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지방가마에서 만들어진 백자 제기(祭器)
지금은 제수(祭需)를 담는 제기(祭器)하면 칠(漆)이 된 목기(木器)를 떠올리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조선시대에는 국가의식에 사용되는 의례용기는 금속으로 만드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다.1)
제기는 용도의 특성상 보수적인 성격을 가지기 때문에
개국 초에 정해진 규범이 조선시대 전체의 기본을 형성하였다.
그런데 현재 전해지는 유물과 가마터 출토 유물 중에는 제기로 추정되는 백자(白磁)가 다수 전하고 있어,
금속으로 제기를 만드는 원칙에 변화가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경기도 용인시 양지지역에서는 제기로 사용된 다수의 백자파편이 발견되어,
이런 변화의 양상을 뒷받침해 준다.
여기서 발견된 백자 제기는 청주와 물을 담아내는데 쓰인 산뢰(山뢰) (도 1)와
단술(甘酒)을 담는 희준(犧尊) (도 2),
흰빛 술(後酒)을 담는 상준(象尊) (도 3),
술을 올릴 때 쓰는 작(爵) (도 4),
벼(稻)나 기장(粱)을 담는 보(보) (도 5),
향을 피우는데 쓰인 향로(香爐) (도 6) 등으로 비교적 종류도 다양한 편이다.
조선시대 제기의 기본구성과 형태를 알 수 있는 자료로는『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가 있다.2)
이 책의 '吉禮' 중 <祭器圖說> 항목에는 39종의 제기가 그림과 함께 실려 있고,
그릇의 연원과 용도·재질·규격 등이 설명되어 있다.
내용을 검토해 보면 제사의 등급에 따라 쓰이는 제물과 제기의 종류, 개수 등에 차이가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를 참고하면 경기도 용인시의 백자제기는 동(銅)으로 만들어져야 하는 종류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떤 이유로 금속으로 만들어야 할 제기가 백자로 제작되게 되었을까?
관련 기록을 검토해보면 각종 군수물자의 제작과 금속활자·동전 주조 등으로 인해
이미 고려 말부터 금속재료가 부족했던 상황이 확인된다.
이후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도 이런 현상은 지속되었던 듯,
상대적으로 중요도가 낮은 왕실의 속제나 지방 제사에는 백자로 만든 제기를 쓸 것을 명하고 있다.
특히 세종 12년(1430)의 기록에는 각종 제기를 전국에 보내 같은 형태의 제기를 주조(鑄造)하게 하였고,
이것을 본떠 자기(磁器)로 만들게 한 내용이 있어 주목된다.3)
이것은 금속제기를 대신할 목적으로 자기(磁器)로 제기를 만든 것을 의미하는 대목으로,
현재 전해지는 많은 유물이 이런 이유로 제작되기 시작한 것을 알려준다.
금속제기의 대체물로 백자 제기가 제작된 것을 분명히 보여주는 예로는
삼성미술관 소장의 <백자청화철화삼산문산뢰(白磁靑畵鐵畵三山文山뢰)>가 있다(도 7).
전체적인 형태는『國朝五禮儀』祭器圖說의 산뢰에 비해 단순하지만, 손잡이의 형태와
삼산문(三山文)을 비롯한 문양의 구성과 모양은 거의 동일하게 만들어진 것을 확인할 수 있다(도 8).
보물로 지정된 백자 산뢰는 백자의 질(質)과 유색(釉色), 굽 받침 재료 등을 보았을 때,
조선시대 왕실 · 관청용 자기의 제작을 전담한 관요(官窯)에서 제작된 것으로 생각된다.
한편 경기도 용인시에서 발견된 제기 중에도 같은 종류인 산뢰가 있어 눈길을 끈다(도 1 참고).
전체적인 형태가 삼성미술관 소장의 산뢰보다 양감이 줄어들어 날씬하고 문양 구성도 훨씬 단순하지만,
손잡이와 삼산문의 특징적인 면을 살리고 있어 산뢰로 제작된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용인시 발견 산뢰는 백자의 질과 문양의 형태, 완성도 면에서
다소 거칠게 만들어져, 관요에서 제작된 것과는 차이를 보인다.
이는 지방의 가마에서도 산뢰와 같은 제기가 만들어졌을 가능성을 제시해 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고 할 수 있다.
현재까지 조사된 지방요(地方窯)에서 발견된 제기는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그릇에 높은 굽을 붙여 만든 접시와 발 등이 대부분이다.
조선시대 일반 사서인(士庶人)은 제사지낼 때 일상의 그릇(燕器)을 제기로 사용한다는 기록을 볼 때,
굽이 높은 접시와 발 등이 제기로 만들어진 것을 짐작할 수 있다.4)
또 관요에서도 같은 형태의 그릇에 「祭」자가 쓰여진 것이 지속적으로 발견되고 있어,
이런 사실을 뒷받침해 준다.
그런데 용인시에서 발견된 백자 산뢰와 같은 예는 지금까지 지방 가마터에서는 조사된 예를 찾을 수 없다.
그렇다고 백자 제기가 발견된 지역을 왕실이나 관요와 관련된 유적으로 볼 수 있는 근거도 없는 실정이다.
이는 지방의례에서도 왕실의 경우처럼 제사의 규모에 따라
일상기명(日常器皿)형 외의 제기를 별도로 제작하여 사용한 예로 보는 것이 타탕할 것 같다.
이런 제기는 만들어진 수량도 적고, 다른 그릇에 비해 상대적으로 공을 들여 제작하였을 것이므로
가마터에서 폐기된 예가 적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우리는 흔히 조선시대 백자를 박물관에 진열된 감상의 대상으로만 생각한다.
그러나 이 그릇들은 수요에 걸맞게 다양한 형태로 만들어져,
한 때 각자의 쓰임에 따라 사용되었던 사실은 지나치기 쉽다.
오늘 살펴본 산뢰도 전시장에서 만난 수많은 백자 중 그저 하나의 항아리였을 수도 있을 것이다.
다시 조선시대 백자를 마주했을 때, 유물이 가진 쓰임과 역사에 대해 떠올려 볼 수 있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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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1)『世宗實錄』卷 2, 世宗卽位年 10月 13日 己丑條.
(주 2) 조선시대 최초의 오례의는 端宗 2년(1454)에 간행된 『世宗實錄』「五禮」가 있다.
그러나 조선시대 國家典禮의 典範이 된 것은 成宗 5년(1474)에 간행된 『國朝五禮儀』이며,
보다 체계적으로 정비된 내용을 담고 있다.
(주 3)『世宗實錄』卷 49, 世宗 12年(1430) 8月 6日 甲戌條.
“…宜以奉常寺諸色祭器分送各道見樣鑄成
又造藏祭器庫令壇直看守右條依所申施行其鑄器姑以磁器燔造 從之”
(주 4)『四禮便覽』卷8, 祭禮. “燕器卽常用之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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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9-03-30
- 최윤정, 문화재청 인천항국제여객터미널 감정관실 감정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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