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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끼며(시,서,화)

라파엘로 - 아테네 학당(The School of Athens)

Gijuzzang Dream 2009. 6. 22. 07:34

 

 

 

 

 

 

 

 라파엘로 - 아테네 학당(The School of Athens)

  

 

 

  

1510-11년. 프레스코, 하단부 772 cm. 로마, 바티칸 서명실(Stanza della Segnatura) 

 

아테네 학당 벽화 상단을 보면 양쪽으로 두개의 신상(神像)이 보인다.

왼쪽이 음악과 조화의 신 아폴로, 그리고 오른쪽의 지혜와 전쟁의 신 아테네 여신상이다.

라파엘로는 두 신을 등장시켜 성스러운 아테네 학당을 수호하게 하고 있다. 

 

라파엘로의 아테네 학당은 단테의 신곡 지옥편에서 영감을 얻어 만든 작품이라는 지적이 많다.

라파엘로는 작품 신곡에서 비기독교인이라는 이유로 지옥에서 고통받고 있던

훌륭한 고대 철학자들을 해방시켜 다시 아테네 학당의 모델로 등장시켰다는 주장이다. 

 

 

 

 

 

 

 

 

 

 

 

 

 

 

 

 

 

 

 

 

 

 

 

 

 

 

 

 

 

 

 

 

 

 

 

 

 

 

 

 

 

                                            

 

교황 율리우스 2세가 철학(哲學), 신학(神學), 시학(詩學), 법학(法學) 등 4개의 주제로 장식된

그의 서명실을 꾸미기 위해 주문한 것으로,

이 작품의 주제는 철학 즉 '인간의 학문' 혹은 '이성의 논리'라는 인간의 정신세계이다.

 

당시 라파엘로는 25세의 나이로 대형 프레스코를 제작해 본 경험이 없는 무명의 예술가였고,

이 작품이 진행되는 동안 바로 옆방에서는 교황이 의뢰한 다른 거대한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었으니

바로 미켈란젤로의 시스틴 성당의 천정화였다.

 

이 작품의 원근법은 그 위치가 보는 사람의 머리 위쪽이라는 사실을 고려해서 이루어졌다.

중앙의 반원통형 보울드와 아치의 연속으로 이루어진 건축공간으로

화면을 엄격한 구성적 질서 속에 통일감을 부여하고 있다.

건물의 이미지가 베드로대성당의 구도를 연상시키지만

엄숙한 도리아 양식의 건축배경은 상상에 의한 것이다.

건축의 규모나 웅장한 느낌, 조화감 등은 인간적 가치보다 초인간적인 것을 표현하고자 했던

전성기 르네상스시대의 이상을 대변하고 있다.

 

라파엘로의 <아테네 학당>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은 르네상스 운동의 중심에 서 있던

신플라톤주의 인문학자들의 영향력이 컸기 때문이다. 라파엘로도 신플라톤주의를 추구했다.

한편 교회 건축물 안에 그린 <아테네 학당>에 등장하는 철학자들은 종교와 피부색을 초월하고 있으며,

이슬람 신학자 아베로즈는 그 중요한 인물 가운데 하나다.

라파엘로의 인문주의와 세계주의적인 철학을 엿볼 수 있다.

르네상스 시대의 최고 걸작으로 꼽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당시 유명인사들을 모델로 한 이 <아테네 학당>은 일종의 집단초상화로,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며 당대의 위인들을 향한 라파엘로의 존경심을 표현하고 있다.

 

<아테네 학당>은 초상화도, 인물화도 아니다.

당시 예술뿐만 아니라 인문학에도 상당한 지식의 소유자인 라파엘로가 그림을 통해

철학과 종교를 이야기하고자 했던 작품이다.
철학자들을 그림으로 끌어 들이는 예술적 작업과 
또 그림을 철학으로 끌어들이는 인문학적 작업을

실천에 옮겨 불후의 명작을 남긴 사람이 바로 라파엘로이다.

그림 속에서 22명의 신원을 밝혔는데, 학자들 간에 거의 일치를 본 이름들이다.

그러나 항상 변수가 있어서 때에 따라서 37-38명의 이름들이 알려져 있기도 한데,

어쨌든 등장인물에 대해서는 현재까지도 여러 논란이 있다.

김형근 편집위원 [아테네 학당] 2008.07.08 ⓒ ScienceTimes

 

 

 


 

 

<아테네 학당>에 나오는 인물들의 초상

 

1. 제논 2. 에피쿠르스 3. 프레데릭 4. 아낙시만드로스 5. 아베로에즈 6. 피타고라스 7. 알렉산더 8. 크세노폰 9. 히파티야 10. 에스키네스 11. 파르메니데스 12. 소크라테스 13. 헤라클레토스 14. 플라톤

15. 아리스토텔레스 16. 디오게네스 17. 플로티누스 18. 유클리드

19. 조로아스터 20 프톨레미 R. 라파엘로 21. 소도마 

 

  

라파엘로의 아테네 학당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은

르네상스 운동의 중심에 서 있던 신플라톤주의 인문학자들의 영향력이

컸기 때문이다. 라파엘로도 신플라톤주의를 추구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스승인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학당 현관을 나오면서

토론에 열중하고 있다.

 

 

 

    

 

 

- 플라톤(Platon, BC 428?~BC 347)  :  여전히 고대 그리스를 대표하는 철학자다.

플라톤은 이미 2천400년 전에 성숙한 시민의 요건으로 교육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왼손에 그의 주저서인 '티마이오스(Timaeus)'를 들고 오른손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르키고 있다.

플라톤은 추상적, 논리적 철학으로서 정신적 이데아의 중요성을 역설하는 듯하다.

서양문화의 철학적 기초가 된 플라톤은 르네상스 시대 신플라톤주의를 추구한 인본주의 학자들에 의해 부활했다. 아테네 학당의 플라톤은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모델로 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라파엘로는 40년 이상 선배인 다빈치를 존경했다.

 

 

 

-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384~322 B.C)

: 겸손하게 손바닥으로 땅을 가리키면서 현실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왼손에는 '니코마코스 윤리학(Nicomachean Ethics)'을 들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의 이데아론과는 달리 현실세계를 중시한 질료론을 설파한 철학자이니 만큼,

손을 현실을 의미하는 앞으로 향함으로써 자연과 생물의 관찰을 중시하는 현상적, 경험적 철학의 중요성을 주장하는 듯하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모델은 미켈란젤로이다.

 

  

 

 

 

   

 

- 사포(Sappho, Psappho라고도 함, ?~BC 610~580년경) : 하늘을 가리키는 플라톤의

손가락 바로 뒤에 얼굴만 내민 사람이 바로 여신(女神) 사포이다.

중심 인물인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뒤에 얼굴 모습도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작은 인물로,

전설 속의 인물로 알려진 미녀 사포는 수많은 신화를 제공하고 있는 고대 시인이다.

 

 

 

 

 

 

 

  

 

- 소크라테스(Socrates, B.C. 470-399) : 의문을 갖고 끊임없이 분석해가는 것이

참된 진리에 도달한다는 그의 사상 핵심을 보여주는 동작을 취하고 있다.

위아래 초록색 옷을 입고 있는 모습이다.

 

 

- 알렉산더 대왕 (Alexander, B.C.356-323) : 마케도니아의 왕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자.

투구를 쓰고 오른손을 앞쪽 허리 부분에 얹은 알렉산더는 주변의 다른 인물과는 달리

소크라테스의 강연에 집중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 재미있는 사실은 소크라테스와 알렉산더의 시대 차이는 2백 년이 넘는다.

그러나 두 사람은 뭔가에 대해 진지하게 토론하고 있다.

알렉산더는 듣는 자세이고, 소크라테스는 가르치고 있는 포즈이다.

사실 알렉산더뿐만 아니라

여기에는 군복으로 무장한 알키비아데스(Alcibiades, BC 450경~BC 404)도 등장한다.

 

 

 

 

 

 


디오게네스

 

 

 

 

 

 - 디오게네스(Diogenes, B.C. 412-323) : 견유학파(犬儒學派, The Cynics)의 철학자로

세속적 소유를 기피한 금욕의 실천을 강조하였다.

이 세상이 혼탁하여 누가 진정한 의인인지 몰라 대낮에도 등불을 들고 다녔으며,

알렉산더 대왕이 햇볕을 쬐며 졸고 있는 그를 찾아와 가르침을 원하자 햇빛을 가로막지 말고

한발 옆으로 물러날 것을 요구한 기인이다.

알렉산더 대왕 대관식에 초대받았으나 참석을 거부하였다.

 

<아테네 학당>을 내려오는 계단에 누더기 차림의 한 사람이 누워있다.

'아테네의 개'로 유명한 디오게네스는 사람들이 서로 모여 토론하고 있는데 혼자 덜렁 누워 있다.

모든 것이 귀찮아하는 것 같으나 자세히 보면 책은 읽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디오게네스를 플라톤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제논

 

 

- 제논(Zenon of Cyprus, 또는 Citium, 334~262 BC) : 스토아학파(Stoicism)의 창시자

유명한 철학자이자 수학자로 제논의 역설로 잘 알려진 엘레아의 제논(Zenon of Elea, 490~430 BC)과 구별해서 키프러스의 제논(Zenon of Cyprus, 또는 Citium)으로 불린다.

(이름 뒤에 오는 것은 지명으로 태어난 고향 이름을 나타낸다.)

 

쾌락주의의 에피쿠로스 바로 옆에, 그림에는 왼쪽 제일 구석에 보면

약간 깡마른 얼굴에 헐렁한 꼬깔 모자를 쓴 노인 한 분이 보인다.

다시 그 옆에는 정면을 주시하면서 퉁퉁하게 생긴 어린애가 보이는데

라파엘로가 <아테네 학당>을 그리면서 이 어린이처럼 생긴 사람을 아무런 의미 없이

등장시키지 않았을 것인데, 아무리 뒤져봐도 누구를 상징하는 인물인지 나와 있지 않다.

그 노인이 바로 유명한 금욕주의 스토아학파(Stoicism)의 창시자 제논.

사실 제논은 피부가 꺼칠했으며 대단히 갈비씨였다고 한다.


금욕주의를 상징하는 스토아철학의 창시자 제논은 원래 무역상인이었다.

그러나 폭풍우로 재산을 모두 잃게 되자 철학에 입문하게 된다. 

 

 “That which exercises reason is more excellent than that which does not exercise reason; there is nothing more excellent than the universe, therefore the universe exercises reason.
이성(理性)을 실천하는 것은 실천하지 않는 것보다 더 나은 일이다.

우주(로고스)보다 더 나은 것은 없다. 우주(로고스)는 이성을 실천하기 때문이다.”

– 키프러스의 제논

 

제논이 주장한 금욕주의와 자연과의 조화는 로마시대를 거쳐 기독교 신학과 윤리관의 기초가 됐다. 그리고 스토아 철학은 훗날 몽테뉴와 같은 계몽주의 철학자들의 도덕관으로도 작용했다. 

 

 

 

 

에피쿠로스와 피타고라스, 아낙사고라스

 

 

 

  

 - 에피쿠로스(Epicurus, 342~271 BC) : 살이 찐 체구에 포도잎 면류관을 쓰고 있다.

행복이란 정신적 쾌락을 추구한다는 ‘쾌락설’을 주장한 철학자로

금욕을 강조한 스콜라철학과 비교되고 있다. 

쾌락주의를 주장한 에피쿠로스는 현재까지도 그의 주장이 개인적인 쾌락추구에만 머물고 있다는 오해받고 있는 대표적인 고대 그리스 지성인이다.

 

에피쿠로스는 철학적인 생활방식을 통해 두려움과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으며,

그러한 행복이 최고의 즐거움이라고 주장했다.

“Luxurious food and drinks, in no way protect you from harm. Wealth beyond what is natural, is no more use than an overflowing container. Real value is not generated by theaters, and baths, perfumes or ointments, but by philosophy.
비싼 음식과 술은 결코 해로움(불행)으로부터 당신을 보호해 주지 않는다.

자연이 주는 것 이상의 부(富)는 넘쳐 흐르는 컨테이너와 같이 필요가 없다.

진정한 가치는 극장도 목욕탕도 아니며, 향수나 좋은 화장품도 아니다. 철학에 의해서다. –에피쿠로스-

 

"Death does not concern us, because as long as we exist, death is not here.

And when it does come, we no longer exist.

죽음은 우리와 별 상관이 없다. 우리가 존재하는 한 죽음은 없는 것이다.

그리고 죽음이 왔을 때는 우리는 이미 살아 있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 에피쿠로스 -

 

 

 - 피타고라스(Pythagoras, B.C. 582-496) : 아테네 학당에서 한참 후배인 아낙사고라스가

무엇인가를 쓴 칠판을 피타고라스(왼쪽)에게 보여주면서 말하고 있다.

아낙사고라스 옆에서 노트에다가 무언가 열심히 적고 있는 머리가 벗겨진 사람이

바로 그 유명한 피타고라스이다. 피타고라스는 아낙사고라스보다 무려 80년 먼저 태어났다.

산술과 음악에 능통했던 철학자로 기하학에 관한 그의 정리를 한쪽 다리를 괴고

‘하모니의 잣대’로 설명하고 있다.

 

피타고라스는 자연과 인간의 비밀을 풀 수 있는 것은 숫자라고 주장했다. 

사실 종교적 신비주의자였던 피타고라스는 침묵을 강조했다.

“말은 은이지만 침묵은 금이다”라는 유명한 격언을 만들어 낸 철학자라고 할 수 있다.

“It is better wither to be silent, or to say things of more value than silence. Sooner throw a pearl at hazard than an idle or useless word; and do not say a little in many words, but a great deal in a few."
"볼품은 없지만 침묵하는 편이 낫다. 아니면 침묵보다 더 나은 것을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 게으르고 헛된 말을 하느니 진주를 바닷속(위험)으로 내던져라. 그리고 많은 말로 조그마한 것을 이야기하려 하지 말고 조그마한 말로 많은 것을 이야기하려고 하라.”


피타고라스는 “말이라는 것은 나무의 잎과 같다. 나뭇잎이 너무 무성할 때는 오히려 열매가 적은 법이다. 우리가 얻고자 하는 것은 잎이 아니라 열매이다. 우리는 침묵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침묵보다 나은 말을 하여야 한다.”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Number is the ruler of forms and ideas and the cause of gods and demons.

수(數)란 (사물의) 형상과 (인간의) 사고를 가늠하는 잣대이며 신과 악마의 명분이기도 하다.”

수학을 종교로까지 승화시킨 피타고라스의 사상을 알 수 있다.

 

피타고라스는 우리가 잘 아는 피타고라스의 정리(Pythagorean Theorem)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수를 수학적으로, 그리고 합리적인 관점에서 이론을 처음으로 만들어 낸 수학자라고 할 수 있다.
학자들은 그를 수비학(數秘學)의 창시자라고도 부른다. 말 그대로 수에 비밀이 담겨 있다는 이야기다.

수비학(numerology)은 원래 라틴어로 누메루스(numerus)와 사고,

또는 표현을 뜻하는 로고스(logos)에서 나온 것으로 ‘숫자의 과학’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수는 일종의 마법적인 힘을 갖고 있어서 미래를 예언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피타고라스가 수비학을 기초하게 된 것도, 

훗날 ‘최초의 순수 수학자(the first pure mathematician)’, '숫자의 아버지(the farther of numbers)'로

불리고, 그러면서도 불교에서 주장하는 윤회를 끝까지 믿었으며 기이한 생애를 산 것도

아마 인도에서 수학했던 영향이 많았던 것으로 학자들은 추측하고 있다.

피타고라스는 사실, 종교적인 신비주의자로 유명하며

훗날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사상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 아낙사고라스(Anaxagoras, 500~428BC)

   : 자연철학의 모체가 된 이오니아 학파의 대표적인 사상가다. 

   학문적 고집으로 종교적인 심판을 받은 최초의 사상가로 통한다.

     

    히파티야 바로 밑부분을 보면 무릎을 꿇고 앉아 책에다 뭔가를 열심히 쓰고 있는

   머리 벗겨진 늙은 사람이 유명한 피타고라스이고, 

   피타고라스에게 조그마한 칠판을 보여주는 머리가 긴 동안의 미소년이

   바로 걸출한 철학자이자 수학자인 아낙사고라스이다.

 

아낙사고라스는 학문적 이유 때문에 종교적으로 수난을 받은 최초의 인물로 꼽힌다.

원적문제(圓積問題)에 처음으로 도전한 수학자였다.

 

원과 같은 면적을 정사각형으로 만드려는 노력을 처음 시도한 사람이 아낙사고라스로 알려져 있다. 

파이(π)란 원의 둘레와 지름 사이의 관계를 표현한 수.

 그러나 그 역사를 들추어 보면 훨씬 흥미롭고 의미 있는 수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파이(π)만큼 인간에게 신비와 공상과 오해, 그리고 호기심을 불러일으킨 수학 기호는 없다.
로마가 쇠퇴하고 기독교가 기승을 부리기 시작할 때 이 파이(π)는

괴상하게 생겼고 오해를 불러일으켜 이 기호를 악마의 기호로 불렀다고 한다. 그래서 이 기호를 사용한 사람들을 수없이 죽이기도 했다.


예를 들어 반지름이 3㎝인 원이 있는데,

이 원과 똑같은 크기의 정사각형을 그려낼 수 있을까?

너무나 간단해 보이는 이러한 ‘원을 정사각형으로 만들기(squaring the circle)’는 이제는 결국 실패라는 의미로 사용된다.

주어진 원과 같은 면적을 가진 정사각형을 자와 컴퍼스로 작도하는

이 원적문제(圓積問題)는

고대 그리스에서 시작한 기하학의 3대 문제의 하나로

1882년이 돼서야 비로소 작도가 불가능하다는 것이 입증됐다.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원적문제를 해결하려고 한 첫 번째 사람이 바로 아낙사고라스로 알려져 있다.

일부 학자들은 아테네의 소피스트 안티폰(Antiphon)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것은 이오니아 출신의 아낙사고라스가 당시 그리스 철학자들 가운데서도

수학에 일가견이 있는 아주 과학적 사고를 하고 있었다는 것.

그래서 결국 그리스 신들을 부정했고 유배생활을 하게 된다.

그것은 가장 뛰어나고 진보적인 과학적 지식을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생각하게 한다.

 


 

 

 

헤라클레이토스, 아낙시만드로스, 아베로즈

 

 

 

 

  

(왼쪽) 만물의 생성소멸의 변화를 로고스라고 주장한 자연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의 주장은

과학이론 성립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오른쪽) 17세기 네덜란드의 미술가 요하네스 모레엘스(Moreelse, 1603~1634)의 작품.

이 그림은 “눈물을 흘리는 철학자(the Weeping Philosopher)”  항상 따라다니는 별칭

“알 수 없는 철학자(the Obscure Philosopher)”헤라클레이토스를 묘사한 상장하는 그림으로
그는 세상을 의미하는 지구의를 바라다 보며 두 손을 굳게 감싸고 있고

어떤 이유에서인지 눈물을 흘리고 있는 슬픈 모습이다. 또한 검은 옷을 입은채 어둠에 싸여 있다.

헤라클레이토스를 '우는 철학자'라고 부르는 반면 원자론의 데모트리토스는 '웃는 철학자'라고 부른다. 

 

헤라클레이토스 그림에는 세상을 상징하는 지구의가 자주 등장한다. 그는 생성소멸을 되풀이 하는 세상의 이치가 바로 로고스라고 주장했다. 17세기 네덜란드 바로크 미술의 거장 헨드릭 테르 브뤼겐(Hendrick ter Brugghen, 1588~1629)의 작품이다. 

 - 헤라클레이토스(Heraclitus, B.C. 535-475) : 인간의 어리석음을 한탄한 우울한 철학자로

머리에 왼손을 괸 채 깊은 사색에 빠져있으며 그의 오른손은 무언가 적으려 포즈를 취하고 있다.

이 인물의 모델은 외모에 관심이 없는 젊은 미켈란젤로이다.

파르메니데스의 바로 오른편에 그야말로 철학자처럼 생긴 사람이 돌 의자 위에서 왼손으로 턱을 받치고 오른 손으로 종이에다 글을 열심히 써내려가고 있다. 그가  “Everything flows. 만물은 유전한다”라는 말로 유명한 헤라클레이토스(Heraclitus, BC 535~BC 475)이다.

 

“우리는 똑같은 강물 속에 두 번 들어갈 수 없다.

왜냐하면 다른 물이 그 위에 계속 흘러 들어오기 때문이다.

변화 이외에 영원한 것은 없다. 변화 이외에 남는 것은 하나도 없다.”
이처럼 우리가 사는 세상은 계속해서 변화하고 있으며, 따라서 변화가 우주의 중심이라고 주장한다.

곧 변화가 로고스라는 것이고,

역으로 말해서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결코 로고스가 아니라는 주장도 된다.

 

 

  

 - 아낙시만드로스(Anaximander, BC 610~BC 546)

천문학을 체계적으로 수립해 진정한 의미에서 최초의 천문학자로 평가받는다.

 최초의 진화론 주창자, 위대한 철학자. 천문학과 지리학에서도 많은 업적을 남겼다.

 그는 지구를 중심으로 한 태양과 달, 그리고 별들로 이루어진 우주를 생각했다. 

 피타고라스 옆에 앉아 피타고라스의 노트를 열심히 베끼고 있는 사람이 아낙시만드로스이다.

연배로 따지자면 피타고라스보다 30년 정도 선배일 뿐만 아니라 탈레스 밑에서 공부를 같이 했지만

피타고라스는 아낙시만드로스의 문하생으로 제자나 다름없었다.

그런데도 제자인 피타고라스가 쓰고 있는 노트를 유심히 훔쳐보고 있는 듯한 모습이다.

  

아낙시만드로스의 물고기가 진화해서 인간이 됐다는 진화론은

20세기 수생유인원이론이 탄력을 받으면서 다시 부활했다.

생물의 역사를 하나의 과학으로 설명하고 있는 진화론의 기본은

인간과 여타 생물과 공통점이 있다는 데서 출발한다. 또한 과학적으로 많은 공통점이 발견되고 있다. 

 

아낙시만드로스는 수학과 기하학을 적용해 천체지도를 처음으로 그렸다. 그는 지구를 중심으로 별들과, 달, 그리고 태양이 움직인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지구는 무한위에 떠 있는 원기둥이라고 생각했다.  지구는 아무것도 지탱하지 않는 무한한 공간의 중심에 떠 있고 그 주위에 별들과 달, 그리고 태양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지구는 “중심에 있기 때문에 이동하지 않고 항상 같은 위치에 있다(in the same place because of its indifference)”는 생각을 가졌다.

 

지리학과 지질학에 정통했던 그는

스파르타의 지진을 예견했으며 세계지도를 처음으로 그렸다.

 

 

    

왼쪽) '아테네 학당'에 그려진 아베로즈의 모습은 피타고라스가 노트에 적고 있는 것을 

        고개를 내밀어 마치 남의 답안지를 훔쳐보면서 ‘컨닝’하는 듯한 모습으로 바라보고 있다.

오른쪽) 15세기 이탈리아 화가 안드레이 디 보나이우토가 그린 '성 토마스 아퀴나스'에 등장하는

           아베로즈의 모습 

 

 - 아베로즈(Aberroes) : 머리에 터번을 두른 모습으로 피부가 까맣다.

스페인 출신의 이슬람 신학자이며, 이슬람 이름은 이븐 루시디(Ibn Rushd)이다.

그리스의 최대 석학 피타고라스가 노트에 무엇인가 열심히 쓰고 있는데, 그 뒤에서 목을 길게

빼고는 피타고라스 노트를 훔쳐보는 사람이다.

 

그는 고대 그리스 사상을 이슬람 전통과 접목시키는데 노력했다.

아베로즈는 일생을 아리스토텔레스를 비롯해 그리스 철학자들의 저서를 번역하는데 바쳤다. 

그가 번역하고 주석을 단 그리스 문헌들은 훗날 유럽의 철학과 과학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과학에서도 아주 많은 업적을 남겼다. 특히 그의 의학 저술서는 유럽의학 발전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초기 이슬람 신학의 대부(master)라는 명칭을 비롯, 이슬람 과학을 집대성한 학자이다.

단테보다 무려 100년 앞서 인본주의에 기초한 세속주의 사상의 선구자로 평가 받는다. 
세계 역사는 아베로즈를 ‘세속주의 사상의 선구자(founding father of secular thought)’라고 부른다.

 

"Secularism is not an argument against Christianity, it is one independent of it. It does not question the pretensions of Christianity; it advances others. Secularism does not say there is no light or guidance elsewhere, but maintains that there is light and guidance in secular truth, whose conditions and sanctions exist independently, and act forever. Secular knowledge is manifestly that kind of knowledge which is founded in this life, which relates to the conduct of this life, conduces to the welfare of this life, and is capable of being tested by the experience of this life.”
“세속주의란 기독교를 부정하는 주장이 아니다. 기독교(교리)와는 독립적인 것이다.

이는 기독교의 주장에 의문을 갖는 것도 아니다. 세속주의는 다른 것을 발전시킬 수 있다.

세속주의는 다른 곳(기독교)이 빛이나 길잡이가 될 수 없다는 주장이 아니다.

세속적인 진실 속에서도 조건과 제재(규율)가 독립적으로 존재하고

영원히 활동하는 빛과 길잡이가 있다고 주장한다.

세속적인 지식은 현생(現生)에 자리 잡고 있는 지식과 같은 것으로 현생에 깊은 관계가 있으며,

현생의 복지와도 연결된다. 또한 현생의 경험을 통해 (좋다는) 평가를 충분히 받을 수가 있다.”
- 1846년 사회적 질서를 발전시키는 방법으로 사회를 종교로부터 분리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세속주의가 종교와는 별개로 인류복지에 크게 이바지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영국의 문학가 조지 홀리오크(George Holyoake)가 '세속주의(secularization)'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 -

 

“Averroes was great because of the tremendous stir he made in the minds of men for centuries. A history of Averroism would include up to the end of the sixteenth-century, a period of four centuries which would perhaps deserve as much as any other to be called the Middle Ages."
"아베로즈는 위대하다. 왜냐하면 수세기 동안 인간의 마음 속에 거대한 감동을 심어 주었기 때문이다.

아베로즈 철학의 역사는 16세기 말까지 지속됐다고 할 수 있다.

무려 4세기에 걸쳐 영향력을 발휘했던 중세암흑기 만큼이나 

커다란 힘을 발휘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 과학사의 아버지(the father of history of science)로 통하는 조지 사튼(George Sarton)은

아베로즈의 업적을 이렇게 높이 평가하였다.-

 

 

 

  

 

유클리트, 프톨레마이오스, 조로아스터

 

 

 

 

 

- 유클리트(Euclid of Alexandria, B.C. 3세기) : 소크라테스의 제자로 컴파스로 원을 그리며

기하학의 공식을 설명하고 있다. 기하학의 아버지 유클리드가 설명하는 것을 듣고 있는

학생들의 태도가 진지하며 놀라워하는 모습이 잘 표현되어 있다.

당시의 예술가로 베드로 성당을 설계한 브라만테(Bramante, 1444~1514) 모델로 하였다.

 

 

 

 - 프롤레마이오스(Cladius Ptolemaeos영어명은 톨레미(Ptolemy), 85?∼165?) 지구가 우주

   의 중심이라고 생각한 천문학자이자 지리학자로 손에 지구의를 들고 뒷모습을 보이고 있다.

 

- 라파엘로 자화상 : 오른편의 검은 베레모를 쓰고 빤히 쳐다보는 사람이 라파엘로 자신이다.

 

 

 

 - 조로아스터(Zoroaster, BC 630?~BC 553?) : 페르시아의 예언자로 천구의를 들고 있다.

    라파엘로는 이교도의 수장이라고 할 수 있는 배화교의 창시자 조로아스터를 주요인물로

    흰옷을 입은 모습으로 등장시켰다. 

 

 

 

 

 

 

히파타아, 파르메니데스

 

 

 

  

 

 

   

 

<아테네 학당> 그림 하단 약간 왼쪽을 보면

책 같은 것을 펴 들고 상체를 약간 비틀고 있는 남자는

“존재하는 것만 있으며 존재하지 않는 것은 없다”라는 말을 남긴

파르메니데스(Parmenides, B.C.515~?)이다.

 

: 파르메니데스는  다신론(多神論)의 그리스 문화에서

일신론(一神論)의 개념을 주장했다.

오늘날 기독교의 철학적 기반을 제공했다.

그는 존재론, 관념론 등 형이상학의 기초를 제공한 철학자로

평가받는데, 파르메니아의 존재론은

기독교는 물론 서양의 합리주의와 논리학의 기초가 되었으며,

불변(不變)만이 진리라고 주장한 파르메니데스의 철학은

성서의 진수라고 할 수 있는 요한복음의 사상적 기초가 됐다.


 

 - 히파티아(Hypatia, 355-415)

종교적 도그마로 인해 희생양이 된 최초의 여성 수학자이며, 대표적 천재과학자이다. 

파르메니데스 옆에 하얀 옷을 입은 채 정면을 빤히 쳐다보는 여성이 여성 수학자 히파티아이다.

  

당시 미인의 기준이 그래서인지 풍만한 느낌을 주며, 횐 옷은 역시 순결을 상징한다.

기록에 의하면, 그리스 최초의 여성 수학자이자 최초의 과학자로 재색을 겸비한 그녀는

학문에만 전념하였고, 평생 독신으로 학문에만 몰두하다가 기독교도들의 습격으로

몸이 갈기갈기 찢겨 죽은 비운의 여성이었다.
히파티야는 누구와 이야기하지 않고 있는데, 

그렇다고 혼자 명상을 하거나 사색에 빠져있는 것도 아니다.

사람들 속에 묻혀 있지만 혼자 외로운 모습을 하고 있고,

눈을 크게 부릅뜨고 정면을 바라보고 있다.

<아테네 학당>에서 정면을 응시하는 인물은 오직 히파티아 뿐이다.

한편, 유럽의 페미니즘의 발단은

히파티아에 대한 남성들의 흠모와 사랑에서 비롯됐다는 지적이 있다.

 


 

 

 

 

 

 유럽 페미니즘의 시작은 히파티아

 

 

히파티아가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18세기 이후 영국과 프랑스를 중심으로 유럽에 시와 소설 같은 문학열풍이 불면서입니다.

히파티아를 소재로 한 작품들이 인기를 끌었습니다.

글이나 쓴답시고 우쭐대는 신사의 필독서였습니다.

1,500년 전 기독교인들에 의해 갈기갈기 찢어져 학문적 순교를 맞이했던 히파티아가

유럽의 신사들에 의해 부활하기 시작했습니다. 히파티아를 모르고서는 신사라고 할 수 없었습니다.

또 학문과 결혼한 히파티아는 상류계층의 지체 높은 여성들에게 순결의 상징이기도 했습니다.

총명한 재능과 미모, 그야말로 재색을 겸비한 여성이었기 때문에 더욱 그랬습니다.

남성들이 히파티아를 동경하는 것만큼 여성들에게도 히파티아는 역시 중요한 인물이었습니다.

일부 학자들은 유럽의 페미니즘이 히파티아와 더불어 시작됐다고 주장합니다.

여성을 단순히 남성의 일부가 아니라 남자의 학문적 능력과 필적할 수 있는 여성이

바로 히파티아였다는 것을 남성들이 인식하기 시작한 거죠.

학문에 의지하여 독신으로 고귀하게 살면서 수학적 업적을 남긴 그녀는

남성들에게는 신비의 대상이었고 우상이었습니다.

히파티아를 모르고서는 상류계층의 점잖은 신사가 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라파엘로가 그렇게 흠모한 히파티아의 모델은 누구였을까요?

라파엘로에게 사랑했던 여인이 있었습니다.

라파엘로의 작품 가운데 ‘젊은 여인의 초상화(The Portrait of a Young Woman)’로 알려진

'라 포르나리나(La Fornarina)' 라는 그림이 있습니다.

 

 

'라 포르나리나' 모델과 다소 흡사해

이 작품은 가슴을 거의 드러낸 반라의 젊은 여인이 요염한 자세로 앉아 있는 모습을 그린 그림입니다.

 

 

이 작품은 한눈에 욕정을 일으키는 파격적인 작품이라는 걸 알 수가 있습니다.

한번 이 그림과 히파티아를 비교해보시죠. 좀 닮은 곳이 있나요?

 

라파엘로의 작품 '라 포르나리나'는 히파티아를

모델로 그렸다 한다.

또 다른 그림이 있습니다.

‘라 돈나 벨라타(La Donna Velata)’는 아주 아름답고 정숙한 여인의

모습을 그린 작품입니다.
‘베일을 쓴 여인(Woman in Veil)’이라는 이 작품은 앞서 설명한 ‘라 포르나리나’의 주인공에게 새로운 옷을 입힌 것이라고 합니다.

세 여인의 얼굴에 어떤 공통점이 있다는 생각이 드나요?

아테네 학당의 히파티아의 모습은 전혀 다릅니다.

그러나 이것은 확실합니다. 다시 말해서 라파엘로의 그림 가운데는 앞가슴이 꽤나 많이 패어 있고 또한 다소 자극적인 작품들이 많다는 겁니다. 
 

강조하고 싶은 것은 라파엘로는 가슴을 드러낸 다소 관능적인 여성들을 모델로 인본주의라는 자신의 철학을 화폭에 담고 싶어했던 화가입니다. 여성을 소재로 가장 많은 그림을 그렸습니다.   

 

 

 

 

 

 

 

 

 

 

 

 

 

 

 

 

 

 

 

 

 

 

 

 

 

 

 

 

 

 

 

 

 

 

 

 

 

 

 

 

 

 

 

 

 


 

 

 

 

 

 

 

 

 

 

 

 

 

 

 

 

 

 

 

 

 

 

 

 

 

 

 

라파엘로

 

라파엘로의 전 작품중에 가장 유명한 작품이며 바티칸의 명화중의 명화로 뽑히는 이 그림은

진리는 인문 과학을 기반으로 한다는 르네상스의 사상을 그림을 통하여 알려 주고 있다.

이 작품은 1510년 후기에 시작하여 1511년 중반에 완성된 작품으로 밑변이 약 820cm이다.

 

 

거대한 로마 시대의 건축물 그리고 원근법으로 구현한 공간의 깊이

 

고대 그리스의 철인, 학자들이 학당에 보여서

인간의 학문과 이성의 진리를 추구하고 있는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많은 인물들이 등장하고 있는데 이 모임의 중앙을 차지하고 있는 인물들은

인간 역사상 가장 고귀한 정신을 보인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이다.

이들은 중세 스콜라 철학 이후 계속 되어온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과

르네상스기에 급속히 확대된 플라토니즘과의 대비 및 조화라는 당시의 사상 동향을 상징하고 있다.

 

이러한 경향을 라파엘로는 두 사람의 철인에 의해 조형적으로 훌륭하게 나타내고 있다.

관념세계를 대표하는 플라톤은 손으로 하늘을 지칭하고,

아리스토텔레스는 팔을 올리며 과학과 자연계의 탐구를 상징하고 있다.

그 주변에는 제자들이 둘러싸고 있으며

그 아래 계단 한가운데에 누워 있는는 인물은 무욕의 철학자 디오게네스이며,

화면의 우측 전면에는

콤파스를 들고 네 명의 제자와 연구하고 있는 그리스의 기하학자 유클리드가 있다. 

이와 대칭되는 좌측에는 피타고라스와 그 제자들을 볼 수 있다.

 

기타 저명한 학자, 위인들이 등장되고 있는 이 그림은

로마 시대의 건축 구조가 틀이 되어 단계적인 공간의 깊이와 그 전개를 보이며,

무대 장식과 같은 구도를 보이고 있다.

이것 또한 고대 세계의 재조합물이지만 예술을 형상화한 [파르나소스] 같은 심미적인 따뜻함이 아니라

학문과 이성의 특성같이 투명하게 정제된 수정 같은 느낌을 준다.

  

배경과 공간의 광대함은 철학자들이 지은 지적인 구조물을 상징한다


이 그림은 전성기 르네상스의 고전적 정신을 완전히 구현한 것으로 알려져있다.

고상하고 세련된 기존의 그의 작품과는 다르게 관람자를 압도하는 웅장함을 느낄수 있는 데

이는 이 벽화를 제작할 때 그가 브라만테의 도움으로 미켈란젤로의 시스티나 천정화를 보았기 때문이며

덕분에 이전의 작품과는 다른 표현력과 늠름한 육체나, 극적인 군상 구성을 나타내게 되었다.

  

 

그러나 라파엘로는 미켈란젤로의 동태나 자세의 표현법을 그대로 차용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양식에 동화시켜서 육신과 영혼, 동작과 감정의 조화있는 균형을 나타내었다.

그리하여 이 대 집회에 참가하고 있는 모든 인물들은

각각 훌륭하고 뚜렷하게 자기 역할을 다하고 있는 것이다.

또 배경에 있는 높은 도움과 원통형 궁륭과 거대한 조상은 기하학적 엄밀성과 장대한 공간을 형성하여

이 모임의 정신적 에너지를 더 높이고 있다.

그러므로 이 배경과 공간의 조화와 광대함은 이곳에 살고있는 철학자들을 테두리 일 뿐만아니라

그들이 지은 지적인 구조물의 상징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이 건축물은 형태와 개념에서 신학을 형상화했던 그의 또다른 벽화, <성체논의>의

가공의 천상 건축물과 대조되기도 한다.

 

라파엘로는 <파르나소스>의 경험을 토대로 철학자의 군상을 소그룹으로 분배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것은 <파르나소스>보다 더 위대한 내부적 다양함을 가진 구도로 실현되었으며

<성체논의>보다 더 최종적으로 웅대한 안정감을 갖는다.

그러므로 이 <아테네 학당>은 라파엘로의 모든 작품중에서도 백미일 뿐만아니라

르네상스 시대의 장려양식을 완성시킨 역사적인 작품으로도 이름이 높다. 

 

화면의 오른쪽 인물군 가장자리에 라파엘로는 검은 모자를 쓰고 우리를 응시하는 자신의 초상을

살짝 그려놓았다. 이 걸작을 그려내고도 젊은 나이에 요절한 그의 아름다운 얼굴을 보면서

우리는 다시 한번 진부한 경구를 되뇌이게 된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

 

 


라파엘로 산치오 Raffaello Sanzio(1483.4.6 ~ 1520.4.6)

다빈치, 미켈란젤로와 더불어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3대 거장으로 불린다. 궁정시인의 아들로 태어나 어머니를 일찍 여의고 11세 때 아버지마저 잃어 사제인 숙부 밑에서 자랐다.

시인이며 화가였던 아버지에게서 그림을 배우다가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후에는 움브리아파의 지도자인 피에트로 페루지노 공방에서 도제 수업을 받았다. 피렌체에서 몇년간 그림을 그린 라파엘로는 1508년 로마로 건너갔으며 교황 율리우스2세를 위하여 바티칸궁전 내부에 있는 서명실의 벽화를 그렸다

- 글 : 강수정/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관(1997년 '세계일보명작산책' 원고 중)

- 2009.07.28. 네이버캐스트 [오늘의 미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