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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자항아리를 사랑한 화가, 도상봉

Gijuzzang Dream 2009. 6. 15. 20:47

 

 

 

 

 

 백자항아리를 사랑한 화가, 도상봉

 

 

 

조선의 백자, 순백의 항아리는 한국의 미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유물이다.

백자항아리를 주재로 그림을 그린 화가들이 많은 점 또한 그 상징성 때문이다.

그러나 특별한 모양도 문양도 없는 수수하고 흰 항아리 그림을 통해

한국적인 미감의 깊이를 분명하게 드러낸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단편적인 외형의 묘사만으로는 백자항아리의 맛을 살릴 수 없다.

백자항아리가 가지고 있는 한국적인 미를 끊임없이 추구한 화가가 바로 도상봉이다.

그의 호 도천(陶泉), 그리고 그가 자신의 백자항아리들을 지칭했던 ‘친우(親友)’라는 표현에서

그가 가진 백자 항아리에 대한 사랑을 느낄 수 있다.

또한 그 애착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세밀한 관찰과 묘사는 도상봉 그림의 특징이다. 


그림 1. 백자항아리를 사랑한 도상봉
백자항아리를 사랑한 도상봉

 

물론 많은 작가들이 자신이 선호하는 소재로 다양한 작품을 만들어낸다.

그러나 도상봉 만큼 긴 세월 동안 같은 주제와 구도의 작품을 계속적으로 그려낸 화가는 찾아보기 어렵다.

작가들은 환경의 변화에 따라, 혹은 내면적인 욕구에 따라 자신의 활동에 새로운 시도들을 한다.

그러나 도상봉의 화업(畵業)에는 그러한 시도들의 흔적이 없다.

그림들에 나타나는 꾸준함을 통해 변하지 않는 그의 자세만이 확인될 뿐이다.

 

도상봉이 그린 백자항아리들을 바라보며 새로운 점을 한 가지 깨달았다.

치열한 삶을 살며 불꽃같은 창작욕을 살라낸 자만이 화가는 아니다.

자신이 원하는 소재를 꾸준히, 답답할 정도로 무던히 그려낸 사람도 화가다.

섣부른 시도로 가벼운 번민의 흔적만을 화폭에 담거나,

다양한 사조의 혼란 속에서 끝없이 흔들리기보다는 한가지만을 고집하는 모습이 더욱 돋보일 수 있다.

도상봉이 그린 백자항아리들이 더욱 아름다운 이유이다.

일본에서 미술을 배운 도상봉이지만 3ㆍ1운동 직후의 투옥 등의 경력 등을 고려 할 때,

그를 단순한 모던보이(Modern Boy)로만 치부할 수는 없다.

당시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 1889~1961)나 아사카와 다쿠미(淺川巧, 1891~1931) 등과 같은

일본 지식인들은 조선백자에 담긴 민족혼과 그 미감에 대한 접근들을 글로 남겼다.

도상봉은 그림으로 그러한 감성을 풀어냈다.

도상봉이 백자를 소재로 선택한 또 다른 이유는 동미회(東美會) 활동에서 확인할 수 있다.

동경미술학교 유학생들의 모임인 동미회는 민족적인 향토미를 매우 강조하였다.

동미회의 동인들은 조선의 예술은 서구를 모방하는데 그치지 않고

진실로 향토적인 정서를 표현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이러한 바탕에서 조선의 민족적인 정서를 반영하기 위해 선택된 것이 백자항아리였을 것이다.


그림 2. 도상봉 그림에 모델이 되어 주었던 백자
도상봉 그림에 모델이 되어 주었던 백자대호, 개인소장

 

 

도상봉에게 백자는 단순히 마음에 드는 소재였을지도 모른다.

또한 도상봉의 백자 항아리들만을 그린 것도 아니다.

도상봉의 백자 항아리들은 때로는 배경의 정물로 때로는 화면 가득 찬 주제로 모습을 달리한다.

그러나 그가 백자 항아리를 차분하게 관찰하여 그려낸 작품들은

분명하게 다른 작가들의 백자들과 구별된다.

오랜 관찰과 세밀한 묘사는 그려지는 대상에 대한 애착이 빚어낸 결과물이다.

만년에 들면 그는 백자와 거기에 담긴 꽃들을 집중적으로 그린다.

평면적으로 풀어낸 그의 작품들은 정적이며, 다발의 꽃들을 묘사 했지만 화려하지만은 않다.

도상봉은 백자 항아리를 통해 그의 애착을 그렸다. 그 애착의 대상은 백자 자체일수도 있지만

그 백자를 만든 우리민족이라고 말하는 것이 더 설득력이 있을 것이다.

혼란의 시기, 자신을 포함한 조선인의 열등감만이 강조되던 시대상 속에서 야나기가 주장한

조선의 위대한 미는 도상봉에게 그가 앞으로 나아가야할 길을 열어주었을 지도 모른다.

도상봉이 포착하려 했던 것도 이러한 백자의 특질과 그 선의 미였을 것이다.

1919년 3·1 운동에 직접 참가해 투옥되었던 도상봉에게 이러한 일본 지식인들의 조선미(朝鮮美)에 대한

탐구와 찬사는 이후 미술의 방향에 일종의 이데올로기로 작용하는 듯하다. 

그에게 백자항아리는 친구였다. 속된 시각으로 보자면 친구보다는 애인에 가까운 듯하다.

이지러진 달항아리를 묘사한 그림에서는 화폭에 그려진 백자항아리는 질감이 느껴질 만큼 사실적이다.

도상봉의 그림은 대부분 짧은 붓터치를 위주로 진행된다.

때로는 스푸마토(sfumato) 기법을 사용하여 윤곽을 매우 연하게 묘사하기도 했다.

섬세하고 충실한 도상봉의 붓질은 직선적인 원근감을 사용하지 않고도 공간감을 느낄 수 있도록 한다.

동시에 작품에 깊이를 더해주어 백자항아리와 같은 소재들이 화면과 완전한 일치를 이루게 한다.

 

또한 그의 짧은 붓질로 인해 그의 작품들은 매우 얇은 마티에르가 특징이다.

명암의 대비가 강하여 무거운 분위기가 감도는 작품일지라도 전체 작품이 푹 가라앉지 않는 이유는

캔버스가 비칠 정도로 얇고 가벼운 마티에르 때문이다.


그림 3. <정물 /> 中 백자항아리 부분, 캔버스에 유채, 개인소장
<정물> 中 백자항아리 부분, 캔버스에 유채, 개인소장

 

백자항아리의 단단한 형태가 주는 안정감은 작가가 추구하는 그림의 미덕과도 일치한다.

완벽한 형태감 위로 피어오르듯 배치된 각종 꽃들의 풍성함은 화면을 가득 채운다.

그러면서도 배경 전체에 드러나는 잔잔하고 절제된 붓질은 깊이감과 함께 무한한 여운을 제공한다.  

깊이감이 느껴짐과 동시에 소재가 돌출되어 보이는 효과는 작가의 치밀한 계산에 기인한다.

이러한 침착한 분위기가 바로 표현이 아닌 관조로 백자항아리를 묘사하려 했던 작가 의지의 발로이다.

도상봉의 백자항아리는 잔잔하며 아름답다.

아름다운 그림은 구조적으로 단단하고 붓의 움직임은 안정적이어야 하며

그러한 질서 속에서 조화된 색체로 아름다움이 발휘된 것이다.

- 박정민, 문화재청 인천항여객부두 문화재감정관실 감정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