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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엉이에 얽힌 동서양의 비밀

Gijuzzang Dream 2009. 6. 6. 12:17

 

 

 

 

 

 

 부엉이에 얽힌 동서양의 비밀

 

 

“봉화산 뒤쪽 해발 80~120m에 있는 큰 바위로,

원래 이곳에 부엉이 떼가 서식하였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주민들 사이에서는 ‘자살바위’라는 명칭으로도 알려져 있다 한다.

바위 위로 올라가면 봉하마을이 보이게 되며, 노무현 전 대통령 생가까지 생생히 보이고

밑은 절벽으로 가파르다. 경사가 급하여 등산객이 잘 다니지 않는 곳으로 알려졌다가

2009년 5월 23일 노무현 전 대통령이 이 바위에 올라서 투신하였던 곳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상은 최근 위키백과에 올라와 있는 ‘부엉이바위’에 대한 설명이다.

언론을 통해서 많이 알려졌다시피

부엉이바위의 유래는 옛날 그곳에 부엉이가 살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실제로 우리나라의 텃새인 수리부엉이는

주로 인가 근처나 숲의 나무에서 생활하는 올빼미과의 다른 조류들과 달리

산의 암벽이나 강가의 절벽 같은 곳에서 산다.

 

둥지를 만드는 대신 깎아지른 듯한 암벽의 선반처럼 편평한 곳이나

바위벽 사이의 틈에 알을 낳아 새끼를 기른다.

때문에 봉하마을 외에도 부엉이바위 또는 부엉바위라는 이름이 붙은 곳이

전국적으로 많이 산재해 있다. 부엉바위가 있는 고개는 부엉재라고 불리며,

부엉이골ㆍ부엉산이라는 지명도 흔히 볼 수 있다.

수리부엉이가 이처럼 외진 곳에서 조용한 은둔 생활을 즐기는 데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

부엉이는 낮에는 바위 틈새나 큰 나뭇가지에 앉아 선잠을 자다가

해가 지면 눈을 뜨고 깨어나 활동을 시작한다.

따라서 무서운 사냥꾼으로 통하는 밤의 제왕 수리부엉이도

낮에는 행동이 불편에 곧잘 자기보다 덩치가 훨씬 작은 새들에게 당하곤 한다.

까마귀나 까치 혹은 다른 산새들은 낮에 부엉이를 발견하면 집단으로 에워싸 괴롭히는데,

부엉이는 쉽사리 덤벼들지 못하고 방어만 할 뿐이다.
때문에 그런 시끄러움과 소란을 피해 절벽 같은 바위에서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는 모양이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예술 작품 속에서 부엉이는 외로움과 쓸쓸함을 상징하는 단골손님으로 등장한다.

사극에서 사랑하는 임과 이별하고 혼자 지새우는 밤에는 꼭 부엉이 울음소리가 들리며,

문학 작품 속에서도 부엉이 울음은 적막한 밤의 풍경을 묘사하거나

암울한 사건의 복선으로 깔리곤 한다.



부엉이 울음에 거처를 옮긴 이성계

조선의 임금들도 부엉이를 매우 불길하게 여겨서,

부엉이 울음소리가 들리면 거처를 옮기거나 해괴제를 지내는 등 부산을 떨곤 했다.

조선왕조실록에 부엉이 울음소리가 처음 등장한 것은 1398년(태조 7) 9월 10일이다.

이날 밤 부엉이가 경복궁 북원에서 울어서,

정종에게 양위하고 상왕으로 물러나 있던 태조 이성계는 거처를 북쪽 양정(涼亭)으로 옮겼다.

당시는 이방원을 비롯한 태조의 첫째 부인 한씨 소생의 왕자들이
사병을 동원해

정도전 등의 반대파 세력과 태조의 둘째 부인 강씨 소생의 세자 방석과 그의 동복형 방번을 죽인

제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난 직후였다. 따라서 한밤중 경복궁에 울려 퍼진 부엉이 울음소리는

궁궐의 분위기를 더욱 으스스하게 만들었음이 틀림없다.

2년 2개월에 불과했던 정종의 재위 기간 동안 궁궐에서 부엉이 울음소리가 난 것은

그 외에도 7차례나 더 기록되어 있다.

이로 인해 정종은 승려들을 데려다가 불경을 읽게 하는 등 재앙을 물리치는 의식을 치렀다.

 

두 차례에 걸친 왕자의 난을 일으키며 결국 왕좌를 차지한 태종도

부엉이 울음소리로 인해 해괴제를 행하라는 명을 내리는가 하면

동문 밖으로 피방(避方)한 일도 있었다.

이처럼 부엉이를 두려워한 까닭은

태종이 1419년(세종 1) 11월 23일자의 ‘세종실록’에서 직접 밝히고 있다.

 

상왕으로 물러나 있던 태종은 부엉이가 자주 와서 울자 조말생과 원숙을 불러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괴이하다고는 생각지 않지마는 궁을 떠나 피해 있는 것은 예부터 있는 일이다.

또 운회(韻會 : 중국의 책 이름)에 올빼미 유(鶹)자를 풀이하기를 ‘유는 새 이름인데 울면 흉하다’

라고 하였으니 나는 피해 있고자 한다.”

유(鶹)는 수리부엉이를 지칭하는 한자이기도 하며,

우리나라에서는 보통 올빼미과 부엉이류의 새를 통틀어 부엉이라 부르므로

이는 곧 올빼미와 부엉이를 모두 지칭하는 뜻으로 볼 수 있다.

그럼 왜 부엉이는

조선의 최고 권력자인 왕들도 시름에 잠기게 할 만큼 흉조(凶鳥)로 낙인찍히게 되었을까?

 


동서양 모두 불길한 새로 여겨

전 세계적으로 올빼미목 조류는 136종이 알려져 있는데,

우리나라에는 10종의 올빼미과 조류가 기록되어 있다.

그 중 사계절 내내 우리 주변에서 살아가는 텃새가

올빼미와 올빼미 무리 중에서 덩치가 가장 큰 수리부엉이다.

보통 귀 모양의 깃털 묶음인 우각(羽角 ; 귀뿔깃)이 있으면 부엉이, 없으면 올빼미로 구분하지만,

그것은 통속적인 구별법일 뿐 학술적으로는 의미가 없다.

여름 철새인 솔부엉이는 귀뿔깃이 없어도 부엉이라고 하며,

같은 올빼미과에 속하는 소쩍새나 큰소쩍새도 부엉이의 특징인 귀뿔깃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올빼미나 부엉이는 동서양 모두 예로부터 불길한 새로 여겨져 왔다.

먹이를 낚아채는 이들의 완벽한 사냥기술을 직접 목격하면

왜 이들이 흉조 취급을 당하며 박해를 받아왔는지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부엉이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밤에 훌륭한 사냥 솜씨를 발휘할 수 있는 것은

특이한 날개와 뛰어난 청력 및 시력이란 3가지 무기를 갖추었기 때문이다.

수리부엉이의 경우 날개를 펼치면 그 길이가 1.5m 이상에 달할 만큼 아주 크다.
그런데도 소리에 아주 민감한 쥐조차 이들이 가까이 다가올 때까지 아무런 눈치를 채지 못할 정도로

날갯짓이 조용하다. 부엉이는 발톱을 제외한 온몸이 풍성한 털로 뒤덮여 있어

바람에 부딪쳐 생기는 마찰음이 나지 않는다.

깃털의 표면 역시 부드러운 털로 뒤덮여 있어 날갯짓을 할 때

날개 표면 주위에서 나는 바람의 소리를 줄여준다.

게다가 날개깃의 끝은 빗 모양으로 되어 있어 비행시 와류현상을 일으키지 않는다.

이런 공기역학적인 신체구조는

전혀 소리 내지 않고 놀라울 정도의 빠른 속도로 먹이에 내려앉을 수 있게 해준다.

 

두 번째, 부엉이의 양눈은 인간처럼 모두 앞쪽에 붙어 있다.

따라서 양안으로 보는 시야가 넓어 움직이는 먹이를 포착하기에 매우 유리하다.

시력 또한 매우 뛰어나 부엉이는 보통 우리 인간보다 5만5천 배나 더 예민한 눈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따라서 달이 뜨지 않는 캄캄한 밤의 숲속은 우리 눈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지만,

부엉이의 눈에는 마치 밝은 불이 켜진 사무실처럼 잘 보인다.

마지막으로 부엉이는 작은 움직임도 정확하게 감지해낼 수 있는

아주 잘 발달된 귓바퀴를 가지고 있다.

부엉이가 꾸벅꾸벅 조는 동안에도 얼굴 가장자리의 깃털을 세우는 것은

귓바퀴의 모양을 원하는대로 변형시켜 계속 주위를 탐색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 부엉이는 주위의 소음 속에서 쥐들이 찍찍거리는 소리같이 아주 날카로운 음을 골라내

그 소리에만 파장을 맞출 수도 있다.

이런 능력으로 인해 부엉이는 ‘날개 달린 고양이’로 불릴 만큼 뛰어난 쥐 사냥 솜씨를 발휘한다.
때문에 옛날 서양에서는 곡물 창고의 지붕에 일부러 구멍을 뚫어놓아 부엉이를 드나들게 함으로써

쥐를 퇴치하기도 했다.



새끼 세 마리 낳으면 대풍년

우리 속담에도 ‘부엉이가 새끼 세 마리를 낳으면 대풍년이 든다’는 말이 있다.

부엉이가 새끼 세 마리를 키우려면 밤마다 엄청난 수의 들쥐를 사냥해야 하므로 생겨난 말이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부쩍부쩍 늘어나는 살림을 ‘부엉이살림’이라 하는데,

이 역시 부엉이의 뛰어난 사냥솜씨를 두고 생겨난 말이다.

부엉이는 욕심이 많아 닥치는 대로 먹이를 물어다 보금자리에 쌓아두는 습성이 있기 때문이다.

에릭 호스킹이라는 자연연구가가

네 마리의 새끼를 데리고 있는 어미 부엉이가 하룻밤 새 보금자리에 물고 온 먹이를 세어본 결과,

들쥐 91마리, 곰쥐 21마리, 생쥐 8마리, 두더지 2마리 작은 뒤쥐 1마리나 되었다고 한다.

그리스신화에서 전쟁과 지혜의 여신인 아테네(로마신화의 미네르바)는 부엉이를 항상 데리고 다녔다.

따라서 밤이 되어야 날개를 펴는 부엉이를

일이 끝날 무렵 얻게 되는 지혜의 상징으로서 해석하기도 했다.

 

부엉이는 이처럼 인류에게 이로운 새임에도 불구하고 대부분 불길함과 죽음의 전조로 여겼다.
그것은 귀신과 같이 밤에 활동하므로 음기가 강한 동물이라는 이유에서였다.

그래서 옛날 중국에서는 더위를 피하기 위해

양기가 가장 강한 단오에 올빼미를 잡아먹는 풍속이 있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우는 소리가 마치 아기 울음소리와 비슷하다고 하여

올빼미가 울면 재앙이 생긴다고 여겼다.

다른 새들과 달리 판판한 얼굴에 부리부리한 두 눈이 모두 앞에 달린 묘한 인상도

이들을 흉조로 만든 이유에 한몫을 하고 있다.

이런 이유들로 인해 한밤중의 부엉이 울음소리는 섬뜩하게 들렸으며,

부엉이가 동네를 향해 울면 그 중 한 집은 상을 당한다는 말이 생겨났던 것이다.

 

그런데 조선의 역대 임금 중에서 부엉이 울음과 가장 깊은 사연을 지닌 이는

바로 단종과 그를 죽인 세조였다.

 

3년 2개월간의 재위 기간 중 단종실록에 부엉이 울음이 기록된 것은 모두 5차례이다.

2년 2개월의 재위 기간 중 8차례나 부엉이 울음이 기록되어 있는 정종에 비해 횟수는 오히려 적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단종 때 부엉이 울음이 난 시점이 매우 절묘하다는 데 있다.

 

5차례의 부엉이 울음 중 3차례가 1453년(단종 1) 9월에 집중되어 있다.

경복궁 근정전과 사정전 등지에서 부엉이가 울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바로 다음 달인 10월 10일에 부엉이의 울음처럼 불길한 사건이 기어이 터지고야 말았다.

단종의 숙부인 수양대군은 그날 밤 심복들을 데리고 좌의정 김종서의 집을 습격하여 죽이고,

황보인ㆍ이양ㆍ민신ㆍ조극관 등의 대신들을 궁궐로 불러들여 모두 참살했다.

이어서 안평대군과 단종의 매형을 유배시킨 후 사약을 내려 죽였다.

이 계유정난으로 인해 수양대군은 단종을 에워싸고 있던 대신들을 일거에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했다.

나머지 2차례의 부엉이 울음은 이듬해인 1454년(단종 2) 8월에 일주일 간격으로

연이어 기록되어 있다. 그로부터 며칠 후 이증과 윤사로가

당시 전권을 휘두르고 있던 수양대군을 찾아와 금성대군이 의심스럽다는 말을 고했다.

역시 단종의 숙부로서 세종의 여섯째 아들이자 수양대군의 동생인 금성대군은

당시 수양대군과 함께 종친 자격으로 단종을 보필하는 위치에 있었다.

때문에 계유정란 이후 군사권과 인사권, 행정권을 모두 장악한 수양대군의 입장으로서는

고분고분하지 않은 금성대군이 걸림돌로 보일 수밖에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로부터 1년이 채 지나지 않은 1455년(단종 3) 6월에 수양대군은

결국 금성대군 등에게 죄를 뒤집어씌우고는 귀양을 보내버렸다.

그러자 위협을 느낀 단종은 스스로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내놓았다.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은 단종

부엉이가 정말 불길한 사건을 예고하는 능력이 있는 것인지,

아니면 사관들이 일부러 불행한 사건의 예고 격으로 의도적인 기록을 해놓았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그런데 단종 때의 부엉이 울음 기록에는 좀 특이한 점이 있다.

 

보통 다른 임금들은 부엉이 울음소리가 궁궐에서 들릴 경우

해괴제를 행하거나 거처를 옮기는 등의 조치를 취했다.

하지만 단종 때는 그런 기록이 전혀 없이 그냥 부엉이가 울었다는 짤막한 문장만이 남아 있다.

 

왜 그랬을까.
부엉이 울음을 듣고도 단종이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은 것은 세종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사실 조선왕조실록에서 부엉이 울음소리가 가장 많이 기록된 것은 세종 재위기간 중이다.

세종실록에는 부엉이가 울었다는 기록이 총 27건이나 있는데,

그때마다 세종은 해괴제를 지내거나

군사에게 명하여 부엉이를 잡게 하는 등의 적극적인 조치를 주로 취했다.

그러다가 부엉이 울음소리가 부쩍 자주 들린 1435년(세종 17) 12월 21일 세종은

“앞으로는 부엉이가 근정전에서 울 때만 해괴제를 지내고 다른 곳에서 울 때는 행하지 말라”는

명을 내렸다.

또 그로부터 7년 후인 1442년에 세종은 대궐 안에서 부엉이가 운다 해도

앞으로는 아예 해괴제를 지내지 말라는 명을 예조에 내렸다.

아마 이 때문에 단종은 부엉이 울음소리를 듣고도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은 듯한데,

그래서 ‘부엉이가 울었다’고만 적혀 있는 단종실록의 짤막한 기록은

그 어느 때보다 더욱 으스스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단종으로부터 왕위를 찬탈한 세조대에는 부엉이 울음과 관련한 기록이 딱 두 번 있다.

첫 번째 기록은 세조가 보위에 오른 지 반 년쯤 지난 후인 1456년(세조 2) 1월 19일이다.

서운관에서 “부엉이가 홍례문(경복궁의 중문) 서루에서 울었다”고 보고하자

세조는 “앞으로는 만약 부엉이가 울어도 아뢰지 말라”고 못을 박았다.

세조가 부엉이 울음에 관련해 이처럼 단호한 조치를 취한 것은

평소 불길한 자연현상에 대한 그의 거부 성향 때문인 것으로 풀이된다.

그런데 부엉이와 비슷한 올빼미에 얽힌 일화를 알고 나면

세조가 왜 이처럼 강한 거부감을 나타냈는지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올빼미 새끼는 어미가 물어다주는 먹이를 먹으면서 성장하다가

100일 후쯤 되어 날개가 생기면 보금자리를 벗어나 먹이 사냥을 나간다.

이때 새끼가 갑자기 어미에게 덤벼들어 잡아먹는다는 중국의 일화가 전해진다.

따라서 올빼미는 예로부터 어미를 잡아먹는 새로서, 불효를 상징했다.

이로 인해 옛 사람들은 올빼미를 잡을 경우 죽여서 나무에 매달아놓곤 했다.

이는 불효의 상징인 올빼미를 통해 후손들에게 경각심을 주기 위한 풍습이었다.

올빼미 ‘효(梟)’자는 바로 이런 풍습에서 유래된 한자이다.

즉, 나무에 매달려 있는 새라는 의미가 올빼미 효인데, 이 한자에는 ‘목을 베어 달다’라는 뜻도 있다.

대죄를 범한 사람의 목을 베어서 높이 매달아 군중 앞에 공시했던 효수(梟首) 또는 효시(梟示)도

올빼미에서 비롯되었던 제도였다.

 


단종 복위 사건과 부엉이 울음

계유정난 때 김종서와 황보인 등의 대신을 효수한 적이 있는 세조로서는

더더욱 부엉이 울음이 반갑지 않았을 터이다.

또한 올빼미는 ‘떳떳하지 못하게 얻은 권세’를 뜻하기도 했다.

조카로부터 왕위를 뺏고 급기야 상왕으로 있던 단종을 내쫓아 죽인 세조로서는

올빼미의 이러한 상징성 때문에 부엉이가 우는 것조차 보고하지 못하게끔

철저히 막아버린 것은 아니었을까.

그 이후 세조실록에서 부엉이 울음소리는 한 번 더 등장한다. 바로 그해 6월 18일의 일이다.

세조가 부엉이 울음을 보고하지 못하게 했는데도 얼마 지나지 않아 실록에 기록된 데는 이유가 있다.

부엉이 울음소리를 누가 보고한 것이 아니라

반역에 관련된 자들을 국문하는 과정에서 나온 말이었기 때문이다.

세조가 사정전에서 반역에 관련된 자들 중 점치는 일을 직업으로 하는 소경 나가을(羅加乙)에게

“몇 사람이 몇 번이나 와서 점을 쳤는가?” 하고 묻자 그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지난번에 상왕(단종)의 유모인 봉보부인이 사람을 시켜 묻기를

‘부엉이가 대궐 북쪽에서 우니 무슨 까닭이냐? 상왕께 무슨 일이 있는 게 아닌가’ 하기에

‘상왕께서 오래지 않아 왕위로 돌아갈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날 국문을 받은 이들은 다름 아닌 집현전 학사 출신의 대신들과 일부 무인들이 주동하여 일으킨

단종 복위사건과 관련된 인물들이었다.

당시 별운검으로 임명된 유응부가 명나라 사신을 맞이하는 자리에서 세조를 살해할 계획이었는데,

갑자기 별운검을 세우는 일이 취소되어 무위로 돌아갔다.

명나라 사신이 돌아간 다음날 거사 참여자 중의 한 사람인 김질이 비밀을 털어놓으면서

성삼문을 비롯해 이개ㆍ유응부ㆍ하위지ㆍ박팽년ㆍ유성원 등 사건의 연루자 17인이 모두 처형되었다.

이 사건 이후 단종은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영월로 유배되었다.

소경 점쟁이는 부엉이의 울음을 단종의 복위로 해석했으나,

사실 그 울음은 단종 재위시의 불길했던 사건에 이어서

단종을 최악의 상황으로 몰아넣는 구실을 했던 셈이다.



금슬 좋고 새끼 양육에 열성

그 후 부엉이 울음은 어지러운 조정 분위기만큼이나 이상한 자연현상이 가장 많이 보고되었던

중종 대에 두 번 기록된 것을 마지막으로 조선왕조실록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최근 우리나라 방송사들이 제작한 생태 다큐멘터리에 의하면

수리부엉이는 새끼가 죽을 경우 어미가 먹어치우거나

아니면 살아남은 다른 새끼들에게 먹이는 것으로 드러났다.

이는 에너지를 재활용하기 위한 야생동물의 생존전략으로 해석할 수 있는데,

어미를 잡아먹는다는 올빼미의 옛 일화는 부엉이의 이런 습성이 잘못 알려진 것일 수도 있다.

또한 수정 후 더 이상 교미를 하지 않는 일반 동물들과는 달리

수리부엉이는 부화 후 새끼를 기르는 기간에도 교미를 계속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수컷이 사냥을 하고 암컷이 새끼를 돌보는 부부관계를 계속 유지하여

새끼를 잘 양육하기 위한 목적인 것으로 추정된다.

이로 미루어볼 때 부엉이는 조선 임금들이 그렇게도 끔찍스럽게 여겼던 흉조가 아니라,

실제로는 한 번 짝을 맺으면 평생 함께 살아가며

새끼들의 양육에도 지극정성인 지조 있는 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 2009.05.29/ 06.05 ⓒ ScienceTimes

- 이야기 과학 실록 (54)-(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