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주짱의 하늘꿈 역사방

나아가는(문화)

한국 근대의 고미술품 수장가 : 장택상

Gijuzzang Dream 2009. 4. 13. 21:43

 

 

 

 

 

 한국 근대의 고미술품 수장가 : 장택상

 

 

 

고미술의 매혹

고미술품 수장가들의 수장을 위한 노력과 열정은 종종 일반의 상상을 초월하는 경우가 있다.

이들의 정열은 이 방면에 관심 없는 이들은 이해하기 어렵다.

일본의 저명한 저널리스트 다치바나 다카시는

프랑스인들의 와인에 대한 정열과 와인 문화를 살핀 글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와인만이 아니라 무엇이든 다 그렇겠지만,

어떤 문화의 바깥에 있는 사람은 그 문화의 안쪽에 있는 사람이 가진 가치체계를 보지 못한다.

그래서 바깥에 있는 사람의 눈에는 안에 있는 사람의 정열이 더없이 어리석게만 보인다.
와인 테이스팅만 해도,

바깥에서 보면 별 것도 아닌 일에 턱없이 진지하게 몰두하는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거기 직접 참가해서 안쪽에서 보면,

자신이 엄청나게 풍요로운 세계의 한복판에 있다는 것을 깨닫고

이제는 역으로 바깥세계의 빈곤함이 딱해 보이는 것이다.

 

안쪽에 들어서면 그 안에 형성되어 있는 가치체계를 알게 된다.

…도자기에 빠진 사람은 찻그릇 하나에 수백만 엔을 지불하기도 한다.

이 역시 그 문화의 바깥에 있는 사람에게는 광기어린 어리석은 짓일 뿐이다.

 

어떤 영역에서도 마찬가지다.

아주 사소한 차이를 찾아 최고급 부분에 광기어린 정열과 돈을 쏟아 붓는 사람이 얼마나 있느냐로

문화의 수준이 결정되는 것이다.

과문한 필자의 좁은 식견 탓이겠지만
문화의 수준과 애호가 또는 호사가들의 관계를

이렇게 쉬운 단어로 이해하기 쉽게 표현해 놓은 글을 읽은 적이 없다.

지면 관계상 전문을 게재할 수 없는 것이 아쉬울 따름이다.

이 글에서 와인을 고미술품 등으로 바꾸면

고미술품 수장가들의 수장열과 그 노력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 듯하다.

한국 근대 고미술품의 수장과 수장경로 등에 대하여 별다른 주목이 없었던 것은

조선시대의 서화고동 수장과 달리 근대 이후의 고미술품 수장 · 매매가 도굴 · 밀매 · 밀반출 등

부정적인 측면과 일부 연관도 있을 듯하다.

이밖에도 감상이나 연구와 달리 매매 등을 낮춰보는 시각도 간과할 수 없다고 본다.
최근 들어 한국 근대의 미술시장과 고미술품 수장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연구의 스펙트럼이 넓어지는 것은 고무적인 현상이다.

이 방면 연구는 조선 후기의 서화 애호풍조에 의해 성행했던 수집과 감평의 수준을 알 수 있게 해주고

수장 형태의 근대적 변화와 함께 근대 동아시아 미술품 유통사를 재구성할 수 있게 해준다는 점에서

중요성을 갖기 때문이다.

 

한국 근대의 수장가에 대해서는 전형필(1906-1962)을 제외하면

수장경위나 수장내역 등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전형필 외에도 근대의 중요한 한국인 수장가로는 이용문(?-?), 박영철(1879-1939), 김용진(1882-1968),

함석태(1889-?), 김성수(1891-1955), 최창학(1891-?), 김은호(1892-1979), 장택상(1893-1969),

김찬영(1893-?), 이한복(1897-1940), 박창훈(1898-1951), 백인제(1898-?), 이병직(?-1973),

손재형(1903-1981) 등이 꼽힌다.

이들은 정치가, 고관, 교육자, 사업가, 의사, 서화가 등의 직업을 가진 인물들이다.

이들 개인 수장가 들에 대한 개별적, 구체적 연구와 수장내역 등은 아직 시도되지 않았다.

필자는 이들 한국 근대의 개인 수장가들에 대한 접근을 시도하려 하고 있다.

제일 먼저 다루고자 하는 인물은 근현대 한국정치사의 거물 장택상(1893-1969)이다.


"난세의 정치인", "천재적 능변가", "정치의 곡예사", "기고만장의 기염아(氣焰兒)", “술수의 화신” 등으로

불리기도 했던 장택상은 대부호의 아들로 태어나 수도경찰청장, 국무총리에 오르는 등

영광에 찬 인생이었던 듯하나 실은 파란만장하고 굴곡 많은 인생을 보냈다.

장택상이 재기발랄하고 정치수완이 능란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인데,

희대의 풍운아답게 풍류와 예술을 즐겼고 자신의 애정행각을 여러 차례 활자화하기도 하였다.

장택상은 그의 아버지나 형제들과 같이 노골적인 친일을 하지도 않았지만

뚜렷한 독립운동을 하지도 않았다.


수장가 장택상

장택상이 고미술품을 완상하고 많이 수집한 것은

그가 영국 유학 당시 직접 목격한 영국인들의 고미술품에 대한 높은 인식이 컸을 것이다.

여기에 본래 재기발랄하고 자신의 지론이 "로맨스는 인생이요, 인생은 로맨스다"라고 할 정도로

감성이 풍부했기 때문으로 짐작된다.

장택상은 고미술품 수집가로 이름이 있지만 국악 애호가이기도 했으며

일용장식품도 특이하고 진귀한 것만을 가졌다고 전한다.


고미술품 애호가들과 고미술상들은 장택상의 고미술품 감식안은 높이 평가하였지만

장사 수완도 보통이 아니었음을 증언하였다.

박병래는 “장택상은 좋은 물건을 많이 가지고 있었거니와 골동품을 사고파는데도 임기응변의 기지를

보였”으며 “돈속에도 아주 밝은 수집가”로 평한 바 있다.

예를 들어 좋은 물건을 많이 샀지만 5-6점을 사면 그것을 친구에게 소개하고

그중에서 1-2점을 사례로 받기도 하였고 상인에게도 맞돈을 주지 않고 물건과 바꾸는 일도 있었는데

그럴 경우 대개 상인들이 손해 보는 경우가 많았다고 전한다.

 

젊은 시절 거간으로 활동한 바 있는 도예가 지순택은

장택상이 “귀하면서도 화려하고 맛이 있고 재미있는 것을 좋아했다”고 평한 바 있으며,

역시 거간이었던 변윤식은 장택상이 “우선 가짜라 말해 놓고 값을 깎아”내렸다고 한다.

그리고 장택상은 “거만한 면이 있었고 남들이 굽신거리기를 바라는” 행태를 보였다고 전한다.


장택상 수장품의 전모를 알 수는 없으나 일

제시기의 신문·잡지 등의 간행물과 도록류를 통해 그 편린이나마 볼 수 있다.


1937년 3월에 발간된 『조광』 3권 3호의 특집 「진품수집가 비장실역방」에

당시 유명한 조선인 고미술 수장가 한상억, 장택상, 이한복, 이병직, 황오의 5명을 찾아

인터뷰한 기사가 실렸다.


“도자기 수집의 권위”로 소개된 장택상은 “선생의 가지신 자기는 몇 점이나 됩니까”라는 기자의 질문에

“네 한 천여 점 됩니다. 그 중에 쓸 만한 것은 삼백여점 밖에 되지 않습니다.”라고 답했다.

이 인터뷰 중 장택상은

우리나라 사람들의 문화재 인식이 박약하고 우리 물건을 홀대하는 행태에 통탄해 마지않았다.

“그러면 이런 물건을 어디에서 사십니까?”하고 기자가 묻자,

“모두 역수입이지오. 조선물건이지만은 모다 일본 내지인의 손을 통하여 사게 됩니다.

경성만 하여두 이런 도자기로 생활하는 일본 내지 사람이 오륙백명이나 되고

그 판매가격이 칠팔십만어치나 됩니다. 전조선을 치면 아마 일천만원 이상이 될 것입니다…”라고 하여

당시의 고미술시장에 대한 소중한 증언을 하였다.

1930년대 당시 서울에서는 거의 매월 교환회 및 경매회가 열리던 ‘골동품거래 호황기’였다는 점에서

장택상의 증언은 한국 근대의 미술시장 및 고미술품 유통과 거래에 의미있는 증언이다.


장택상 수장유물은 6·25사변으로 인하여 상당수 없어졌고

이후 이승만과 맞서기 위한 대통령입후보로 인하여 주요 유물을 판매하는 바람에 많이 흩어졌다고 전한다.

6·25사변으로 인하여 장택상의 서울 저택은 물론 경기도 시흥과 노량진의 별장도 파괴되었다.

시흥별장에서 전투가 벌어져 이곳에 보관하였던 숱한 유물들이 사라졌으며

노량진별장에도 일부를 두었다가 직격탄을 맞아 대부분 파괴되었다.


장택상의 고미술품에의 열정과 감식안 등은 아직도 이 방면 애호가들에게 회자되곤 한다.

고미술품 수집과 매매에 기벽이 있었지만

장택상은 수집한 고미술품의 질적 · 양적인 측면에서 모두 최상위로 꼽히는 중요한 수장가이기 때문에

한국 근대의 수장가를 언급할 때면 가장 먼저 다뤄야 할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다.

특히 다른 수장가들과 함께 일종의 품평회와 같은 모임을 만들어

이 방면 문화의 심화와 확산에 기여한 점은 특기할 만하다.

- 김상엽, 문화재청 인천국제공항 문화재감정관실 감정위원

- 2009-04-13, 문화재청 문화재칼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