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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 한번 만난 30년 지기, 조선인 이상적과 淸人 王鴻의 우의가 깃든 그림

Gijuzzang Dream 2009. 6. 8. 22:20

 

 

 

 

 

 

 딱 한번 만난 30년 지기,

 조선인 이상적과 淸人 왕홍(王鴻)의 우의가 깃든 그림 

 

 

 

 

이상적(李尙迪, 1804∼1865)은 19세기 조선의 한역관(漢譯官)으로, 지금의 중국어 동시동역관 정도이다. 그는 공식 사행원으로 청에 건너간 1829년부터 세상을 떠난 1865년까지 12차례나 연행(燕行) 길을 올랐다.

그가 37년이라는 세월 속에 많은 청의 문사들과 교분을 가졌는데, 그 수는 70여명에 가까웠다.

그중에서도 유독 많은 편지가 오고 간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은 바로 왕홍(王鴻, 1806~?)이라는 청나라 문인이다. 사실 그는 고관대작도 아니었고

겨우 53세가 되어야 산동성 연성(聯城)의 지현(知縣)이라는 관직을 받았을 뿐이다.

조선의 벼슬로 치면 종 6품인 현감내지 현령 정도였다.

그러나 이마저도 지병 때문에 얼마 못가 사직하였다. 이력으로 따지면 내놀만한 것이 없었던 인물이었다.

 

이상적이 그를 만나게 된 때는 4번째로 연경(燕京, 지금의 베이징) 땅을 밟았을 때인 1837년 음력 7월이다.

왕홍은 조선 사행원들의 숙소로 찾아와 이상적을 만나고자 하였는데,

이유는 그와 시문을 나누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이미 연경의 문사들 사이에서는 이상적의 詩名이 자자하던 터였다.

이렇게 대면한 두 문사는 이내 친해져 시문과 술잔을 주고받으며 우의를 다져갔다.

그렇지만 한 달이 채 못 되는 기간은 너무나 짧았다.

공식적인 업무다 뭐다 빼고 나면 그마저도 만날 시간은 더욱 적었을 것이다.

 

왕홍은 이상적과의 이별을 아쉬워하는 절절한 마음을 이렇게 글로 남겼다.

 

“우연히 연경에서 만나 술에 취하고 시를 논하였고 중국 밖의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곳은 산과 바다가 웅장하고 기이하며 사람들은 고대의 유풍을 간직하고 있으며 시와 글씨는 고졸합니다.

형과는 문자와의 인연으로 인해 한번 보고 그만 마음을 빼앗겨 버렸습니다.”

 

왜 왕홍은 이상적에게 이렇게 매료되었을까? 아마도 두 문인 모두가 시에 능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왕홍은 관료로서의 길이 순탄하지 않았지만

그는 당대 문학가인 장상하(張祥河)의 막하에 있으면서 시문을 연마하는 등,

문학가로서의 길을 차분히 걸었던 문인이었다.

 

이상적은 조선시대의 내로라하는 역관 가문의 후손으로,

헌종 임금께서 그의 시를 애송하였을 정도였으니 시의 품격을 굳이 말하는 것이 구차스럽기까지 하다.

 

이렇게 만난 두 문사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시인으로서 서로를 격려하고 때로는 筆戰을 가지기도 하였다.

즉, 친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두 사람이 만난 것이었다.

 

왕홍은 이처럼 마음을 담은 진솔한 글을 남긴 뒤, 곧바로 山東省 곡부(曲阜)로 내려가게 되었다.

그는 관직에 나가지 못한 터라 딱히 연경에 있기에는 부담스러웠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의 곡부행은 조선 친구 이상적과의 영원한 이별의 시작이 되고 말았다.

왕홍은 지방에 내려간 뒤에 과거 시험을 보기위해, 혹은 다른 일 때문에 연경에 올라왔지만

이상적과는 항상 엇갈린 발걸음을 하곤 하였다.

그는 연경에 와서 주위 사람들에게 이상적의 근황을 물었고 편지를 남겨두고 떠나곤 하였다.

이상적 역시 연경에 와서 왕홍의 편지를 보고 다시금 답장을 남겨두고 귀국하였다.

 

이렇듯 두 문인은 연경에서 시문수창(詩文酬唱)하던 날들을 잊지 못하고 인편을 통해 편지를 계속 전하며

인연을 이어갔는데, 왕홍이 이상적을 생각하는 마음이 조금은 더 간절했던 것 같다.

그는 첫 만남을 잊지 못하였기에 1840년경에 이를 그림으로 남기고자 작정하였다.

그래서 북경에 잠깐 올라왔을 때, 아집도나 소조(小照, 작고 간솔한 초상화)의 제작을 전담하다시피 했던

오준(吳儁)에게 <옥하청선도(玉河聽蟬圖)>를 부탁하였다.

이 그림은 나무아래 두 문사가 이런 저런 담화를 나누는 장면이 표현되어 있다.

첫 만남을 가진지 5년여만의 일이다.

요즈음 사람 같았으면 벌써 그 관계가 소원해졌을 법한데,

아니 한 번 만난 정도로 서로를 벗 삼지도 않았을 것인데,

두 문인을 보면 인연을 맺어가는 先人들의 아름다움에 반할 뿐이다.

 

왕홍은 <옥하청선도>가 그려진지 5년이 지난 1845년에 또 하나의 작품을 오준에게 의뢰하였다.

<춘명육객도(春明六客圖)>라 일컬어지는 그림으로,

1837년에 연행한 이상적을 위해 청조의 문사들이 베푼 연회를 표현한 것이다.

화면 속에는 이상적과 왕홍을 비롯하여 당시 참석하였던 공자의 후손 孔憲?와 왕홍 만큼이나

이상적과 절친하였던 장요손(張曜孫) 등, 6인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왕홍은 이 그림을 지니고 다니면서 이상적이 그리울 때면 펼쳐보며 실제로 만나듯 하였을 것이다.

또한 주위 문사들에게 보여 지난 날의 만남을 이야기 하곤 하였다.

 

이에 문사들은 이 그림을 당나라 때 호북성 죽계(湖北省 竹溪)에서 서로 벗하며 어울렸던

이백(李白) 등의 여섯 현인(죽계육일, 竹溪六逸)에 빗대기도 하고,

晉나라 때에 죽림에 모여 청담으로 세월을 보낸 阮籍을 비롯한 일곱 명의 선비의 모임(竹林七賢)에

비유하기도 했다. 이상적 역시 제시를 보내 왕홍의 간절한 마음에 화답을 하였다.

 

두 그림 중에 <옥하청선도>는 1844년에 왕홍의 품을 떠나 조선으로 건너오게 되었다.

제작된 지 대략 5년여 만에 이상적에게 온 <옥하청선도>는 청조 문사들의 많은 제발이 연이어져 있었다.

이를 받아 든 이상적은 어떤 기분이 들었을까?

왕홍을 만난 지 근 10여년이 되어 가기에 이제는 그 모습도 가물가물해져 갈 텐데

그들의 인연은 옅어져가는 기억과는 정 반대로 깊어만 갔던 것이다.

 

이후에도 둘 사이에는 많은 편지와 서화가 오가면서 서로의 생각과 근황을 교환하였지만

다시 보지 못함에 그리움은 사무쳐 갔다.

그래서 두 문인은 서로의 모습을 보여주고자 왕홍은 1858년에 53세가 된 자신의 모습을 그려서 보냈다.

기록상으로 이상적이 자신의 얼굴을 그려 보낸 예는 확인되지 않지만 분명 화답을 하였을 것이다.

두 문인은 소조(小照)를 그려 20여 년이 지난 자신의 모습을 벗에게 보여주었던 것이다.

요즈음으로 치자면 얼굴 사진을 찍어 메일로 보낸 셈이다.

두 문인은 각각의 소조를 보고 웃으면서도

지천명의 나이에 접어들어 변해 버린 친구의 모습에 서글펐을 것이다.

 

1860년대 초반에 이르러 이상적은 15년 전에 받은 <옥하청선도>를 아들 이용림에게 임모를 하게 하였고

완성된 임모본을 다시 왕홍에게 전하였다.

그림을 받은 왕홍은 나이게 맞지 않게 기뻐하며 가지고 다니며 여러 문인들의 제시문을 받았다.

옛 버릇이 다시 도진 것이다.

조금은 부산스럽게 느껴지지만 그래도 ‘얼마나 기뻤으면 그럴까’ 하고 이해할만하다.

 

세월은 계속 흘러갔지만 이상적과 왕홍에게 두 번째 만남의 기회는 결국 주어지지 않았다.

마치 누군가 장난이라도 하듯 두 문인이 연경에 온 시기의 차가 몇 개월에 불과할 때도 있었다.

1860년에 들어서도 한묵(翰墨)교유는 지속되었다.

 

왕홍이 생애 말년에 보낸 편지 중에는 아래처럼 애절하면서도 서글픈 사연을 담고 있는 것이 있다.

 

30년이나 절친하였지만 오직 한 차례 만남만을 허락하고

그 후에는 다시 보기 곤란하고 어려우니 편지를 이처럼 써 내려가다 애통한 마음을 추스를 수 없습니다.

형의 편지를 보니 마치 만나 뵈는 듯합니다.

저의 시집을 바로잡아 주실 것을 부탁하고자 보내며 형께서 대신 발간해 주실 수 있겠는지요.

<옥하청선도>는 화공의 오묘함이 뛰어납니다. 저는 장차 <춘명육객도>를 임모할 것이며

六客 像을 모각하여 題記 및 시문과 합하여 1부로 만들겠습니다.

형께는 장차 <옥하청선도>로 형과 저의 像을 모각함에 전의 것보다 공교히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마도 이 편지는 왕홍이 보낸 생애 말년에 가까운 편지로 생각된다.

 

 

왕홍은 시인으로서  자신이 이루어 놓은 작은 결실을 시문집으로 출간하고자 이상적에게 부탁하였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과 이상적간의 인연이 표현된 <춘명육객도>와 <옥하청선도>를 바탕으로

각각의 소조를 만들어 시문과 합할 것을 알렸다.

왕홍은 딱 한번 밖에 만나지 못한 조선인 이상적에게

자신의 지나온 삶속에서 중요한 두 가지를 부탁하고 공유하고자 하였던 것일까?

 

이 시기 이후 왕홍의 편지는 한 두통을 제외하고는 찾을 수 없었다.

두 문인이 세상을 떠나게 되면서, 딱 한번 만났을 뿐이지만

몇 겹의 산과 넓은 바다를 두고 이어져 온 30년 지기간의 아름다운 우애는 더 이상 지속되지 못하였다.

 

<옥하청선도>와 <춘명육객도>에 얽힌 19세기 조선과 청의 문인 간의 교우는 대강 이러하였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 작품은 현재 찾을 수 없다.

다만 오준이 그린 다른 작품을 보면서 두 그림을 머릿속에서 그려본다.

분명 두 작품은 그 내막을 아는 어느 수장가에게 비장되어 있을 것이다.

그 수장가가 이 그림들을 세상에 내놓아 옛 선인이 보여주었던 인연의 소중함과 우애의 돈독함을

우리들이 알 수 있도록 해주기를 기대할 뿐이다.

- 김현권, 문화재청 인천항 국제여객터미널 문화재감정관실 감정위원

- 2009-06-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