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가며(자료)

나무(木)문화재에 숨겨진 역사의 흔적

Gijuzzang Dream 2009. 4. 19. 19:34

 

 

 

 

 

  

 

 

 

 

삶의 터전, 집짓기에 쓰인 나무


원시인의 움막집부터 인류의 주거 공간은 나무로 시작하였으나

고려말 이전의 목조 건축물은 실물로 남아 있는 것이 없다.

 

우선 <삼국사기>에서 기록에서 보면,

고주몽은 부여를 떠나면서 일곱 모가 난 돌 위의 소나무 기둥 아래(七稜石上松下)에

부러진 칼 한 쪽을 묻어둔다. 소나무가 건축물의 기둥으로 쓰였다는 최초의 기록이다.

신라 귀족들의 집짓기를 규제하는 옥사(屋舍)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집짓는 나무로 5두품 4두품 이하는 ‘느릅나무山(楡木)을 써서는 안 된다’고 했다.

뒤집어 생각해보면 귀족들이 집을 지을 때 느릅나무를 널리 이용했음을 알 수 있다.


또 <삼국유사>에는 경주 남천에 걸려 있는 느릅나무다리(楡橋)에 원효대사가 일부러 떨어짐으로써

요석공주와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시대를 앞서간 신여성 평강공주가 청혼하러 온달 집을 찾아갔을 때,

그는 느릅나무 껍질을 벗기려 앞산에 올라가 있었다.

 

이 같은 기록으로 짐작해보건대 한반도에는 느릅나무가 흔했고

고급 기둥나무 등 건축재로 널리 사용되었음을 짐작 할 수 있다.

그러나 이후 느릅나무 건축재의 기록은 더 이상 찾기 어렵다.

고려에 들어와서는 현재 남아있는 영주 부석사나 해인사 팔만대장경판 보관 건물의 기둥이

주로 느티나무이고 참나무가 보조재로 쓰인 정도이다.

 

그러나 조선왕조에 들어서면서는 대부분의 건축재는 소나무였다.

이와 같이 시대별로 건축재에 쓰이는 나무의 종류가 달라지는 것은

한반도의 산림구성 변화와도 깊은 관계가 있다. 

 

 다호리에서 출토된 구유형 상수리나무 목관재

 

조선시대 싸움배로 쓰인 판옥선, 민화에 그려진 거북선 모습 



배 만들기 재료나무


배 만드는 나무는 우선 물속에서 견딜힘이 강하고 가벼우며 단단하여 가공이 쉬운 수종이라야 한다.

따라서 참나무나 느티나무 등의 활엽수보다 침엽수가 알맞다.

가장 널리 쓰인 나무 종류는 소나무다.

 

실증적인 자료로 2005년 경남 창녕 비봉리에서 발굴된 신석기시대의 통나무배가 소나무였다.

 

안압지에서 나온 통일신라시대의 나무배와 노도 소나무로 만들어졌고

고려 초기의 화물선으로 밝혀진 4척의 나무배도 역시 소나무로 만들어 졌다.

한반도에 자라는 나무 중에 배를 만들기에는 소나무가 가장 적합함을 나타낸 것이다.

특이한것은 완도 앞 바다에서 인양된 목선의 배 밑바닥 일부는 비자나무이다.

또 완도군 장좌리 장보고 유적지의 목책(木柵)에도 비자나무를 사용했다.

오늘날 비자나무는 최고급 바둑판의 재료로 알려져 있고

웬만한 굵기의 비자나무는 거의 천연기념물로 지정될 만큼 희귀목이다.

당시에는 이 나무가 배를 만드는데 쓰일 정도로 흔하였다고 볼 수 있다.

 

(왼쪽) 건축재로 사용되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굵은 영월 북면 공기리 느릅나무

(오른쪽) 가로 숨국멍이 특징인 산벚나무 줄기



팔만대장경판을 만든 나무


해인사 팔만대장경판(고려대장경판)은

고려 고종 23~38년(1236~51)까지 16년간에 걸쳐 제작된 81,258여 장의 목판이다.

경판(經板)은 손잡이(마구리)를 포함한 총 길이 68 혹은 78㎝인 것이 대부분이고

나비는 약 24㎝, 두께는 약 2.8㎝, 무게는 대체로 3-3.5㎏정도이다.

전체 무게는 약 280톤, 4톤 트럭 70대분에 해당한다.

경판에는 앞뒤로 640여 자씩 글자가 새겨져 있으며, 경판 전체의 글자수는 약 5천2백여 만 자이다.

 해인사 팔만대장경판, 대보적경 02권 17장

 

이렇게 방대한 세계최고의 나무경판을 만들고도

선조들은 제작과정에 관련된 기록을 거의 남겨 놓지 않았다.

특히 무슨 나무로 만들었지는, 판각장소를 비롯한 경판 제작과정의 비밀을 밝히는 중요한 과학적인 자료이다.

지금까지 ‘화목(樺木)’으로 제작되었다는 구전을 근거로 자작나무로 알려져 왔다. 그러나 옛 사람들은 벚나무도 역시 화목이라 하여 구분이 안 된다.

 

최근 현미경으로 재질을 분석한 결과 자작나무가 거의 포함되지 않았다.

자작나무가 자라는 지역이 북한의 고원지역이므로 경판을 새길 당시의 역사적 상황을 고려해 본다면, 애당초 자작나무를 가져다 경판을 만드는 일은 근본적으로 가능하지 않았다.

대장경판의 재료로 대부분을 차지하는 산벚나무


산벚나무가 60%이상이고 돌배나무가 10%, 기타 거제수나무, 후박나무 등을 사용하였다.

해인사의 뒷산인 가야산 등 주로 남부지방의 고산지대에 자라는 거제수나무와

남해안 섬지방에 주로 자라는 후박나무가 포함된 것은,

경판 새긴 장소를 새로운 시각으로 볼 수 있는 자료가 된다.

 


영겁의 세계를 함께한 목관재(木棺材)

 

무령왕릉 출토 목관재 편

내세를 믿어온 옛 권력자들은 죽은 후의 안식처인 무덤에 온갖 정성을 쏟았다. 특히 자신의 몸을 감싸줄 관은 자기의 권력이 미치는 한 당대 최고 품질의 재료로 만들었다.

출토되는 목관재를 보면 크게 나누어 수입목재와 국산재가 있다.
수입관재의 대표적인 예는 백제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금송(金松) 목관이다.

이 나무는 세계적으로 일본남부에만 자라는 독특한 나무이며 6세기 초의 일본과 백제의 관계를 알 수 있는 실증자료로 의미가 크다.

 

경남 창녕 송현동의 6세기 초에 축조된 것으로 짐작되는 7호분의 구유 모양 목관은 녹나무로 만들어졌다.

경주 금관총과 98호 고분의 목곽재료 역시 녹나무였다.

녹나무는 우리나라 제주도에 자라기도 하나 굵고 재질이 좋은 나무는 일본에 많아서

우리나라 남부지방 무덤에서 출토되는 목관의 녹나무는 일본에서 가져왔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낙랑고분 출토 목관의 재질을 분석한 일제강점기의 자료를 보면 양자강 남부에 자라는 넓은잎삼나무였다.

이 수종의 분포지역이 양자강 남부인 점을 들어 낙랑과 중국남부지방과 활발한 교류가 있었음은 물론

지배계층의 중국과의 관련설을 확인하는 증거로 들고 있다.

 

국산재로는 부여 능산리 고분의 관재가 비자나무, 화순 대곡리의 원삼국시대의 관재는 굴피나무이며

경북 경산 임당리의 원삼국시대 고분에서는 밤나무, 산뽕나무 관재가 출토되었다.

그 외 또 다른 임당고분, 부산 복천동 가야고분, 천마총 등에는 느티나무 관재가 나왔다.

또 의창 다호리의 초기 가야고분에서는 상수리나무로 만든 구유모양 목관이 출토되었다.

 

이렇게 우리나라 고대국가의 목관재는 수입나무이거나 활엽수이다.

그러나 조선왕조에 들어오면서는 목관으로 쓸 수 있는 활엽수가 거의 사라져 버려

황장목이란 이름으로 소나무를 쓸 수밖에 없었다.

 


천마도에 숨겨진 자작나무껍질의 비밀

 

 

나무껍질을 캔버스로 이용한 것이 특징인 '천마도' 

1973년 발굴된 경주의 이름 없는 한 고분은 천마도가 그려진 '장니(障泥)'가 출토되면서 비로소 '천마총'이란 이름을 얻었다.

'장니'는 말안장에 늘어뜨려 진흙이 튀는 것을 막는 장식품으로서 '말다래'라고도 한다.

천마도는 나무껍질을 캔버스로 이용하였으니 무슨 나무의 껍질인지가 우선 궁금해 질 수밖에 없다.

 

오늘 날 우리 모두는 천마도는‘자작나무 껍질위에 그린 천마도’란 상식에 익숙해 있다. 과연 그런가?

결론부터 말하여 북한의 고산지대에서 시베리아 벌판에 걸쳐 자라는 새하얀 껍질을 가진 바로 그 자작나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껍질이 얇고 하얀 나무는 자작나무이외에도 거제수나무와 사스레나무가 더 있다.

이 세 나무껍질은 육안으로는 물론이고 현미경을 들이대어도 구분해내는 방법이 없다.

한 마디로 천마도는 이 세 나무 중 어느 하나일 터이다.

 

자작나무는 당시의 신라영역에 자라지 않았다.

따라서 남한의 웬만한 높은 산에는 다 자라는 거제수나무와 사스레나무 껍질일 가능성도 높다.

천마도가 진짜 자작나무로 만들어진 것으로 단정하고

북방민족과 신라와의 관계를 증명하는 자료로 활용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나무로 만든 문화재야말로 우리 역사의 비밀을 간직하고 있는 하드디스크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썩어서 형체조차 보존하기 힘든 수천 년 전의 나무 조각은

가 간 또는 지역 간의 교류를 짐작해 볼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역사적인 증거이며

조상들의 역사와 문화를 알아 낼 수 있어서 시공을 뛰어넘는 매개자이다.

그래서 발굴 터에서 나오는 썩은 나무토막 하나라도 과학적인 분석이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세상은 아는 만큼 보이고, 아는 만큼 사랑하는 법이다.

썩은 나무 조각에서 얻을 수 있는 이런 작은 지식조차도 소중하게 기억해야만

문화재를 진정으로 아끼고 사랑할 수 있을 것이다.

글 · 사진, 박상진 경북대학교 명예교수

- 월간문화재사랑, 2009-04-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