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에도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었다
1000년 과거시험 황당 에피소드 … 문제 출제 오류 후 다시 오류 내 파면 |
“근래 홍건적(紅巾賊)이 강을 건너 침략했는데, 어쩔 수 없이 무력을 사용해야 한다면 어떤 책(策)과 술수(術數)가 의(義)에 합치하겠는가.”
이것은 650년 전인 고려 공민왕 9년(1360)에 치러진 문과의 시제(試題)다.
당시 경상도 영천 출신의 23세 청년이 과거에 응시해 자신의 가치관과 세계관을 다음과 같은 대책문(對策文, 답안지)으로 써내려가 장원 급제했다. “문무를 함께 써야 하는 것은 왕이 따라야 할 대법(大法)이며 만대의 불변하는 원칙이다. 근래에 이런 것들이 무너져 홍건적이 생겼다. 문무를 겸한 인재를 중용해야 나라를 안정시킬 수 있다. 강태공, 사마양저(제나라 병법가), 제갈량 같은 사람들이 문무를 겸해 인의(仁義)로 적을 물리쳤다. 이런 것을 모범으로 삼아야 한다.”
이 청년이 누구인가. 바로 고려 말 성리학을 체계화한 동방 이학(理學)의 종조이자, ‘단심가(丹心歌)’로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정화를 보여준 포은 정몽주(1337~1392)다. 정몽주는 문신이면서 국방에도 관심이 많아 이성계와 더불어 여진 토벌에 참가하고, 왜구에 잡혀간 고려 백성 수백 명을 쇄환(刷還)했으며, 우왕 6년(1380) 황산대첩에 이성계, 이지란 등과 왜구를 섬멸하는 데 기여했다.
고려 말 - 조선 중종대 30여 명 답안지 발견
최근 조선 정조의 어찰(御札)이 무더기로 발견된 데 이어, 정몽주를 비롯한 고려 말∼조선 중종대 문신 30여 명이 쓴 과거 답안지가 발견돼 역사학계를 흥분시켰다.
오늘날 공무원 임용시험에 해당하는 과거제도는 고려 광종 9년(958) 처음 실시됐다. 조선시대 들어와서도 무과를 추가해 보완하는 등 그 형식을 존속시켜 인재를 선발하다 갑오개혁(1894년 7월)으로 폐지될 때까지 1000여 년 동안 시행됐다. 과거 외에도 음서, 유일(遺逸 · 천거) 등이 있었지만 역시 과거가 새로운 피를 수혈하는 주요 수단이었다. 국가경영 철학을 확립하며 국가 발전의 구체적 정책을 제시하는 근간이 된 것이다.
고려 · 조선시대 국가 동량지재(棟梁之材)를 선발하는 등용문인 과거는 1000여 년의 세월을 거치며 수많은 에피소드를 낳았다. 그중 세 가지를 소개한다.
첫째, 과거 문제 출제 오류로 처벌을 받은 관리의 얘기다. 고려 인종 때 이부시랑(吏部侍郞) 임존과 평장사(平章事) 최자성(1065~ 1143)은 과거를 관장하는 동지공거(同知貢擧)와 지공거(知貢擧)로 임명됐다. 인종 10년(1132) 윤4월에 시행된 과거에서 임존이 부(賦)의 제목으로 <예기(禮記)>에 나오는 ‘성인은 능히 천하로써 집을 삼는다(聖人耐以天下爲一家)’라는 구절을 출제했다. 이에 대해 중서문하성의 간관이 왕에게 아뢰기를 “상고하건대 ‘내(耐)’자는 (문장 의미로 봤을 때) ‘능(能)’자로서 ‘능’으로 읽어야 할 것인즉 ‘내’로 발음하였으니 옳지 않습니다. 바라건대 시관을 다른 사람으로 바꿔 다시 시험을 치르게 하여 주십시오”라고 했다. 그러나 왕은 시관을 바꾸지는 않고 최자성 등에게 명해 다시 시험을 시행케 했다.
이에 최자성이 ‘천도불한이능구(天道不閑以能久)’를 출제했다.
- 이영철 목원대 겸임교수 · 역사학 - 2009.03.24 678호(p76~77) 주간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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