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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도 오딧세이]

[간도 오딧세이] 52. 청나라 관리 다쳐 사형당한 조선 백성

Gijuzzang Dream 2009. 4. 23. 20:37

 

 

 

 

 

 

[간도오딧세이]  청나라 관리 다쳐 사형당한 조선 백성

 

 

 

 

 


청구도 본조팔도성경합도에 나타난 간도지역. <규장각 소장>


 

1685년 숙종 3년 11월 때 일이다. 조선 백성 한득완이 한양 의금부로 끌려왔다.

한득완뿐만이 아니었다. 무리는 한득완을 포함해 25명이었다.

영의정 · 좌의정 · 우의정도 앉아 있었지만

청나라 칙사 2명도 앉아 이들이 죄상을 자백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청나라 칙사가 지켜보고 있기에 문초는 더욱 엄했다.

불과 1년 전에는 온성 유원진에 사는 한 백성이 나무를 하기 위해 두만강을 건넜다가

청나라 영고탑 수장에 사로잡혔다. 때문에 청나라 칙사가 조정으로 와서 사건을 조사했다.

이 백성은 사형에 처해졌고 변방 관리는 파직 또는 강등되는 처벌을 받았다.



청나라가 총 쏘자 조총으로 맞대응

 
한득완 무리는 삼을 캐기 위해 압록강을 건넜다.

이들은 조총으로 청나라 관리를 쏘았다. <숙종실록>에는 ‘상해’라고 표현했다.

<만주의 역사>에는 이 사건을 ‘러추 사건’이라고 이름 붙였다.

청의 관리인 러추 일행이 측량을 하다 조선 백성의 범월을 막으려고 먼저 총을 쏘았다.

맞서던 조선인 사냥꾼이 쏜 총에 맞아 러추가 부상했다.

이 사건은 청나라에서 칙사를 파견함으로써 양국의 외교적 문제로 비화했다.

 

함경감사 이수언은 이 사건의 주동자들을 잡았다.

<숙종실록>에는 청나라 칙사들이 한양에 도착하기 전에

함경감사를 비롯한 관리들이 미리 와서 기다려야 한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함경감사 이수언은 이 사건과 관련해 압록강과 두만강을 넘은 범월인을 샅샅이 뒤지면서

“변방의 백성들이 놀라고 소란하기를 마치 새가 도망가듯 물고기가 놀라듯 한다”고 보고했다.

형조판서 이사명이 이들을 문초하기 시작했다.

숙종이 범인의 우두머리에 대해 묻자, 형조판서 이사명은

“그의 사람됨은 매우 용맹스럽고 침착, 강인하여 입 밖에 나온 말은 다시 바꾸지 아니한다”고 말했다.

이날 <숙종실록> 기사에는 범월인 이름이 등장하지는 않았지만 이 사람은 한득완으로 추정된다.

숙종은 한편으로 변경 백성을 걱정했다.

이때 이사명은 “산삼의 채취를 금지함은 엄하게 단속하지 않을 수 없지만,

이 길이 끊어지고 나면 미천한 백성들의 살아갈 도리가 또한 어렵게 될 것이니

조정에서 이 점을 파악해 대비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청의 칙사가 한양에 오면서 범월인 25명에 대한 취조가 이뤄졌다.

칙사는 영의정 · 좌의정 · 우의정과 배석, 취조에 참여했다.

칙사는 인삼을 판매한 곳과 판매한 양을 범월인에게 물었다. 함경감사 이수언을 비롯한 관리들에게는

이들과 같이 공모하지는 않았는지, 이들을 고의로 풀어주었는지 따져 물었다.
그해 12월 1일 조선 백성 한득완에게 사형이 내려졌다.

 

<숙종실록>에 세 차례 등장하는 한득완은 청나라의 실록인 <청사고>에도 나타난다.

강희 25년(1686) “조선 백성인 한득완 등 28명이 강을 건너 산삼을 채취하고

창으로 회화여도관리(繪畵輿圖官吏)를 찔러 상처를 입혔다.

이를 상부에서 심리하여 우두머리에 해당하는 한득완 등 6명을 참형에 처하고

나머지는 죽음을 면하게 하여 등급을 감해 각각 집행하였다”고 나와 있다.

 


한득완은 과연 어떤 인물이었을까.

<숙종실록>에 나타난 것처럼 용맹했고 강인했던 한득완은

삼을 캐기 위해 압록강을 넘은 무리를 이끌었다.

<만주의 역사>에서 저자 김득황 박사는 “(청의 관리가) 조선인에게 총질하다가 얻어맞고

조선 국왕에게까지 책임을 추궁하여 조선인을 30여 명이나 극형에 처한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며

국가적인 참극이 아닐 수 없다”고 표현했다.

의금부에 잡혀 왔어도 꿋꿋한 태도를 보였던 조선 백성 한득완은 사형으로 역사에서 이슬처럼 사라졌다.
- 윤호우 기자 hou@kyunghyang.com

- 2009 05/05   위클리경향 823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