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주짱의 하늘꿈 역사방

느끼며(시,서,화)

라파엘로(Raffaello Sanzio, 1483~1520)

Gijuzzang Dream 2009. 6. 22. 05:05

 

 

 

 

 

 

 

 (1) 다 빈치 VS 라파엘로 VS 미켈란젤로

 

 

 

이탈리아에 우르비노(Urbino)라는 곳이 있습니다.

이탈리아 산(産) 도자기 마졸리카(Majolica)로 유명한 곳입니다. 고급 도자기죠.

라파엘로가 태어난 곳입니다. 당시에는 우르비노 공화국이라고 불렀습니다.

 

  

 

The School of Athens. 1509. Fresco. Vaticano, Stanza della Segnatura, Rome

라파엘로가 그린 ‘아테네 학당’ 성당 벽화다.

주위에 다른 그림들이 있다. 



당시 로마 교황청은 세계를 지배하는 막강한 권력을 소유하고 있었지만

반도 이탈리아는 사분오열 여러 갈래로 찢어져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과거 위용을 자랑했던 로마의 이탈리아는 온데간데없이 로마 교황청만 남고

여러 개 나라들로 쪼개져 있었던 거죠. 그래서 공화국들이 많았습니다. 우리나라 같으면

서울 공화국, 충청 공화국, 전라도, 경상도, 심지어 제주 공화국으로 나누어져 있었던 겁니다.

이러한 이탈리아를 하나로 통일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

바로 마치니(Mazzini)라는 젊은 정치 지도자였습니다.

이탈리아가 오늘날 이탈리아로 하나의 나라로 된 것은 19세기 중반입니다.

르네상스 시대의 이탈리아는 미약하기 그지 없었고,

이러한 이탈리아에 군침을 흘리며 정복의 야망을 꿈꾸고 있었던 나라가

바로 프랑코 왕국, 오늘날 프랑스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제2의 로마제국이 되고 싶었던 거죠.

그러한 분열의 시대에 인간중심의 르네상스가 싹트기 시작한 겁니다.

 

궁정화가 브라만테는 라파엘로와 같은 고향으로 교황에게 추천했다.

어쨌든 라파엘로가 그런 시기에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같은 우르비노 공화국 출신으로

당시 교황 쥴리오 2세(또는 율리우스 2세)의 총애를 받던 화가가

있었습니다. 그가 바로 성 베드로 성당 재건축을 총 지휘한

당대 최고의 화가 브라만테(Donato Bramante)입니다.

이 브라만테가 자신의 고향의 젊은 화가인 라파엘로를 추천한 겁니다.

 
당시 브란만테(1444~1514)는 많이 노쇠해 있었고,

그래서 젊은 라파엘로를 일종의 후계자로 키우고 싶었던 거죠.

그래서 교황청으로 불러 들였고 라파엘로는 브라만테를 이어

성 베드로 성당 건축 책임자가 되는 영광을 누리게 됩니다.

또 쥴리오 2세에 이어 등극한 교황 레오 10세의 총애를 받습니다.

  

 

 

 

라파엘을 추천한 것은 같은 고향의 브라만테

 

 

교황 쥴리오 2세는 카톨릭의 권위를 지키기 위해 전쟁도 불사한 호전적인 인물이며, 

또한 예술을 장려한 인본주의에 심혈을 기울인 종교 지도자로 평가받고 있다. 

‘아테네 학당’은 교황 쥴리오 2세가 시킨 것이지만 완성된 것은 교황 레오 10세 때입니다.

 

라파엘로가 르네상스 시대의 대가로 그 능력을 발휘하게 된 것도

레오 10세 덕입니다.

그러니까 라파엘로는

고향 선배인 브라만테의 추천으로 교황청에 입성해서

그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하게 되는 겁니다.

이처럼 라파엘로에게는 든든한 ‘빽’이 있었습니다.

 

 

 

 

 

 

 

 

 

 

 

교황 쥴리오 2세(율리시스 2세) 1512년

Raphael.  Portrait of Pope Julius II. c.1512. Oil on panel. National Gallery, London, UK

 

 

교황 레오 10세

Raphael.  Portrait of Pope Leo X with Cardinals Giulio de' Medici and Luigi de' Rossi. 1513-1519. Oil on panel. Palazzo Pitti, Galleria Palatina, Florence, Italy

 


잘 아시겠지만 르네상스 시대 3대 화가는

라파엘로를 포함해 레오나르도 다 빈치, 그리고 유명한 미켈란젤로가 있습니다.

그러나 다 빈치가 광적이고, 미켈란젤로가 신경질적이고 변태적인 화가인데 비해

라파엘로는 아주 철학적이고 이성적인 화가라는 칭송을 받습니다.

그래서 어떤 비평가들은 라파엘로가 예술가에게 고유한 집착과 ‘끼(madness)’가 부족하다고

평가하기도 합니다. 또 예술적 측면에서 다른 화가들에 비해 능력이 뒤떨어진다는 혹평을 듣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와 반대로 “라파엘로야 말로 그림을 통해 르네상스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확실하게 보여준

화가”라고 칭송하기도 합니다.

아마 라파엘로를 평가절하는 가장 큰 이유는 이런 데 있는 것 같습니다.

“너무 냉철하고 이성적이다. 그리고 교황의 총애를 너무 많이 받아 세속적으로 출세가도를 걸었다.

고생을 하지 않았다. 너무나 온실 속에서만 자란 화가이기 때문에 예술이라는 작품 세계에서는 ‘꽝’이다”

이런 거죠.

사실 다 빈치나 미켈란젤로는 성격도 광적이거나 정신병적인 집착이 많았습니다.

다 빈치의 ‘모나리자’가 아니라 해부도, 그것도 여성의 해부도는

당시 역대 해부도 가운데 가장 정확하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다 빈치는 어떻게 그 해부도를 세밀하게 그릴 수 있었을까요?

또 다 빈치는 남성의 해부도가 아니라 여성의 해부도를 택한 것일까요?

그는 해부라는 광적이고 폭력적인 예술 세계 속에서도 페미니즘을 선택한 것일까요?

아니면 반대로 오히려 여성을 지배하려는 남성의 이기적 야욕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다 빈치가 인간을 해부하기 위해 방금 갓 묻은 묘지에서 시신을 몰래 꺼내와

집에서 그 쾌쾌한 송장냄새를 마다하고 하나하나 메스를 대면서 해부했다면

그야말로 광적이라고 할 수 있는 거죠. 해부도를 완성하려면 해부해 봐야 합니다.

그러나 공식 인가를 받지 않고, 그것도 시체를 훔쳐서 갈기갈기 난도질을 했다면

그것은 광적인 폭군만이 할 수 있다고 봐야 합니다.

아마 그래서 후세 사람들은 다 빈치의 광적인 행동에 대해 엄청난 예술성을 부과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천재 화가, 그 이상의 화가라고 칭찬하면서 말입니다.

 


탄탄대로를 걸어 ‘예술성’이 없다는 지적도

가장 예술적 값어치가 있다고 평가받는 라파엘로의 자화상은 2차대전 기간

행방불명이 됐다. 

인간의 잔혹함과 폭력은 때로 예술의 이름으로 아름답게 포장됩니다.

예술이라는 아름다움으로 인간의 사악함이라는 것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집니다. 엄청난 사람들이 희생된 중국의 만리장성은

위대한 건축물이자 예술입니다.

인간은 유한하지만 예술은 영원합니다.

아마 그래서 그리스 시대 히포크라테스가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라는

말을 남겼는지 모르겠습니다. 정말 다 빈치의 예술은 길 겁니다.

천재 다 빈치는 후세 사람들이 ‘다 빈치 코드’에 얽매어 칭찬하고

욕할 것이라는 걸 미리 예견했을지도 모릅니다.

천재 다 빈치는 그가 그린 ‘최후의 만찬’이

종교라는 인간의 이기심과 집착을 둘러싸고 엄청난 파문을 일으킬 것이라는 걸 미리 예견했는지도 모릅니다.

만약 다 빈치가 지금 살아 돌아와 우리들 앞에 나선다면 그의 그림을 갖고 왈가불가 하는 우리들에게 무슨 말을 전할까요?

“아 정말 귀찮고 짜증나네, 술하고 여자나 대령해” 혹시 이렇게 이야기하지 않을까요?

그는 종교적이었을까요? 그는 예술이 종교보다도 길 것이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예술이 영원할 것이라는 데에 확고한 신념을 갖고 있었던 거죠.


라파엘로의 자화상. 

 

 

 

 

 

 

 

 

 

 

 

 

 

 

 

 

 

 

 

 

 

 

 

 

 

 

 

 

 

 

 

 

 

 

 

 

 

 

 

 

 

 

 

 

 

 

 

 

 

 

 

 

 

 

 

이처럼 다 빈치가 광적이고 기괴한데 비해

라파엘로는 그림뿐만 아니라 공부를 많이 해서 인문학적 소양도 갖춘 대단한 학식의 소유자였습니다.

그러니까 갑자기 혜성처럼 나타난 예술가라기보다 절차를 밟고 준비한 화가라고 볼 수 있는 거죠.

예술에 대한 평가는 준비된 사람보다 혜성처럼 나타난 예술가에게 후한 점수를 줍니다.


이런 상상을 해봅니다.

만약 라파엘로가 아니라 다 빈치에게 ‘아테네 학당’을 맡겼다면 어떻게 그렸을까 하고 말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나요? 그러니까 교황 쥴리오 2세가 다 빈치를 불러 돈을 후하게 줄 테니

‘아테네 학당’을 그려보라고 했다면 말입니다.
엄청난 명작이 나왔을까요? 아마도 그럴 겁니다.

왜냐하면 라파엘로의 ‘아테네 학당’은 존재하지 않고 다 빈치의 ‘아테네 학당’만이 존재할 테니 말입니다.

그는 혹시 플라톤과 아리스텔레스가 서로 시기하고 질투하는 모습을 그리지 않을까요?

또 혹시 자신도 등장시켜 피타고라스를 비롯해 내로라 하는 수학자들이

자신이 떠드는 강의에 매료된 모습을 그리지는 않았을까요?
아주 잘난 척 하면서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 이놈들, 내보다 훨씬 덜 떨어진 무식한 놈들”이라고

표현하지는 않았을까요? “임마, 너희들 머리 모두 합해봐야 나 따라올 날 멀었어, 이 무식쟁이들아!”

 

 

 


라파엘로에게 가장 적절한 그림

 

라파엘로는 광적인 천재화가 다 빈치의 예술성을 높이 평가했다. 


 

 

 

 

 

 

 

 

 

 

 

 

 

 

 

 

 

 

 

 

 

 

 

 

 

 

 

 

 

 

 

 

 

 

 

 

 

 

또 이렇게도 상상할 수 있습니다.

‘아테네 학당’에 나오는 인물들을 무한한 신비의 세계로 끌고 가는 겁니다.

아주 종교적으로 승화시키는 겁니다. 기독교보다 로마 교황청보다

더 거룩하고 권위 있는 종교적인 세계로 말입니다.

예를 들어 플라톤이나 소크라테스를 교주로 만들고
그 속에서 종교를 창시해 보는 거죠.

너무 비약인가요? 만약 그랬다면 교황이 허락을 하지 않았겠죠?

만약 허락했다면 훗날 엄청난 파문을 불러 일으켰을 겁니다. 

다른 그림은 제쳐놓고 ‘아테네 학당’은 라파엘로에게 가장 적격이었던
그림이었던 같습니다.

광적인 다 빈치도 아니고 변태적인 미켈란젤로도 아닙니다.

철학적 소양과 인문주의로 무장된 라파엘로에게 가장 맞는 그림이었던 같다는 이야기입니다.

모든 것이 그렇듯이 그림도 맞는 사람을 찾아 가는 거 아닐까요?

그림에 대한 상상은 과학에 대한 상상력으로 통합니다. 그 상상력 속에서 창의력이 나오는 거죠.

그래서 그리스 시대 철학자들은 전부 과학자였습니다. 

아테네의 거지 디오게네스도 대단한 과학자였다는 것도 추후 이야기하겠습니다.

‘아테네 학당’ 속에는 과학, 철학 모든 게 있습니다. 그래서 불후의 명작입니다. 

- 김형근 편집위원

- 2008.06.17 ⓒ ScienceTimes

 

 

 

 

 

 

 

 (2) 여성모델을 인본주의 주제로 삼다 - 라파엘로 

 

 

앞서 이야기했듯이 라파엘로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와 함께

르네상스의 고전적 예술을 완성한 3대 작가 가운데 한 사람으로

어려서부터 천재적인 능력을 인정 받았고, 또 그 능력을 유감 없이 발휘했습니다.

16세기 르네상스시대의 철학과 인본주의 사상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고 평가받는 '아테네 학당'은 다양한 철학과 종교를 아우르는

라파엘로의 세계관이 잘 나타나 있는 작품이다. 


3대 화가 가운데 가장 어렸으며 친화력이 있어

광적인 다빈치나 신경질적이고 변태적인 성격의 미켈란젤로와도 잘 지냈다고 합니다.

특히 다빈치를 존경해서 다빈치를 여러 그림의 중요한 모델로 사용하기도 했으며

그의 화풍(畵風)을 모방한 그림도 많이 그렸습니다.

 

 

라파엘로는 30세나 위인 다빈치를 존경해 플라톤의 모델로 삼았다. 

 

 

 

 

 

 

 

 

 

 

 

 

 

 

 

 

 

 

 

 

 

 

 

 

 

 

 

 

 

 

 

 

 

 

 

 

 

 

 

 

 

나중에 더 자세히 이야기하겠지만

‘아테네 학당’ 중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와 이야기하고 있는 머리 벗겨진 노인이 바로 플라톤인데,

그 모델이 바로 다빈치입니다. 다빈치를 아테네 학당의 가장 중요한 인물인 플라톤으로 묘사했다면

다빈치에 대한 라파엘로의 존경심이 극치에 달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다빈치를 가장 존경해서 그림의 모델로 많이 삼아

 

하긴 당시 최고의 화가로 르네상스 예술을 손아귀에 쥐고 있던 거장에게

추파를 던지기 위해서라는 추측도 가능합니다.

그러나 출세를 위해 다빈치에게 추파를 던졌다는 것은 지나친 비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부 비평가들이 탄탄대로를 걸어 온 라파엘로의 예술성이 다빈치나 미켈란젤로에게 뒤지는 이유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라고 지적하기도 합니다.

다시 말해서 예술에서 가장 중요한 독특한 창의성이 다른 두 화가에 비해 부족하다는 주장입니다.

과연 그럴까요? 그러한 주장은 일부의 주장일 뿐더러 ‘아테네 학당’에서 논할 만한 일은 아닌 것 같네요.

그리고 한마디 덧붙이고 싶은 것은 모든 분야가 그렇겠지만

특히 예술에서 영향과 모방이라는 것은 완전히 다르다는 겁니다.

아테네 학당은 예술가와 예술품을 비평하고 가치를 논하려는 자리가 아니라

현대 과학과 철학, 심지어 종교에 이르기까지 모든 분야에 걸쳐 영향을 끼친

위대한 그리스 석학들의 매력에 빠져보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의 상상의 나래를 펴고 그 시대로 한번 되돌아 가 보는 것이죠.

어쨌든 순간적인 것을 탐하는 정치적인 예술가에게 영원한 걸작품은 원래 나오지 않는 법입니다.

라파엘로도 그렇습니다.

또 당시 교황이 가장 신임하고 있던 브라만테에 의해 궁정화가로 추천이 될 정도로

그의 입지 또한 확실한 위치에 있었다는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실 라파엘로는 다빈치와 그의 예술을 존경했습니다.

우선 다빈치는 1452년생으로 1483년 생인 라파엘로에 비해 무려 30살이 많습니다. 아버지뻘이죠.

그리고 다빈치는 작품과 의학, 과학 등 연구에 대한 광기(狂氣)가 가득차 있었지만

사람들과의 교류에 허점이 있었던 건 아닙니다.

그래서 모델을 두고 말이 많은 모나리자를 그릴 수 있었던 거죠.

모나리자를 둘러싸고 말이 많긴 하지만

부유하고 지체가 높은 사람에게 돈을 듬뿍 받고 그린 것은 확실한 것 같습니다.

 


미켈란젤로의 작품은 ‘지배적이며 독선적인 폭군적 성격 강해’

반면 미켈란젤로는 아버지가 은행가로 집안이 부유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너무나 거만했고 신경질적이어서 사람들과 항상 싸웠습니다.

그리고 완성한 작품에 대해 한번도 만족감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격한 분노와 좌절감 속에서 살았습니다.

 

그러한 격정 때문에 성격도 변태적으로 변했죠.

블랑카치 성당 마사초 벽화 앞에서 동료 화가인 토레지아니(Sebastiano Torregiani)와 논쟁을 벌이다가

주먹질 끝에 코뼈가 부러진 것은 유명한 일화입니다.

그는 항상 마음 속에는 독재자적 기질의 폭군의 성격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연은 같이 살아야 할 대상이 아니라 싸워서 파괴하고 정복해야 할 대상으로 생각했습니다.

자신 또는 그림 속의 주인공은 세상을 지배하는 통치자로써 묘사했습니다.

그가 조각한 다윗 상은 신체적으로는 남성의 완벽한 구조를 이루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렇게 평가하는 사람도 많지만 온화함과 부드러움이 없고 지배자의 권위가 있을 뿐입니다.

또한 잘 보시면 알겠지만 '최후의 심판', '천지창조', '다윗과 골리앗'을 비롯해

그가 그린 많은 그림들 속에는 항상 공격적인 주인공의 모델만이 존재할 뿐입니다.

또한 여성을 모델로 한 그림은 일부 성모마리아에 대한 것 말고는 거의 없습니다.

그의 작품들 속에는 그러한 폭군적 성격이 고스란히 반영됐다고 비평가들은 지적합니다.

물론 온화하고 부드러운 것만이 예술적인 것은 결코 아닙니다.

다만 그의 성격이 작품세계에 그대로 베어있다는 설명을 드리는 겁니다.

 

 

모나리자에 매혹돼 여성작품 많이 그려

 

라파엘로는 미켈란젤로는 물론 다빈치에 비해 상당히 온화하고 상냥한 작품들을 남겼습니다.

그는 모나리자에 흠뻑 빠져 있었습니다.

라파엘로의 작품 가운데 '라 포르나리나(La Fornarina)'라는 그림이 있습니다. 
 

 

 

'라 포르나리나(La Fornarina)'

La Fornarina. c.1518-1519. Oil on panel. Galleria Nazionale d'Arte Antica, Rome, Italy.

‘젊은 여인의 초상화(The Portrait of a Young Woman)’

 

라파엘로는 애인으로 알려진 반나의 여성모델을 통해 인본주의를 주장하려고 했다. 

 

 

 

 

 

 

 

 

 

 

 

 

 

 

 

 

 

 

 

 

 

 

 

 

 

 

 

 

 

 

 

 

 

 

 

 

 

 

 

 

 

 

 

 

 

 

 

 

 

 

 

 

 

 

 

 

 

 

 

 

 

 

 

 

 

 

 

 

‘젊은 여인의 초상화(The Portrait of a Young Woman)’로 알려진 이 작품은

가슴을 거의 드러낸 반라의 젊은 여인이 요염한 자세로 앉아 있는 모습을 그린 그림입니다.

로마 국립고대미술박물관에 소장돼 있는 이 작품은

한눈에 욕정을 일으키는 파격적인 작품이라는 걸 알 수가 있습니다.

이 그림의 모델은 라파엘이 평소에 사랑했던 애인이라는 말도 있고

또 그야말로 노리개 감으로 이용한 섹스 파트너라는 말도 있습니다.

확실하게 밝혀진 것은 없지만 이름은 마르게리타 루티(Margherita Luti)로

로마의 산타도레아라는 곳에서 빵집을 운영하던 프란체스코 루티의 딸이라고 합니다.
아마도 작품의 제목 'fornarina'가 빵집 여자(bakeress)를 뜻하기 때문에

이러한 주장이 더욱 더 탄력을 받는 것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어쨌든 라파엘로가 상당히 사랑했던 여인으로

그가 죽을 때 이 여자가 살아갈 수 있도록 많은 재산을 남겼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라파엘로(1483~1520)는 37세에 일찍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 그림은 원래 조금은 미완성인 채로 라파엘로의 화실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라파엘로가 죽자, 그의 작품들을 정리하던 조수 로마노(Guilio Romano)가

약간 수정을 가해 완성한 다음 내다 팔게 된 것이죠.

 

 


가슴을 드러낸 여성작품에서 인본주의를 주창해

동그스름한 귀여운 얼굴의 이 여인은 대담하게 젖가슴을 내놓고 있으며

배에는 속이 훤히 비치는 베일을 두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배꼽이 훤히 보일 정도죠.

여성의 가슴을 통해 관능을 자극하는 그림으로 당시로 볼 때는 대단히 파격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그림에서 여자의 오른손과 손가락을 잘 보시기 바랍니다.

미술사가들 간에 논쟁이 멈추지 않는 부분입니다.

일부 학자들은 오른 쪽 손이 왼쪽 가슴 아랫부분을 만지고 있는 것은

성적 본능을 자극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암 종양을 만지고 있다는 주장입니다.

재미 있죠? 어떻게 생각하시는 지요?

 

 

 

‘라 돈나 벨라타(La Donna Velata)’ / ‘베일을 쓴 여인(Woman in Veil)'

La Donna Velata. c. 1514-1516. Oil on canvas. Palazzo Pitti, Galleria Palatina, Florence, Italy

라파엘로는 같은 모델에 옷을 입히고 베일을 가리게 해서 정숙한 아름다움을 표현하려 했다. 

 

 

 

 

 

 

 

 

 

 

 

 

 

 

 

 

 

 

 

 

 

 

 

 

 

 

 

 

 

 

 

 

 

 

 

 

 

 

 

 

 

 

 

 

 

 

 

 

 

 

 

 

 

 

 

 

 

 

 

또 다른 그림이 있습니다.

‘라 돈나 벨라타(La Donna Velata)’는 아주 아름답고 정숙한 여인의 모습을 그린 그림입니다.

‘베일을 쓴 여인(Woman in Veil)’라는 이 작품은

앞서 설명한 ‘라 포르나리나’의 주인공에게 새로운 옷을 입힌 것이라고 합니다.

다시 말해서 모델이 꼭 같다는 거죠.

같은 지 안 같은 지는 확인할 길이 없고 열심히 보면 공통점을 찾을 수가 있다고 하네요.

그렇다면 라파엘로는 왜 한 모델을 갖고 포르노와 비슷한 그림과,

그와 반대로 아주 정숙한 그림을 그린 것일까요?

돈 주고 모델을 샀으니까 이것저것 마음 내키는 대로 마음대로 그려본 걸까요?

또 때로는 남자의 욕정도 채우면서 말입니다.

라파엘로는 르네상스 화가 가운데 여성을 모델로 많은 그림을 그린 화가로 유명합니다.

여자 초상화만 무려 40여 장을 그렸습니다. 또 가장 아름답고 거룩한 성모상을 그린 화가이기도 합니다.

 


인간의 “성적 욕망과 정숙함은 동전의 양면”

라파엘로는 인간의 성적 욕망과 정숙함이라는 동전의 앞면과 뒷면처럼 생각했던 것은 아닐까요?

인간의 육체와 정신이 함께한다는 것을 표현하고자 한 것이 아닐까요?

그것이 곧 인본주의의 시작이며 또한 르네상스의 본질이라고 라파엘로는 표현하고자 했던 것 같습니다.

육체와 정신이 함께 할 때 비로서 진정한 자유로운 인간이 탄생할 수 있다는 것이겠죠.

당시 예술가와 예술품에 대한 바사리의 기록은 르네상스시대 최고의 걸작품이다. 

라파엘로는 독신으로 살다가 생을 마쳤습니다.

르네상스 시대 유명한 미술가이자 사학자인 조지오 바사리(Giorgio Vassari)는

“라파엘로가 결혼을 하지 않은 것은 교황으로부터 신임 받고 있었고,

그래서 추기경이 되려는 야망이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바사리는 르네상스 시대의 미술과 미술가에 대해 꼼꼼히 기록해

오늘날 르네상스시대의 최고의 미술사가로 인정받고 있는 예술가입니다. 

현존하는 당대에 대한 미술에 대한 기록은 거의 그의 저술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건축가로도 명성을 날린 그는 특히 예술가들의 전기를 상세하게 기록해

르네상스 시대 화가들의 철학과 사상을 이해하는 데 크게 이바지했습니다. 

또한 그는 역사상 세계 최초로 예술아카데미를 설립한 장본인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라파엘로는 자신을 위해 기꺼이 모델이 돼 주겠다고 나선 ‘빵집 여자’를

그렇게 사랑하고 좋아했는데도 권력에 눈이 멀어 애인을 헌신짝처럼 버린 걸까요?

둘 사이는 과연 어떤 관계였을까요?



모나리자 이야기가 나온 김에 재미 있는 이야기 하나를 소개하겠습니다.

외국의 모 미술대학의 예술철학 시간에 일어난 일입니다.

교수가 학생들에게 종이를 나눠준 다음에 갖고 온 모나리자 그림을 칠판에 걸어 놓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그림을 열심히 보고 감상하면서 앞으로 한 시간 동안 이 여인(모나리자)이 과연 어떤 사람인지,

어떻게 보이는지 생각나는대로 마음대로 써서 제출하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쓰고 싶은가요?

부드러운 미소와 온화한 얼굴을 들먹이면서 온갖 찬사로 가득 메울 건가요?

성모 마리아의 거룩한 모습, 아니면 좀더 발전해서 불교의 관음상(觀音像)의 자비를

동양적인 해석을 할지도 모릅니다. 좋습니다.

그런데 한 학생이 모나리자를 “황달(간염)에 걸린 임신한 아낙네”라는 내용의 리포트를 냈습니다.

교수는 그 학생에게 아주 후한 점수를 주었다고 합니다.

사실 미술 평론가 가운데 이러한 평을 한 학자도 있습니다. 눈썹 이야기는 넘어가고요.

 

 

 

 Raphael. Portrait of a Young Man.

Oil on wood. Szepmuveseti Muzeum, Budapest, Hungary.

  피에트로 벰보의 초상(Portrait of Pietro Bembo(1504)

라파엘로는 피렌체의 신플라톤주의에 의한 인간의 존엄성을 중시했다. 

 

 

 

 

 

 

 

 

 

 

 

 

 

 

 

 

 

 

 

 

 

 

 

 

 

 

 

 

 

 

 

 

 

 

 

 

 

 

 

 

 

 

 

 

 

 

 

 

 

 

 

 

 

 

 

 

 

 

 

 

 

 

 

 

과학과 예술, 보는 각도에 따라 달라

 

요는 예술이란 보는 사람의 시각에 따라 다릅니다.

예술품이 보는 사람마다 꼭 같이 생각해버린다면 이는 예술품이 아닙니다. 상품이죠.

경주의 석굴암이 세계적인 예술품으로 인정받는 이유가 그렇습니다.

석굴암은 미소를 띠고 있을까요?

아니면 속세의 모든 것을 멀리한 채 깊은 명상에 잠겨 있는 것일까요?

또 아니면 중생과 번뇌를 함께하며 근심과 우수에 찬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예술이 그렇듯이 과학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물이나 현상을 바라보는 방향과 차원에 따라 엄청나게 변할 수 있습니다.

‘아테네 학당’이라는 예술 속에서 과학이라는 무한한 상상의 나래를 펼칠 수 있어야 합니다.

- 김형근 편집위원

- 2008.06.24 ⓒ ScienceTimes

 

 

 

 

 

 

 

 (3) 자연주의 철학을 추구한 인본주의 화가 - 라파엘로

 

 

사실 르네상스 시대에 등장한 각종 성화(聖畵)를 보면 대부분 무섭고 좀 괴이한 그림들이 많습니다.

심지어는 소름기치는 그림도 많습니다.

아시겠지만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 같은 작품은 그야말로 일종의 공포를 자극할 정도입니다.

특히 그의 그림이나 조각품들이 그렇습니다.

아테네 학당의 라파엘로는 인간미의 이상을 추구했으며

여러 가지 화풍을 종합해 우아한 작품을 만들었다.

르네상스 시대 미술을 완성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우리나라를 비롯해 ‘아름다운 미소’를 선사하는 동양의 예술품과는 전혀 다른 양상이죠.

그러나 그러한 그림들 가운데 그나마 온유하고 부드러운 느낌을 주는 그림이 있다면

바로 착실한 수업을 받으면서 화가로서의 정도(正道)의 길을 걸은 라파엘로의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술이란 화가나 작가의 성격이나 철학, 그리고 인생관이나 세계관이 요약돼

고스란히 나타난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라파엘로는 부드럽고 순수한 성품의 소유자였고,

그래서 적이 없었고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고 합니다.

  


그의 그림 가운데 ‘The Nymph Galatea(요정 갈라테아, 1512년)’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독특한 인물배치와 구도상의 교묘한 기법 등으로 후세의 찬사를 받고 있는 작품입니다.

이 그림은 감상자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며 순수한 아름다움을 표현한 작품으로

라파엘로의 부드럽고 순수한 성품이 나타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The Nymph Galatea(요정 갈라테아)’

1512년, Fresco. Villa della Farnesina, Rome, Italy.

라파엘로의 온유하고 유순한 성품이 가장 잘 나타나 있는 작품이다. 

 

 

 

 

 

 

 

 

 

 

 

 

 

 

 

 

 

 

 

 

 

 

 

 

 

 

 

 

 

 

 

 

 

 

 

 

 

 

 

 

 

 

 

 

 

 

 

 

 

 

 

 

 

 

 

 

 

 

못생긴 거인 폴리페모스가 아르다운 바다 요정 갈라테아에게 사랑의 노래를 바치지만

그녀는 그의 노래를 조롱하듯이 두 마리 돌고래가 끄는 수레를 타고 파도위로 달려가고

다른 바다의 신들과 요정들이 그녀 주위에 몰려드는 장면입니다. (그림 참조)

 

 

부드럽고 순수한 성품, 작품에도 그대로 나타나


인물들의 순수한 아름다움이 나타나 있습니다.

르네상스라는 사조 속에서 16세기 이탈리아 사람들이 상상했던 아름다움의 전형을

요정의 모습을 통하여 이상적인 미를 형상화한 작품으로

라파엘로를 독보적인 화가로 만든 작품이기도 합니다.

그와 같은 화풍 때문에 르네상스의 미술을 완성한 화가라는 칭송을 받습니다.

르네상스 3대 화가 가운데 가장 나이가 어렸다는 이유도 크게 작용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상업주의 미술 포르노가 등장한 것은 르네상스 시대
 

그런데 이 그림에서 볼 수 있듯이 가슴을 드러낸 여성들이 많이 나타납니다.

그리고 그 가슴들은 종교적이고 거룩한 어머니의 상징이라기보다,

보는 차원에 따라서 관능적인 표현이 담겨 있습니다. 성적 욕망도 다소 일으키게 하는 작품이죠.

미술의 역사상 포르노의 등장은 엄청나게 중요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포르노의 등장이 소위 우리가 이야기하는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기초가 되는 겁니다.

또 성스럽게 여겨졌던 여성의 가슴이 세속화 되기 시작한 것이 르네상스 시대부터입니다.
르네상스는 고대 그리스라는 복고주의를 의미합니다.

그러나 이 때부터 종교권력이 퇴색하고 근대시민사회가 생성되는 시발점이 됩니다.

이는 근대 자본주의가 형성되기 시작되는 시기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돈을 쥔 자본가들을 중심으로 그림을 하나의 비즈니스로 발전시키려는 시도가 이루어지고,

그 가운데서도 여성, 특히 가슴을 소재로 한 포르노가

점차 예술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기 시작하는 것이죠.

그러나 예술이냐, 외설이냐를 두고 항상 논란이 있었던 것처럼

라파엘로의 상반신을 드러낸 누드 작품 또한 감상하는 사람의 차원에 따라 다르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어쨌든 여성들을 모델로 순수한 인간중심의 인본주의를 나타내려는 라파엘로의 의도를 읽을 수 있습니다.

 

 

포르노 미술은 근대 자본주의 형성과 같이 해


The Three Graces. c.1503-1504. Oil on panel. Conde Museum, Chantilly, France

라파엘로는 나체의 여성을 모델로 한 그림을 많이

그렸다. 포르노는 르네상스 시대에 시작됐다. 

 


요는 라파엘로를 비롯해 르네상스시대부터

여성의 가슴을 주제로 한 포르노성의 그림들이 존재하기 시작한다는 겁니다.

사실 성화에는 여성의 가슴이 많이 등장합니다.

특히 성모 마리아가 어린 예수에게 젖을 주는 그러한 그림들이죠.

그러나 이 그림들은 대부분 세속적인 느낌은 전혀 없습니다.

그래서 화가들은 이를 통해 성모 마리아를 인간들에게 먹을 것을 주는 풍요의 상징으로,

그리고 신의 은총을 표현하려고 한 것이죠.

외설이냐, 예술이냐를 둘러싼 공방은 어느 때 어느 곳에서나 존재합니다.

보고 느끼는 시각에 따라 다르기 때문입니다. 예술의 묘미 또한 바로 그러한 점에 있습니다.

그러나 처음의 시도와는 달리 가장 세속화 된 예술의 소재가 여자의 가슴입니다.

가장 종교적이며 성스러웠던 여자가슴은 사회의 변천과 함께 가장 타락한 인체 부위로 등장합니다.

이제 여자의 가슴은 성스러운 어머니의 모습도 아니고

그렇다고 인류에게 풍성한 선물을 안겨주는 풍요의 상징도 결코 아닙니다.

풍만한 가슴은 관능과 섹스의 상징으로 세속적인 상업용 도구로 변질됐고

각종 포르노와 에로물에서 섹스를 자극시키는 가장 중요한 인체 일부가 돼버립니다.

기독교가 지배하던 중세 암흑기만 해도 여성가슴은 성적 흥분을 자극하는 에로물이 아니었고

성모 마리아가 아기 예수에게 젖을 주는 그야말로 종교적인 성스러움 그 자체였습니다.

적어도 성화에서는 그랬습니다.

그러나 르네상스를 거쳐 근대시민시회로 변모하면서 여성가슴 역시 세속적으로 변모하게 됩니다. 
 

 


고향 우르비노는 미술의 중심지

라파엘로가 우루비노 출신이라는 이야기는 이미 설명했습니다.

우르비노는 르네상스 당시 예술의 중심지였습니다.

더구나 로마 교황청이 직접 관장하는 교황청 소속 관할지역이었기 때문에

라파엘로와 같은 걸출한 화가들을 배출할 수 있었던 겁니다.

당시 우르비노에는 어릴 때부터 화가수업을 받는 사람들이 꽤 있었습니다.

라파엘로의 아버지도 유명하지는 못했지만 화가였고 어린 라파엘로에게 그림을 가르쳤습니다.

1504년 프로렌스로 가서 마사치오, 다 빈치, 미켈란젤로 등의 그림을 공부하기 전

당시 라파엘로는 우르비노의 유명한 화가 페루지노의 제자로 화가수업을 받습니다.

 

 

Parnasus. c. 1509-1510. Fresco. Vaticano, Stanza della Segnatura, Rome

 

 

Raphael.  Disputa. 1510-1511. Fresco. Vaticano, Stanza della Segnatura, Rome

 

 

Raphael.  The Virtues. 1511. Fresco. Vaticano, Stanza della Segnatura, Rome

 

 

Raphael.  The Expulsion of Heliodorus. c.1512. Fresco. Vaticano, Stanza di Eliodoro, Rome

 

 

Raphael.  The Mass at Bolsena. 1512. Fresco. Vaticano, Stanza di Eliodoro, Rome.

 

 

Raphael.  The Freeing of St. Peter. 1514. Fresco. Vaticano, Stanza di Eliodoro, Rome.

 

 

Raphael.  The Sibyls. 1511-1513. Fresco. Saint'Agostino, Rome, Italy

 

 

Raphael.  The Burning of the Borgo. 1514. Fresco. Vaticano, Stanza dell'Incendio, Rome.

 

 

Raphael.  The Battle of Ostia. 1514-1515. Fresco. Vaticano, Stanza dell'Incendio, Rome.

 

 

Raphael.  The Coronation of Charlemagne.

c 1516-1517. Fresco. Vaticano, Stanza dell'Incendio, Rome.

 

아테네 학당과 마찬가지로 라파엘로는 천정이 아치형인 벽화를 좋아했다.

이는 로마네스코 미술의 상징이다. 

 

 

 

 

 

 

 

 

 

 

 

 

 

 

 

 

 

 

 

 

 

 

 

 

 

 

 

 

 

 

 

 

 

 

 

 

 

 

 

 

 

 

 

 

 

 

 

 

 

 

 

 

 

 

 

 

 

 

 

 

 

 

 

 

 

 

 

 

 

 

 

 

 

 

 

 

 

 

 

 

 

 

 

 

 

 

 

 

 

 

 

 

 

 

 

 

 

 

 

 

 

 

 

 

 

 

 

 

 

 

 

 

 

 

 

 

 

 

 

 

 

 

 

 

 

 

 

 

 

 

 

 

 

 

 

 

 

 

 

 

 

 

 

 

 

 

 

 

 

 

 

 

 

 

 

 

 

 

 

 

 

 

 

 

 

 

 

 

 

 

 

 

 

 

 

 

 

 

 

 

 

 

 

 

 

 

 

 

 

 

 

 

 

 

 

 

 

 

 

 

 

 

 

 

 

 

 

 

 

 

 

 

 

 

 

 

 

 

 

 

 

 

 

 

 

 

 

 

 

 

 

 

 

 

 

 

 

 

 

 

 

 

 

 

 

 

 

 

 

 

 

 

 

 

 

 

 

 

 

 

 

 

 

 

 

 

 

 

 

 

 

 

 

 

 

 

 

 

 

 

 

 

 

 

 

 

 

 

 

 

 

 

 

 

 

 

 

 

 

 

 

 

 

 

 

 

 

 

 

 

 

 

 

 

 

 

 

 

 

 

 

 

 

 

아테네학당도 마찬가지지만 라파엘로가 그린 벽화 가운데는

천장이 활과 같은 곡선으로 돼있는 아치형을 한 작품들이 많습니다.

둥근 아치형의 지붕 밑에서 여러 사람들이 토론하고, 종교적 의식이나 모임을 갖는 거죠.

‘성체논의(디스푸타)’, ‘파르나소스’, ‘헬리오도로스의 성전추방’, ‘볼세나의 미사’ 등

상당 수의 작품들이 아치형입니다.

로마풍이라는 어원을 가진 로마네스코 예술의 대표적인 형태라고 볼 수 있습니다.

 

  

 

라파엘로의 ‘빈도 알토비티’는 수난을 당하기도

 

 

 

 

Raphael. Portrait of Bindo Altoviti.

c.1515. Oil on wood. The National Gallery of Art, Washington DC, USA

돈 많은 은행가의 아들 <빈도 알토비티 초상화>

라파엘로의 초상화라는 한 미술가의 주장때문에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Bindo Altoviti (b.1491-?) was a Florentine banker, who lived in Rome.

He commissioned his portrait when he was young. 

 

 

 

 

 

 

 

 

 

 

 

 

 

 

 

 

 

 

 

 

 

 

 

 

 

 

 

 

 

 

 

 

 

 

 

 

 

 

 

 

 

 

 

 

 

 

 

 

 

 

 

 

 

 

 

 

 

 

 

 

 

 

 

 

 

 

 

 

 

 

 

 

 

 

 

 

 

 

 

 

 

 

 

 

 

 

 

 

 

 

 

 

 

 

 

 

 

 

 

 

 

 

 

 

 

 

 

 

 

 

 

 

 

 

 

 

 

 

 

 

 

 

 

 

 

 

 

 

 

 

 

 

 

 

 

 

라파엘로의 그림 가운데 가장 명작으로 꼽히는 그림은

은행가 집안의 상속자이자 대단하게 잘 생긴 미남 빈도 알토비티의 초상화입니다.

그러나 아름다운 이 그림은 한 감식가의 모호한 말 한 마디에

라파엘로가 그린 자화상으로 유명세를 타게 됩니다.

그림 속 주인공이 라파엘로인지 아닌지에 대한 논란으로도 유명합니다.

신비스런 표정과 아름다운 채색감으로 그가 그린 명작 중에서도 명작으로 손꼽히는 작품입니다.

그림은 파란만장한 인생유전을 겪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1512년경 라파엘로가 빈도 도 알토비티의 초상화로 피렌체에서 그림을 그렸지만

유명한 감식가이자 화가인 바사리의 말 한마디로 라파엘로의 자화상으로 오인됩니다.

그 후 독일의 황태자가 소유하다가

19세기 말에는 라파엘로의 작품이 아니라고 부정 당하는 수모를 겪기도 합니다.

히틀러 정권 아래에서 외면당한 이 그림은 영국으로 빼돌려졌고

다시 돈 많은 미국인 사업가에 의해 미국에 오게 돼 현재는 워싱턴 미국국립미술관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어쨌든 라파엘로는 300여 점의 작품을 남기면서

우르비노 지방화가에서 바티칸 교황청 궁정화가에 이르기까지

최고의 사회적 영예와 세속적 성공을 누린 예술가입니다. 교황도 성실하고 온화한 라파엘로에게 매료돼

그에게 추기경이라는 아주 높은 직위를 선사하려고 했고 라파엘로도 그런 명예를 누리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기다려주지 않습니다. 천재 화가 라파엘로는 37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등집니다.

아마도 그가 광적인 화가 다 빈치처럼 68세 정도까지 오래 살았다면

아마 3천 점 이상의 작품을 내고 르네상스의 미술을 좌지우지하는 대단한 화가로 남았을 겁니다.

 

 

 

바사리, “라파엘로, 여자에 너무 빠져 빨리 죽어”

재미 있는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당시 화가이자 미술사학자라고 할 수 있는 바사리는 라파엘로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라파엘로가 일찍이 세상을 뜬 것에 대해서 여자에 너무 빠져 몸이 허약해져 죽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라파엘로가 ‘빵집 아가씨’를 좋아했는데도 결혼을 하지 않았던 것은

추기경에 대한 욕심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기록한 바로 그 사람입니다.

그는 라파엘로가 너무 이기적이고 권력에 눈이 어두워

사랑하는 사람을 헌신짝처럼 걷어찼다고 비난했습니다.

바사리의 기록에 따르면 그가 1520년 4월6일 세상을 떠난 것은

그 전날 밤 그의 애인이자 모델인 ‘빵집아가씨’와 지나친 섹스 때문이라는 겁니다.

라파엘로는 그날 이후 심한 고열과 두통에 시달립니다.

 

병원을 찾아간 그는 의사가 “어떤 특별한 일이 있었느냐?”라는 질문에

“아무런 일이 없었다”고 대답합니다. 그러자 의사는 처방을 잘못했고,

그래서 죽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바사리의 주장은 만약 라파엘로가 의사에게 솔직하게 지나친 섹스 때문에 병에 걸렸다고 고백했다면

그에 맞는 처방을 받아 죽지 않았을 거라는 이야기입니다. 글쎄 약간 황당한 기록이기도 합니다.

바사리가 어떻게 과도한 섹스 때문에 병에 걸렸고, 또 처방을 잘못해서 라파엘로가 죽었다는 것까지

어떻게 알았을까요? 알고는 지냈겠지만 그렇게 친한 사이도 아닌데 말입니다.
그러나 바사리는 당시 화가는 물론 작품에 대해 너무나 많은 기록을 남긴 학자입니다.

또 유일한 사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그래서 믿을 도리밖에 없습니다.

라파엘로는 죽음에 임박해서 애인인 ‘빵집 아가씨’에게 평생 살아갈 수 있는 돈을 남겼습니다.

이것도 바사리의 기록에 따른 것입니다.

바사리는 재미 있는 기록을 남깁니다.

라파엘로가 태어난 1483년 4월6일도 예수가 돌아가신 성금요일(Good Friday)이며

죽은 1520년 4월6일(또는 3월28일)도 성금요일이었다는 겁니다.

즉 성금요일에 태어나서 성금요일에 세상을 떴다는 이야기죠.

기독교적으로 이야기 할 때 좋은 이야기인가요 나쁜 이야기인가요?


 


“자연이 두려워한 자연주의 화가”

르네상스의 최고의 화가 라파엘로는 이렇게 생을 마쳤습니다. 그의 묘비에는 이렇게 쓰여져 있습니다. “Here lies that famous Raphael by whom Nature feared to be outdone while he lived,

and when he died, feared herself to die.

살아있는 동안 자연은 그가 자신보다 더 뛰어날까 봐 두려워했으며

죽어서는 자연 역시 죽을까 봐 두려워했던 유명한 라파엘로가 여기 잠들어 있다.”

자연보다 더 자연적인 것이 바로 라파엘로였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라파엘로가 죽으니까 자연도 혹시 죽는 거 아닐까 하고 두려워했다는 이야기죠.

자연을 흉내 내려고 했던 르네상스 미술가 가운데서

라파엘로가 가장 자연주의적이었으며 최고라는 설명이죠.

라파엘로 이야기는 이제 이 정도로 마무리하겠습니다.

 

- 김형근 편집위원

- 2008.07.01 ⓒ ScienceTim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