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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계단(戒壇)의 기원과 흐름

Gijuzzang Dream 2009. 4. 9. 11:03

 

 

 

 

 불교 계단(戒壇)의 기원과 흐름 

 

 

 

불교의 계단(戒壇)은 수계의식과 설계(說戒)를 위한 성역(聖域)이다.

특정장소에서 거행되는 수계의식은 무상보리의 근본이 계에 있어 불교정신의 원천으로 여겨진다.

불교교단(samgha, 僧伽)은 계와 율을 준수하면서 이루어진 공동체이다.

그것은 교단에 들어가 수행하기를 원하는 개인의 의지인 戒(sila)와

교단의 통제를 유지하기 위한 율법이라는 律(vinaya)의 이중구조에 의한다.

이러한 수계의식과 단장은 시대와 지역, 종파에 따라 다른 모습을 취할 수 있다.

그럼에도 특히 당대(唐代)에 부처의 가르침을 직접 수지하면서

심오한 종교적 힘을 생성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고

이로 인해 계단은 불교정신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조형이다.

한국의 계단은 통도사 계단과 금산사 계단이 대표적이다.

통도사 계단은 수계인이 굳건히 계율을 지켜 지혜가 무너지지 않음을 의미하는

'금강계단(金剛戒壇)'으로 불린다.

 

금산사 계단 역시 대승적인 어의를 담은

'方等戒壇[방등, 바이뿔야, Vaipulya, 발전된]' 이라는 명칭을 가지고 있다.

 

두 곳 모두 방형의 다중 단 중앙부에 한 개의 석종이 올려 져있고

기단 면석에는 천신(天神)들의 부조가, 주위에는 사천왕 등의 조각상이 바깥을 향하여 세워져 있다.

계단연구의 교과서라 할 당대 도선(道宣, 596~667)의 『계단도경(戒壇圖經)』과 비교하건대

구조, 형태, 크기가 유사하나 도선 계단의 중앙에 놓인 복발이 한국에서는 석종형이다.

통도사 계단은 640년경 신라의 자장율사가 당에서 석가의 진신사리를 가져와 만들었다는

한국 최초의 계단으로 전한다(도 1).

그리고 금산사 계단은 8세기 중엽 진표의 사상과 연결되는 것으로 이해된다(도 2).

<도 1> 통도사 금강계단, 경남 양산 통도사


<도 2> 금산사 방등계단과 오층석탑, 전북 김제 금산사


계를 받는 장소는 산스크리트어로 'sima-mandala'이다.

sima는 界를 뜻하며 중국어로는 界場, 界壇, 동음이의어 戒場과 戒壇으로 받아들여졌다.

 

계단이 만들어지게 된 경위를 『四分律』을 통하여 보면 다음과 같다.

A. 때에 모든 비구가 4人衆을 필요로 하는 갈磨事가 일어났고,

5비구衆, 20비구衆이 필요한 갈마사가 일어났다.

이렇게 하다 보니 대중들이 여러 가지 모임으로 극도로 피곤해졌다.

여러 비구들이 부처님께 사뢰었더니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戒場을 만드는 것을 허락한다. 반드시 이와 같이 하여야 한다.

白二갈磨로서 四方界의 모양을 말하라.

혹은 말뚝이나, 혹은 돌을 놓은 것이거나, 혹은 큰 두둑으로 제한하라.

대중 가운데 능히 갈마를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을 뽑아서 이와 같이 말하게 해야 한다.

대덕 승가는 들으소서. 이 주처의 비구가 사방의 小界相을 말합니다.

만약 승가가 때에 이르렀으면 승가는 승인하고 허락하십시오.

승가는 지금 이 사방 소계상 안에 戒場을 결계하겠습니다. 이와 같이 사룁니다.

이와 같건대 계단은 원래의 의미로는

대계(大界) 가운데에 구족계갈마를 실행하는 데에 편의상 만들어진 소계(小界)이다.

그것은 백이갈마작법에 의해 결계가 이루어져 있다.

그런데 중국, 한국, 일본에서는

평지보다 높게 만들어진 단에 오르는 것에 특수한 의미를 부여하였는지도 모른다.

원론적으로 계율은 의식을 행하는 동안에

넘어서는 안 될 명백한 경계가 정해져 있는 공간을 요구할 뿐이며,

이에 따른 경계는 단지 계율의식을 행할 수 있는 더 작은 영역을 설정하기 위해서 이용되었던 것이다.

당대 도선의 『계단도경』이나 송대 『석씨요람』에서는

계단의 기원을 당시에는 이미 존재하지 않았지만

부처가 25년간 머물렀던 인도의 기원정사(Jetavana)에 놓는다. 그 내용을 살피면,

누지비구(樓至比丘)가 부처에게 청하여 기원정사 외원 동남쪽에 비구수계계단을 건립하였다.

그 단은 부처 열반 시에 사라졌고 대가섭의 1차 결집 시 아난의 말에 따라 복구되었다(도 3).

<도 3> 현재 인도 기원정사(Jetavana)의 계단


중국으로의 수계의식은 조위(曹魏) 가평(嘉平) · 정원(正元) 연간(249~256)에

담가가라(曇柯迦羅)가 낙양에 와서 『승지계심(僧祗戒心)』을 번역하고 인도승을 초청하면서 전해졌다.

계단은 고고학적으로 확인되지 않지만

진송(晉宋) 이래 남방에 주로 세워졌고 모두 300여 곳에 이른다고 한다.

그중에서 구나발마의 남림사 계단은 수계자로 하여금 단 위에 올라가서 계를 받게 했다거나

그가 입적하자 이곳에서 인도식 화장을 하였다는 등의 기록을 전하고,

도선의 『계단도경』과 지반(志盤)의 『佛祖統記』(1258~1269년 撰)은 이 계단이 중국 최초라고 한다.

그럼에도 당대 건봉 2년(667) 도선율사가 장안 교외의 정업사에 계단을 창립하기 이전까지의

계단에 관한 증거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율사이자 역사가인 도선은 문헌과 구법승 및 서역왕래 상인들에게서 얻은 지식을 바탕으로

3중 방형 기단과 그 중심에 복발, 보주를 올린 계단을 설계하였다.

그것은 여러 가지의 의미를 지니는데, 특히 계율, 계단, 의식을 통하여

석가모니 자체로부터 직접 비롯된 불가해한 힘의 원천을

종교적 영향력의 심오한 근원으로 재현하였던 것으로 평가된다.

실제로 계단도경은 오랜 연구를 통한 저술로서,

중국 불교 내에서 적어도 9세기로 이어진 계단의 유행을 비롯하여

한국과 일본 불교의 발전에 분명히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도 4> John R. McRae, Going Forth

: Dauxuan's vision of Jetavana, p.83에서 재인용


<도 5> John R. McRae, Going Forth

: Dauxuan's vision of Jetavana, p.83에서 재인용.


구체적으로 도선의 계단은 삼중방형이며 중앙에는 사리를 둔 복발과 보주가 올려 진 구조이다.

그리고 각 단의 면석에는 벽감을 두어 많은 천신들을 조각하고 난간을 두었다.

충실히 재현한다는 것은 어려워 보이지만 그 핵심은,

삼중 기단이 불교의 초문을 상징하는 삼공(三空)이며

위에 복발과 보주를 합한 오중의 형상이

순수한 오온(五蘊)을 갖춘 오분법신(五分法身)의 표상이라는 데에 있다.

오분법신은 계 · 정 · 혜 · 해탈 · 해탈지견으로서 부처에 의해 이루어진 다섯 가지 지혜를 나타내는

표준밀교용어 오불(五佛)과도 연결된다.

9~10세기 돈황문서를 통해 보건대

계단은 당대 싹이 튼 선종이나 새롭게 도입된 밀교 모두에서 유행을 했고

나아가 수계식은 밀교입문, 계단은 만다라 등과도 동일시되었다.

구체적으로 도선 이후 의정(義淨, 635~713) · 의행(義行, 683~727) · 금강지(金剛智, 671~742) 등이

낙양부근에 계단을 건립하였으며 계단은 상당한 유행을 이루었다.

그중 몇 개의 예를 들어 보면,

인도 나란다 사원에서 10여 년을 유학한 의정의 <대당서역구법고승전>에 있는 나란다사원 계단은

도선의 계단과 달리 절 안의 한적한 곳에

각변 3.1m 이상 높이 2척의 벽돌담으로 쌓은 단층 기단 안에 높이 5촌의 대좌를 두었으며

중앙에는 작은 차이티야(caitya, 枝提: 사리가 있는 것을 탑, 사리가 없는 것을 차이티야)가 있다.

 

의정은 근본일체유부비나야(根本一切有部毘奈耶) 텍스트를 구체적으로 번역한 계율의 전문가였다.

704년 낙양의 숭산 소림사에 새 계단을 세웠는데

아마도 그가 본 나란다사원의 것을 옮겼을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일본의 구법승 엔닌(圓仁, 794~864)이 <입당구법순례행기>에 기록한 당주 계원사 계단은

청벽색의 번와로 만든 2층이며, 하층의 너비가 25척, 상층이 15척, 높이 각 2척이다.

그리고 당말에 창립된 오대산의 죽림사 정원계율원 내 만성계단(萬聖戒壇)은

옥돌로 만든 석자 높이의 팔각이며 바닥은 향내 나는 진흙을 채우고 단상에 융단을 깔아 실내에 둔 단이다.

이것은 도선의 계단이 하층 너비 2장9척8촌(당척 31.1cm로 하여 9.26m)으로 시작되는

방형의 3중 기단 중앙에 복발을 갖는 것과 다른 9세기 중엽 당말까지의 실정이다.

여러 형태를 통하여 발달하는 계단은

안록산의 난 이후 도첩을 팔아서 국가재정의 일원으로 하였기 때문에

관설의 계단이 일어나 곤우삼부(坤隅三府)의 계단 같은 동서북 삼도의 3단이 설치되는 등

계단은 점차 중앙에서 지방으로 보급되었다.

당말 회창폐불로 불교사원이 피폐해져 계단의 설치는 북송에 들어가 재흥되었고

북송의 계단은 도선의 것을 기준으로 하였다.

중국의 계단이 일본으로 건너가게 된 과정은 비교적 소상하게 기록되어 있다.

754년 도선의 손제자 감진화상(鑑眞和尙, 688~763)이 수차례 도일을 시도한 끝에

실명을 무릅쓰고 여섯 번째에 극적인 성공을 거두어 동대사 대불전 앞에 계단을 건립하였다.

일본에서는 감진계의 계단이 나라조에 4개이고

헤이안조 최징에 의해 창시된 예산계단(叡山戒壇)이 추가로 세워졌다.

감진계의 계단은 단상에 탑을 올리는데,

본래 아육왕탑식의 금동탑에서 석가 · 다보 이불병좌상의 다보탑으로 변화되었다.

이러한 동아시아의 계단사조 안에서 한국의 계단이 어떠한 의미와 형태로 존재하는가?

통도사 계단과 금산사 계단이 더욱 흥미롭게 보여 진다.


* 이 글은 계단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필자의 「중국 당 道宣의 戒壇과 金山寺 戒壇」, 『歷史學硏究』35호(호남사학회, 2009)의 글을

일부 수정하여 옮긴 것이다.
- 이경화, 문화재청 무안국제공항 문화재감정관실 감정위원

- 2009-04-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