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도 오딧세이]

[간도 오딧세이] 54. 청나라 강희제의 백두산 야욕

Gijuzzang Dream 2009. 5. 8. 12:03

 

 

 

 

 

[간도오딧세이] 청나라 강희제의 백두산 야욕  

 

 

 

 

 

 

 

백두산 정계비 부근. <초석 제공>


 

1677년 강희제는 내대신 우무누에게 명하여

백두산(중국명 장백산)을 답사한 후 제사를 드리고 돌아오라고 명했다.

8살의 나이에 황제 자리에 오른 강희제가 재위 16년째를 맞이하던 해였다. 이때 나이 24세였다.

청의 4대 임금인 강희제는 청조의 발상지로 전해오던 백두산에 관심이 많았다.

우무누는 오라 지방(현재의 길림)을 거쳐 백두산 천지에 도달했다.

이 조사 결과를 강희제에게 보고했다. 강희제는 우무누의 보고를 듣고

“장백산은 열조 발상의 성지로서 매우 중요한 곳이므로

장백산신에게 마땅히 봉호하고 제사를 받들어 나라가 보살핌을 받는 뜻을 밝히도록 하라”고 명하였다.

 


목극등 파견 국경 조사

 
간도연구가인 김득황 박사의 저서 <만주의 역사>에는 이 부분이 잘 나타나 있다.

당시 강희제는 삼번의 난을 완전히 평정한 후 영토 확장에 눈을 돌렸다.

이중 하나가 백두산 지역이었다. 1684년 강희제는 러추로 하여금 백두산을 탐사토록 했다.

하지만 러추 일행은 백두산을 탐사하는 데 실패했다.

러추 일행은 압록강 상류의 삼도구에서 측량하다가 강을 넘어온 조선 백성들을 향해 총을 쐈다.

조선 백성 역시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조선인 사냥꾼이 쏜 총에 러추가 맞아 부상했다.

1685년 청은 조선 정부에 문서를 보내 강력히 항의했다.

이때 붙잡힌 백성이 한득완이었다. 한득완과 그 무리들은 결국 사형당했다.


1710년 조선의 이만지 일행이 청인을 살해했을 때에도 청의 조정은 사건 조사를 빌미로

백두산을 탐사하고자 하였으나 조선 관리의 거부로 실패했다.

1712년에 청은 노골적으로 백두산 탐사의 야욕을 드러냈다.

청의 조정에서 공식적으로 문서를 보낸 것이다.

오라총관 목극등 일행을 보낼 것이니 협조해달라는 것이었다.

청의 야욕은 백두산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청은 이참에 조선과 청의 국경선을 긋기를 원했다.

 

청의 역사서인 <청사고>에서 1711년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타난다.

강희 50년 5월 황제가 대학사에게 유시하기를,
“장백산의 서쪽은 중국과 조선이 이미 압록강을 경계로 삼고 있는데

토문강은 장백산 동쪽 변방에서부터 동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가니

토문강의 서남쪽은 조선에 속하고 동북쪽은 중국에 속하여 역시 이 강으로 경계를 삼도록 하였다.

그러나 압록과 토문 두 강 사이의 지방은 그것이 어디에 속하는지를 확실히 알지 못한다”
라고 하였다. 이에 목극등을 그 곳에 파견하여 국경을 조사하게 했다.


<청사고> 1712년 구절에는

“이 해에 목극등이 장백산에 이르러,

조선 접반사 박권, 관찰사 이선부와 함께 소백산 위에 비석을 세웠다”고 나타나 있다.

 

청의 야욕은 오래전부터 시작됐고

청은 1711년부터 준비했다가 1712년 본격적으로 영토 긋기에 나섰다.

 

<청사고> 구절을 보면 청은 토문강을 두만강으로 잘못 알고 있었다.

정확한 지리적 정보가 없었기 때문이다. 토문강은 원래 송화강으로 흘러들어가는 강이었다.

청은 자신의 발상지로 알려진 백두산 천지를 차지하려는 욕심에 눈이 멀었다.

국경을 넘은 조선 백성을 처벌한다는 구실로 백두산을 찾았지만

백두산 천지뿐 아니라 토문강에 대해서도 청은 자세히 알지 못했다.

그들은 결국 엉뚱한 곳에 정계비를 세우는 오류를 범하고 말았다.
- 윤호우 기자
hou@kyunghyang.com

- 2009 05/19  위클리경향 825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