈이다.

문제는 현재다.
지난해 중국에서는 유건봉의 장백산 답사 100주년을 기념하는 대대적인 사업을 펼쳤다.
중국이 역사를 왜곡하는 작업을 하고 있지만
우리는 그대로 있는 역사적 진실조차 제대로 조명하고 있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 윤호우 기자 hou@kyunghyang.com
- 2009 08/04   위클리경향 836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