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 불상 엿보기
제주지역은 백제, 신라시대부터 대륙간의 교통을 통해 많은 문물교류가 있었음을 사서에서 알 수 있다.
고려시대에는 사찰이 건립되었으며 불서(佛書)가 개간되었다는 기록이 있은 것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에는 불교가 제주지역에 토착화되었다고 추정된다.
불교의 흔적이 제주도에서 처음 확인되는 것은 고려 정종 원년(1034) 이후부터
불교행사인 팔관회에 참석하였다는 기록이 남아있고
사찰유적으로는 서귀포시 하원동 법화사지 발굴 조사를 통해
고려 원종 10년(1269)에 중창을 시작하여 충렬왕 때에 마쳤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당시 제주 지역에 산재한 수정사, 묘련사, 원당사 등 크고 작은 사찰은 제주의 불교신앙의 중심지였다.
그러나 제주 불교는 조선 중기 변협(1565, 명종 20년), 곽흘(1565-1568년 제주목사 재임),
이형상(1601년) 목사 이후부터 폐사가 가속화되었고 이후를 제주불교사에서는 무불교시대라고 부른다.
제주의 근대 불교는 1908년 안봉려관 스님에 의하여 제주시 관음사 창건으로 시작하게 되었고
2007년 현재 도내 사찰수는 254개소이며 성보문화재는 286건 751점이다.
제주도에서 복장물이 발견되어 조성 연대가 확실한 불상은 6구이다.
가장 앞선 시기의 것은 임진왜란 이전인 1534년에 조각승(彫刻僧) 향엄(香嚴)이 조성한
서산사 목조보살좌상(사진 1)으로 향엄(香嚴)이 수화사로
보조 조각승(補助 彫刻僧)을 데리고 작업했다는 발원문 내용으로 보아
조각승(彫刻僧) 또는 조각승 유파의 존재 가능성을 말해주고 있다.
월계사 목조아미타불좌상(사진 2)은 1661년 조각승(彫刻僧) 운혜(雲惠)가 조성한 상으로
전체적으로 안정된 신체비례를 보여주고 있고
옷주름 특징은 오른쪽 어깨 하부, 두 다리 사이, 왼쪽 무릎에 잘 나타나 있다.
삼광사 목조보살좌상(사진 3)은 1671년 조각승(彫刻僧) 응혜(應慧)가 조성한 상으로
신체는 당당한 편이며 무릎폭이 넓어 전체적으로 안정감 있는 자세이고,
수인은 양손을 모두 무릎에 닿을 정도로 내려와 엄지와 중지를 맞댄 중품하생인을 선호하고 있다.
관음사 목조관음보살좌상(사진 4)은 1698년 조각승(彫刻僧) 색난(色難) 등에 의해서 개금된 불상으로
복장물로는 발원문(發願文)과 개금발원문(改金發願文)이 발견되었다.
색난(色難)의 제작한 불상의 특징은
얼굴의 전체적인 모습은 단아하면서도 양감이 있고 부드러운 미소를 띠고 있다.
용문사 목조석가여래좌상(사진 5)은 1700년경 조각승(彫刻僧) 진열(進悅)이 조성된 상으로
복장물로는 발원문(發願文),후령통(喉鈴筒), 다라니, 불경 등이 발견되었다.
진열(進悅)이 조성한 불상의 특징은 전체적으로 둥글며 옷주름의 선도 매우 유려하다.
정방사 석조여래좌상(사진 6)은 1702년 조각승(彫刻僧) 수일(守日)이 조성한 상으로
복장물로는 발원문(發願文), 후령통(喉鈴筒), 다라니 등이 발견되었다.
수일(守日)이 조성한 불상의 특징은 전체적으로 사각형에 가깝고 길고 날카로운 눈과
굳게 다문 입 등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불상과 보살상이 종교적으로 재탄생하기 위한 매개체로
복장물이 큰 역할을 담당한다고 할 수 있다.
불상에 있어 복장물은 신앙의 대상으로 승화시키는 의미를 지니고 제주도에서 발견되는 발원문은
육지부와 마찬가지로 순수한 민생들의 시주와 승려들을 중심으로 불상 조성이 이루어지고 있다.
부처의 공덕이 국가 태평과 민생의 편안함을 기원하고 중생들을 불교에 귀의시키려는
승려들의 노력과 개인적인 신앙심의 순수한 열정이 불상조성을 통하여 염원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불상 조성과 제작년도, 불보살 명칭, 봉안사찰과 전각 등을 기록한 다음
왕과 왕비, 왕세자의 무병장수를 기원하고, 시주질 등을 나열하고 있다.
그리고 불상 조성에 참여하는 작가의 경우도 모두 승려 계층으로 일반화되었다.
또한 조선전기의 복장기에서 찾아보기 힘든 왕실의 안녕을 기원하는 문구가 발원문에 표현되어 있어
17세기에 형식화되었다는 점에서 불교에 유교의 충효사상이 융화되어
유교적 정치체계가 뿌리내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제주의 기년명 불상의 조각승들은 16세기 조각승 유파의 존재 가능성을 보여주는 향엄(香嚴)과
17세기 후반에는 운혜(雲惠)와 응혜(應慧)가,
17세기말에는색난(色難)과 진열(進悅) 등이 유파를 이끌며 불상을 조성하였다.
또한 응혜(應慧)와 색난(色難)이 조성한 불상의 양식은 매우 유사하여 서로 교유하였음을 알 수 있다.
제주에서 발견된 불상은 모두 소형이고 대부분 전라도에서 활동한 조각승(彫刻僧)에 의하여 제작되었다.
그리고 봉안처는 전라도 지역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것은 제주의 근대불교가 지리적으로 가까운 전라도 사찰의 포교당으로 시작을 하였기 때문에
전라도의 사찰과 활발한 교류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불상이 소형인 이유는
타지 사찰에 봉안되었다가 제주도로 옮겨오려면 불상의 크기가 작아야 운반이 쉽기 때문이다.
삼광사 목조보살좌상과 같이 조성된 불상이 전남 신안 일심사에 소장되어 있고
정방사 석조여래좌상과 같이 조성된 불상이 전남 벌교 용연사에서 조사된 것으로 보아
앞으로 전라도 지방의 사찰에서 제주 지방 불상과 같은 계열이 계속 발견되리라 기대된다.
- 김창화, 문화재청 제주국제공항 문화재감정관실 감정위원
- 문화재청, 문화재칼럼, 2009-0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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