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범 김구를 살린 ‘덕진풍’
1876년 어느 날, 미국 최대의 전신회사인 웨스턴유니언사에 가디너 허바드란 남자가 방문했다. 그가 찾은 곳은 다름 아닌 웨스턴유니언사의 사장인 월리엄 오튼의 방이었다. 그 자리에서 가디너는 월리엄 사장에게 전화기 특허권을 사가라는 제안을 내놓았다. 월리엄 사장은 탐탁치 않은 표정으로 내부의 검토를 거친 다음 연락을 주겠다고 말했다. 얼마 후 그에 대해 웨스턴유니언의 내부에서 작성된 검토서 의견은 다음과 같았다. 이 기계는 탄생한 순간부터 전혀 가치가 없는 물건이다. 그저 장난감이나 신기한 물건에 불과할 뿐이다.”
당시 전신사업을 독점 운영하고 있던 웨스턴유니언사는 하나의 전선에 여러 개의 전신기를 운영할 수 있는 다중전신기의 실용화에 관심을 쏟고 있었다. 때문에 장난감 기계 같은 전화기에는 신경조차 쓰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몇 개월 전 전화기 발명에 성공한 사위를 대신해 웨스턴유니언사를 방문한 것이었다. 웨스턴유니언사는 갈수록 위축돼 국제송금대행으로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 무엇이든 간에 패러다임 자체를 바꾸는 새로운 것에 대한 세상 사람들의 애초 반응은 참으로 냉혹하다. 물론 벨이 처음 만든 전화기의 성능이 그리 썩 좋지 않은 탓도 있었겠지만, 시장의 반응은 예상보다 훨씬 부정적이었다. “말을 멀리 전송하는 것은 시간낭비에 불과하다”며 전화라는 아이디어 자체를 폄하했다. 주변 동료나 특허 담당 변호사들조차 전화라는 것이 과학적으로 그저 신기한 물건일 뿐 실제로 사용하거나 사업화될 아이템은 아니라고 여겼다. 신기하지만 실생활과는 아무러 상관도 없는 일이었을 뿐이다. 전화를 하면 귀가 안 들린다거나 미친다는 소문이 그것이었다.
전화기를 처음 들여온 조선 사회에서도 한때 그 같은 소문이 돌았다. 전화로 이야기를 하면 귀신이 붙는다는 말이 나돌았던 것이다.
궁내부(덕수궁)에 1백 회선의 전화교환기를 놓고 자석식 전화기로 부처간 통화를 할 수 있었다. 그런데 1890년경 조선을 방문한 새비지 랜도어란 영국인이 쓴 기행문에는 재미있는 내용이 소개되어 있다. 명성왕후의 무덤과 통화를 하기 위해서였다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왕궁에서 몇 마일 떨어진 왕후의 무덤에 전화를 가설해 놓고 임금과 신하들이 하루에 몇 시간씩 전화기에서 나오는 소리를 듣기 위해 기다렸지만 무덤 속의 왕후로부터 어떠한 기별이나 속삭임조차 들리지 않자 고종은 전화를 사기꾼으로 여겼다고 적혀 있다. 하지만 청나라가 전화 부설의 이권을 차지하기 위해 신정왕후의 능과 궁중을 연결하는 전화를 설치해 고종을 설득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고종은 대비였던 신정왕후를 생전에 끔찍이 모셔서 사후에도 3년상을 치르는 과정에서 매번 능을 찾았다고 한다. 명성황후의 능이건 대비 신정왕후의 능이건 간에 고종은 전화를 이용해 능에 문상을 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능 관리인이 전화기를 봉분 앞에 대면 왕과 신하들이 궁중의 전화기에 대고 곡을 하는 식이었다. 이는 고종 승하 후 일어난 3ㆍ1운동과 연관해 고종의 문상을 조용히 처리하고자 한 일본의 강요에 의한 일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지금은 전화로 온갖 비밀 이야기를 다 주고받지만, 초기의 전화로서는 언감생심이었다. 비밀은 고사하고 심지어 상대방과의 잡담조차 상상할 수 없었다. 그때는 전화번호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손으로 딸딸이를 돌려서 전화교환수를 호출한 다음 어디의 누구를 대달라고 하면 연결해주는 방식이었다.
따라서 교환수는 지역의 모든 계약자의 이름과 주소를 외우고 있어야 했다. 전화가 처음 발명된 미국에서도 잡담하는 것은 전화의 본래 이용법에서 벗어난 쓸데없는 짓으로 여겼다.
특히 동방예의지국인 조선의 전화예절은 매우 까다로웠다. 전화를 걸기 전에 두 손을 맞잡아 얼굴 앞으로 들어 올리고 허리를 앞으로 공손히 구부렸다가 손을 내리는 읍을 한 다음 전화기를 들었다. 전화 거는 곳이 상부일 때는 두루마기를 입고 상투를 단정히 한 다음 전화통을 향해 큰절을 세 번 하고서 엎드린 채 전화를 걸어야 했다. 그런데 아무리 예의를 깍듯하게 지켜도 전화는 종종 궁중의 법도를 어기는 의외의 사건을 일으킬 수 있다. 러시아공사가 와서 압록강변 산림벌채권을 결재하라고 강요하자 고종 황제의 내시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교환수가 바꿔준 전화기 속에서 내시가 아니라 고종의 목소리가 직접 들려왔다. 청양으로 좌천당해야 했다. ‘텔레폰’을 음역해서 덕진풍(德津風), 덕률풍(德律風) 또는 다리풍(多離風)이라고 불렸다. 또 의역해서 말을 전하는 기계라는 뜻의 전어기, 어화통, 전어통 등으로도 불렸다. ‘도덕을 닳게 하는 바람’이란 악명을 얻은 것이다.
파발마보다 빠른 고종의 대청전화
음성학과 농아 교육에 종사하며 ‘청각 장애인의 아버지’로 불리기도 했던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이 최초의 전화기 발명가라는 데는 지금도 논란의 여지가 남아 있다. 벨이 '말하는 기계'의 설계도를 들고 특허청을 찾아간 것은 1876년 2월 14일이었다.
그런데 벨이 특허청에 들어간 지 2시간 후 당시 전신 분야에서 최고 전문가로 인정받던 엘리셔 그레이도 특허청을 찾았다. 그레이는 벨보다 먼저 유선송화기로 말을 전달할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지만, 전화가 돈이 될 것 같지 않다는 생각에 다중 전신의 개발에 더 전념하고 있었다. 벨은 가죽막을 이용해 음성을 전달하는 방식이었고, 그레이는 더 효율적인 금속진동막을 이용하는 방식이었다. 최초 전화기 발명의 논쟁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비교적 최근에 알려진 바에 의하면 벨이나 그레이보다 훨씬 이전에 전화를 발명한 사람이 있었다. 독일의 과학자 필립 라이스는 멀리 떨어진 두 장소에서 대화를 주고받을 수 있는 장치를 발명하여 1863년 영국의 STC사에서 시험까지 해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라이스가 개발한 장치는 실용화되지도 않은 채 사람들에게서 잊혀져 버렸다. 미국 회사에 공동개발을 요청했으나 서류가 분실되는 바람에 유야무야된 적이 있다. 오늘날 전화기의 최초 발명가는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로 기억된다. 단지 운이 좋아서였을까? 전화의 진정한 가치를 가장 먼저 알았다는 점이다. 즉, 벨은 창조적 정신과 미래를 보는 눈을 겸비하고 있었다. 그는 전화기를 보며 얼마나 많은 돈을 벌어주는 기계일까, 라고 생각하지 않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자유롭게 해줄 수 있는가에 의미를 두었다. 농아학교에서 가르쳤던 청각장애인들이 어떻게든 소리를 들을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던 따뜻한 가슴을 지닌 이가 바로 벨이었다.
전화기를 여러 모로 가치 있게 활용하고 있었다. 1900년(고종 37년) 3월 14일 고종은 태조 이성계의 신궁이 있던 함흥과 영흥으로 능을 보살피러 떠나는 신하들을 접견했다.
그 자리에서 의정(議政) 윤용선이 파발마가 없으므로 계본(啓本 ; 임금에게 일을 아뢸 때 제출하던 문서 양식)을 올릴 때 우체사를 통해 아뢰면 도중에서 지연될 것이 우려된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그래서 궁중 사람들은 이 전화기를 ‘대청전화’라고 불렀다. 그러니 각 부처의 관리들도 대청전화를 받기 위해 새벽까지 근무해야 했다. 이 대청전화의 위력을 가장 잘 알려주는 사건으로 백범 김구의 목숨을 건진 일화를 들 수 있다.
해주에서 동학농민운동을 지휘하다가 일본군에 쫓겨 만주로 피신했다. 1896년 다시 조국으로 돌아온 21세의 청년 김구는 황해도 안악으로 가기 위해 치하포 나루터 주막으로 들어섰다. 단발을 하고 한복을 입은 그 사람은 조선인 행세를 하고 있었지만, 말투가 이상하고 두루마기 안에 칼을 차고 있었다. 즉, 그는 조선인을 가장하여 밀정 노릇을 하고 있던 일본군 중위 쓰치다(土田壤亮)였다.
그가 일본인임을 눈치 챈 김구는 쓰치다를 발로 차서 계단 밑에 떨어뜨리고는 칼을 빼앗아 살해했다. 그때 김구는 쓰치다가 혹시 국모 명성황후를 시해한 일본 낭인 중의 한 명이 아닐까 생각했던 것이다.
이 사실이 전해지자 일본 공사관에서는 외부대신 이완용에게 가해자의 빠른 체포를 요구하는 등 수선을 떨었다. 김구가 교수대로 끌려가기 직전 사형수의 심문서를 뒤적이던 승지 중 한 명이 김구의 심문서에서 ‘국모보수(國母報讎)’라는 글귀를 발견했다. 그 내용을 본 고종은 즉시 어전회의를 연 후 대청전화를 걸어 김구에 대한 사형집행 정지명령을 내렸다. 한국 최초의 전화 개통 후 약 한 달여 만에 고종은 전화로써 국모의 원수를 갚기 위해 몸부림 친 청년 김구를 살려낸 것이다. - 이성규 기자 - 2009년03월 27일, 04월01일 [이야기 과학 실록, 46, 47] ⓒ Science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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