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코 슈텐른베르크 국립미술관
소련이 동유럽을 지배하면서 프라하에 있는 미술관들은 주목을 받지 못했지만
종전과 더불어 체코 정부는 국립미술관법을 개정하면서
건물을 신축하기보다는 수도원과 성 그리고 과거 무역박람회장을 미술관으로 이용하기로 했다.
1948년 개관한 국립 미술관은
8개의 분관에 르네상스 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1만3천 점의 다양한 예술품들을 분산 소장한다.
8개의 국립 미술관 중에 소장품의 규모가 가장 큰 미술관은
슈텐른베르크 궁전으로 1700년경 후기 바로크 양식으로 지은 아름다운 건물이다.
권력에 희생된 정숙한 여인, 시몽 부에 <루크레이아의 자결>
슈텐른베르크 국립미술관의 16-18세기 이탈리아, 프랑스, 스페인 회화실에 전시되어 있는 작품 중에
로마 공화국 창립에 기원을 두고 있는 작품이 시몽 부에의 <루크레티아의 자결>이다.
루크레티아만큼 그림에 자주 등장하는 여성이 없는데
그녀는 권력에 희생된 여인으로 정숙한 여인을 대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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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크레티아의 자결>Suicide of Lucretia 1625∼1626년, 캔버스에 유채, 197×148 슈텐른베르크 국립미술관, 체코 프라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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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509년 로마의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는
그의 장인 세르비우스를 살해하고 권력을 잡은 다음 정치제도를 바꾸었다.
그 당시 군주제도는 독재 군주제로 타락해 있었다.
권력을 쥔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는 아들 섹스투스의 강력한 보좌를 받으며 공포 정치를 펼쳤다.
어느 날 섹스투스는 그의 사촌 타르퀴니우스 콜라티누스의 아내 루크레티아에게 반한다.
강력한 권력을 행사하고 있던 섹스투스는 루크레티아에게 접근해 섹스를 요구한다.
정숙한 여인 루크레티아는 그의 요청을 단호히 거절한다.
그녀가 거절하자 섹스투스는 죽이겠다고 협박을 한다. 그래도 그녀가 말을 듣지 않자 힘으로 겁탈한다.
다음 날 아침 루크레티아는 섹스투스의 강요에 못 이겨 아버지와 남편 및 모든 가족들을 모아놓고
자신이 당한 일을 공개적으로 이야기해야만 했다.
그리고 루크레티아는 복수를 당부하면서 불명예를 안고 살 수 없다는 말을 남기고 생을 마감한다.
이에 분노한 콜라티누스와 그의 가족들은 시민 봉기를 일으켰고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와 섹스투스는 추방당하고 공화국이 선포되었다.
한 여인의 죽음이 로마를 공화국으로 거듭나게 한 것이다.
섹스투스와 루크레티아 사건의 한 장면을 묘사한 이 작품에서
붉은 색의 커튼이 쳐진 침대 위에서 루크레티아는 오른손에 칼을 움켜쥐고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다.
루크레티아가 칼을 잡고 있는 손과 시선은 불명예를 회복하기 위한 그녀의 의지를 나타내고 있다.
벌거벗은 몸과 강한 대비를 이루고 있는 붉은색 커튼 그리고 흐트러진 흰색 침대 시트는
자살 동기인 섹스투스와의 하룻밤을 암시한다.
시몽 부에(Simon Vouet, 1590∼1649)는
고급스러운 침대, 양탄자, 루크레티아의 몸에서 흘러내리는 모피를 통해 그녀의 신분을 나타냈다.
이 작품의 모델은 이탈리아 여성 화가이자 부에의 아내인 다 베초다.
루크레티아의 이야기는
세익스피어의 서사시〈루크레티아의 능욕(The Rape of Lucrece)〉에서 재조명되었다.
이탈리아에서 수학해 입신한 시몽 부에는
말년에 루이 13세 수석 궁정화가로서 프랑스 고전주의의 씨를 뿌리는 위치에까지 오른다.
로마초기의 전설적 역사시대 때 루크레티아라는 귀부인이 있었다.
당시 군주였던 타르킨은 그의 혈족이었는데, 이 폭군의 아들 섹스투스가 어느날
그녀의 방에 들어와 겁탈하려 했다. 섹스투스는 루크레티아가 저항하면
그녀와 노예 하나를 죽여 나란히 눕혀놓고 간음현장에서 베어버렸다고 선전하겠다고 위협했다.
집안의 명예를 생각해 몸을 허락한 루크레티아는
섹스투스가 돌아간 후 아버지와 남편에게 각각 편지로 이 사실을 알리고는 자결해 버린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타르킨의 조카 부르투스가 분기해 결국 타르킨을 권력의 자리에서 축출해 버린다.
신분이 높고 가진 것이 많다고 해서 인생이 고단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시몽 부에의 그림에서 루크레티아는 그 높은 지체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이제 막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하고 있다.
비록 아버지와 남편에게 그들의 명예를 위해 몸을 내줄 수밖에 없었음을 고했다 하더라도
그것으로 모든 것이 용서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자신의 신분에 걸맞는 인생의 짐을 져야 한다.
살아있으면 영원한 모멸이 뒤따르고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 영원한 찬양과 숭배가 뒤따른다. 그 중간지대는 없다.
작가는 고급스런 침상과 양탄자, 그리고 모피 옷 등으로 주인공 루크레티아의 귀한 지체를 표현했고, 칼을 쥔 오른손의 단호함과 하늘을 향한 시선의 경건함으로 주인공의 고결한 정신을 표현했다.
카라바죠 풍의 강렬한 명암대비가 이같은 작가의 의도를 더욱 강하게 하는 이런 그림들이
결국에는 가부장적 지배 이데올로기를 옹호하기 위해 주로 제작되었던 점을 고려하면
루크레티아도 그 오랜 이데올로기의 희생자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같은 희생이 기득권 계급 안에서도 여자나 여타 약자들에게 주로 지워져왔다는 점에서
‘사람살이의 매정함’은 더욱 도드라지게 눈에 들어온다.
이 그림의 모델은 이탈리아의 여성화가 다 베초로 추측된다.
이 그림이 그려지던 무렵 작가와 모델이었던 두 사람은 사랑에 빠져 결혼에 이르렀다.
- 이주헌 <50일간의 유럽미술관 체험>에서
- 문국진 <명화와 의학의 만남> p114-117
극적인 장면 연출한 호세 데 리베라의 <성 히에로니무스>
슈텐른베르크 국립미술관에서 강열한 명암대비로 극적인 장면을 연출하고 있는 작품이
호세 데 리베라의 <성 히에로니무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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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히에로니무스> 1646년, 캔버스에 유채, 146×198 슈텐른베르크 국립미술관, 체코 프라하 |
히에로니무스는 4세기에서 5세기에 활동했던 인물로서
그는 일찍이 그리스어, 히브리어, 라틴어를 통달했을 정도로 학식이 뛰어났다.
자만심에 가득한 청년 시절 히에로니무스는 기독교 예언서에 관심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열병에 걸려 생사의 갈림길에서 섰던 히에로니무스는 하나님의 말씀만 읽겠다고 약속한다.
말년에 히에로니무스는 예수를 의지하는 마음으로 광야에 있는 동굴로 들어가
히브리 성서를 라틴어로 번역하는 일을 했다.
그가 번역한 불가타 번역본은 수세기 동안 가톨릭교회의 공식 성경으로 사용되었다.
전형적으로 그림에서 히에로니무스는 동굴에 앉아 성경을 번역하는 노인의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으며
그의 곁에는 사자가 등장하고 있다.
사자는 라틴 성서를 번역했던 아우구스티누스와 혼동하지 않기 위한 도상학적 약속이다.
<황금 전설>에 따르면 히에로니무스가 베들레헴 수도원에서 생활하고 있을 때
사자 한 마리가 다리를 절뚝거리며 나타난다.
히에로니무스는 수사들을 시켜 사자의 발을 씻기고 발에 박힌 가시를 빼 주라고 지시한다.
상처를 치유한 사자는 수도원을 떠나지 않고 나귀를 돌보는 일을 한다.
하지만 수도원을 지나가던 상인들은 나귀 한 마리를 끌고 간다.
사자가 나귀 한 마리를 잡아 먹은 것으로 오해한 수사들은 사자를 수도원 밖으로 쫓아낸다.
히에로니무스는 사자가 한 짓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것을 설명할 길이 없었다.
어느 날 상인들이 끌고 간 나귀를 알아본 사자는 그들을 쫓아버리고 나귀를 끌고 수도원으로 돌아온다.
사자는 그 이후 자신을 끝까지 믿었던 히에로니무스와 항상 동행했다.
동굴 속에서 앉아 있는 히에로니무스는 종이를 펼쳐 들고 있고 앞에는 성경책이 놓여 있다.
화면 왼쪽 그의 발 아래에는 사자가 앉아 있고 오른쪽에는 해골과 종이 그리고 필기구가 있다.
이 작품에서 해골은 죽음과 허무를 상징하고 있어 수도사를 그린 그림에 등장하는 상징물이다.
종이는 히에로니무스가 번역한 성경을 나타낸다.
허리를 감싸고 있는 붉은색의 풍성한 천은 뼈만 남은 히에로니무스의 앙상한 몸을 강조하고 있다.
호세 데 리베라(José de Ribera, 1591∼1652)는
노년에 광야에서 혹독한 삶을 살았던 히에로니무스를 사실적으로 묘사하기 위해
뼈만 앙상한 노인의 모습을 정교하게 표현했다.
- 박희숙 서양화가, 미술 칼럼니스트
- 2009. 06.16 [명화산책]ⓒ Science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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