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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 바젤미술관 - 무덤 속의 그리스도 / 오디세우스와 칼립소

Gijuzzang Dream 2009. 7. 8. 23:37

 

 

 

 

 

 

 

 스위스 바젤미술관(Fondation beyeler) 

 

 

 

 

 

스위스 바젤미술관은 유럽 최초의 공공 미술관이다.

바젤 미술관이 대중들에게 처음 공개된 배경은 수집가들이 시민계급이었기 때문이다.

프랑스와 독일이 인접해 있는 스위스 바젤은

중세 중엽 인쇄술이 발명된 지 얼마 되지 않아서부터 중세 인문주의 사상의 중심지가 되었다.

바젤미술관이 설립된 때는 1662년. 유명한 바젤대학의 부설기관으로 문을 열었다.

교황 피우스 2세에 의해 1460년 스위스 최초의 대학으로 설립된 바젤대학은

한때 인문주의자 에라스무스가 가르치는 등 휴머니즘과 프로테스탄트 운동의 중심지로 성가를 높였다.

그런 기초가 이렇듯 세계 최초의 공공미술관을 낳은 좋은 배경이 되어 주었다.



미술관 컬렉션의 모태는 시민계급으로 열정적인 수집가였던 ‘바실리우스 아머바흐’라는

출판업자 · 법학자 가문의 3대가 모은 회화 49점, 드로잉 1866점, 판화 3881점 등 총 5000여점의 미술품.

소장품을 죽으면서 네덜란드에 기증하기로 했다. 이에 바젤 대학교수들은 시 당국을 설득해

1661년 당시로서는 고가의 소장품들을 시에서 구입하게 한다.
예술과 미학을 중요시했던 인본주의 사상의 영향으로 바젤은 순수 미술이 발달하게 되었으며,

시민 계급은 자국의 예술가들에게 자부심을 가졌고 그들을 후원하고 그들의 작품을 구입해 수집한다.

 

1671년, 아머바흐 소장품들은 일반 대중들에게 공개되어 유럽 최초의 공공 미술관이 창설된다.

귀족들이 예술품을 감상하기 위한 목적으로 개관했던 유럽의 미술관과는 다르게

당시로서는 획기적이었다.


바젤미술관은 시민계급의 소장품으로 개관했기 때문에

12세기부터 20세기의 미술품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소장하고는 있지만

17세기 유럽의 귀족들에게 사랑받았던 바로크나 로코코 예술품들이 거의 없는 것이 특징이다.

다른 나라에서는 미술 컬렉션이 아직 왕후장상들을 주된 소유층과 감상층으로 하고 있던 무렵

일반 시민을 대상으로 한 최초의 공공미술관을 창설했다는 점에서

당시 이 도시공화국의 남다른 선진성을 읽을 수 있다.

바젤미술관의 이런 선진성은

바젤에서 태어났거나 활동한 작가들의 작품에서도 선명하게 나타나는 특징이다.

이는 이 도시가 종교개혁의 세례를 받고 그 이상 아래 발전해왔다는 사실과 깊은 관계가 있다.

주지하듯 스위스는 독일과 함께 주요 종교개혁의 진원지였다.

특히 바젤은 에라스무스를 비롯해 츠빙글리, 칼뱅 등 저명한 인문주의자와 종교개혁가의 영향이

두루 미친 곳이다. 철저한 실증주의적 전통과 휴머니즘의 공기를 호흡한 바젤 작가들의 작품에서는

그래서 치밀한 조형의식과 더불어 실존주의적인 근대인의 정신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남부 독일 아우크스부르크 태생이지만 한동안 바젤에서 활동한 16세기의 거장 ‘작은’ 한스 홀바인이나

19세기 상징주의의 대가 아르놀트 뵈클린, 사회적 사실주의 경향의 농촌화가 알베르트 앙커 등이

그 대표적인 면면이다. 홀바인의 경우 소장품 수로 보자면 이 미술관의 컬렉션이 세계 최대이다.

 

 

 

 

 

 

 

 한스 홀바인 <무덤 속의 그리스도>

 

 

신앙심을 버리게 하는 작품

도스토예프스키는 이 작품을 보고 공포에 휩싸여


 

<무덤 속의 그리스도>

 The Body of the Dead Christ in the Tomb

1522년, 나무에 템페라, 30×200 


 

바젤 미술관은 특히 홀바인의 작품을 많이 소장하고 있다는 것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데

홀바인의 작품 중 해부학적으로 인체를 철저하게 관찰해 표현한 작품이 <무덤 속의 그리스도>이다.

이 작품은 당시 신성시되었던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를 인간적인 모습으로 표현하기 위해

사실적으로 묘사했다.


흰 천이 깔린 바닥 위에 시신이 길게 누워 있다.

바짝 말라 명태처럼 굳어버린 몸뚱이, 갈색으로 타버린 얼굴과 손, 발,

주검의 참혹한 형상은 차마 똑바로 쳐다볼 엄두를 내기 어려울 정도다.

신의 아들로서의 위엄이나 권위는 어느 한구석 찾아볼 수 없다.

주검에 대한 철저한 자연과학적 관찰과 상황에 대한 객관적 인식만이 도드라져 보인다. 


좁은 공간에 누워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입술은 창백하며 얼굴은 짙은 녹색으로 변해 있다.

피로 물든 갈비뼈 주변의 상처는 녹회색으로 변해가고 있으며 발의 상처는 검은색으로 변했다.

상처의 색은 예수 그리스도가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것을 암시한다.

섬뜩할 정도로 사실적으로 묘사된 예수 그리스도의 시신은 처참하게 죽은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지만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스스로 고통 속으로 걸어갔던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야 한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30.6x200cm의 긴 화폭에 일직선으로 굳은 시신을 눕히고,

이를 받치고 있는 또 다른 수평의 세마포가 깔린 시체 지지대가 있을 뿐이다.

죽은 그리스도의 주검이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다.

눈은 멍하니 뜬 채로 정지되어 있고, 입은 열친 채로 숨을 멈췄다.

그리고 그 산발한 듯한 머리와 수염, 초록으로 변한 굳은 손등 위에 못 박힌 흔적이 뚜렷하고,

발도 검게 타 있는데, 발목 밑의 못 자국이 이미 썩어 들어가고 있다.

참담하게, 영락없이 버려진 보통 사람일 뿐인데 옆구리의 창 찔린 흔적과 손과 발의 못 자국만이

그가 예수님임을 확인시켜 준다.

관 상단에 ‘유대인의 왕 나사렛 예수’라고 새겨 놓았다. 거기에 절제된 색이 긴장감을 더해 준다.

이런 참혹성 때문이었는지 홀바인이 무신론자였을 것이라는 주장이 심심찮게 제기되고 있다.

물론 무신론자가 보면 자기 자신도 구원 못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조롱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믿음의 눈으로 보면

그 참담함에 담긴 한없는 경건과 경외 그리고 넘치는 감사와 겸손을 느낄 수 있다.

엄숙한 리얼리티 앞에서 그림자와 같은 인생의 본질과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죽음의 엄정성을 생각게 한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동정을 유발시키는 것이 아니라, 공격적인 도발이다.

- 부분 인용 : 이석우 교수(경희대 사학과, 서양사 전공) ⓒ 크리스찬투데이

 

한스 홀바인(Holbein, Hans,1497∼1543)은

영국 헨리 8세의 궁정화가가 되기 전 바젤에 살면서 그의 나이 스물넷에

부유한 상인 한스 오버리트에 의뢰를 받아 그린 제단화인데,

1521년 이 작품을 제작했으며 1522년 극단적으로 긴 수평적 구성을 지닌 이 작품을 완성했다.

시선을 사로잡는 그 고밀도의 표현력은 이미 대가의 수준을 넘어섰다.

이처럼 철저히 실존주의적인 정신을 표현한 데서

인문주의자로서 홀바인의 선구적인 시각과 자길을 읽게 된다.

그는 바젤로 이주해오면서 미니코니우스라는 한 인문주의자로부터 형과 함께

에라스무스의 <우신예찬>을 학습했다. 그리고 작가로서 명성이 쌓이면서부터는

에라스무스와 직접 교분을 쌓는 한편 그의 초상화를 그려주기도 했다. 이런 교유관계가 말해주듯

그는 그 시대 인간의 본성을 정확히 읽고 표현할 줄 알았던 극소수의 화가 중 한 사람이었다.

이 그림이 당시 홀바인에게 전유럽적 명성을 가져온 최초의 작품이었다.

홀바인은 반듯하게 누워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자세를

그뤼네발트의 <이젠하임 제단화>와 프리델라의 <제단화>에서 영감을 얻었다.

러시아의 문호 도스토예프스키는 오로지 이 작품을 보기 위해 바젤에 들렸으며

얼마나 충격적이었던지 이 작품을 보고 간질 발작을 일으킬 정도로 공포에 휩싸였다.

그는 <백치>에서 미슈킨 공작의 입을 통해 신앙심을 버리게 할 정도의 작품이라고 말했다.

 

 


 

 

 

 아놀트 뵈클린의 <오디세우스와 칼립소>

 


홀바인을 비롯해 바젤에서 활동했던 예술가들을 후원해주었던 전통은

19세기 상징주의의 대가 아놀트 뵈클린에게까지 이어진다. 

뵈클린은 바젤 출신으로 고대에 뿌리를 둔 소재를 다루는 화가로 당대에 가장 명성이 높았다.

고대 신화에 뿌리를 둔 뵈클린의 작품 중 가장 걸작은 <오디세우스와 칼립소>다.

이 작품은 사랑하는 연인을 붙잡고 싶어하는 여인의 외로움을 표현한 작품이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오디세우스와 칼립소>

1883년, 나무에 유채, 104×105


 

항해 중이던 오디세우스는 메시나 해협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엄청난 소용돌이를 만나게 된다.

그곳에서 오디세우스는 6명의 선원을 잃어버리고 태양에게 바쳐진 가축 떼들이 풀을 뜯는 섬에 도착한다.

굶주린 생존자들은 오디세우스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가축들을 잡아먹는다. 

분노한 신은 오디세우스와 선원들이 바다로 나가자 폭풍우를 일으킨다.

폭풍우에 선원들은 다 죽고 유일하게 난파선 파편에 의지한 오디세우스만

지브롤터 해협 근처에 있는 칼립소 섬에 닿게 되었다.

아름다운 님프 칼립소는 오디세우스를 보자마자 사랑에 빠져

무려 7년 동안 동굴에 붙잡아두고 사랑을 나누었다.

칼립소는 자기 곁에 있으면 영원한 젊음과 불멸을 선사하겠다고 약속하지만

오디세우스는 아내 페넬로페와 고향 이타카를 그리워한다.

제우스신은 그의 마음에 감동하여 칼립소에게 오디세우스를 놓아주도록 명령을 했다.

음식과 뗏목을 오디세우스에게 준 칼립소는 불멸의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슬픔에 겨워 죽음에 이른다.

칼립소는 악기를 든 채 고개를 돌려 한없는 눈길로 오디세우스를 바라보고 있다.

오디세우스는 영원한 젊음보다는 헤어져 있는 아내 페넬로페가 그리워 바다만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다.

오디세우스는 상념에 빠져,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사랑을 바라보고 있는 칼립소를 외면하고 있다.
뒤돌아서 있는 남자와 그를 바라보고 있는 여인은 모든 면에서 강한 대비를 이루고 있는데

두 사람의 현재 심정을 극적으로 강조해 표현했다.

풀 한 포기 없는 동굴 앞에서 칼립소는 붉은 천 위에 앉아 있는데

붉은 천은 쾌락을, 악기는 사랑을 암시한다.

우윳빛의 살결을 드러내고 있는 칼립소의 육체는

오디세우스에게 영원한 젊음을 주겠다고 한 약속을 나타낸다.

아놀트 뵈클린(Arnold Bocklin, 1827∼1901)은 이 작품에서 검은색과 붉은색, 인물의 대비를 통해

사랑의 이중성을 표현했다. 사랑은 기쁨을 선사하지만 헤어지는 고통도 선사하고 있다는 암시이다.

또 칼립소가 입고 있는 황금색의 베일은 사랑의 기쁨을 상징하고 있다.

 

 

 

고향에 돌아가고 싶은 마음과 붙들고 싶은 안타까움이 '대비'

 

호메로스(Homeros, BC 800년경)의 <오디세이아(Οδύσσεια)(Odyssey)>는 전 24권의 서사시이다.

<오디세이아>에는 오디세우스를 뛰어난 지혜 · 언변 · 지략 · 용기 · 인내를 지닌 인물로 그리고 있다.

오디세우스는 목마를 이용해 트로이를 점령하는 ‘트로이전쟁(The Trojan War)’이 끝난 뒤

오디세우스의 귀향, 특히 귀향 막바지 상황에 초점을 맞춰 쓴 글이다.

 

이오니아해의 섬 이타카(Ithaca)의 라에르테스왕과 안티클레이아 사이에서 태어난

오디세우스 [Odysseus, (라틴어)Ulixes 울릭세스, (영)Ulysses 율리시스]는 이타카의 왕이었으며

아내인 페넬로페와의 사이에 텔레마코스를 낳았다.

 

헬레네가 트로이로 납치되었을 때 오디세우스는 미친 척 하며 헬레네의 구조 원조를 거부하였으나

곧 거짓임이 탄로나 결국 그리스 정복군이 되어 트로이원정에 참가하게 되었다.

트로이 전장에서 영웅적 활약으로 10년을 보낸 오디세우스는 고향으로 돌아가는데,

또 다시 10년의 세월을 소모한다. 그 10년은 무엇보다 바다의 신 포세이돈의 노여움으로 인해

바다 위에서 곤란에 찬 세월이었고 힘겨운 생존투쟁을 했던 시기이도 하다.

 

한편, 여신(혹은 님프)인 ‘칼립소(Calypso)’는 티탄족 아틀라스의 딸이라고도 하고,

태양신 헬리오스의 딸이라고도 한다. 그녀의 이름은 ‘숨기는 여인’이란 뜻을 갖고 있다.

칼립소는 난파하여 자신의 섬 오기고스에 떠내려 온 오디세우스에게 반하여

자신의 곁에 있어주면 영생을 주겠다고 약속하고 극진한 대접과 애틋한 사랑을 주었다.

 

 

 

고향 이타카(Ithaca)를 열렬히 그리워하던 그리스신화의 위대한 영웅 오디세우스를 칼립소는

그녀의 이름 의미에 걸맞게 7년동안 자신의 섬 오기고스에 붙잡아 머무르게 한다.

옛유럽 귀족들의 피서용 돌집인 그로트를 크게 확대해놓은 듯한 동굴 안에는 기화요초와

아름다운 과실이 지천으로 널려 있다. 만개한 꽃과 무르익은 과실은 농익은 사랑을 상징한다.

  

오디세우스와 칼립소가 있는 환상적인 동굴 풍경

(A Fantastic Cave Landscape with Odysseus & Calypso)

Jan Brueghel the Elder(1568-1625)

  

 

아름다운 여인과 땅, 그러나 오디세우스에게는 갈 곳이 있고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고향이 그리워진 오디세우스는 자주 망망대해를 바라보며 눈물을 흘렸다.

아테나의 강력한 요청으로 제우스가 칼립소에게 오디세우스를 돌려보내라고 명령하지 않았다면

오디세우스는 영원히 그렇게 살아야 했을 것이다.

칼립소는 슬픔을 억누르며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은 오디세우스를 떠나보내기로 허락한다.

오디세우스가 험한 바다를 무사히 항해할 수 있도록 뗏목 엮는 법도 가르쳐주고,

빵과 물과 포도주를 넉넉하게 마련해준다.

 

 

오디세우스와 이별하는 오기고스 섬의 님프 칼립소

 

오디세우스는 바닷가 가까이에 서있는 나무 스무 그루를 찍어 조그만 쪽배를 만들고

제일 길고 곧은 전나무는 배 한 가운데 세워 돛대로 삼았다.

칼립소가 가져다 준 튼튼한 무명천으로 돛을 만들었다.

칼립소가 준 통가죽을 가늘게 자르고 몇 개씩 모아 꼬아서 밧줄과 마룻줄을 만들고

나흘동안 준비한 그는 닷새째가 되자 쪽배 밑에 통나무를 깔고 쪽배를 바다로 밀어 넣었다.

칼립소는 험한 뱃길을 견딜 수 있도록 튼튼한 옷과 물과 포도주가 가득 들어있는 가죽부대와

먹을 것을 실었다. 이윽고 칼립소와 이별을 한 오디세우스는 바다로 향했다.

돛은 칼립소가 보내준 순풍의 도움으로 부풀어 올랐다.

칼립소는 홀로 동굴로 돌아가고 오디세우스는 무사히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된다.

 

   

난파당해 오기고스 섬으로 떠내려 온 오디세우스를 아름다운 음악으로 그의 마음을 사로잡아

외딴 섬에 묶어둔 님프 칼립소는 고향을 그리워하며 먼 바다를 향해 등을 돌리고 선 오디세우스의

고뇌에 찬 모습을 악기를 든 채로 그의 뒷모습을 애타게 바라보고 있다.

그녀의 애절한 사랑은 환한 빛을 받으며 강렬하게 빛나고 있다.

떠나는 사람과 남아있는 사람의 두 마음이 보여주는 대조는 그림 전체에 강한 긴장감과 함께

애틋한 비애가 서리도록 만든다. 극적으로 강조된 칼립소의 사랑이 가슴 속으로 고통스럽게 배어든다.

 

 

 

두 연인의 끝없이 어긋나는 심리상태를 묘사한 그림을 그린 아르놀트 뵈클린(Arnold Bocklin)은

떠나고 싶은 남자의 냉정한 마음과 붙들고 싶은 여인의 안타까운 심정을

색채와 명암을 대비시켜 표현하고 있다.

칼립소는 몸을 앞으로 향하고 있지만 오디세우스는 등을 보이고

칼립소는 거의 벗은 몸이지만 오디세우스는 옷을 꽁꽁 여며 입었고

칼립소의 몸은 환하고 밝게 빛나지만 오디세우스의 옷색은 짙은 어두움이고

칼립소의 배경은 짙고 폐쇄적인 바위, 오디세우스의 배경은 개방적인 환하고 연한 하늘과 바다이다.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 없는 바위섬의 풍경이 자아내는 단순함은

두 연인의 대조적 분위기를 더욱 장엄하고 절제된 분위기로 이끈다.

마치 그리스 비극의 한 장면을 연극무대에서 보고 있는 듯한 이와 같은 고전적인 분위기는

오디세우스의 일화와 아주 잘 어울리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건축물, 아름다운 자연풍경도 없지만 그런 부재가

오히려 이 그림의 주제를 좀 더 명확하게 부각시켜 준다.

 

다른 한편으로 화면의 대부분을 덮고 있는 어두운 그늘과 칼립소가 앉아있는 붉은 천은

인간의 심리를 극명하게 상징하고 있다.

고전적 테마와 낭만적 감정이 혼합된 매우 상징적인 장면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랑은 이 그림에서 두 가지 모순된 색의 공존으로 표현된다.

슬픔과 죽음을 표현하는 검은색과 사랑과 쾌락을 표현하는 붉은색이 공존하는 이 그림에서는

갈등과 비극적 결말이 두 색의 대조를 통해 암시되며 사랑의 상반된 두 가지 면을 드러낸다.

 

뵈클린은 붉은색을 반드시 써야 할 곳에 가장 의미심장하게 쓸 줄 아는 화가였다.

이 그림에서도 붉은색이 없었다면 아무 의미 없는 그림이 되었을 것이다. 

붉은색 천은 오디세우스를 향해 팔을 뻗고 있는 것처럼 그려져 있다.

절규하는 듯한 붉은 빛의 애틋함은 칼립소의 마음을 잘 표현하고 있다.

칼립소는 오디세우스에게 다가가지도 못하고 오히려 바위 뒤에 숨어 입을 굳게 다문채

한 팔을 바위에 고정시킨 채 앉아 그녀를 감싸고 있는 붉은 천만이 여인의 감정을 솔직하게 전하며

그림자처럼 어려 있다. 가슴을 찌르는 듯한 감정묘사라 할 수 있다.

 

그녀의 몸에는 피할 수도 없고 꼼짝할 수 없는 운명의 잔인한 사슬이 보이지 않게 씌워져 있는 듯하다.

하반신을 가린 황금빛 베일은 그녀의 두 발을 무겁게 휘감아 움직이지 못하게 만든다.

오직 악기를 든 한 팔만 자유로울 뿐이다.

영원히 슬픈 노래를 연주하게 될 그녀의 운명은 슬픔을 위해서만 존재한다.

그 악기마저 어둠의 그늘에 잠겨 있다.

 

이별은 오로지 그녀의 몫으로만 남겨졌고

등을 돌린 오디세우스는 그녀에 대해 아무 생각조차 없어 보인다.

그와의 거리는 멀게만 느껴지고 그는 이미 다른 세상으로 강을 건너가 버린 존재와도 같다.

등을 돌린 그는 얼굴이 보이지 않지만 뒷모습은 여전하다.

이처럼 세밀하게 이별하는 여인의 심리를 묘사하는 것을 볼 때

뵈클린은 분명 연인과의 가슴 아픈 이별을 경험한 것임에 틀림없다.

사실 뵈클린에게는 젊은 시절 사랑하던 여인이 있었다.

1849년 프랑스대혁명의 불길이 꺼져갈 즈음 약혼식을 올렸다.

그러나 약혼녀는 이듬해 사고로 죽게 되고,

그는 연인과의 이별을 벗어나기 위해 그림에 몰두했던 것이다.

- 이주헌의 신화그림으로 읽기,  '칼립소와의 이별'

- 그림속 연인들, 박정욱, 예담, 2006 p191-95

   

 

- 박희숙 서양화가, 미술 칼럼니스트 [명화산책]

- 2009.06.30 ⓒ ScienceTim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