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도오딧세이] 두 개의 물줄기가 만나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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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 정계비는 두 강의 물줄기가 발 아래 보이는 곳에 위치했다. 정계비에서 산 아래쪽으로 본다면 오른쪽이 압록강이고 왼쪽이 토문강이다. 토문강은 북쪽의 송화강으로 흘러간다. 정계비 터를 맨 처음 확인한 고구려연구재단(현 동북아역사재단) 측 관계자들은 이곳이 바로 두 개의 물줄기가 만나는 분수령임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고 한다. 정계비가 세워졌던 주춧돌은 움직일 수 없는 ‘역사적 산증인’이다. 일제가 강점하던 시기에 정계비는 여러 사진에 모습을 드러냈고, 비석의 비문은 탁본으로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1885년과 1887년 조선과 청의 국경회담에서 청의 관리는 정계비가 옮겨졌다는 주장을 펼치기도 했다. 하지만 이 주장은 현지 답사 후 사실무근임이 밝혀졌다. 사료 속에서처럼 정계비 외에도 주춧돌이 존재했다. 여기에 당시 감계사였던 이중하가 청의 관리와 답사하면서 본 흙울타리(토퇴 · 土堆)와 돌울타리(석퇴 · 石堆)는 조선과 청의 국경이 과연 어느 곳인지 분명하게 밝혀줬다.
지도상으로 본 조선과 청의 경계가 분명히 나타나 있다. 위성사진에서 전문가가 아니라면 쉽게 볼 수 없는 경계선이 지도에서는 금방 드러난다. 물론 강 교수가 지도 속에 알기 쉽게 표기했기에 가능한 일이다.
지도를 보면 남북으로 뻗은 선이 압록강의 상류 물줄기다. 반면 ㉮㉯로 표시된 두 물줄기가 토문강 상류 물줄기다. 이 물줄기는 현재 토문강이라는 명칭으로 불리지 않는다. 중국 측에서는 백두산 천지의 바로 위쪽에서 물줄기를 따져 일도백하, 이도백하, 삼도백하, 사도백하, 오도백하라는 이름을 붙였다. ㉮는 사도백하에 해당하고 ㉯는 오도백하에 해당한다.
압록강과 토문강 사이에 정계비가 위치해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실제적인 국경선은 ㉮물줄기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물줄기에 석퇴와 토퇴가 있었다는 것을 추론해볼 수 있다. ‘weekly경향’이 611호(2005년 2월 15일)에서 1m급 위성사진을 판독해 석퇴의 흔적을 발견한 것도 ㉯물줄기였다.
강 교수는 원래 ㉮물줄기가 국경선이었다는 설과 원래부터 ㉯물줄기가 국경선이었다는 설을 나란히 소개했다.
㉮물줄기가 국경선이었다는 것은 1712년 정계 후 같은 해 몇 개월 뒤 울타리를 쌓기 위해 백두산에 오른 조선의 관리들이 ㉮물줄기가 두만강으로 흘러들어가지 않고 북쪽으로 흘러가자, ㉯물줄기를 선택해 울타리를 쌓았다는 것이다. ㉯물줄기 역시 송화강으로 흘러가긴 마찬가지다.
㉯물줄기가 원래부터 국경선이었다는 주장은 일제시대 간도 문제를 연구했던 시노다 지사쿠의 견해를 따른 것이다.
<숙종실록>에는 첫 번째 갈래와 두 번째 갈래가 만난다는 구절이 있다. 이것으로 보았을 때 물줄기 자체가 여러 갈래로 존재했고 조선 관리들이 위보다 아래 갈래 물줄기에 울타리를 쌓았음을 알 수 있다.
지도로 보면 ㉯물줄기가 하나인 것으로 나타나지만 위성사진으로 보면 ㉯물줄기는 여러 갈래로 흩어져 있다. 아무튼 1712년 그은 조선과 청의 국경선은 압록강과 토문강의 물줄기인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 2009 04/14 위클리경향 82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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