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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 김구선생 피격당시의 옷(血衣) 문화재로

Gijuzzang Dream 2009. 4. 12. 16:32

 

 

 

 

 

 백범 김구 선생 피격 당시의 血衣(피묻은 옷)

 문화재로 등록 · 보존한다

 

 

- 임정(臨政) 수립 90주년 및 백범 서거 60주기 맞아 인장, 시계, 유묵 등 -

  

 

※ 백범 김구 선생 관련 지정․등록문화재 현황

「백범일지」(보물 제1245호, ‘97.6.12 지정 / 백범김구기념관 소장)

「김구(金九) 서명문 태극기」(등록문화재 제388호, ‘08.8.12 등록 / 독립기념관 소장)

「서울경교장」(사적 제465호, ‘89.6.8 지정 / 서울 종로)

 

 

문화재청(청장 이건무)은 2009년 올해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90주년(4.13) 및 백범 김구 선생 서거 60주기(6.26)를 맞아

선생의 유물 19점을 문화재로 등록하기로 하고, 이를 등록예고 한다고 13일 밝혔다.

 

백범 김구(金九, 1876.8.29-1949.6.26)선생은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으로 활동하며

우리나라의 자주독립과 통일조국 실현을 위해 헌신한 민족 지도자로,

1949년 6월 26일 서울 경교장(京橋莊)에서 손님으로 가장한 안두희의 흉탄을 맞고 서거하셨다.

 

이번에 문화재로 등록 예고되는 유물 19점은,

선생이 총격으로 서거할 당시 입고 있었던 피묻은 의복류(8종 10점),

편지나 붓글씨에 사용한 인장(3종 5과),

윤봉길 의사의 상해의거 직전 윤의사와 맞바꿔 찬 회중시계(1점),

서거 당시 책상 위에 놓여있던 유묵(3점) 등으로

백범 김구 선생의 생애 및 대한민국임시정부 활동과 관련하여

역사적, 상징적 가치가 큰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혈의(血衣)는 선생이 흉탄에 쓰러지던 순간까지 입고 있었던 의복류로

조끼 적삼, 저고리, 조끼, 개량속고의, 바지, 대님, 양말 및 개량토시이며,

혈흔(血痕)과 탄흔(彈痕)이 남아 있다.

1996년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보존처리하면서

의복에 묻은 피 검사를 통해 선생의 혈액형이 AB형인 것으로 확인된 바 있다.

 

인장(印章)은 선생이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으로 계실 때부터 편지, 붓글씨 등에 사용한 것들이다.

이 중에서 1940년경부터 1945년까지 사용한 ‘金九之印’ 인장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판공실장을 역임한 민필호(閔弼鎬)가 관리하여 오다

후손이 독립기념관에 기증한 것이며,

낙관(落款) 세트(寬和, 金九之印, 白凡)는 근대기의 유명한 전각가 김태석이 1946년에 새긴 것이다.

이 인장들은 선생이 광복 후 쓴 유묵의 대부분에 사용된 것이어서 매우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회중시계는 윤봉길(1908-1932)의사가 의거(義擧)를 위해 중국 상해로 떠나는 날 아침에

김구선생의 시계와 맞바꿔 찬 것으로, 윤 의사의 유품이면서 김구 선생의 유품이기도 하여

그 가치가 크며, 애국 애족을 위한 거사에서 분초를 정확히 따져 실행하기 위한 소중한 뜻이 담겨 있는

회중시계(懷中時計, 양복의 포켓 등 품속에 넣어 휴대하는 시계)이다.

 

유묵 '한미친선평등호조(韓美親善平等互助)’는

선생이 1949년 1월에 당시 주한미국대사관 문정관이던 헨더슨(Gregory Henderson, 1922-1988)에게

써 준 붓글씨로 당시의 시대상황과 통일조국을 열망한 의지가 반영되어 있으며,

‘愼其獨’(신기독, 홀로 있을 때에도 삼가다)과 ‘思無邪’(사무사, 생각함에 그릇됨이 없다)는

서거 당시 책상 위에 두루마리 상태로 놓여있던 것으로

가장자리에 혈흔이 남아 있어 역사적, 상징적 가치가 큰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번에 엄선된 유물들은 백범김구기념관(서울 용산)과 독립기념관(충남 천안)에 소장된 것들로,

관계전문가 현지조사(‘09.2-3월) 및 검토회의(’09.3.18)와 문화재위원회의 검토, 논의(‘09.4.2)를 거쳐

선생의 유물 중 사료적 가치가 매우 크고 유일성․희귀성이 있는 것을 등록기준으로 삼았다.

 

문화재청은 30일간의 문화재 등록예고 공고를 통해

소유자를 비롯한 각계의 의견을 수렴한 후, 문화재위원회의 심의 등을 거쳐

백범의 서거일(6월 26일)에 맞추어 문화재로 공식 등록할 계획이다.

담당자 : 근대문화재과 강흔모, 김미성
전화번호 : 042-481-4892, 4888

 

 

 

 

 

문화재 등록예고 백범 김구 유물 현황

 

 

□ 유물 목록

 

연번

문화재 명칭

수량

제작시기

규격

(가로×세로, mm), 재질

소장처

[소유자]

비고

1

백범 김구 혈의

(血衣) 일괄

일괄

10점

1940년대 후반

 

백범김구기념관

[김 신]

 

 

①조끼적삼

1점

 

길이 690, 화장 630,

품 565, 9족 항라

 

 

 

②저고리

1점

 

길이 600, 화장 800,

품 600, 생주, 노방주

 

 

 

③조끼

1점

 

길이 595, 품 600,

9족 항라, 노방주

 

 

 

④개량속고의

1점

 

길이 480, 엉덩이둘레(1/2) 760, 명주

 

 

 

⑤바지

1점

 

길이 1230, 엉덩이둘레(1/2) 1100,

9족 항라, 노방주

 

 

 

⑥대님

1쌍 2점

 

815×40, 생주

 

 

 

⑦양말

1쌍 2점

 

길이 230, 너비 190, 면직물

 

 

 

⑧개량토시

1점

 

길이 450,

너비 120, 190

 

 

2

백범 김구 인장

金九之印

1과

1940년경 추정

18×18×50, 옥석

독립기념관

 

3

백범 김구 인장

金九

1과

1945년경 추정

16×16×45, 계혈석

백범김구기념관

[김 신]

 

4

백범 김구 낙관

3과

1946년

15×30×60, 32×32×60,

32×32×55, 옥석

백범김구기념관

[김 신]

 

5

백범 김구

회중시계

1점

1932년 이전

Waltham, 직경 45

백범김구기념관

[김 신]

 

6

백범 김구 유묵

韓美親善平等互助

1점

1949.1월

1320×320, 한지

백범김구기념관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

 

7

백범 김구 유묵

愼其獨

1점

1949.6월

400×1100, 한지

백범김구기념관

[김 신]

 

8

백범 김구 유묵

思無邪

1점

1949.6월

400×1100, 한지

백범김구기념관

[김 신]

 

 

19점(과)

 

 

 

 

 

 

 

 

1) 백범 김구 혈의(血衣) 일괄

ㅇ 김구(金九, 1876~1949)선생이 1949.6.26 경교장에서 총격으로 서거할 당시

입고 있었던 의복류로 조끼적삼(1점), 저고리(1점), 조끼(1점), 개량속고의(1점), 바지(1점),

대님(2점), 양말(2점) 및 개량토시(1점) 등 일괄 8종 10점임.

혈흔이 남아 있으며 특히 조끼적삼과 저고리에는 탄흔이 있어

서거 당시의 상황을 생생히 증명해주는 유물로 역사적․상징적 가치가 매우 큼

ㅇ 혈흔이 가장 많이 남아있는 조끼적삼과 저고리 및 조끼는 왼쪽 어깨부위가 절개된 상태이며,

개량속고의(전통적인 袴衣와 달리 개량된 속바지)와 바지 및 대님은 상의와 마찬가지로

명주로 만들어짐.

그 외 갈색 양말과 개량토시(전통적인 吐手와 달리 옷소매의 오염을 방지하기 위해 근대기부터

사용한 덧소매형 토시)가 있으며, 조끼에 달렸던 것으로 추정되는 은단추도 별도 보관되어 있음

 

2) 백범 김구 인장 - 金九之印

ㅇ 김구(金九, 1876~1949)선생이 사용하던 사인(私印)으로

황색 옥석(玉石)에 구름무늬가 새겨져 있고

선생이 중국에서 활동하던 1940년쯤부터 1945년 11월 귀국시까지 주로 사용되었으며,

중국 정부의 주요 인사에게 보낸 서한 대부분에 이 인장이 찍혀있어 자료적 가치가 큼

 

3) 백범 김구 인장 - 金九

ㅇ 김구(金九, 1876~1949)선생이 사용하던 사인(私印)으로

황색 계혈석(鷄血石)에 해표(海豹)가 새겨져 있고 광복 이후에 주로 사용되었으며,

1946년경에 김상정(金商玎), 정인보(鄭寅普)에게 보낸 명함과 안창호(安昌浩)에게 보낸 사진 등에

이 인장이 찍혀있어 자료적 가치가 큼

 

4) 백범 김구 낙관

김구(金九, 1876~1949)선생이 사용하던 사인(私印)으로

[寬和] ․ [金九之印] ․ [白凡] 3과로 구성되는 낙관(落款) 세트로서

각각 두인(頭印), 성명인(姓名印), 아호인(雅號印)임.

검은 옥석(玉石)에 연잎무늬가 새겨져 있고

‘惺齋作’, ‘丙戌仲春惺齋仿古’라는 측관(側款, 인장의 옆면에 새긴 문자)이 있어

근대기의 유명한 전각가 성재(惺齋) 김태석(金台錫, 1875-1953)이 1946년 봄에 새긴 것임을

알 수 있으며, 김구 선생이 주로 글씨를 쓸 때 사용했던 것으로

1945년 11월 중국에서 귀국한 이후에 쓴 유묵(遺墨)의 대부분에 이 인장이 찍혀 있음

 

5) 백범 김구 회중시계

ㅇ 윤봉길(1908-1932)의사가 한인애국단 입단 선서식(1932.4.26) 직후에 구입하여 간직하다가

중국 상해 홍구공원(虹口公園)으로 떠나는 날 아침에 김구선생의 시계와 맞바꾼 것으로,

윤봉길의사의 유품이면서 김구선생의 유품이기도 하며,

거사에 임한 두 분의 애국, 독립정신을 헤아릴만한 유물로서 상징적 가치가 큼

ㅇ 이 금색 회중시계(懷中時計)는 Waltham사에서 만든 것으로

시계줄 끝에 작은 나침반이 달려 있으며,

하트형의 꽃무늬가 은도금되어 있는 덮개를 열면 12방위가 한문으로 표시되어 있음

 

6) 백범 김구 유묵 韓美親善平等互助

ㅇ 김구(金九, 1876~1949)선생이 1949년 1월에 당시

주한미국대사관 문정관 헨더슨(Gregory Henderson, 1922-1988)에게 써 준 붓글씨임.

미군정과 대립하던 당시 해방정국에서 선생은

한국의 역사와 문화에 관심을 가졌던 젊은 헨더슨에게 여러 점의 휘호를 선물하였음.

그 중 ‘韓美親善平等互助’는 당시 시대상황과 선생의 통일조국을 열망한 의지를 반영하고 있어

사료적 가치가 크며 ‘한국과 미국이 친선하고 평등하게 서로 돕자’라는 의미로

한미외교관계에 있어 상징적 가치가 큼

ㅇ 헨더슨은 1948-1950, 1958-1963년까지 우리나라에 체류하며 韓大善이라는 이름을 가질 정도로

우리와 깊은 인연을 맺은 인물로, 우리 정계와 학계, 문화계 인사들과 폭넓게 교류하면서

도자기 등 진귀한 유물을 수집하였으며,

이 유묵(遺墨)은 헨더슨의 부인이 2002년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에 기증한 것임

 

7) 백범 김구 유묵 愼其獨

ㅇ 김구(金九, 1876~1949)선생이 쓴 붓글씨로

1949.6.26 서거 당시 책상 위에 놓여있던 두루마리 중 하나이며,

가장자리에 혈흔이 남아 있어 그 당시의 상황을 생생히 증명해주는 유물로서 역사적 가치가 큼

ㅇ 선생은 1932년 윤봉길의사의 상해의거 이후 본격적으로 붓글씨를 쓴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현재까지 알려진 유묵(遺墨)은 150여 점에 달하는데,

‘홀로 있을 때에도 삼가다’는 愼其獨의 의미가

당시 선생이 처한 상황과 마음가짐을 보여주는 것으로서 상징적 가치가 큼

 

8) 백범 김구 유묵 思無邪

ㅇ 김구(金九, 1876~1949)선생이 쓴 붓글씨로

1949.6.26 서거 당시 책상 위에 놓여있던 두루마리 중 하나이며,

가장자리에 혈흔이 남아 있어 그 당시의 상황을 생생히 증명해주는 유물로서 역사적 가치가

논어 위정편에 나오는 경구인 ‘생각함에 그릇됨이 없다’라는 뜻의 思無邪는

당시 선생이 처한 상황과 마음가짐을 보여주는 것으로서 상징적 가치가 큼

 

 

백범 김구 유물

 

 

 1. 백범 김구 혈의 일괄

(조끼적삼)

백범 김구 혈의 일괄

(저고리)

 백범 김구 혈의 일괄

(조끼)

 백범 김구 혈의 일괄

                             (개량속고의)

 백범 김구 혈의 일괄

(바지)

 백범 김구 혈의 일괄

(대님 2점)

 

 백범 김구 혈의 일괄

(양말 2점)

  백범 김구 혈의 일괄

(개량토시)

 2. 백범 김구 인장

<金九之印>

 

 3. 백범 김구 인장

<金九>

 

 4. 백범 김구 낙관(3과)

 

 5. 백범 김구 회중시계

 6. 백범 김구 유묵

<韓美親善平等互助>

 

 7. 백범 김구 유묵

<愼其獨>

 8. 백범 김구 유묵

<思無邪>

 

 

- 2009-04-10  문화재청

 

 

 

 

 

 

 

 


 

민족지도자 백범 선생의 자취를 이어가다     

백범 김구(金九, 1876.8.29~949.6.26)선생은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으로 활동하며 우리나라의 자주독립과 통일조국 실현을 위해 헌신한 민족 지도자로, 1949년 6월 26일 서울 경교장(京橋莊)에서 손님으로 가장한 안두희의 흉탄을 맞고 서거하셨다.

 

이번에 문화재로 등록 예고되는 유물 19점은,

선생이 총격으로 서거할 당시 입고 있었던 피묻은 의복류(8종 10점),

편지나 붓글씨에 사용한 인장(3종 5과),

윤봉길의사의 상해의거 직전 윤의사와 맞바꾼 회중시계(1점),

서거 당시 책상 위에 놓여있던 붓글씨 등 유묵(3점) 등으로

백범 김구 선생의 생애 및 대한민국임시정부 활동과 관련하여

역사적, 상징적 가치가 큰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역사의 현장에서 살아남은 백범의 보화(寶華)들

혈의(血衣)는 선생이 흉탄에 쓰러지던 순간까지 입고 있었던 의복류로

조끼적삼, 저고리, 조끼, 개량속고의, 바지, 대님, 양말 및 개량토시이며,

혈흔과 탄흔이 남아 있다.

1996년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보존처리 하면서 의복에 묻은 피 검사를 통해

선생의 혈액형이 AB형인 것으로 확인된 바 있다.

 

인장(印章)은 선생이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으로 계실 때부터 편지, 붓글씨 등에 사용한 것들이다.

이 중에서 1940년경부터 1945년까지 사용한 ‘김구지인(金九之印)’ 인장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판공실장을 역임한 민필호(閔弼鎬)가 관리하여 오다 후손이 독립기념관에 기증한 것이며, 낙관(落款) 세트(관화寬和, 김구지인金九之印, 백범白凡)는 근대기의 유명한 전각가 김태석이 1946년에 새긴 것이다.

이 인장들은 선생이 광복 후 쓴 유묵의 대부분에 사용된 것이어서 매우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회중시계는 윤봉길(1908~1932)의사가 의거를 위해 중국 상해로 떠나는 날 아침에 김구선생의 시계와 맞바꾼 것으로, 윤 의사의 유품이면서 김구선생의 유품이기도 하여 그 가치가 크며, 애국 애족을 위한 거사에서 분초를 정확히 따져 실행하기 위한 소중한 뜻이 담겨 있는 회중시계(양복의 포켓 등 품속에 넣어 휴대하는 시계)이다.

 

유묵 ‘한미친선평등호조(韓美親善平等互助)’는 선생이 1949년 1월에 당시 주한미국대사관 문정관이던 헨더슨(Gregory Henderson, 1922~1988)에게 써 준 붓글씨로 당시의 시대상황과 통일조국을 열망한 의지가 반영되어 있으며,

‘신기독(愼其獨)’과 ‘사무사(思無邪)’는 서거 당시 책상 위에 두루마리 상태로 놓여있던 것으로

가장자리에 혈흔이 남아 있어 역사적, 상징적 가치가 큰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문화재청, 백범 김구선생의 유품 문화재로 등록
    
이번에 엄선된 유물들은 백범김구기념관(서울 용산)과 독립기념관(충남 천안)에 소장된 것들로,

관계전문가 현지조사 및 검토회의와 문화재위원회의 검토, 논의를 거쳐

선생의 유물 중 사료적 가치가 매우 크고 유일성 및 희귀성이 있는 것을 등록기준으로 삼았다.

 

문화재청은 30일간의 문화재 등록예고 공고를 통해 소유자를 비롯한 각계의 의견을 수렴한 후,

문화재위원회의 심의 등을 거쳐 백범의 서거일(6월 26일)에 맞추어 문화재로 공식 등록할 계획이다.

 


- 강흔모 문화재청 근대문화재과 행정사무관

- 월간문화재사랑,  2009-05-13

 

 

 

 

 

 

 

 “내 소원은 대한 독립이오”

 김구 선생 집무실 경교장(京橋莊)

 

 

 

 

 

죽첨장이었던 것을 개울 다리 이름인 경교를 따서 '경교장'으로 고쳐 사용

 

“네 소원이 무엇이냐?”하고 하느님이 내게 물으시면,

나는 서슴지 않고 “내 소원은 대한 독립이오.” 하고 대답할 것이다.

“그 다음 소원은 무엇이냐?” 하면, 나는 또 “우리나라의 독립이오.” 할 것이요,

또 “그 다음 소원이 무엇이냐?” 하는 셋째 번 물음에도,

나는 더욱 소리를 높여서 “나의 소원은 우리나라 대한의 완전한 자주독립이오.” 하고 대답할 것이다.

“동포 여러분, 나 김구의 소원은 이것 하나밖에 없다.

내 과거의 칠십 평생을 이 소원을 위하여 살아왔고,

현재에도 이 소원을 위하여 살고 있고, 미래에도 나는 이 소원을 이루려고 살 것이다”

(김구, 「나의 소원」)

 

 

1945년 8월 15일 일제가 패망하고 중국에 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주석 김구와 요인들이

상해에서 꿈에 그리던 조국의 땅으로 돌아온 날은 같은 해 11월 23일이었다.

오후 4시가 조금 지난 시각 김포 비행장에는 그러나 환영 인파는커녕

낯선 미군병사 몇 명만이 임시정부 요인들을 맞이하였다.

귀국 인사들을 태운 국방색 세단 2대와 지프차 10여 대는 때마침 내리는 함박눈을 맞으며

숙소인 서대문의 죽첨장(竹添莊)에 도착하였다. 그곳은 일행을 맞을 준비가 전혀 되어있지 않았다.

나중에 들으니 매일같이 임시정부가 환국한다는 소문은 있었으나 대부분 헛소문에 그쳐

 아무런 준비를 못했다는 것이다.(선우진 회고록, 『백범 선생과 함께 한 나날들』에서 인용)

 

서대문의 죽첨장은 바로 경교장을 말한다. 일제강점기 때에 이곳이 죽첨정이었던 것에 따른 것이다.

'죽첨장'은 원래 일제강점기에 금광(金鑛)을 경영하던 광산 재벌 최창학(崔昌學)의 저택이었다.

광복 후 자신의 친일 행위를 뉘우친다는 뜻으로 이곳을 김구 선생의 거처로 제공하였던 것이다.

 

김구는 죽첨장을 건물 주변의 개울에 있는 다리 이름인 경교를 따서 '경교장'으로 고쳐 사용하였다.

김구는 이곳에서 3년 7개월간 거주하였고, 경교장은 김구의 집무공간이자 안식처였다.

아들 김신과 함께 생활하며 가끔은 손수 밥을 지어 들기도 했다고 한다.

 

경교장은 1936년 착공하여 1939년 준공되었으며,

당시에는 1,548평 대지에 지하 1층, 지상 2층 264.4평 규모의 양관(洋館)이었다.

광복군 대원 장준하의 수기인『돌베개』를 보면 경교장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2층의 구조는 동서로 긴 복도가 한 가운데 있고 그 복도 양 옆에 방이 있었다.

남향한 방의 첫 방이 김구의 거실이었고, 왼쪽 맨 끝 방이 응접실이었다.

그 사이에 있는 일본식 다다미방은 수행원들이 사용하였다.

아래층에는 식당이 있었는데 요인들과 내방객들은 모두 이곳에서 식사를 하였다.

 

 

“선생님을 내가 죽였다…….”

 

김구는 1949년 6월 26일 이곳에서 동포인 육군 소위 안두희의 총탄에 의해 서거하였다.

김구의 비서 선우진의 회고록을 통해 서거 당일을 살펴보고자 한다.

 

- 1949년 6월 26일은 일요일이었다.

일요일에는 남대문교회의 예배에 참석하곤 하였는데 이 날은 마침 차가 없어서 교회에 가지 못하였다.

당일 11시 30분 경 육군 포병 소위 안두희가 찾아와 백범 선생 뵙기를 청했다.

안두희는 일전에 한국독립당의 조직부장 김학규의 소개로 경교장을 찾아온 적이 있었다.

내가 선생이 손님과 면담 중이라 하자 안두희는 비서실에서 면담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안두희는 45구경 권총을 차고 있었다. 12시경 선생과 잘 아는 강홍모 헌병 대위가 경교장에 들렀다.

(중략) 안두희는 강 대위에게 먼저 선생을 뵈라고 답했다. 10여 분 뒤에 강 대위가 2층에서 내려왔다.

안두희가 일어나자 내가 2층으로 안내를 했다.

선생은 휘호를 쓰려는 듯 의자에 단정히 앉아 계셨고, 평소와 마찬가지로 평온한 표정이었다.

이 때가 12시 40분을 조금 지난 시각이었다.

갑자기 위층에서 떠들썩한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급하게 위층으로 뛰어 올라갔다.

안두희가 권총을 든 채 2층에서 고개를 숙이고 내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아래층에서 이풍식, 이국태 비서가 뛰어 올라가려는 순간, 안두희가 권총을 계단에 철커덕 떨어뜨렸다.

“선생님을 내가 죽였다…….” 그가 중얼거렸다.

나도 뒤따라 층계 위를 내달려 선생의 방문을 들어서는 순간 눈앞이 하얘졌다.

선생의 얼굴과 오른편 가슴에서 유독 붉은 피가 왈칵 흘러나오고 있었다. -

 

이념으로 분단된 조국의 완전한 통일을 위하여 남북협상 기획을 구상하고,

자신보다 더 큰 인물이 배출되기를 바라며 살아간 기록인 『백범일지』를 집필한 곳이며,

그토록 바라던 해방된 조국에서 일제가 아닌 동포의 손에 의해 생을 마친

백범 김구의 혼과 넋이 살아 있는 곳이 경교장이다.

 

경교장은 백범 서거 후 집주인 최창규 측의 요구로 반환이 되었고,

한국전쟁 이후 외국 대사관과 미군 시설을 거쳐 1966년 고려병원에 인수되었으며,

현재는 강북삼성병원의 소유로 되어 있다.

그동안 여러 차례 철거, 이전 등 논란이 많았지만

2001년 4월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129호로 지정이 되었고,

2005년 5월에는 문화재청이 국가지정문화재 사적 제 465호 ‘서울 경교장’으로 지정, 고시하였다.

 

병원 측은 서울시 문화재과와 협의하여 시설 일체를 그 당시대로 복원할 계획을 가지고

현재 개수공사에 들어가 2011년 12월까지 임시 폐쇄하고 있으며,

다만 백범기념실은 매주 토요일 오후에 3차례 제한적으로 일반인 관람을 허용하고 있다.

- 사종민(서울역사박물관 교육홍보과장)

2010.11.11 Hi Seoul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