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덕왕대 금제규정으로 본 신라 공예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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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제42대 흥덕왕(興德王, 재위 827-836) 때인 834년에 금령(禁令)이 반포된다.
그 내용은 ‘사람은 상하(上下)가 있고, 지위는 존비(尊卑)가 있어,
명칭과 법식(法式)이 같지 않고 의복(衣服)도 다르다.
그런데 풍속이 점점 각박하고 백성들이 다투어 사치와 호화를 일삼고
다만 외래품의 진기(珍奇)한 것만을 숭상하고, 도리어 국산품을 싫어하니,
예절이 어긋나고 풍속이 파괴되기에 이르렀다. 이에 옛 법에 따라 엄명을 베푸는 것이니,
만일 일부러 범하는 자가 있으면 국법(國法)으로 다스릴 것이다’ 라는 것으로 시작된다.1
이어 색복(色服), 거기(車騎), 기용(器用), 옥사(屋舍),
즉 복식과 탈것, 사용하는 기물, 집 등에 대해 신분에 따른 세세한 규정을 열거하였다.
예나 지금이나 부와 권력을 가진 사람들의 사치와 진귀한 외래품의 선호는 다르지 않았던 것 같다.
더욱이 당시에는 엄연한 신분제가 유지되었기 때문에
풍속의 문란은 국가의 기강을 흔드는 중요한 사안이었을 것이다.
신라의 후반기는
연이은 왕위쟁탈로 인한 귀족의 정쟁(政爭)과 육두품(六頭品)의 정치 진출 확대 등으로
골품(骨品)의 계층구별이 엄격히 요구되는 시기였다.
한편 이처럼 금제규정이 필요했다는 것은,
그만큼 당시의 사치품이 광범위하게 소비되고 있음을 반증해 준다.
상하존비(上下尊卑)에 걸맞게 잘 지켜지고 있었다면 굳이 규정을 되새길 이유가 없을 것이다.
사치품의 범람과 외래품의 선호를, 물론 긍정적인 현상이라고는 볼 수 없다.
그러나 당시 통일신라의 공예문화의 수준과 유행, 다양성 등을 살펴볼 수 있다는 측면에서,
금령에 언급된 품목들은 우리에게 중요한 자료를 제공해준다.
따라서 금령에 나타나는 일례를 통해, 신라의 뛰어난 공예문화의 단면을 찾아보기로 한다.
금제규정 가운데 색복(色服) 부분은 복식에 대한 내용으로,
관모(冠帽), 의복, 요대(腰帶), 신발 등 21가지에 이르는 항목을 다루고 있다.
또한 최상위인 성골(聖骨)을 제외하고 진골(眞骨)부터 평민까지
남녀 각 5계층으로 나누어 금지되는 품목을 적어 놓았다.
그 가운데 여성에게 금지된 품목 중에 슬슬전(瑟瑟鈿)이 언급되어 있다.
전(鈿)이라는 것은 감식(嵌飾)의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중국에서는 금은(金銀)이나 구슬, 보석 등으로 꾸민 장식물 및 장식의미로 사용된다.2
또한 슬슬(瑟瑟)은 서역(西域)에서 전래된 푸른색의 보석으로,
에메랄드나 사파이어라는 견해도 있지만 대체로 터키석으로 추정된다.3
진골(眞骨) 여인은 슬슬전(瑟瑟鈿)과 대모(玳瑁)의 빗을 금(禁)했고
육두품(六頭品) 여인은 슬슬전(瑟瑟鈿)의 빗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였다.4
기록에 보이는 이러한 내용과 연결되는 유물이 삼성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도 1).
슬슬전(瑟瑟鈿)으로 화려하게 꾸며져 있으며,
바다거북의 등껍질로 일찍부터 공예 재료로 사용된 대모(玳瑁)로 만든 빗이다.
일반적인 빗이 아니라, 빗살과 윗부분이 구부러져 있는 장식용의 빗이다.
대모슬슬전빗은 공식적으로는 신라의 성골 여인만이 누릴 수 있었던 호화로운 장신구이며,
당시 공예품의 아름다움을 잘 보여준다.
각종 기물의 사용과 관련된 ‘器用’ 부분에는
‘사두품(四頭品)이하의 신분은 금은(金銀), 유석(鍮石), 주리평문물(朱裏平文物)의 사용을 금(禁)한다’
라는 기록이 보인다.
여기에서 주리란 (朱裏)란 내면에 주칠(朱漆)한 칠기를 가리키며,
평문(平文)이란 평탈(平脫)을 뜻하는 장식기법이다.
평탈은 나무나 금속으로 된 기물(器物)에 금은편(金銀片)으로 만든 무늬를 장식하는
고대의 대표적인 공예기법이다. 즉 금은을 두드려 얇은 판을 만들어 문양을 재단한 후,
기면(器面)에 접착시키고 그 위에 다시 칠을 하여 고정시킨 다음 곱게 다듬어서,
칠한 표면의 금은편 무늬가 드러나게 하는 것이다.
당시 최고의 재료였던 금은과 옻칠을 이용하여 만든 수준 높은 공예품이며,
신라 뿐만 아니라 중국과 일본에서도 크게 선호되어, 국제적으로도 유행을 공유한 장식기법이기도 하다.
평탈공예품은 현존 유물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대표적으로 국립중앙박물관에 두 점의 평탈장식이 있는 거울이 소장되어 있다(도2, 3).
거울의 뒷면에 옻칠을 하고 금은편의 문양을 장식으로 부착하였다.
부분적으로 소실된 부분이 있어 아쉽지만, 꽃과 동물문양의 금은편과 검은색 옻칠이 대비되어,
화려하면서도 품격 있는 미감을 상상하게 한다.
또한 삼성미술관에 소장된 금은평탈패합(金銀平脫貝盒)은
자연산 조개 껍질을 재료로 이용한 드문 예로 주목된다(도 4).
겉면에는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는 한 쌍의 사슴이 평탈기법으로 장식되었으며(도 5),
향합으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흥덕왕대의 금제규정은 분명 국가의 기강을 바로잡고 올바른 풍속과 예법을 찾고자 했던 일이다.
그렇지만 당시 실제적인 분위기를 파악할 수 있는 행간(行間)의 의미도 놓쳐서는 안 될 것이다.
진골이나 육두품의 여인들이 슬슬전을 사용하지 않았다면,
그리고 사두품 이하의 신분이 평탈공예품을 선호하지 않았다면,
금령(禁令)을 내려 사용을 강력하게 규제할 필요는 크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슬슬 즉 터키석이나 대모와 같은 수입품,
그리고 국제적으로 유행한 평탈기법의 유입과 발전 등은 당시 신라의 적극적 대외교류를 확인해 준다.
금제규정에 보이는 슬슬전(瑟瑟鈿)과 평탈(平脫)기법이
고가의 재료와 뛰어난 장식 기술이 접목된 공예품이라는 점에서,
신라인이 즐겼던 수준 높은 미술문화의 일면도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다.
- 신숙, 문화재청 파주 남북출입사무소 문화재감정관실 감정위원
- 2009-05-29 문화재청, 문화재칼럼
- '三國史記' 卷 第三三 雜志第二 色服, 興德王九年, “人有上下, 位有尊卑, 名例不同, 衣服亦異, 俗漸?薄, 民競奢華, 只尙異物之珍寄, 却嫌土産之鄙野, 禮數失於逼僭, 風俗至於陵夷, 敢率舊章, 以申明命, 苟或故犯, 國有常刑”. [본문으로]
- 김영재. '瑟瑟, 鈿考, 복식' 31 (1997.2), pp. 220-221. [본문으로]
- 김진구. '瑟瑟의 硏究' '복식문화연구' 2권 2호 (1994), pp. 247~263 ; 김영재. 위의 논문, pp. 215-222. [본문으로]
- '三國史記' 卷 第三三 雜志第二 色服, 興德王九年,“眞骨女…梳禁瑟瑟鈿玳瑁…六頭品女…梳禁瑟瑟鈿…”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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