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가며(자료)

백범 김구를 살린 ‘덕진풍’ 이야기

Gijuzzang Dream 2009. 4. 2. 00:48

 

 

 

 

 

 백범 김구를 살린 ‘덕진풍’

 

1876년 어느 날, 미국 최대의 전신회사인 웨스턴유니언사에 가디너 허바드란 남자가 방문했다.

그가 찾은 곳은 다름 아닌 웨스턴유니언사의 사장인 월리엄 오튼의 방이었다.

그 자리에서 가디너는 월리엄 사장에게 전화기 특허권을 사가라는 제안을 내놓았다.

전화기에 대한 일체 권리 및 특허권 가격은 10만 달러.

월리엄 사장은 탐탁치 않은 표정으로 내부의 검토를 거친 다음 연락을 주겠다고 말했다.

얼마 후 그에 대해 웨스턴유니언의 내부에서 작성된 검토서 의견은 다음과 같았다.

“전화기는 통신 수단으로 쓰기에는 결점이 너무 많다.

이 기계는 탄생한 순간부터 전혀 가치가 없는 물건이다.

그저 장난감이나 신기한 물건에 불과할 뿐이다.”

▲ 전화기를 발명한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 

당시 전신사업을 독점 운영하고 있던 웨스턴유니언사는 하나의 전선에 여러 개의 전신기를 운영할 수 있는 다중전신기의 실용화에 관심을 쏟고 있었다. 때문에 장난감 기계 같은 전화기에는 신경조차 쓰지 않았던 것이다.

그날 월리엄 사장을 찾은 가디너 허바드는 바로 전화기를 발명한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의 장인이었다.

그는 몇 개월 전 전화기 발명에 성공한 사위를 대신해 웨스턴유니언사를 방문한 것이었다.

이 일화는 통신산업사에서 가장 유명한 경영오판 중 하나로 흔히 꼽히는 사례이다. 월리엄 사장이 그날 특허권 인수 제안을 거절한 것에 대해 땅을 치며 후회하기까지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특허권 인수 제안을 거절당한 그레이엄 벨은 1878년 직접 전화회사를 설립했다. 그 후 전화기를 사용하는 소비자들이 급격히 늘어나면서 전신 사업은 하루아침에 사양 산업으로 전락해 버렸다.

벨전화회사는 1885년 AT&T로 회사 이름을 바꾸어 오늘날 세계 최대의 통신사업자가 된 반면

웨스턴유니언사는 갈수록 위축돼 국제송금대행으로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


과학적으로 신기한 장난감

무엇이든 간에 패러다임 자체를 바꾸는 새로운 것에 대한 세상 사람들의 애초 반응은

참으로 냉혹하다. 물론 벨이 처음 만든 전화기의 성능이 그리 썩 좋지 않은 탓도 있었겠지만,

시장의 반응은 예상보다 훨씬 부정적이었다.

당시 업계 최고 권위의 기술잡지였던 ‘더 텔레그래피’는

“말을 멀리 전송하는 것은 시간낭비에 불과하다”며 전화라는 아이디어 자체를 폄하했다.

주변 동료나 특허 담당 변호사들조차 전화라는 것이 과학적으로 그저 신기한 물건일 뿐

실제로 사용하거나 사업화될 아이템은 아니라고 여겼다.

요즘으로 치면 화성에 간 우주탐사선이 물을 발견했다는 뉴스를 들을 때처럼

신기하지만 실생활과는 아무러 상관도 없는 일이었을 뿐이다.

거기에다 전화가 처음 출시된 후에는 나쁜 소문이 번져나갔다.

전화를 하면 귀가 안 들린다거나 미친다는 소문이 그것이었다.

▲ 벨이 개발한 최초의 전화기 

전화기를 처음 들여온 조선 사회에서도

한때 그 같은 소문이 돌았다.

전화로 이야기를 하면 귀신이 붙는다는 말이 나돌았던 것이다.

우리나라에 최초의 전화가 개통된 것은 벨이 전화를 발명한 지 20년의 세월이 흐른 뒤인 1896년 10월 2일로 알려져 있다.

 

궁내부(덕수궁)에 1백 회선의 전화교환기를 놓고 자석식 전화기로 부처간 통화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때 설치된 전화는 궁중 내부에 설치된 것인만큼 일반 사람들은 이용할 수 없는 궁중 전용이었다.

그런데 1890년경 조선을 방문한 새비지 랜도어란 영국인이 쓴 기행문에는 재미있는 내용이 소개되어 있다.

고종이 많은 비용을 들여 전화를 설치한 까닭이

명성왕후의 무덤과 통화를 하기 위해서였다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왕궁에서 몇 마일 떨어진 왕후의 무덤에 전화를 가설해 놓고

임금과 신하들이 하루에 몇 시간씩 전화기에서 나오는 소리를 듣기 위해 기다렸지만

무덤 속의 왕후로부터 어떠한 기별이나 속삭임조차 들리지 않자

고종은 전화를 사기꾼으로 여겼다고 적혀 있다.

물론 이 기행문은 개인의 기록으로서 사실에 근거했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하지만 청나라가 전화 부설의 이권을 차지하기 위해

신정왕후의 능과 궁중을 연결하는 전화를 설치해 고종을 설득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고종은 대비였던 신정왕후를 생전에 끔찍이 모셔서

사후에도 3년상을 치르는 과정에서 매번 능을 찾았다고 한다.

전화에 귀신이 붙는다는 소문은 아마 여기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짐작된다.

명성황후의 능이건 대비 신정왕후의 능이건 간에

고종은 전화를 이용해 능에 문상을 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또한 1919년 고종이 승하한 후 순종도 전화로 고종의 능에 문상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능 관리인이 전화기를 봉분 앞에 대면 왕과 신하들이 궁중의 전화기에 대고 곡을 하는 식이었다.

이는 고종 승하 후 일어난 3ㆍ1운동과 연관해 고종의 문상을 조용히 처리하고자 한

일본의 강요에 의한 일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잡담은 상상조차 할 수 없어

지금은 전화로 온갖 비밀 이야기를 다 주고받지만, 초기의 전화로서는 언감생심이었다.

비밀은 고사하고 심지어 상대방과의 잡담조차 상상할 수 없었다.

그때는 전화번호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손으로 딸딸이를 돌려서 전화교환수를 호출한 다음

어디의 누구를 대달라고 하면 연결해주는 방식이었다.

▲ 망건을 쓴 초창기의 전화교환수 

따라서 교환수는 지역의 모든 계약자의 이름과 주소를 외우고 있어야 했다. 전화가 처음 발명된 미국에서도 잡담하는 것은 전화의 본래 이용법에서 벗어난 쓸데없는 짓으로 여겼다.

 

특히 동방예의지국인 조선의 전화예절은 매우 까다로웠다. 전화를 걸기 전에 두 손을 맞잡아 얼굴 앞으로 들어 올리고 허리를 앞으로 공손히 구부렸다가 손을 내리는 읍을 한 다음 전화기를 들었다.

전화 거는 곳이 상부일 때는 두루마기를 입고 상투를 단정히 한 다음 전화통을 향해 큰절을 세 번 하고서 엎드린 채 전화를 걸어야 했다.

교환수가 상대방을 바꿔주면 자신의 직함 및 품계ㆍ본관ㆍ성명을 말하고 상대부서의 판서ㆍ참판ㆍ참의의 안부를 물은 다음 전화 받는 당사자의 부모 안부까지 물은 후 용건을 말했다.

그런데 아무리 예의를 깍듯하게 지켜도

전화는 종종 궁중의 법도를 어기는 의외의 사건을 일으킬 수 있다.

대한제국의 외부교섭국 황우찬 주사는

러시아공사가 와서 압록강변 산림벌채권을 결재하라고 강요하자

고종 황제의 내시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교환수가 바꿔준 전화기 속에서

내시가 아니라 고종의 목소리가 직접 들려왔다.
그 일로 인해 황우찬 주사는 황제에게 직접 전화를 건 불손죄를 뒤집어쓰고

청양으로 좌천당해야 했다.

당시 우리나라의 전화기 이름은

‘텔레폰’을 음역해서 덕진풍(德津風), 덕률풍(德律風) 또는 다리풍(多離風)이라고 불렸다.

또 의역해서 말을 전하는 기계라는 뜻의 전어기, 어화통, 전어통 등으로도 불렸다.

그런데 덕을 이어준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는 덕진풍이 더러는 덕진풍(德盡風)으로 표기되곤 했다. 즉, 황우찬의 사건처럼 삼강오륜을 망치는 요물이라 하여

‘도덕을 닳게 하는 바람’이란 악명을 얻은 것이다.

 

 

파발마보다 빠른 고종의 대청전화

 

음성학과 농아 교육에 종사하며 ‘청각 장애인의 아버지’로 불리기도 했던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이

최초의 전화기 발명가라는 데는 지금도 논란의 여지가 남아 있다.

벨이 '말하는 기계'의 설계도를 들고 특허청을 찾아간 것은 1876년 2월 14일이었다.

▲ 여러 사람 앞에서

전화기 시연을 보이고 있는 벨 

그런데 벨이 특허청에 들어간 지 2시간 후 당시 전신 분야에서 최고 전문가로 인정받던 엘리셔 그레이도 특허청을 찾았다. 그레이는 벨보다 먼저 유선송화기로 말을 전달할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지만, 전화가 돈이 될 것 같지 않다는 생각에 다중 전신의 개발에 더 전념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벨의 전화 발명이 임박했다는 소문을 듣고 부랴부랴 자신의 아이디어를 정리해 특허청으로 달려온 것이었다.

사실 그날 특허청에 접수된 전화기 아이디어는 벨보다 그레이의 것이 성능면에서 더 우수했다.

벨은 가죽막을 이용해 음성을 전달하는 방식이었고, 그레이는 더 효율적인 금속진동막을 이용하는 방식이었다.

특허청은 이 전무후무한 일에 대해 고민하던 끝에 결국 조금이라도 일찍 서류를 제출한 벨의 손을 들어주었다.

그 후로도 그레이는 가변저항을 이용해 음성을 실제로 전달하는 데 성공하는 등 기술적인 면에서는 벨보다 앞서 나갔으나, 여전히 다중전신 분야에만 관심을 쏟고 음성을 전달하는 전화에는 별 의미를 두지 않았다.


최초 전화기 발명가 논쟁

최초 전화기 발명의 논쟁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비교적 최근에 알려진 바에 의하면 벨이나 그레이보다 훨씬 이전에 전화를 발명한 사람이 있었다.

독일의 과학자 필립 라이스는 멀리 떨어진 두 장소에서 대화를 주고받을 수 있는 장치를 발명하여

1863년 영국의 STC사에서 시험까지 해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라이스가 개발한 장치는 실용화되지도 않은 채 사람들에게서 잊혀져 버렸다.

또 이탈리아의 발명가 안토니오 무치도 1860년 전화기를 발명해

미국 회사에 공동개발을 요청했으나 서류가 분실되는 바람에 유야무야된 적이 있다.

이처럼 많은 이들이 벨보다 먼저 전화를 발명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전화기의 최초 발명가는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로 기억된다. 단지 운이 좋아서였을까?
벨이 그들보다 앞섰던 것은 전화기 발명의 시간이 아니라

전화의 진정한 가치를 가장 먼저 알았다는 점이다.

즉, 벨은 창조적 정신과 미래를 보는 눈을 겸비하고 있었다.

또한 벨은 전화기를 바라보는 시각도 그들과 달랐다.

그는 전화기를 보며 얼마나 많은 돈을 벌어주는 기계일까, 라고 생각하지 않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자유롭게 해줄 수 있는가에 의미를 두었다.

농아학교에서 가르쳤던 청각장애인들이 어떻게든 소리를 들을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던

따뜻한 가슴을 지닌 이가 바로 벨이었다.


봉심 행사에 전화과 주사 동행

전화의 가치를 가장 먼저 안 벨처럼 20년 늦게 전화를 도입한 조선의 고종 역시

전화기를 여러 모로 가치 있게 활용하고 있었다.

1900년(고종 37년) 3월 14일 고종은 태조 이성계의 신궁이 있던 함흥과 영흥으로

능을 보살피러 떠나는 신하들을 접견했다.

▲ 조선의

남자 전화 교환원 

그 자리에서 의정(議政) 윤용선이 파발마가 없으므로

계본(啓本 ; 임금에게 일을 아뢸 때 제출하던 문서 양식)을 올릴 때

우체사를 통해 아뢰면 도중에서 지연될 것이 우려된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그러자 고종은 “마땅히 전화과 주사가 기계를 가지고 동행해야 할 것이니, 전화로 먼저 아뢰면 필경 빠를 것이다”라고 해결책을 내놓았다. 이에 윤용선은 “그렇게 하면 이보다 더 편리한 것이 없을 것입니다”라며 기뻐한다.

갑오경장 이후 오랫동안 북도의 능침을 보살피지 못해 걱정이 많았던 고종으로서는 전화를 이용해 실시간으로 봉심(奉審 ; 임금의 명으로 능을 보살피던 일)의 진행 상황을 보고 받고자 했던 것이다.

고종이 기거하던 덕수궁 함녕전의 대청마루에는 전화기가 놓여 있었다. 고종은 언제든지 필요할 때 이 대청마루의 전화로 정부의 각 부처에 지시사항을 내렸다.

그래서 궁중 사람들은 이 전화기를 ‘대청전화’라고 불렀다.

그 당시 고종은 주로 밤늦게까지 정사를 보다가 새벽에서야 침소로 들곤 했다.

그러니 각 부처의 관리들도 대청전화를 받기 위해 새벽까지 근무해야 했다.

이 대청전화의 위력을 가장 잘 알려주는 사건으로 백범 김구의 목숨을 건진 일화를 들 수 있다.


살인강도죄로 사형을 선고 받은 김구

황해도 해주에서 출생한 김구는 1893년 동학에 입교하여 접주가 된 후

해주에서 동학농민운동을 지휘하다가 일본군에 쫓겨 만주로 피신했다.

1896년 다시 조국으로 돌아온 21세의 청년 김구는

황해도 안악으로 가기 위해 치하포 나루터 주막으로 들어섰다.
그런데 거기서 김구는 수상쩍은 인물을 발견했다.

단발을 하고 한복을 입은 그 사람은 조선인 행세를 하고 있었지만,

말투가 이상하고 두루마기 안에 칼을 차고 있었다.

즉, 그는 조선인을 가장하여 밀정 노릇을 하고 있던 일본군 중위 쓰치다(土田壤亮)였다.

▲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주석으로 활동한 김구 

그가 일본인임을 눈치 챈 김구는 쓰치다를 발로 차서 계단 밑에 떨어뜨리고는 칼을 빼앗아 살해했다. 그때 김구는 쓰치다가 혹시 국모 명성황후를 시해한 일본 낭인 중의 한 명이 아닐까 생각했던 것이다.
김구는 쓰치다가 갖고 있던 돈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도록 하고 그곳을 떠났다.

 

이 사실이 전해지자 일본 공사관에서는 외부대신 이완용에게 가해자의 빠른 체포를 요구하는 등 수선을 떨었다.

3개월 후 체포된 김구는 인천으로 압송되어 살인강도라는 죄명으로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런데 사형을 하려면 형식적으로라도 임금의 재가를 받아야 했다.

김구가 교수대로 끌려가기 직전 사형수의 심문서를 뒤적이던 승지 중 한 명이 김구의 심문서에서 ‘국모보수(國母報讎)’라는 글귀를 발견했다.

이미 재가 수속이 끝난 뒤였지만 승지는 김구의 심문서를 다시 고종에게 보여드렸다.

그 내용을 본 고종은 즉시 어전회의를 연 후 대청전화를 걸어

김구에 대한 사형집행 정지명령을 내렸다.
재판에서 김구가 사형선고를 받은 것은 1896년 11월이니,

한국 최초의 전화 개통 후 약 한 달여 만에

고종은 전화로써 국모의 원수를 갚기 위해 몸부림 친 청년 김구를 살려낸 것이다.

- 이성규 기자

 2009년03월 27일, 04월01일 [이야기 과학 실록, 46, 47] ⓒ ScienceTim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