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도 오딧세이]

[간도 오딧세이] 53. 조선 긴장시킨 '이만지 사건'

Gijuzzang Dream 2009. 5. 8. 12:03

 

 

 

 

 

[간도오딧세이]  조선 긴장시킨 ‘이만지 사건’

 

 

 

 

 

  


동국여도. <규장각 소장>

왼쪽 위에 압록강 변의 위원(渭原) 지명(동그라미)이 보인다. 

 

 

1710년 조선 숙종 36년 조정은 발칵 뒤집혔다.

1685년(숙종 3) 한득완이 청나라 관리를 다치게 했을 때도 청나라에 한 차례 곤욕을 치렀지만

이번에는 조선 백성이 압록강을 건너가 청나라 사람을 살해한 일이 발생한 것이다.

좌의정과 우의정, 병조판서가 숙종에게 이 사실을 보고했다.

이해 11월 9일 기사에는 이 같은 상황이 생생히 기록돼 있다.

좌의정 서종태 · 우의정 김창집 · 병조 판서 민진후가 청대(請對)하여,

위원(渭原) 사람들이 범월(犯越)한 일을 올리니,

임금이 말하기를 “저들이 혹 조사하는 사신을 보내어 오는 일이 있을까 지극히 염려스럽다.”하였다.

서종태가 말하기를 “장계 가운데 각 사람들의 범행 진술을 보건대,

살해하였다는 것은 허언이 아닌 듯합니다. 만약 저들이 먼저 사문(査問)한다면,

일이 장차 순조롭지 못할 것입니다. 갑신년(1704)에도 이자(移咨)한 것으로 말미암아

마침내 무사하였으니, 지금도 먼저 자문(咨文)을 보내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여러 대신과 경재들의 뜻도 모두 이와 같습니다” 하니, 임금이 그 말을 옳게 여겼다.

 


청나라와 외교적 마찰 발생 우려

 
숙종의 발언이 시사하는 것처럼 조선은 청이 외교적인 문제로 압박을 가해올 것을 두려워했다.

그래서 찾아낸 묘안이 전에 했던 것처럼 미리 공문을 청에 보내자는 것이었다.

시쳇말로 하자면 ‘자수하여 광명찾자’다.

여기에다 어사까지 보내서 미리 사건을 조사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청나라가 나서서 조사한다면 더 큰 굴욕을 당할 수도 있을 사안이었다.

실록에 나타난 사건의 전말을 보면,

압록강변 위원의 백성 이만건 · 이만성 · 이만지 · 이지군 · 이선의 · 이준건 · 이준원 · 송흥준 · 윤만신

등이 밤을 틈타 압록강을 건넜다.

이들은 청인들이 삼을 캐기 위해 설치한 장막으로 들어가 청인 5명을 죽였다.

그리고 삼과 돈을 약탈했다.

이때 청인 1명이 달아났다. 이 청인이 20여 명의 사람과 함께 위원으로 와서

“조선 백성이 대국의 사람 5명을 죽였다”고 소란을 피웠다.

이들은 범인을 인도하라며 순라장(巡邏將)을 납치해 인질로 삼았다.

위안군수 이후열은 이들에게 술을 먹이고 뇌물을 주면서 사건을 무마시켰다.

하지만 나중에 이 사실을 알게 된 관찰사가 범인을 가두었다.

이들은 이송 도중 도주했다가 다시 잡혔다.

 

실록의 내용에 따르면 이들 중 3형제, 4형제가 있어 청에 조사 사실을 보고하자,

청에서는 대국(大國)임을 내세워 이 중 한 명씩 살려 부모를 봉양하도록 했다.

이만건 · 이만성 · 이만지 · 이지군의 형제 중 이만건은 살아남았고,

이선의 · 이준건 · 이준원의 형제 중 이준원은 살아남았다.

 

여러 범인이 있었지만 이 사건은 ‘이만지 사건’으로 전해온다.

이 사건을 빌미로 청나라는 백두산 탐사에 나섰으나 실패했다.

 

<북정록> 서문에는 다음과 같은 사실이 나타나 있다.

경인년(1710)에 백두산 서쪽 변방의 백성이 국경을 넘어가서 살인을 범했다.

청나라는 이듬해 신묘년에 조사관을 보내서 변고가 일어난 위원 지역을 조사하고

이어서 내지로 들어와서 백두산에 가보려고 하였다.

조정에서는 재신에 명하여 접대하게 하고 또 길을 빌려주는 문제를 가지고 쟁론하게 하였다.

이때 광천 김공이 추운 겨울날 서쪽에서 열흘을 보내면서 끝까지 고집하자,

북경 사신이 그만 기가 꺾여 돌아간 일이 있었다.

‘이만지 사건’은 역사상 중요한 변환점을 가져왔다.

이 사건이 일어난 후 2년 만인 1712년 청나라의 압력으로 백두산 정계비를 세우게 된 것이다.
- 윤호우 기자,  hou@kyunghyang.com

-  2009 05/12   위클리경향 824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