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가며(자료)

이완용의 건물 '명월관'에서 독립선언을 한 이유

Gijuzzang Dream 2009. 4. 2. 18:35

 

 

 

 

 

 이완용의 건물 '명월관'에서 독립선언을 한 이유는

 

 

 

 

<매일신보>의 기미년 영인본

한국 최초의 근대적 레스토랑은 '명월관'이다.

브리야 사바랭의 <미식예찬>에 따르면, 근대적 레스토랑이라 함은,

주막이나 국밥집과 달리 가격이 미리 정해진 메뉴판을 보고

취향에 따라 골라 먹을 수 있음을 의미한다.

음식을 만드는 사람으로서 요리사의 존재감도 크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명월관은 1909년에 만들어졌고, 1918년에 불탔으며, 불탄 명월관 주인 안순환이

인사동에 만든 태화관에서 민족대표 33인이 독립선언을 했다.

그러나 이는 오류다.

 

명월관은 1903년 만들어졌고, 독립선언이 이뤄진 곳은 태화관이 아니라

엄밀히 말해 명월관 인사동 지점이었으며, 명월관 본점이 불탄 것은 1919년이다.

3.1운동이 있던 1919년에 엄연히 명월관 본점이 있었다.

국사 교과서를 수정해야 할 판이다.

 

서예가인 강종섭 선생(필명 강무)이 월간 <한글+한자 문화>(바로가기)에서 밝혔다.

그는 당시 <매일신보>기사를 찾아냈다.

 

선생의 제보를 받고, 곧장 <서울신문>자료실에 뛰어가 확인했다. 과연 사실이었다.

기미년, 즉 1919년 매일신보는 아직 pdf작업이 이뤄지지 않았다.

식민지 조선에 대한 생활사 연구가 진전하려면 하루 속히 전산화가 이뤄져야할 듯.

과연 당시 신문은 생활사, 미시사의 보고다.

 

'명월관이 소실됨' 이라는 기사와 맞물린 사진이 보인다.

 

일개 음식점 화재 기사가 면톱기사라니!

화재 기사 밑에 당시 주인 안순환이 고객들께 미안하다며 사과광고를 실었다.

대단하다. 심지어 기자들 불러다 기자단 초청 연회를 베풀었단다.

한자로 선명하게 ‘광화문 명월관 본점, 인사동 명월관 지점’이라고 돼 있다.

 

1919년에 태화관은 없었다. 명월관 지점이었을 뿐.

강무 선생에 따르면,

건물 주인은 이완용이었고, 안순환이 세 들어 요리점을 낸 것이었다.

안순환은 송병준, 이완용과 궁에 있을 때 부터 친했다.

단순한 숙수가 아닌 수완좋은 고위 공무원이자 사업가였다.

 

강무 선생에 따르면, 싸움도 잘해서 송병준과 처음 만났을 때 맞짱을 뜨셨다고 한다.

1919년 당시 총독부 고위 관리들과 네트워크가 얼마나 탄탄했을 지 알만하다.

그런 곳에서 이른바 민족 대표들은 독립선언을 했다. 아마 술도 한잔씩 했으리라.

 

명월관 기생이었던 이난향의 ‘남기고 싶은 이야기’(70~71년, 중앙일보)에 연재했다.

이 기사에 따르면, 독립 선언 뒤 총독부에는 안순환이 직접 전화했다고 한다.

명월관은 당시 기자들(이라고 해봤자 1910년부터 조선동아가 생기는 20년대까지

유일한 한글신문은 <매일신보>밖에 없었다)이 모두 아는 장소였고

취재원인 고위 관리, 정치인이 자주 드나드는 '출입처'였다.

일종의 ‘기자회견장’에서 독립선언을 했다고 좋게 해석해야할까?

아니면 ‘대표님들’께서 언제 ‘딸려가서’ 얼마정도의 기간만큼 ‘빵 살지’ 요리조리

견적 좀 뽑아보시고 ‘네트워크’ 빵빵한 안순환 주인에게 연락을 부탁한 것일까?

- 사진촬영 고나무 기자 dokko@hani.co.kr

2009-04-01 ⓒ 한겨레 (http://www.hani.co.kr)

 

 

 

 

왕의 요리사들, 근대를 열다

 

한국 최초의 근대적 레스토랑 명월관
당대 엘리트·문화계 인사들의 사랑방 구실도



 한국 최초의 근대적 레스토랑 명월관

 

 

혁명은 왕의 목을 베었지만 왕의 음식 문화는 없애지 못했다.

취향에 따라 메뉴에 가격이 정해진 요리를 사 먹는 근대적 레스토랑은

프랑스대혁명 전인 1765년께 파리에서 처음 생겼다.

미식은 왕과 귀족들의 전유물이었다.

새로 떠오른 시민계급은 권력뿐 아니라 사교의 수단으로 미식법도 요구했다.

1789년 대혁명 뒤 이런 경향은 더 심해졌다.

귀족이 몰락하며 실업자가 된 요리사들은 부르주아에게 고용되거나

레스토랑을 차렸다. 요리사가 스타가 되는 현상도 처음 나타났다.

나폴레옹, 러시아 알렉산드르 황제, 은행가 로스차일드(로트실트) 가문 등을 위해

요리했던 앙토냉 카렘은 몸값 높은 스타였다.

 

한국에서 근대적 식당이 들어선 계기도 왕조의 몰락이었다.

그전에도 주막 · 국밥집 등 서민들이 요기할 수 있는 곳은 존재했다.

그러나 근대적 레스토랑은 20세기 초에 생긴 명월관이 처음이다.

 

태화관은 명월관 인사동 지점

 

지금까지 학계의 정설은 궁중 숙수(요리사)였던 안순환이

숙수와 기생들을 모아 1909년 황토마루에 세웠다는 것이다.

황토마루는 동아일보사의 옛 사옥(현재 일민미술관)이 있는 광화문 세종로 터다.

또 1918년 명월관이 화재로 없어지자 안순환이 인사동에 태화관을 차렸고,

이곳에서 1919년 민족대표 33인이 독립선언을 했다고 알려져 있다.

 

명월관에서 기생으로 일했던 이난향씨가 1970~71년 <중앙일보>에 연재했던

‘남기고 싶은 이야기’가 이 학설의 중요한 근거였다.


화재가 났을 때 <매일신보>에 기사와 함께 나온 화재 사진.

일개 음식점 화재가 면톱기사라는 점에서 명월관의 인지도를 짐작할 수 있다.

사료 소장 <서울신문> / 사진 고나무 기자

그러나 최근 이에 대한 반론이 나왔다.

서예가 · 한학자인 강무(66·본명 강종섭)씨는 <한글+한자 문화>1월호에서

명월관의 최초 설립 연도가 1903년이며 불이 났던 해도 1919년 5월이라고 주장했다.

 

그가 제시한 자료를 보면 이는 사실로 보인다.

<대한매일신보>(1904년 영국인 베델이 만든 신문)는 1908년 9월18일치에

“명월관 기념. 명월관에서 작일(어제)은 해관설시(該館設始 · 새로 문 열다)하던

제오(第五)기념일인 고로 국기를 고양(高揚)하고 기념식을 설행(設行)하얏다더라”

라고 보도했다.

 

<매일신보>1919년 5월24일치에 명월관 화재 기사가 머리기사로 실려 있다.

(<대한매일신보>가 1910년 총독부 기관지가 되며 바꾼 제호.<서울신문>의 전신) 

 

“명월관이 소실됨. 이십삼일 오젼 여셧시경에 실화되야 젼부쇼실 되얏다.

이십삼일 아침 여셧시경에 광화문통 명월관 료리뎜 뒤방 집고각(集古閣)

온돌방에셔 불이 이러낫는데 화셰가 맹렬하야 동 여셧시반가량에 젼부 소실되고

동편 리웃에 격상(서로 떨어져 있는)한 셰심관과 졍문압헤잇는 초가집에도

연소는 되지 안이하얏스나 집웅에 약간 손해가 잇셧는데 원인은 목하 취됴중이오

손해액은 약 륙만원 이샹이라더라.”(원문에 가깝게 적음)

 

음력 4월23일 불이 났으니

결국, 명월관은 양력 1919년 5월22일 오전 여섯 시에 불탔다고 강씨는 설명했다.

 

강씨는 민족대표가 독립선언을 한 장소도 엄밀히 말해 태화관이 아니라

명월관 지점이라고 덧붙였다.

실제로 화재 기사 밑에 나온 명월관 광고에

‘광화문 명월관 본점, 인사동 명월관 지점’이라고 나와 있다.

 

강씨는 또다른 근거로

샌프란시스코의 한인 동포들이 펴낸 <신한민보>도 제시했다.

이 매체의 1925년 5월28일치를 보면

“1919년 3·1 운동 시에 33인이 모여셔 대한독립을 선언한 우리의 역사적 유명한

명월관을 서양인션교회에서 매수하엿다더니…”라고 돼 있다.

인사동 명월관 지점은 이완용의 소유로 안순환이 세를 주고 빌려 요리점을 차렸다.

태화관이라는 이름은 기독교선교회가 명월관 자리에 들어온 뒤

비로소 붙여진 이름이라고 강씨는 주장했다.

 

명월관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매일신보>는 “최초의 요리점. 내지에서도 다 안다.

조선에서 제법 요리점이라고 할 만한 신식 요리점”이라고 보도했다.

<대한매일신보>와 <매일신보> 기사를 보면,

1906년 확장공사를 했고 불탔을 당시엔 삼층 건물이었다.

삼층 모두 합쳐 연건평 300평에 스무 개의 별실이 있었다.

1919년 총독부 1년 예산이 약 7700만원이었고 화재 손해액이 6만원 이상이니,

지금 국가예산과 비교하면 일개 음식점 자산가치가 웬만한 중소기업 이상인 셈이다.

 

 

기생조합에서 보낸 최고의 ‘선수’들

 

명월관에서는 겸상이 없는 궁중 의례를 따라

손님 일인당 본상과 곁상으로 은그릇에

탕조치(조치는 찌개를 가리키는 궁중용어), 편육 등 12첩상과 육회 등 별찬을 냈다.

훗날 외국 요리도 제공했다.

궁중 나인 출신이 약주 · 소주를 만들었고 나중엔 맥주와 일본 정종도 팔았다.

왕이 살아 있던 시절, 왕의 음식을 먹을 수 있다는 사실은 엄청난 충격이었다.

1894년 갑오개혁으로 관기제도가 폐지되어 일자리를 잃은 기생들은

기생조합을 만들어 명월관에 최고의 ‘선수’들을 보냈다.

명월관은 곧 전 조선에 널리 알려졌다.

 

미식은 사교의 수단으로 활용된다.

19세기 초 로스차일드 가문의 응접실에서 빅토르 위고, 발자크가 앙토냉 카렘이

만든 음식을 먹었고, 하인리히 하이네는 시를 읊었다.

명월관에도 고관대작 · 문인 · 언론인 등 당대의 엘리트들이 모여들었다.

송병준 등 거물 정치인은 물론, 최남선 · 이광수 · 김기진 · 백석 등 문인들이

명월관에서 술을 들이켜며 새벽까지 고담준론을 주고받았다.

술 좋아하는 문인 수주 변영로는 술 취한 친구가 주인 안순환과

주먹다짐을 벌였던 일을 <명정기(酩酊記)>에 기록했다.

 

안순환은 요리사보다 경영인에

가까웠다. 사진 한복진 제공

명월관을 만든 안순환은 숙수(궁중 요리사)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안순환은 단순한 요리사가 아니었다.

 

<일성록> 1908년 기록을 보면, 안순환은 전선사(典膳司) 장선(掌膳)에 임명된다.

전선사는 궁중의 음식을 책임지는 기관으로 장선은 총책임자다.

“전선사 장선 안순환을 내부대신 송병준의 일본 파견 시 수행할 것을 명하다”라는 <고종시대사> 1909년 기록도 있다.

이때 내각총리대신이 이완용이다.

 

<순종실록>을 보면, 안순환은 왕조가 망하기 직전인 1910년에는 정삼품에 오른다. 강씨의 자료를 보면, 안순환(1871~1942)은 어려서 부모를 잃고 머슴, 주막 잡부 등을 전전하다 1885년 궁에서 요리를 만드는 찬방(饌房)에 잡일꾼으로 들어간다.

 

궁에서 인맥과 경험을 쌓다 1903년 명월관을 만들었다.

식당 경영자가 궁의 음식과 식재료 책임자로 임명됐으니,

안순환은 ‘투잡 공무원’이었던 셈이다.

그는 1908년 관립극장 원각사도 잠시 인수해 운영했다.

 

설립자 안순환은 ‘투잡 공무원’

 

조각난 기록 사이에서 떠오르는 안순환의 이미지는

요리밖에 모르는 장인보다 찬방 잡부에서 정삼품으로 출세한

수완 좋은 경영자이자 야심가다.

송병준 같은 실력자와 친분을 유지하는 현실 감각도 있었다.

언론 플레이도 능했다. 신문에 자주 광고를 냈고,

1915년에는 경성과 지방의 신문사 기자단을 불러 기자대회를 열 정도였다.

 

이완용이 소유한 건물에 있는 명월관 지점에서 독립선언이 벌어지는 ‘모순’이

벌어진 것은 명월관의 이런 인지도 때문이라고 추측된다.

1932년 잡지 <삼천리>에는

명월관과 또다른 유명 요릿집 식도원을 비교한 원시적인 레스토랑 비평도 등장한다.

근대는 이렇게 조금씩 일상을 바꾸기 시작했다.

고나무 기자 dokko@hani.co.kr

2009-04-02 한겨레 (http://www.hani.co.kr).

 

*참고

<한글+한자 문화>(전국한자교육추진총연합회)

<남기고 싶은 이야기>(이난향)

<앙토넹 카렘 평전 천재 파티시에, 프랑스 요리의 왕>(이안 켈리·말글빛냄)

*자료 도움 : 한복진 전주대 문화관광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