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파엘로 - 아테네 학당(The School of Athens)
1510-11년. 프레스코, 하단부 772 cm. 로마, 바티칸 서명실(Stanza della Segnatura) 아테네 학당 벽화 상단을 보면 양쪽으로 두개의 신상(神像)이 보인다. 왼쪽이 음악과 조화의 신 아폴로, 그리고 오른쪽의 지혜와 전쟁의 신 아테네 여신상이다. 라파엘로는 두 신을 등장시켜 성스러운 아테네 학당을 수호하게 하고 있다. 라파엘로의 아테네 학당은 단테의 신곡 지옥편에서 영감을 얻어 만든 작품이라는 지적이 많다. 라파엘로는 작품 신곡에서 비기독교인이라는 이유로 지옥에서 고통받고 있던 훌륭한 고대 철학자들을 해방시켜 다시 아테네 학당의 모델로 등장시켰다는 주장이다.
교황 율리우스 2세가 철학(哲學), 신학(神學), 시학(詩學), 법학(法學) 등 4개의 주제로 장식된
그의 서명실을 꾸미기 위해 주문한 것으로,
이 작품의 주제는 철학 즉 '인간의 학문' 혹은 '이성의 논리'라는 인간의 정신세계이다.
당시 라파엘로는 25세의 나이로 대형 프레스코를 제작해 본 경험이 없는 무명의 예술가였고,
이 작품이 진행되는 동안 바로 옆방에서는 교황이 의뢰한 다른 거대한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었으니
바로 미켈란젤로의 시스틴 성당의 천정화였다.
이 작품의 원근법은 그 위치가 보는 사람의 머리 위쪽이라는 사실을 고려해서 이루어졌다.
중앙의 반원통형 보울드와 아치의 연속으로 이루어진 건축공간으로
화면을 엄격한 구성적 질서 속에 통일감을 부여하고 있다.
건물의 이미지가 베드로대성당의 구도를 연상시키지만
엄숙한 도리아 양식의 건축배경은 상상에 의한 것이다.
건축의 규모나 웅장한 느낌, 조화감 등은 인간적 가치보다 초인간적인 것을 표현하고자 했던
전성기 르네상스시대의 이상을 대변하고 있다.
라파엘로의 <아테네 학당>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은 르네상스 운동의 중심에 서 있던
신플라톤주의 인문학자들의 영향력이 컸기 때문이다. 라파엘로도 신플라톤주의를 추구했다.
한편 교회 건축물 안에 그린 <아테네 학당>에 등장하는 철학자들은 종교와 피부색을 초월하고 있으며,
이슬람 신학자 아베로즈는 그 중요한 인물 가운데 하나다.
라파엘로의 인문주의와 세계주의적인 철학을 엿볼 수 있다.
르네상스 시대의 최고 걸작으로 꼽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당시 유명인사들을 모델로 한 이 <아테네 학당>은 일종의 집단초상화로,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며 당대의 위인들을 향한 라파엘로의 존경심을 표현하고 있다.
<아테네 학당>은 초상화도, 인물화도 아니다.
당시 예술뿐만 아니라 인문학에도 상당한 지식의 소유자인 라파엘로가 그림을 통해
철학과 종교를 이야기하고자 했던 작품이다.
철학자들을 그림으로 끌어 들이는 예술적 작업과 또 그림을 철학으로 끌어들이는 인문학적 작업을
실천에 옮겨 불후의 명작을 남긴 사람이 바로 라파엘로이다.
그림 속에서 22명의 신원을 밝혔는데, 학자들 간에 거의 일치를 본 이름들이다.
그러나 항상 변수가 있어서 때에 따라서 37-38명의 이름들이 알려져 있기도 한데,
어쨌든 등장인물에 대해서는 현재까지도 여러 논란이 있다.
- 김형근 편집위원 [아테네 학당] 2008.07.08 ⓒ ScienceTimes
<아테네 학당>에 나오는 인물들의 초상
1. 제논 2. 에피쿠르스 3. 프레데릭 4. 아낙시만드로스 5. 아베로에즈 6. 피타고라스 7. 알렉산더 8. 크세노폰 9. 히파티야 10. 에스키네스 11. 파르메니데스 12. 소크라테스 13. 헤라클레토스 14. 플라톤 15. 아리스토텔레스 16. 디오게네스 17. 플로티누스 18. 유클리드 19. 조로아스터 20 프톨레미 R. 라파엘로 21. 소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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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파엘로의 아테네 학당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은 르네상스 운동의 중심에 서 있던 신플라톤주의 인문학자들의 영향력이 컸기 때문이다. 라파엘로도 신플라톤주의를 추구했다. |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
스승인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학당 현관을 나오면서 토론에 열중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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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플라톤(Platon, BC 428?~BC 347) : 여전히 고대 그리스를 대표하는 철학자다. 플라톤은 이미 2천400년 전에 성숙한 시민의 요건으로 교육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왼손에 그의 주저서인 '티마이오스(Timaeus)'를 들고 오른손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르키고 있다. 플라톤은 추상적, 논리적 철학으로서 정신적 이데아의 중요성을 역설하는 듯하다. 서양문화의 철학적 기초가 된 플라톤은 르네상스 시대 신플라톤주의를 추구한 인본주의 학자들에 의해 부활했다. 아테네 학당의 플라톤은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모델로 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라파엘로는 40년 이상 선배인 다빈치를 존경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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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384~322 B.C) : 겸손하게 손바닥으로 땅을 가리키면서 현실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왼손에는 '니코마코스 윤리학(Nicomachean Ethics)'을 들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의 이데아론과는 달리 현실세계를 중시한 질료론을 설파한 철학자이니 만큼, 손을 현실을 의미하는 앞으로 향함으로써 자연과 생물의 관찰을 중시하는 현상적, 경험적 철학의 중요성을 주장하는 듯하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모델은 미켈란젤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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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포(Sappho, Psappho라고도 함, ?~BC 610~580년경) : 하늘을 가리키는 플라톤의 손가락 바로 뒤에 얼굴만 내민 사람이 바로 여신(女神) 사포이다. 중심 인물인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뒤에 얼굴 모습도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작은 인물로, 전설 속의 인물로 알려진 미녀 사포는 수많은 신화를 제공하고 있는 고대 시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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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크라테스(Socrates, B.C. 470-399) : 의문을 갖고 끊임없이 분석해가는 것이 참된 진리에 도달한다는 그의 사상 핵심을 보여주는 동작을 취하고 있다. 위아래 초록색 옷을 입고 있는 모습이다.
- 알렉산더 대왕 (Alexander, B.C.356-323) : 마케도니아의 왕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자. 투구를 쓰고 오른손을 앞쪽 허리 부분에 얹은 알렉산더는 주변의 다른 인물과는 달리 소크라테스의 강연에 집중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 재미있는 사실은 소크라테스와 알렉산더의 시대 차이는 2백 년이 넘는다. 그러나 두 사람은 뭔가에 대해 진지하게 토론하고 있다. 알렉산더는 듣는 자세이고, 소크라테스는 가르치고 있는 포즈이다. 사실 알렉산더뿐만 아니라 여기에는 군복으로 무장한 알키비아데스(Alcibiades, BC 450경~BC 404)도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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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오게네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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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디오게네스(Diogenes, B.C. 412-323) : 견유학파(犬儒學派, The Cynics)의 철학자로 세속적 소유를 기피한 금욕의 실천을 강조하였다. 이 세상이 혼탁하여 누가 진정한 의인인지 몰라 대낮에도 등불을 들고 다녔으며, 알렉산더 대왕이 햇볕을 쬐며 졸고 있는 그를 찾아와 가르침을 원하자 햇빛을 가로막지 말고 한발 옆으로 물러날 것을 요구한 기인이다. 알렉산더 대왕 대관식에 초대받았으나 참석을 거부하였다.
<아테네 학당>을 내려오는 계단에 누더기 차림의 한 사람이 누워있다. '아테네의 개'로 유명한 디오게네스는 사람들이 서로 모여 토론하고 있는데 혼자 덜렁 누워 있다. 모든 것이 귀찮아하는 것 같으나 자세히 보면 책은 읽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디오게네스를 플라톤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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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논 |
- 제논(Zenon of Cyprus, 또는 Citium, 334~262 BC) : 스토아학파(Stoicism)의 창시자
유명한 철학자이자 수학자로 제논의 역설로 잘 알려진 엘레아의 제논(Zenon of Elea, 490~430 BC)과 구별해서 키프러스의 제논(Zenon of Cyprus, 또는 Citium)으로 불린다.
(이름 뒤에 오는 것은 지명으로 태어난 고향 이름을 나타낸다.)
쾌락주의의 에피쿠로스 바로 옆에, 그림에는 왼쪽 제일 구석에 보면
약간 깡마른 얼굴에 헐렁한 꼬깔 모자를 쓴 노인 한 분이 보인다.
다시 그 옆에는 정면을 주시하면서 퉁퉁하게 생긴 어린애가 보이는데
라파엘로가 <아테네 학당>을 그리면서 이 어린이처럼 생긴 사람을 아무런 의미 없이
등장시키지 않았을 것인데, 아무리 뒤져봐도 누구를 상징하는 인물인지 나와 있지 않다.
그 노인이 바로 유명한 금욕주의 스토아학파(Stoicism)의 창시자 제논.
사실 제논은 피부가 꺼칠했으며 대단히 갈비씨였다고 한다.
금욕주의를 상징하는 스토아철학의 창시자 제논은 원래 무역상인이었다.
그러나 폭풍우로 재산을 모두 잃게 되자 철학에 입문하게 된다.
“That which exercises reason is more excellent than that which does not exercise reason; there is nothing more excellent than the universe, therefore the universe exercises reason.
이성(理性)을 실천하는 것은 실천하지 않는 것보다 더 나은 일이다.
우주(로고스)보다 더 나은 것은 없다. 우주(로고스)는 이성을 실천하기 때문이다.”
– 키프러스의 제논
제논이 주장한 금욕주의와 자연과의 조화는 로마시대를 거쳐 기독교 신학과 윤리관의 기초가 됐다. 그리고 스토아 철학은 훗날 몽테뉴와 같은 계몽주의 철학자들의 도덕관으로도 작용했다.
에피쿠로스와 피타고라스, 아낙사고라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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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피쿠로스(Epicurus, 342~271 BC) : 살이 찐 체구에 포도잎 면류관을 쓰고 있다. 행복이란 정신적 쾌락을 추구한다는 ‘쾌락설’을 주장한 철학자로 금욕을 강조한 스콜라철학과 비교되고 있다. 쾌락주의를 주장한 에피쿠로스는 현재까지도 그의 주장이 개인적인 쾌락추구에만 머물고 있다는 오해받고 있는 대표적인 고대 그리스 지성인이다.
에피쿠로스는 철학적인 생활방식을 통해 두려움과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으며, 그러한 행복이 최고의 즐거움이라고 주장했다. “Luxurious food and drinks, in no way protect you from harm. Wealth beyond what is natural, is no more use than an overflowing container. Real value is not generated by theaters, and baths, perfumes or ointments, but by philosophy. 자연이 주는 것 이상의 부(富)는 넘쳐 흐르는 컨테이너와 같이 필요가 없다. 진정한 가치는 극장도 목욕탕도 아니며, 향수나 좋은 화장품도 아니다. 철학에 의해서다. –에피쿠로스-
"Death does not concern us, because as long as we exist, death is not here. And when it does come, we no longer exist. 죽음은 우리와 별 상관이 없다. 우리가 존재하는 한 죽음은 없는 것이다. 그리고 죽음이 왔을 때는 우리는 이미 살아 있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 에피쿠로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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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타고라스(Pythagoras, B.C. 582-496) : 아테네 학당에서 한참 후배인 아낙사고라스가 무엇인가를 쓴 칠판을 피타고라스(왼쪽)에게 보여주면서 말하고 있다. 아낙사고라스 옆에서 노트에다가 무언가 열심히 적고 있는 머리가 벗겨진 사람이 바로 그 유명한 피타고라스이다. 피타고라스는 아낙사고라스보다 무려 80년 먼저 태어났다. 산술과 음악에 능통했던 철학자로 기하학에 관한 그의 정리를 한쪽 다리를 괴고 ‘하모니의 잣대’로 설명하고 있다.
사실 종교적 신비주의자였던 피타고라스는 침묵을 강조했다. “말은 은이지만 침묵은 금이다”라는 유명한 격언을 만들어 낸 철학자라고 할 수 있다. “It is better wither to be silent, or to say things of more value than silence. Sooner throw a pearl at hazard than an idle or useless word; and do not say a little in many words, but a great deal in a few."
수(數)란 (사물의) 형상과 (인간의) 사고를 가늠하는 잣대이며 신과 악마의 명분이기도 하다.” 수학을 종교로까지 승화시킨 피타고라스의 사상을 알 수 있다.
피타고라스는 우리가 잘 아는 피타고라스의 정리(Pythagorean Theorem)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수를 수학적으로, 그리고 합리적인 관점에서 이론을 처음으로 만들어 낸 수학자라고 할 수 있다. 수비학(numerology)은 원래 라틴어로 누메루스(numerus)와 사고, 또는 표현을 뜻하는 로고스(logos)에서 나온 것으로 ‘숫자의 과학’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수는 일종의 마법적인 힘을 갖고 있어서 미래를 예언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피타고라스가 수비학을 기초하게 된 것도, 훗날 ‘최초의 순수 수학자(the first pure mathematician)’, '숫자의 아버지(the farther of numbers)'로 불리고, 그러면서도 불교에서 주장하는 윤회를 끝까지 믿었으며 기이한 생애를 산 것도 아마 인도에서 수학했던 영향이 많았던 것으로 학자들은 추측하고 있다. 피타고라스는 사실, 종교적인 신비주의자로 유명하며 훗날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사상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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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낙사고라스(Anaxagoras, 500~428BC) : 자연철학의 모체가 된 이오니아 학파의 대표적인 사상가다. 학문적 고집으로 종교적인 심판을 받은 최초의 사상가로 통한다.
히파티야 바로 밑부분을 보면 무릎을 꿇고 앉아 책에다 뭔가를 열심히 쓰고 있는 머리 벗겨진 늙은 사람이 유명한 피타고라스이고, 피타고라스에게 조그마한 칠판을 보여주는 머리가 긴 동안의 미소년이 바로 걸출한 철학자이자 수학자인 아낙사고라스이다.
아낙사고라스는 학문적 이유 때문에 종교적으로 수난을 받은 최초의 인물로 꼽힌다. 원적문제(圓積問題)에 처음으로 도전한 수학자였다.
파이(π)란 원의 둘레와 지름 사이의 관계를 표현한 수. 그러나 그 역사를 들추어 보면 훨씬 흥미롭고 의미 있는 수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파이(π)만큼 인간에게 신비와 공상과 오해, 그리고 호기심을 불러일으킨 수학 기호는 없다. 괴상하게 생겼고 오해를 불러일으켜 이 기호를 악마의 기호로 불렀다고 한다. 그래서 이 기호를 사용한 사람들을 수없이 죽이기도 했다.
이 원과 똑같은 크기의 정사각형을 그려낼 수 있을까? 너무나 간단해 보이는 이러한 ‘원을 정사각형으로 만들기(squaring the circle)’는 이제는 결국 실패라는 의미로 사용된다. 주어진 원과 같은 면적을 가진 정사각형을 자와 컴퍼스로 작도하는 이 원적문제(圓積問題)는 고대 그리스에서 시작한 기하학의 3대 문제의 하나로 1882년이 돼서야 비로소 작도가 불가능하다는 것이 입증됐다. 일부 학자들은 아테네의 소피스트 안티폰(Antiphon)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수학에 일가견이 있는 아주 과학적 사고를 하고 있었다는 것. 그래서 결국 그리스 신들을 부정했고 유배생활을 하게 된다. 그것은 가장 뛰어나고 진보적인 과학적 지식을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생각하게 한다. |
헤라클레이토스, 아낙시만드로스, 아베로즈 |
(왼쪽) 만물의 생성소멸의 변화를 로고스라고 주장한 자연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의 주장은 과학이론 성립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오른쪽) 17세기 네덜란드의 미술가 요하네스 모레엘스(Moreelse, 1603~1634)의 작품. 이 그림은 “눈물을 흘리는 철학자(the Weeping Philosopher)” 항상 따라다니는 별칭 “알 수 없는 철학자(the Obscure Philosopher)”헤라클레이토스를 묘사한 상장하는 그림으로 어떤 이유에서인지 눈물을 흘리고 있는 슬픈 모습이다. 또한 검은 옷을 입은채 어둠에 싸여 있다. 헤라클레이토스를 '우는 철학자'라고 부르는 반면 원자론의 데모트리토스는 '웃는 철학자'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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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헤라클레이토스(Heraclitus, B.C. 535-475) : 인간의 어리석음을 한탄한 우울한 철학자로 머리에 왼손을 괸 채 깊은 사색에 빠져있으며 그의 오른손은 무언가 적으려 포즈를 취하고 있다. 이 인물의 모델은 외모에 관심이 없는 젊은 미켈란젤로이다. 파르메니데스의 바로 오른편에 그야말로 철학자처럼 생긴 사람이 돌 의자 위에서 왼손으로 턱을 받치고 오른 손으로 종이에다 글을 열심히 써내려가고 있다. 그가 “Everything flows. 만물은 유전한다”라는 말로 유명한 헤라클레이토스(Heraclitus, BC 535~BC 475)이다.
“우리는 똑같은 강물 속에 두 번 들어갈 수 없다. 왜냐하면 다른 물이 그 위에 계속 흘러 들어오기 때문이다. 변화 이외에 영원한 것은 없다. 변화 이외에 남는 것은 하나도 없다.” 곧 변화가 로고스라는 것이고, 역으로 말해서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결코 로고스가 아니라는 주장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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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낙시만드로스(Anaximander, BC 610~BC 546) : 천문학을 체계적으로 수립해 진정한 의미에서 최초의 천문학자로 평가받는다. 최초의 진화론 주창자, 위대한 철학자. 천문학과 지리학에서도 많은 업적을 남겼다. 그는 지구를 중심으로 한 태양과 달, 그리고 별들로 이루어진 우주를 생각했다. 피타고라스 옆에 앉아 피타고라스의 노트를 열심히 베끼고 있는 사람이 아낙시만드로스이다. 연배로 따지자면 피타고라스보다 30년 정도 선배일 뿐만 아니라 탈레스 밑에서 공부를 같이 했지만 피타고라스는 아낙시만드로스의 문하생으로 제자나 다름없었다. 그런데도 제자인 피타고라스가 쓰고 있는 노트를 유심히 훔쳐보고 있는 듯한 모습이다.
아낙시만드로스의 물고기가 진화해서 인간이 됐다는 진화론은 20세기 수생유인원이론이 탄력을 받으면서 다시 부활했다. 생물의 역사를 하나의 과학으로 설명하고 있는 진화론의 기본은 인간과 여타 생물과 공통점이 있다는 데서 출발한다. 또한 과학적으로 많은 공통점이 발견되고 있다.
지리학과 지질학에 정통했던 그는 스파르타의 지진을 예견했으며 세계지도를 처음으로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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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아테네 학당'에 그려진 아베로즈의 모습은 피타고라스가 노트에 적고 있는 것을 고개를 내밀어 마치 남의 답안지를 훔쳐보면서 ‘컨닝’하는 듯한 모습으로 바라보고 있다. 오른쪽) 15세기 이탈리아 화가 안드레이 디 보나이우토가 그린 '성 토마스 아퀴나스'에 등장하는 아베로즈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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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베로즈(Aberroes) : 머리에 터번을 두른 모습으로 피부가 까맣다. 스페인 출신의 이슬람 신학자이며, 이슬람 이름은 이븐 루시디(Ibn Rushd)이다. 그리스의 최대 석학 피타고라스가 노트에 무엇인가 열심히 쓰고 있는데, 그 뒤에서 목을 길게 빼고는 피타고라스 노트를 훔쳐보는 사람이다.
그는 고대 그리스 사상을 이슬람 전통과 접목시키는데 노력했다. 아베로즈는 일생을 아리스토텔레스를 비롯해 그리스 철학자들의 저서를 번역하는데 바쳤다. 그가 번역하고 주석을 단 그리스 문헌들은 훗날 유럽의 철학과 과학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과학에서도 아주 많은 업적을 남겼다. 특히 그의 의학 저술서는 유럽의학 발전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초기 이슬람 신학의 대부(master)라는 명칭을 비롯, 이슬람 과학을 집대성한 학자이다. 단테보다 무려 100년 앞서 인본주의에 기초한 세속주의 사상의 선구자로 평가 받는다.
"Secularism is not an argument against Christianity, it is one independent of it. It does not question the pretensions of Christianity; it advances others. Secularism does not say there is no light or guidance elsewhere, but maintains that there is light and guidance in secular truth, whose conditions and sanctions exist independently, and act forever. Secular knowledge is manifestly that kind of knowledge which is founded in this life, which relates to the conduct of this life, conduces to the welfare of this life, and is capable of being tested by the experience of this life.” 이는 기독교의 주장에 의문을 갖는 것도 아니다. 세속주의는 다른 것을 발전시킬 수 있다. 세속주의는 다른 곳(기독교)이 빛이나 길잡이가 될 수 없다는 주장이 아니다. 세속적인 진실 속에서도 조건과 제재(규율)가 독립적으로 존재하고 영원히 활동하는 빛과 길잡이가 있다고 주장한다. 세속적인 지식은 현생(現生)에 자리 잡고 있는 지식과 같은 것으로 현생에 깊은 관계가 있으며, 현생의 복지와도 연결된다. 또한 현생의 경험을 통해 (좋다는) 평가를 충분히 받을 수가 있다.” 세속주의가 종교와는 별개로 인류복지에 크게 이바지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영국의 문학가 조지 홀리오크(George Holyoake)가 '세속주의(secularization)'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 -
“Averroes was great because of the tremendous stir he made in the minds of men for centuries. A history of Averroism would include up to the end of the sixteenth-century, a period of four centuries which would perhaps deserve as much as any other to be called the Middle Ages." 아베로즈 철학의 역사는 16세기 말까지 지속됐다고 할 수 있다. 무려 4세기에 걸쳐 영향력을 발휘했던 중세암흑기 만큼이나 커다란 힘을 발휘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 과학사의 아버지(the father of history of science)로 통하는 조지 사튼(George Sarton)은 아베로즈의 업적을 이렇게 높이 평가하였다.- |
유클리트, 프톨레마이오스, 조로아스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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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클리트(Euclid of Alexandria, B.C. 3세기) : 소크라테스의 제자로 컴파스로 원을 그리며 기하학의 공식을 설명하고 있다. 기하학의 아버지 유클리드가 설명하는 것을 듣고 있는 학생들의 태도가 진지하며 놀라워하는 모습이 잘 표현되어 있다. 당시의 예술가로 베드로 성당을 설계한 브라만테(Bramante, 1444~1514)를 모델로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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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롤레마이오스(Cladius Ptolemaeos, 영어명은 톨레미(Ptolemy), 85?∼165?) : 지구가 우주 의 중심이라고 생각한 천문학자이자 지리학자로 손에 지구의를 들고 뒷모습을 보이고 있다. |
- 라파엘로 자화상 : 오른편의 검은 베레모를 쓰고 빤히 쳐다보는 사람이 라파엘로 자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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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로아스터(Zoroaster, BC 630?~BC 553?) : 페르시아의 예언자로 천구의를 들고 있다. 라파엘로는 이교도의 수장이라고 할 수 있는 배화교의 창시자 조로아스터를 주요인물로 흰옷을 입은 모습으로 등장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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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파타아, 파르메니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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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테네 학당> 그림 하단 약간 왼쪽을 보면 책 같은 것을 펴 들고 상체를 약간 비틀고 있는 남자는 “존재하는 것만 있으며 존재하지 않는 것은 없다”라는 말을 남긴 파르메니데스(Parmenides, B.C.515~?)이다.
: 파르메니데스는 다신론(多神論)의 그리스 문화에서 일신론(一神論)의 개념을 주장했다. 오늘날 기독교의 철학적 기반을 제공했다. 그는 존재론, 관념론 등 형이상학의 기초를 제공한 철학자로 평가받는데, 파르메니아의 존재론은 기독교는 물론 서양의 합리주의와 논리학의 기초가 되었으며, 불변(不變)만이 진리라고 주장한 파르메니데스의 철학은 성서의 진수라고 할 수 있는 요한복음의 사상적 기초가 됐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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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히파티아(Hypatia, 355-415) : 종교적 도그마로 인해 희생양이 된 최초의 여성 수학자이며, 대표적 천재과학자이다. 파르메니데스 옆에 하얀 옷을 입은 채 정면을 빤히 쳐다보는 여성이 여성 수학자 히파티아이다.
당시 미인의 기준이 그래서인지 풍만한 느낌을 주며, 횐 옷은 역시 순결을 상징한다. 기록에 의하면, 그리스 최초의 여성 수학자이자 최초의 과학자로 재색을 겸비한 그녀는 학문에만 전념하였고, 평생 독신으로 학문에만 몰두하다가 기독교도들의 습격으로 몸이 갈기갈기 찢겨 죽은 비운의 여성이었다. 그렇다고 혼자 명상을 하거나 사색에 빠져있는 것도 아니다. 사람들 속에 묻혀 있지만 혼자 외로운 모습을 하고 있고, 눈을 크게 부릅뜨고 정면을 바라보고 있다. <아테네 학당>에서 정면을 응시하는 인물은 오직 히파티아 뿐이다. 한편, 유럽의 페미니즘의 발단은 히파티아에 대한 남성들의 흠모와 사랑에서 비롯됐다는 지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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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페미니즘의 시작은 히파티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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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파티아가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18세기 이후 영국과 프랑스를 중심으로 유럽에 시와 소설 같은 문학열풍이 불면서입니다. 히파티아를 소재로 한 작품들이 인기를 끌었습니다. 글이나 쓴답시고 우쭐대는 신사의 필독서였습니다. 유럽의 신사들에 의해 부활하기 시작했습니다. 히파티아를 모르고서는 신사라고 할 수 없었습니다. 총명한 재능과 미모, 그야말로 재색을 겸비한 여성이었기 때문에 더욱 그랬습니다. 남성들이 히파티아를 동경하는 것만큼 여성들에게도 히파티아는 역시 중요한 인물이었습니다. 여성을 단순히 남성의 일부가 아니라 남자의 학문적 능력과 필적할 수 있는 여성이 바로 히파티아였다는 것을 남성들이 인식하기 시작한 거죠. 남성들에게는 신비의 대상이었고 우상이었습니다. 히파티아를 모르고서는 상류계층의 점잖은 신사가 될 수 없었습니다. 라파엘로에게 사랑했던 여인이 있었습니다. 라파엘로의 작품 가운데 ‘젊은 여인의 초상화(The Portrait of a Young Woman)’로 알려진 '라 포르나리나(La Fornarina)' 라는 그림이 있습니다.
'라 포르나리나' 모델과 다소 흡사해 이 작품은 가슴을 거의 드러낸 반라의 젊은 여인이 요염한 자세로 앉아 있는 모습을 그린 그림입니다.
이 작품은 한눈에 욕정을 일으키는 파격적인 작품이라는 걸 알 수가 있습니다. 한번 이 그림과 히파티아를 비교해보시죠. 좀 닮은 곳이 있나요?
또 다른 그림이 있습니다. ‘라 돈나 벨라타(La Donna Velata)’는 아주 아름답고 정숙한 여인의 모습을 그린 작품입니다. 세 여인의 얼굴에 어떤 공통점이 있다는 생각이 드나요? 그러나 이것은 확실합니다. 다시 말해서 라파엘로의 그림 가운데는 앞가슴이 꽤나 많이 패어 있고 또한 다소 자극적인 작품들이 많다는 겁니다. 강조하고 싶은 것은 라파엘로는 가슴을 드러낸 다소 관능적인 여성들을 모델로 인본주의라는 자신의 철학을 화폭에 담고 싶어했던 화가입니다. 여성을 소재로 가장 많은 그림을 그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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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 : 강수정/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관(1997년 '세계일보명작산책' 원고 중)
- 2009.07.28. 네이버캐스트 [오늘의 미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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