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주짱의 하늘꿈 역사방

나아가는(문화)

우정(郵政) 이야기

Gijuzzang Dream 2009. 3. 15. 01:25

 

 

 

 

 

우체통의 ‘위기’


 

한 사람이 그리워지면서부터, 난

날마다 가슴 살짝 풀어헤치고

사연이 당도하길 기다린다

이미 다 써버린 시간은

종이 한 장의 가벼움으로 뜯겨나가고

(중략)

그대 눈빛으로 건너오는

길목을 내기 위해

언어에다 내 마음 덧칠하고 있다 - 향일화 · 우체통

 


 

적지 않은 사람들에게 우체통은

이미 현실이 아니다.

시(詩)의 세계, 영화의 영역이다.

동화 같은 사랑이야기가 펼쳐지는 장면의 배경 소품이다.

바라보면서 정감 어린 시어(詩語)를 떠올리고,

상상의 나래를 펴는 회상의 물체다. 꿈이고 행복이다.

하지만 현실 속에서 우체통은 전혀 다르다.

시나 영화 속의 아름다움은 온데간데없고, 찾는 이 없어 버려질 운명에 처하기 십상이다.

몰상식한 시민들 때문에 종종 거리의 쓰레기통으로 천대받기도 한다.

우체통을 열면 편지는 들어 있지 않고

경찰서에 가야 할 지갑이나 휴대폰 같은 습득물, 담배꽁초, 먹다 버린 빵봉지까지

갖가지 쓰레기들이 튀어나오기 일쑤다.

우체통은 무조건 하루 한 번 개함(開函)하도록 돼 있다.

편지는 ‘전국 어디서나 당일 수거한다’는 원칙 때문이다.

한 통의 편지도 들어 있지 않은 경우가 허다하지만 어쩔 수 없다.

직원 한 명이 담당하는 우체통은 하루 평균 20여 개.

매일 허탕치다 보면 “저 우체통에는 오늘도 보나마나 비어 있겠지” 하며

건너뛰는 직원이 나오지 않을까 해서 예방하는 장치까지 마련해놓았다. 우체통 속 바코드가 그것.

수거 직원이 매일 이 바코드와 접촉한 기록을 우체국에 제시하도록 시스템화했다.

하루종일 아무도 찾는 이 없는 우체통이어도 수거 직원만큼은 반드시 열어보게 돼 있는 것이다.

대당 설치비 5만 원에 연간 유지 · 보수비 7510원이라는 직접비용 외에

우체통을 관리하는 비용은 결코 만만찮은 셈이다.

효용은 적고 비용은 많이 든다면 갈수록 줄어드는 게 세상 이치다.

우체통을 설치하고 철거하는 것은 지역의 우체국장 재량이나,

대체로 하루 평균 3통 미만인 날이 3개월 지속될 때는 지역 주민의 의견을 들어 철거하는 게 보통이다.

이렇게 해서 없어지는 게 매년 1000~3000여 개다.

지난해 서울에서만 678개, 전국적으로 3000여 개가 철거됐다.

하루 3통 미만인 우체통 수는 사실 더 많지만, 농촌 주민들이

“우리에게 우체통은 외부와 연결되는 유일한 창”이라고 하면 철거하기 어렵다고 한다.

2006년 전국의 우체통은 2만7000여 개. 4년 전인 2002년에 비해 1만 개 가까이 줄었고,

가장 많던 1993년 5만7000여 개와 비교하면 절반 이상이 없어졌다.

13년 전에는 인구 764명당 1개꼴이었는 데, 지금은 1758명당 1개꼴로 준 것이다.






 

 

 (1) 여성 인물 우표는 왜 드물까

 

 

왼쪽부터 신사임당, 류관순, 육영수 우표

 

5만 원짜리 신권에 신사임당 얼굴이 들어갔다.

신사임당의 아버지 외가인 강릉 최씨 대종회에서 화폐 속 얼굴이 표준영정의 그것과 다르다고

이의를 제기하면서 또 다른 논란을 낳았지만 화폐에 여성의 얼굴이 들어간 것은 처음이다.

이것만으로도 우리 여성사(史)에 큰 의미를 지닌다 할 것이다.

우표는 어떨까. 우표는 화폐와 달리 한 해에도 수십 종이 발행되기 때문에

위인의 얼굴이 새겨질 여지가 많다. 그러나 여성이 우표에 등장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신사임당은 2000년 밀레니엄 시리즈 우표가 나올 때 우표에 등장한 적이 있다.

신사임당의 서체가 새겨진 병풍도를 배경으로 표준영정이 비교적 선명하게 그려져 있어

우표수집가들의 인기를 끌었다.

유관순 우표도 나와 있다. 1982년 10월 100원짜리 보통우표에 유관순 열사의 얼굴이 등장한 것이다.

보통우표는 특정 기념일에 한정 수량을 찍어내고 마는 기념우표와 달리

수요가 있을 때 한동안 계속 찍어낸다는 점에서 더 많은 수량이 시중에 풀려나간 셈이다.

이들 우표는 지금도 우표 거래 사이트에 가면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다.

유감스러운 것은 이게 사실상 전부라는 점이다.

125년 한국 우정 역사를 통틀어 이 두 종류 외에 내놓을 만한 여성 인물 우표가 없다.

수집가들이 좋아하는 우표가 한 종류 더 있긴 하다.

 하지만 순수한 의미에서 인물우표라고 하기에는 정치적 색깔이 너무 짙다.

해당 우표는 박정희 대통령의 부인 육영수 여사를 추모하는 우표다.

육 여사는 1974년 8월 15일 문세광이 쏜 총탄에 맞아 숨졌다.

그로부터 석 달 뒤인 11월 29일 고인의 49회 생일을 맞아 당시 체신부가

“나라와 겨레를 그지없이 사랑하시다 가신 여사의 유덕을 길이 추모하기 위해”라며 우표를 발행했다.

육 여사가 많은 국민으로부터 존경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우표를 발행한 의도는 명백히 박 대통령에게 잘 보이는 데 있다.

여성 우표라는 것이 당시로선 상상도 못할 때였으니

체신부의 파격적인 아부가 박 대통령을 감동시켰을지 모르는 일이다.

우리 사회가 오랫동안 남성 위주로 전개되면서 위인 반열에 오를 만한 여성이 많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신사임당과 유관순만 있는 것은 아니다.

얼굴을 알 길이 없는 고대 인물은 차치하고 근·현대사만 더듬어도 적지 않은 인물이 떠오른다.

일제와 맞선 조선의 국모 명성황후나 교육자이며 독립 애국지사인 김마리아,

농촌 계몽운동가로 소설 <상록수>의 모델인 최용신 같은 이는 언제라도 우표에 등장할 자격이 충분하다.

우리나라 최초의 여의사 박에스더, 최초의 여성 변호사 이태영, ‘사의 찬미’를 부른 여류 성악가 윤심덕,

최초의 현대무용가 최승희, 최초의 여기자 최은희, 판소리 명창 박녹주 등도 마찬가지다.

이들이 우표에 등장했다고 해서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들은 우표에 등장하지 못하는 걸까.

우정사업본부 이기석 우표디자인실장은 “성(姓)에 따른 차별은 없다”고 말한다.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우표 도안에서 배제하는 것은 아니라는 얘기다.

그보다는 인물우표 자체를 좀처럼 발행하지 않는 데 그 원인이 있다.

우표는 우정사업본부가 마련해놓은 우표발행세칙에 근거해 발행한다.

여기에 인물우표 발행을 금지한다는 규정은 물론 없다.

다만 “역사적으로 기념할 중요한 가치가 있는 인물 · 사건으로 50주년 또는 100주년 단위의

기념행사가 있을 때”라는 제한 규정이 있다.

또 정치적 · 종교적 논쟁의 소지가 있는 소재는 발행하지 않는다는 원칙이 있다.

굳이 발행하려 든다면 못할 것은 없다.

유관순 우표는 이런 기념우표 규정의 적용을 받지 않도록 아예 보통우표로 발행했다.

보통우표는 우정사업본부장이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경우엔 무엇이든 발행할 수 있도록 허용하고 있으며

기념우표도 국민적인 홍보가 필요하다고 판단되는 경우 가능하도록 돼 있다.

결국 중요한 것은 우본의 발행 의지인 셈이다.

지난주 한·필리핀 수교 60주년 기념우표가 나왔다.

특정국가와 수교한 지 60년이 되었다는 사실도 의미가 없지는 않겠지만

국민 다수의 관심을 끌 사안은 될 수 없다.

그보다 여성 인물우표에 대한 금기 아닌 금기를 허무는 일이 우표 활성화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 이종탁 경향신문 논설위원

- 2009 03/17 위클리경향 816호

 

 

 

 

 

 (2) 정직한 우체국장 링컨

 

우체국장 시절 링컨 모습을 그린 삽화(왼쪽)와 링컨 우표.

미국 일리노이 주는 요즘 온통 축제 분위기다.

미국 전역에서 관광객이 몰려 거리마다 인파로 들썩인다.

이곳 주지사 출신의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백악관에 입성한 흥분의 여진도 남아 있겠지만,

비단 그 때문만은 아니다.

일리노이 주 출신의 16대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의 탄생 200주년 기념일이 지난 12일이었기 때문이다.

링컨 200주년 기념위원회는 2월 1일부터 28일까지 하루도 빼놓지 않고 각종 기념행사를 펼치고 있다.

링컨은 미국인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꼽힌다.

노예를 해방했고, 남북전쟁을 이끌며 미 연방의 분열을 막아 지금의 미국이 있게 한 위인이다.

그 링컨이 젊은 시절 정치의 꿈을 키우고 성장한 곳이 일리노이 주다.

주도(州都)인 뉴스프링필드는 링컨의 도시다. 이곳을 여행하는 사람은 링컨기념물과 관공서 건물을

빼면 다운타운에서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입을 모은다.

링컨이 살았던 집, 그가 점원으로 일하던 가게, 기념박물관, 도서관, 링컨묘지 등이 관광객을 부른다.

링컨이 캔터키 주에서 일리노이로 이주해 처음 정착한 곳은

뉴스프링필드에서 그리 멀지 않은 뉴세일럼이라는 소도시다.

당시 떠오르는 상업 중심지였던 이곳에서 링컨은 우정사업과 인연을 맺었다.

1833년 그의 나이 24세 때 우체국장에 임명된 것이다.

3년 뒤 우체국이 문을 닫을 때까지 링컨은 1주일에 두 번 오는 편지를 받아 직접 배달 일까지 했다.

당시는 수신인이 요금을 내던 시절이어서 배달과 요금 수납을 동시에 해야 했다.

그는 편지를 모자에 담아 다녔고, 사람들은 그런 그를 ‘정직한 에이브(에이브러햄)’라 불렀다.

링컨은 우체국에서 틈만 나면 정치철학 책을 읽었고, 공짜로 볼 수 있는 신문을 꼼꼼히 살폈다.

그렇게 생활한 지 1년 만에 링컨은 지방의회선거에 나가 당선했다.

우체국에서 정치를 공부했고, 우체국장 신분으로 정계에 첫발을 내디딘 것이다.

다시 1년 뒤 의회가 폐회하자 링컨은 변호사로 변신했고,

뉴세일럼을 떠나 뉴스프링필드로 옮겨 두 번 의회선거에 당선하면서

백악관으로 가는 정치적 자산을 쌓아갔다.

미국 역대 대통령 가운데 우체국장을 지낸 사람은 링컨이 유일하다.

미 우정청(USPS)으로서는 큰 자랑이다.

탄생 200주년을 맞아 기념우표를 내는 것은 무척 당연한 일이다.

우체국장 출신의 미국 대통령은 링컨 외에 한 사람 더 있긴 하다.

반소 · 반공을 내세우며 한국전쟁 때 군사를 파병한 33대 해리 트루먼이다.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며칠 전 트루먼은

미주리 주 캔자스 시 인근의 작은 마을인 그랑뷰에서 우체국장 시험을 치러 합격했다.

그의 나이 28세였다. 그는 우체국장으로서 몇몇 공문에 결재까지 했으나 실제 근무하지는 않았다.

직무를 태만히 했기 때문이 아니다.

이웃 중에 전쟁터에서 남편을 잃고 어린 두 자녀를 혼자 키우는 엘라 홀이라는 여성이 있었다.

이 여성이 돈이 없어 쩔쩔매는 것을 보고 “나 대신 우체국을 맡아 운영하라”며 자리를 넘겨준 것이다.

당시 그랑뷰 우체국장의 월급은 월 50달러. 농장에서 근로자 2명을 고용할 수 있는 큰 돈이었다.

트루먼은 자기 앞으로 나오는 이 돈을 한 푼도 손대지 않고 엘라에게 건넸다.

우체국장 운영권 양도가 당국의 승인을 받지 않은 비공식적 행동이었지만

트루먼의 인간적 면모를 보여주는 긍정적 에피소드로 전해진다.

미국인들이 존경해 마지않는 ‘건국의 아버지’ 6인 중에도 우정인이 있다.

벤저민 프랭클린(1706~1790)이다.

프랭클린이 위대한 정치가이자 외교관, 과학자, 저술가라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피뢰침을 발명한 근대 기상학의 아버지라는 것도 그 분야 사람들은 안다.

그런데 우정인, 그것도 원조 우정인이라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프랭클린은 미국이라는 나라가 생겨나기 전인 1737년 31세의 나이로

필라델피아에서 우체국장에 임명됐다.

이후 영국 의회를 설득해 미 전역의 우체국장을 총괄하는 역할을 맡았고,

1775년에는 훗날 우정청이 되는 기관의 장, 즉 초대 우정청장이 됐다.

그 유명한 독립선언문 기초위원 일을 하면서도 우정청장직에 있다가

건국한 지 두 달 만인 1776년 11월 사위에게 2대 우정청장을 넘겨줬다.

이렇게 보면 미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정치인, 한국과 밀접한 인연이 있는 대통령이 모두 우정인이다.

미국이든 한국이든 우정인이라면 자긍심을 가져도 좋을 사실들이다.

- 이종탁 경향신문 논설위원

- 2009 02/24, 위클리경향 813호

 

 

 

 

 

 (3) 미국대통령 우표

 

라이베리아에서 발행한 오바마 우표와

미국인들이 가상으로 만든 부시 우표들.

미 우정청이 조지 부시 대통령의 특별 지시에 따라 부시 얼굴이 새겨진 우표를 발행했다.

우표가 나왔다는 소식에 부시는 우체국을 찾아 새 우표 인기가 어떤지 물어봤다. 뜻밖에도 창구 직원은 “우표가 잘 붙지 않는다고 고객들의 불만이 대단하다”고 말했다.

부시는 중앙정보국(CIA)에 어떻게 된 일인지 알아보라고 지시했다. CIA는 현장조사를 한 후 이렇게 보고했다. “각하, 우표 품질은 국제 수준입니다. 문제는 사람들이 우표 뒷면에 칠해야 할 침을 앞면에 바른다는 점입니다”

미국인들이 즐겨찾는 인터넷 사이트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는 유머 가운데 하나다.

부시 대통령에 대한 국민의 반감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유머와 달리 미 우정청은 대통령 우표를 내지 않는다.

살아 있는 사람에 대해서는 우표를 발행하지 않는다는 분명한 원칙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취임식 때 한 번 대통령 우표를 발행하는 우리 우정사업본부와 비교된다.

미 우정청은 오는 20일 제44대 대통령 버락 오바마의 취임에 맞춰 기념품을 내놓았다.

오바마 대통령과 바이든 부통령의 사진을 새긴 편지봉투와

오바마의 개인 이력, 대통령 선서문 등을 우표첩에 넣어 14.95달러에 판매하는 것이다.

우표는 아니지만 이 또한 소장 가치가 있어 꽤 인기가 높다.

미국 대통령 우표는 종종 외국에서 발행한다.
현직 대통령 얼굴이 들어 있는 우표를 갖고 싶어하는

미국인 등 우표수집가의 수요를 염두에 둔 틈새 공략이다.

오바마 우표는 라이베리아에서 세계 최초로 냈다.

지난해 11월 오바마가 당선하자 몇 시간 뒤 기념우표를 발행해 세계 우표수집가들의 눈길을 끌었다.

오바마와 매케인, 두 우표를 동시에 준비해놓았다가

선거 결과에 따라 어느 한 쪽을 버리고 다른 한 쪽을 출시하는 작전을 쓴 것이다.

라이베리아는 과거에도 그런 작전을 쓴 적이 있다.

조지 부시와 앨 고어 후보가 맞붙은 2000년 개표 상황이 엎치락뒤치락하면서

승부가 40일 이상 지연된 적이 있다.

이때 라이베리아는 고어가 당선했다는 최초의 잘못된 보도를 믿고

성급하게 고어 우표를 발행했다가 회수하는 소동을 벌였다.

라이베리아가 국제 망신을 당하면서까지 미국 대통령 우표에 집착하는 것은

아무래도 역사적 배경 때문일 것이다.

라이베리아는 1822년 미 식민협회가 해방된 노예를 귀환 이주시켜 만든 국가로

1847년 미국에서 독립했다. 그러나 국가명을 자유의 나라라는 뜻에서 라이베리아로 짓고,

수도명을 제임스 먼로 미 대통령의 이름을 따 먼로비아로 지을 만큼

미국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라이베리아 외에 오바마 우표를 발행한 나라는 차드, 케냐, 기니 등이 꼽힌다.

기니는 오바마를 가운데 두고 에이브러햄 링컨, 넬슨 만델라, 제시 잭슨, 존 F 케네디, 마릴린 먼로,

빌 클린턴 등의 인물을 두루 담은 우표 6종을 전지 형식으로 발행했다.

차드와 케냐 또한 편지 송달과 무관하게 오로지 수집가들에게 판매할 목적으로 우표를 냈다.

북한이 가끔 사용하는 외화벌이 사업인 것이다.

그렇다면 인물 우표에 관한 미 우정청의 원칙은 만고불변일까.

우정청은 지금까지 대통령은 사후 1년, 그외 인물은 사후 10년이 되기 전에는

어떤 경우에도 우표에 등장시키지 않는다는 원칙을 고수해왔다.

그런데 올해 처음으로 이 원칙에서 어긋나는 우표가 나오게 됐다.

전설의 코미디언 밥 호프의 우표를 그의 106번째 생일인 올 5월 29일에 내기로 한 것이다.

호프가 사망한 게 2003년이니까 올해는 사후 6년밖에 안 된다.

우정청은 이에 대해 “사후 10년 규정을 사후 5년으로 수정했다”고 설명한다.

수정한 원칙의 첫 적용 사례가 밥 호프라는 것이다.

세계 각국을 통틀어 우표에 가장 많이 등장한 사람은 윈스턴 처칠 전 영국 총리다.

그가 숨진 뒤 10년째 되는 1974년이 그의 탄생 100주년이어서

이때를 전후해 줄잡아 126개국에서 474종의 처칠 우표를 발행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처칠이 세계적으로 존경받았음을 보여주는 단면이다.

처칠 전에는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700종에 달하는 우표에 등장해 단연 선두였으나

얼굴 모습보다는 배나 등대같이 항해에 얽힌 상징물이 우표에 올랐다.
- 이종탁 경향신문 논설위원

- 2009 01/20, 위클리경향 809호

 

 

 

 

 

 (4) 우표로 보는 새해

 

기축년 새해에는 국내외에 어떤 일이 예정돼 있을까.

우정사업본부의 2009년 우표 발행 계획을 보면 일단의 흐름을 알 수 있다.

새해 처음 나오는 우표는 루이 브라유(Louis Braille, 1809~1852) 탄생 200주년 기념 우표다.

브라유는 시각 장애인들이 손가락을 이용해 읽고 쓸 수 있는 문자인 점자를 창안한

프랑스 태생의 교사다. 그 자신 네 살 때 시력을 잃었으나 읽고 쓰기를 배워

능숙한 첼로와 오르간 연주자가 되었으며 모교에서 교사가 되기도 했다.

이 분이 태어난 지 200년이 되는 날이 1월 2일이어서

만국우편연합(UPU)의 요청에 따라 이날 기념우표를 내는 것이다.

일반인에게 널리 알려지지 않았지만 2009년은 유엔이 정한 세계 천문의 해다.

이탈리아의 철학자 갈렐레오 갈릴레이가 천체망원경을 발명한 지 400주년이 되는 해를 기념해

정한 것이다. 망원경의 발명은 세상을 보는 눈, 우주 크기에 대한 이해의 지평선을 넓혀주는

인류사의 기념비적 사건이다.

세계적으로는 국제천문연맹(IAU), 우리나라에서는 한국천문연구원이 주관이 돼

다양한 행사를 준비하고 있으며,

상세한 정보는 공식 웹사이트(www.astronomy2009.org, www. astromomy2009.kr)에 가면

얻을 수 있다. 이를 기념하는 우표가 1월 15일 나온다.

2009년 한 해 동안 세계인의 입에 가장 많이 오르내릴 단어는 무엇일까.

통계를 낼 수 없겠지만 ‘경제 위기’ 아니면 ‘기후 변화’쯤 되지 않을까 싶다.

12월 스웨덴의 코펜하겐에서 열리는 기후변화협약 당사국 회의에서 지구온난화를 방지하기 위한

전지구적 협상이 마무리된다. 우리나라가 의무감축국가가 되는지도 이때 결정된다.

물론 예정대로 이때 모든 협상이 종결될 수 있을지는 미지수지만,

기후 변화라는 주제가 인류 공통의 과제로 다가왔음을 실감하는 데는 모자람이 없는 한 해다.

4월 22일 지구의 날을 맞아 지구사랑 특별우표를 발행한다는 우정사업본부의 계획은

그래서 시의적절하다. UPU에 따르면,

우리나라 외에 세계 40개국에서 기후 변화 관련 우표를 발행할 계획을 세워놓고 있다.

새해를 누구보다 설레는 가슴으로 맞는 사람들은 만화가다.

1909년 6월 2일 일간지 <대한민보> 창간호에 이도영 선생이 한 컷의 만화를 실어 첫 선을 보인 지

꼭 100년이 되는 해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만화에 빠지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길창덕의 ‘순악질 여사’, ‘이상무의 독고탁의 비밀’, 박수동의 ‘번데기야구단’,

월간 어린이 잡지 <어 깨동무> 등등 제목만 들어도 만화의 한 장면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한국만화100주년 기념우표가 나오는 6월 2일을 전후해

이런 추억의 책을 다시 볼 수 있는 기회가 있다. 한국만화100주년기념위원회가 준비하고 있는

행사 중에 이들 책을 일반인에 보여주는 특별전시회가 포함돼 있다.

새해 한국에서 열리는 국제 행사로는 제3차 OECD(경제개발협력기구) 세계 포럼이 있다.

세계 각국의 고위관료, 국제기구, 기업, NGO 및 학계, 언론계 등 1500여 명이 참여하는 행사다.

통계를 통해 사회 발전을 측정하고 미래를 예측하는 방안에 대해 논의한다.

통계청이 미국, 스페인, 인도 등과 경쟁을 벌여 유치했으며,

국내에서는 부산이 서울과 제주를 제치고 개최지로 선정됐다.

10월 27일부터 나흘간 벡스코에서 열리며 이때 기념우표가 나온다.

우취계의 행사로 필라코리아 아시아국제우표전시회도 있다.

7월 30일, 행사 개막일에 맞춰 기념 우표가 나올 예정이다.

눈에 띄는 것은 해병대 창설 기념우표다.

‘무에서 유를 창조한다’는 해병대가 창설된 지 60년이 되는 2009년 4월 15일, 기념우표를 낸다는

계획이다. 결속력 강하기로 이름난 해병대의 저력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라 할 만하다.

건군 60주년 우표는 2008년에 나왔고,

2009년은 해병대 외에 공군 창설 60주년이기도 한데, 공군우표는 없기 때문이다.

2010년에는 여군 창설 60년이 되는데, 이때 우표가 나올지도 두고볼 일이다.

눈을 외국으로 돌리면 새해에 다시 한 번 새겨야 할 위인도 여럿이다.

<종의 기원>의 저자인 다윈 탄생 200주년이자 교향곡의 아버지 하이든의 서거 200주년이다.

이를 기념해 우표를 발행하는 나라도 있다.

예나 지금이나 국내외 우표를 살피면 과거와 현재의 역사를 한꺼번에 배울 수 있다.
- 이종탁 경향신문 논설위원

- 2009 01/06, 위클리경향 807호

 

 

 

 

 

 (5) '남의 실수가 나의 행복' 인 우표

 

 

러시아 항공첨쇄 에러, 바덴 색도 에러, 루스벨트 손가락 에러,

대한제국 독수리 우표 에러, 콜럼버스 지도 에러

(왼쪽부터 시계방향)

 

'실수가 돈이다’라고 하면 “그게 무슨 헛소리냐”는 반문이 돌아올지 모르겠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 ‘한 번 실수는 병가지상사(兵家之常事)’라는 말은 있어도

실수가 직접 돈이 된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대개 실수는 돈이 아니라 크고 작은 상처를 남긴다.

중요한 순간의 결정적 실수라면 참담한 패배와 뼈아픈 후회를 준다.

바둑에서 한 수의 실수는 승부를 좌우하고 전쟁에서 한 번의 실수는 목숨을 좌우한다.

어떻게든 실수는 피하고 보는 게 상책이다.

그런데 우표의 세계에선 실수가 돈이 된다.

실수로 잘못 만들어진 우표는 정상 우표보다 훨씬 값어치가 나간다. 짝퉁이 정품보다 비싼 것이다.
그 이유는 물론 희소성 때문이다.

우표에서 만약 실수가 발견되면 발행 당국은 그 즉시 회수에 들어간다.

그러나 그때마다 회수 그물망에 걸리지 않고 시중에 흘러나가는 게 몇 장씩은 있게 마련이다.

그러면 그 우표는 지구 상에 몇 장밖에 없는 존재가 되고, 수집가들의 소유욕을 자극한다.

자연히 부르는 게 값이 된다.

실제 세계 경매시장을 놀라게 하는 빅 거래도 열이면 여덟아홉은 에러우표다.

우표 제작자의 실수가 수집가의 행복이 되는 분야가 우표 세계인 것이다.

우표닷컴에 따르면,

얼마 전 미국 옥션에서 1935년에 발행된 러시아의 항공첨쇄 에러우표(사진 1)가

62만5000달러(1달러=1500원일 때 9억3700만 원)에 낙찰됐다.

San Fransico(샌프란시스코)를 나타내는 f자가 거꾸로 첨쇄된 우표로,

지금까지 10장만 발견된 희귀우표였다.

지난 4월 스위스 옥션에서는 1851년에 나온 독일 바덴의 색도 에러우표(사진 2)가

무려 110만 유로(19억 원)에 팔렸다. 유럽 우편사를 통틀어 한 장밖에 없는 귀중한 우표라는 것이다.

이 정도는 아니어도 수집가들의 인기를 끄는 에러우표는 많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것은 모나코 항공우표(사진 3)다.

모델로 등장한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의 손가락을 실수로 6개로 디자인한 것이다.

‘역사상 가장 바보 같은 우표’라는 오명이 붙어 있는 이 우표는

그러나 많은 분량이 유통돼 생각만큼 가격이 비싸지는 않다.

단순 실수가 아니라 역사적 인식이 부족해 생기는 에러우표도 있다.

콜럼버스의 대륙 발견을 기념해 만든 미국 우표(사진 4)에서

콜럼버스가 둥근 모양의 지구를 가리키는 게 그 예다.

당시 지도는 평평한 모양만 있을 뿐이어서 콜럼버스가 둥근 지구를 사용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중국이 ‘전국은 붉다’는 구호를 내걸고 발행한 우표는 발행 하루 만에 회수됐다.

본토는 붉은색을 입히면서 대만은 흰색으로 칠하는 바람에

대만을 중국의 영토라고 해온 그동안의 주장과 모순됐기 때문이다.

에러우표가 돈이 된다면 일부러 에러를 범하면 될 것 아닌가.

의도적으로 에러우표를 내면 우표 발행 당국과 우표수집가 모두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것 아니냐고

문외한들은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그렇게 나오는 에러우표는 시장에서 큰 가치가 없다.

자칫 우표 발행 당국의 명예만 떨어뜨리기 십상이다.

북한과 같은 후진국에서 우표를 편지에 붙이는 게 아니라

오로지 외국 수집가들에게 파는 용도로 찍어 팔다가 신용 기반을 깎아먹는 것과 같은 이치다.

미국 우정청은 에러우표를 이벤트성으로 발행한 적이 있다.

1901년 나온 판암 엑스포 에러우표를 기념하기 위해 100년이 지난 2001년

당시 모양을 도안으로 해 우표를 발행한 것이다.

그러나 처음부터 이 우표는 우편용이 아니라 기념품용이라고 못박음으로써

의도적 에러우표를 남발한다는 인상은 주지 않았다.

우리의 경우 에러우표는 손꼽을 정도밖에 없다.
외국 수집가들의 에러리스트에는

대한제국 때인 1903년 나온 독수리 우표(사진 5) 정도가 올라 있다.

우표 속 독수리가 왼쪽에 받치고 있는 지구에서 일본을 섬 하나로 그리는 실수를 범한 것이다.

우리 우정 당국이 이 정도로 일처리를 빈틈없이 한다는 뜻일까.

믿음직스럽긴 하지만 신용을 떨어뜨리지 않으면서 국부도 창출하는 방법은 정말 없나 하는

아쉬움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 이종탁 경향신문 논설위원

- 2008 12/30, 위클리경향 806호

 

 

 

 

 

 (6) 우편배달부, 우체부, 집배원 중

무엇이 올바른 명칭인가요?

 


 

우편물을 싣고 배달에 나선 집배원.

 

인터넷 지식검색창에 심심찮게 오르는 질문이다.

여러 명칭이 혼용되다 보니 그런 의문이 드는 것도 이상할 게 없다.

자칫 잘못 불렀다간 눈총을 살 수도 있으니 말이다.

가령 간호사를 간호원, 환경미화원을 청소원이라고 옛날식으로 불렀다간

교양없는 사람이란 소리를 듣기 십상이다. 이름이란 당사자가 원하는 대로 불러주는 게 원칙이며,

직군 명칭 또한 종사자들이 싫어하지 않도록 배려하는 게 예의다.

‘편지 나르는 사람’에 대한 정부의 공식 명칭은 집배원(集配員)이다.

편지를 모아서(集) 배달한다(配)는 뜻에서 나온 말로 1905년 을사조약 이후 지금까지 변함이 없다.

그러나 꼭 이 명칭만 쓰이는 것은 아니다.

민간에서는 우편배달부(郵便配達夫), 우체부(郵遞夫)를 함께 써왔고,

이 명칭에 정(情)이 담기면서 집배원들도 별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고 있다.

구한말, 그러니까 1884년 우정총국 창설 직후엔

체전부(遞傳夫), 또는 체부, 분전원(分傳員), 우체군(郵遞軍)이란 말이 쓰였다.

공식 명칭이 집배원으로 바뀐 뒤에도 이 용어는 한동안 살아 있었다.

1906년 ‘만세보’에 연재된 최초의 신소설 ‘혈의 누’를 보면

“여보 누구더러 이 녀석 저 녀석 하오? 체전부는 그리 만만한 줄로 아오”라고 하는 대목이 나온다.

1935년 이상의 수필 ‘산촌여정’에도

“이곳에는 신문도 잘 아니오고 체전부는 이따금 하도롱빛 소식을 가져옵니다”라는 구절이 있다.

또 1936년 김유정의 동백꽃에는 “체부가 잘 와야 사흘에 한 번밖에 들르지 않는 것을”이라는

구절이 있어 체전부, 또는 체부가 당시 보편적 용어였음을 보여준다.

현대에 들어선 우편배달부와 우체부란 용어가 더 많이 쓰였다.

가수 남인수는 ‘향기품은 군사우편’에서 ‘전해주는 배달부가 싸립문도 못가서’라고 노래했고,

문정희 시인은 ‘가을우체국’에서 ‘때론 시인보다 우체부가 좋지’라고 적었다.

영어 ‘postman’을 우체부 또는 우편배달부로 번역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네루다의 우편배달부’ ‘우체부 브레드’ ‘우편배달부 워커씨 이야기’ 같은 책이 그것이다.

집배원이라고 하면 왠지 딱딱하게 느껴지기 때문일까.

집배원들의 항의로 영화 제목이 바뀐 뒤부터는

번역하지 않고 그냥 ‘포스트맨’으로 쓰는 경향도 생겼다.

불륜을 저지르고 남편을 살해한 여인의 이야기를 그린 영화(The postman always rings twice)를

국내에 들여오면서 ‘우편배달부는 벨을 두 번 울린다’라고 제목을 붙였다가

“집배원은 영화에 나오지도 않는 데 왜 나쁜 이미지를 씌우나”라는 항의가 쏟아져

‘포스트맨은 벨을 두 번 울린다’라고 바꾼 것이다.

이후 케빈 코스트너 주연의 영화(The postman)에 ‘포스트맨’이란 제목이 붙었고,

무라카미 류의 소설 ‘포스트맨’도 원제 그대로 소개됐다.

외국에서도 집배원 명칭이 하나만 쓰이는 것은 아니다.

영어권만 해도 ‘postman’ ‘mail man’ 외에 편지를 나르는 사람이란 뜻에서

‘letter carrier’ ‘mail carrier’ 등의 용어를 혼용한다.

과거에는 남자집배원만 있어 man이라고 했으나

점차 여자 집배원이 늘면서 중성적인 carrier란 단어를 쓰는 것이다.

미국 집배원의 공식 명칭은 ‘letter carrier’, 영국이나 뉴질랜드 같은 나라에선 ‘postie’라고도 한다.

‘post carrier’의 애칭인 셈이다.

한자어를 쓰는 중국에선 우체원(郵遞員),

일본에선 우편외무원 또는 외무원(外務員)이 공식 명칭이나 민간에선 대개 우편배달원이라고 한다.

나라마다 공식 명칭은 있지만, 일반에서는 정감이 느껴지는 용어를 선호하는 셈이다.

1999년 우정사업본부는 집배원의 명칭을 바꿔볼까 싶어 공모한 적이 있다.

‘우편정보원’ ‘까치아저씨’ 등의 아이디어가 제시됐지만 딱 이거다 싶은 게 없었고,

결국 집배원을 그대로 쓰기로 한 게 오늘에 이르고 있다.

- 이종탁 경향신문 논설위원

- 2007 12/04, 위클리경향 752호

 

 

 

 

 

 (7) 최초의 우표수집가를 아십니까?

 

 

“우리나라 최초의 우표 수집가가 누군지 아세요?”

한국 최초 우표 수집가

남궁억.

자칭 국내 우취칼럼니스트 2호라는 시인 여해룡씨가 나를 만나자 불쑥 던진 질문이다. 수십 년간 우표를 연구해온 전문가답게 그는 나 같은 사람이 모르는 우취 상식을 훤히 꿰고 있다.

국가에서 공인한 것은 아니지만, 그에 따르면 국내 최초의 우표 수집가는 독립운동가 남궁억(南宮檍, 1863~1939)이다.

여씨의 말을 듣고 남궁억의 생애를 찾아보니, 그보다 앞선 우표 수집가는 있을 것 같지 않다. 국내 최초의 문위우표를 발행하던 1884년 남궁억은 21살의 나이로 1년짜리 영어학교를 막 마쳤고, 갑신정변으로 중단한 우표 발행을 1895년 재개했을 때 독립협회 수석총무였다.

태극우표, 대한제국 우표 등 역사적인 우표가 쏟아지던 때 근대 우정의 의미를 누구보다 잘 알 수 있는 지위에 있었던 셈이다.

새 우표가 나올 때마다 그는 하나씩 구입 · 보관했고, 이렇게 해서 1895~1904년 발행한 우표 20매를 모을 수 있었다.

이때쯤 그는 황성신문 사장과 배화학당 교사를 지내고,

강원도 홍천에 내려가 무궁화 묘목을 심고 있었다.

“나 죽으면 무궁화 나무 아래 묻어달라”고 할 만큼 말년에 심혈을 기울인 무궁화 보급운동을

위해서였다. 고이 간직해온 우표 20매는 무궁화 묘목이 있는 홍천 모곡의 산기슭에 숨겨졌다.

그러다 남궁억이 68세되던 1931년, 당시 시가로 3000원에 이르는 이 우표들을

연희전문학교(연세대) 도서관에 기증했다고 2004년 3월 4일자 ‘연세소식’은 전하고 있다.

국내 최초 우표 수집가의 족적(足跡)은 이렇게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다.

유명한 우표 수집가인

사마란치 전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장이

자신의 소장 우표를 기증한 올림픽박물관.

그렇다면 세계 최초의 우표 수집가는 누구일까.

영국 왕실이다.

1840년 세계 최초의 우표 페니 블랙을 발행한 나라답게 영국의 왕실은 자국 우표는 물론 세계적인 희귀 우표를 틈날 때마다 구입했다.

제임스왕은 즉위하기 전인 1904년 런던 필라텔리 소사이어티 회장으로서 모리셔스의 미사용 우표를 당시 최고가인 1450파운드에 구입해 세계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1900년대 들어 이름을 날린 우표 수집가는 전 세계 체스 챔피언 아나톨리 카르포프다.

그는 영국 식민지의 우표는 물론 아메리카에서 아프리카까지, 동식물에서 올림픽에 이르기까지

역사적으로 의미 있고 귀한 우표를 대거 수집했다.

이 우표들을 유럽 등 여러 나라의 은행 금고에 분산시켜 넣어놓고

그 나라로 여행갈 때마다 꺼내보면서 즐기곤 했다.

그는 “우표 수집은 나에게 개인적 취미가 아니라 비밀스런 취미”라고 말하기도 했다.

현재 세계적으로 유명한 우표 수집가로는

후안 안토니오 사마란치 국제올림픽위원회(IOC) 명예위원장을 들 수 있다.

그는 올림픽 개최국이 여는 문화행사에 우표 전시회를 포함시킨 당사자다.

올림픽 헌장 40조에는 “개최국은 올림픽 기간 중 선수촌에서 반드시 문화행사를 열어야 하며,

행사 프로그램은 사전에 IOC 집행위에 제출해 승인받아야 한다”고 돼 있다.

이 규정에 따라 1988년 서울올림픽 때 처음으로 우표 전시회가 열렸다.

사마란치는 현재 IOC 수집분과위 위원장이다. 여기서 수집이란 물론 우표를 말한다.

그는 1993년 제네바 호숫가에 올림픽박물관이 세워질 때

자신이 소장하고 있던 우표 1만2000점을 기증한 전력이 있다.

정치적 편력 때문에 이런 저런 구설에 오른 사마란치지만,

우취 세계에선 무시할 수 없는 업적을 쌓은 것이다.

국내의 우표 수집가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큰 잔치가 최근 열렸다.

지난 8월 1~5일 코엑스에서 열린 대한민국 우표 전시회가 그것이다.

남궁억의 대를 잇는, 한국의 사마란치라 자부하는 우표 수집가들이 내놓은 작품에

우취인의 한국적 정취(情趣)가 듬뿍 담겨 있었다.
- 이종탁 경향신문 논설위원

- 2007 08/21 위클리경향 738호

 

 

 

 

 

 (8) 우정총국 탄생 주역 '풍운아 홍영식'

 

 

“각국과 통상한 이래 안팎의 관계와 교섭이 날로 늘어나고 관상(官商)의 신식(信息)이 번잡하여지니

진실로 그 뜻을 속히 체전(遞傳 · 차례로 여러 곳을 거쳐 소식과 편지를 전하여 보냄)하지 않으면

서로 연락하거나 멀고 가까운 곳이 일체로 될 수 없다.

이에 명하노니 우정총국을 설립해 각 항구에 왕래하는 신서를 맡아 전하고

내지(內地)의 우편도 점차 확장하여 공공의 이익을 거두도록 하라.”

사적 213호, 서울 종로구 견지동 우정총국 건물.

123년 전인 1884년 4월 22일.

고종이 내린 칙령(勅令)에 의해 우정총국이 탄생했다.

 

정식 업무는 이보다 7개월 뒤인 11월 18일 개시했지만, 초대 총판이 임명되는 등 우정총국의 역사는 이때부터 시작했다. 이날이 바로 한국 우정의 시발점인 것이다.

 

1994년 체신부가 정보통신부로 바뀌면서 이날을 기념하는 ‘체신의 날’을 ‘정보통신의 날’로 개칭하긴 했으나, 우정인들 사이에 생일 떡을 돌려 먹으며 자축하는 관습은 지금도 변함없이 내려오고 있다.

우정의 날에 떠오르는 인물은 우정총국 초대 총판인 금석(琴石) 홍영식(洪英植)이다.

그는 헌종 때 영의정을 지낸 홍순목의 둘째로 태어나 16세에 칠석시(七夕試)에 급제한 명문가의 영재.

너무 어린 나이에 과거에 급제해 2년간 사가독서(賜暇讀書 · 독서당에서 공부하는 것)를 했고,

1878년 교리(정 5품 · 지금의 5급 사무관)로 관료생활을 시작해

2년 만에 참의(參議 · 당상관 · 1급 관리관)로 승진하는 등 초고속 출세길을 달렸다.

10대 청소년 시절에 그는 연암 박지원의 손자로 우의정을 지낸 박규수의 가르침을 받아

개화사상에 눈을 떴다. 이때 역시 명문가 자제인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등과 어울리면서

훗날의 혁명동지로 유대를 다져나갔다. 1881년 신사유람단의 일원으로 일본에 갔을 때,

그 2년 뒤 전권대신 민영익과 함께 미국에 갔을 때

그는 무엇보다 우편 행정을 유심히 살피고 돌아왔다.

그러고는 고종에게 ‘우리나라에 우편 개설이 급선무’라고 설득, 우정총국 설치 칙령을 이끌어냈다.

이렇게 해서 우정총국이 탄생했으니 그가 수장이 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따지고 보면 그는 당시 조선 최고의 우편전문가가 아닌가.

초대 총판 홍영식.

우정총국 총판이 되었을 때 그의 나이 고작 29세.

가정과 사회에 막 기반을 닦는다는 이립(而立)도 채 못 되어 지금의 정보통신부 장관이 되었으니, 그 젊은 위세는 하늘을 찌를 듯했다.

매천 황현이 ‘매천야록’에서 홍영식을 가리켜 ‘경박하고 영민하다’고 혹평한 것만 보아도 짐작할 만하다.

홍영식의 기운은 그러나 여기까지였다.

그해 12월 우정총국 개국축제일을 디데이로 삼아 갑신정변을 일으켰다가 실패해 청나라 군사에 살해되고 나중에 노륙의 형을 당하는 비운을 맞았다. 정변 직후 우의정이 되어 3일 만에 진압될 때 주변의 망명 권유를 뿌리치고 끝까지 임금을 호위했다는 기록이 그나마 그의 이름을 최후까지 높여준다.

홍영식이 대역죄인으로 낙인 찍히자

아버지 홍순목과 배다른 형 홍만식 등 일가 20여 명은 독약을 받고 집단 자살했다.

또 그가 세운 우정총국은 업무 개시 한 달도 안 되어 간판을 내려야 했다.

이후 근대 우정이 다시 시작되는 데 꼬박 10년의 세월이 필요했다.

홍영식 역시 우편업무가 재개되고 나서야 신원(伸寃 · 죄를 씻어주는 것)을 받았고,

1910년 규장각 대제학(정2품)으로 추증(追贈)됐다.

혜성처럼 왔다가 바람처럼 스러져간 풍운아 홍영식의 이름이

그래서 한국 우정사에 영원히 살아남게 된 것이다.
- 이종탁 경향신문 논설위원

- 2007 05/01, 위클리경향 722호

 

 

 

 

 

 (9) 세계 우편의 아버지 '로랜드 힐'

 


우리나라 근대 우편의 아버지는 우정총국의 초대총판 홍영식,

그렇다면 세계 근대 우편의 아버지는? 상식 퀴즈에 나올 법한 문제다.

우정인은 대개 알고 있지만,

정답은 세계 최초의 우표를 만들어낸 영국의 로랜드 힐(Rowland Hill, 1795~1879) 경이다.

로랜드 힐 동상.

로랜드 경은 런던 근교에서 교사 아버지에게서 태어나 11살에 아버지 학교의 교사가 되어 천문학을 가르친 천재다.

24살 때에는 자신의 교육철학을 펼칠 학교를 직접 설립했고, 27살에는 ‘공교육’이라는 제목의 교육개혁 보고서를 내기도 한 교육전문가였다. 그런 그가 우정인으로 변신하게 된 계기는 우연한 기회에 우편제도의 모순을 발견하면서다.

1837년 산업혁명의 물결이 한창일 때였다.

로랜드는 시골길을 가던 중 한 젊은 여자가 집배원에게서 편지를 받고 “돈이 없다”며 돌려주는 광경을 목격했다.

당시 영국에는 개인끼리 편지를 주고받는 시스템은 있었으나, 직접 손이나 잉크를 찍어 요금을 받았음을 나타내는 우편증지를 붙여야만 송 · 수신이 되는 제도였다.

증지의 요금은 우편물의 무게와 거리에 따라 비싸게 매겼고,

발신인이 아니라 수신인이 내는 방식이었다.

그러다 보니 집배원이 수신자에게 요금을 적당히 깎아주고

나머지 돈을 받아 자기 호주머니에 넣거나,

애초부터 수신 거부를 하기로 송 · 수신자 간에 약조를 하고 겉봉에 암호를 쓰는 경우 등

갖가지 편법과 불합리가 판을 쳤다. 로랜드가 본 젊은 여자도 그런 경우였다.

로랜드가 요금을 대신 내주고 편지를 받아 건넸을 때

이 여자의 입에서 나온 말은 로랜드를 깜짝 놀라게 했다.

“약혼자가 보낸 편지인데 사실 돈 내고 받을 필요는 없었어요. 무슨 내용인지 다 알고 있거든요.”
상대 약혼자가 편지 겉봉에 둘만이 알아보는 암호를 써놓아

수신 거부를 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당시 우편제도의 모순을 생생하게 목격한 로랜드는 그 길로 우편 연구에 매달렸다.

한 해도 안 되어 내놓은 게 ‘우편제도의 개혁-그 중요성과 실효성’이란 논문이다.

근대우편사에 길이 남는 불후의 명작이 된 이 논문은

▲ 요금 발송자 부담의 원칙 ▲ 전국 단일요금 원칙 ▲ 요금선납형 우표제 도입

▲ 특권층 무료우편 폐지 4가지 획기적 제안을 담고 있었다.

 

1839년 영국 의회는 이 제안을 공식 채택했고, 이듬해 법이 발효됐다.

근대 우편제도가 공식 탄생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때까지 로랜드의 머릿속에는 우표를 편지 겉봉에 붙이는 방안까지는 들어 있지 않았다.

그는 우표를 특별봉투에 넣을까 생각했다.

그런데 인쇄소 주인인 제임스 찰머스가 접착성 있는 우표를 쓰자고 아이디어를 냈다.

다음은 우표를 디자인하는 문제였다.

영국 정부에서 공모를 해 600건의 응모작을 받았으나 마땅한 작품이 없었다.

결국 여왕 즉위식 때 만든 메달을 소재로 디자인하고, 요금은 1페니로 한다는 결정이 내려졌다.

이렇게 해서 세계 최초의 우표 블랙 페니(Black Penny)가 탄생한 게 1840년 5월 6일이다.

세계 모든 나라에서 발행하는 국제용 우표에는 국가 표시가 있다.

만국우편연합(UPU) 규정에 그렇게 돼 있기 때문이다. 유일한 예외가 영국이다.

영국 우표에는 국내용이든 국제용이든 국가 표시가 없다.

세계 최초로 우표를 만들었으니 만큼 국가 표시를 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 전통은 UPU에서 공식 인정돼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다.

블랙 페니 발행의 주역 로랜드는 59세에 우정청장이 되어 10년간 재직하면서

근대 우편제도의 기틀을 다졌다. 사후(死後) 그는 영국의 성지인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안치됐으며,

그의 업적을 기리는 동상이 3개 설치돼 후세에 전해지고 있다.
- 이종탁 경향신문 논설위원

- 2007 05/22, 위클리경향 725호

 

 

 


 

 (10) 우표 - 괴테에게 퇴짜맞은 슈베르트

 


 

초·중학교 시절 내게 슈베르트는 ‘가곡의 왕’이었다.

그러나 고교시절에 관람했던 ‘미완성 교양곡’이라는 영화에 영향을 받아 베토벤보다 더욱 위대한 음악가로 이해됐다. 지금은 그의 현악 4중주곡 제14번에 나오는 ‘죽음과 소녀’를 즐겨 듣는다.

나로 하여금 슈베르트를 반려자나 다름없게 만든 곡이다.

슈베르트 역시 천재였기에 31세로 요절하고 말았다.

독일 낭만주의 가곡을 완성시켜놓은 오스트리아의 위대한 음악가답게

그는 600여 곡의 가곡을 남겼다.

오늘날에도 애창되고 있는 ‘마왕’ ‘들장미’ ‘송어’(숭어는 오류임)

‘아베마리아’와 ‘겨울나그네’의 ‘보리수’는 정겹기 그지없다.

이 위대한 슈베르트가 생전에 시성 괴테의 시에다 몇 편의 가곡을 작곡하여 보냈는데

괴테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한 불운을 겪기도 했다.

모르긴 해도 괴테는 악보를 읽을 줄 모르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멕시코 항공우표 속에는 ‘죽음과 소녀’의 장면과 표제가 보인다.

그의 탄생 150주년이던 1978년에 발행되었다.

‘슬픔은 이해를 돕고, 정신을 강하게 한다’라는 명구도 남겼다.
- 여해룡 시인 · 칼럼니스트

 

 

 

 

 

 (11) 우편번호의 고민

 

 

우편번호에 따라 우편물을 분류하는 모습.

"아빠, 우리 집 우편번호가 뭐예요?”
“글쎄 모르겠네. 인터넷에 찾아보면 나오겠지.”

 

보통 가정이라면 아버지와 자녀 사이에 흔히 이런 대화가 오갈 법하다.

가장이라도 자기 집 우편번호를 외우지 못하는 게 일반적이기 때문이다.

 

자기 집 주소와 전화번호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 이 두 가지는 이런저런 문서를 작성할 때 꼭 써넣어야 해 잊을래야 잊을 수 없다.

하지만 우편번호는 필수 기재 항목이 아니다. 그러다 보니 외울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외국에선 우편번호가 주소의 일부다.

자기 집 주소를 적을 때 우편번호도 함께 기재하는 게 보통이다.

이력서에도, 행정관청의 문서에도, 학교에 내는 등록서류에도 우편번호를 함께 적도록 돼 있다.

그러니 누구나 자기 집 우편번호를 머릿속에 넣고 다닌다.

우편번호를 쓰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우편법 시행령 6조에는

“우편물의 외부에는 발송인 및 수취인의 성명 · 주소와 우편번호를 기재해야 한다”고 돼 있다.

우편번호를 쓰는 것은 선택사항이 아니라 법적 의무사항인 것이다.

그러나 어겼을 때 어떻게 한다는 처벌조항이 없다.

그 때문에 우체국에선 우편번호를 안 쓴 우편물도 빠짐없이 배달해준다.

다만 우체국 입장에서 그런 우편물은 큰 부담이다.

우편물을 접수-분류-발송-배달하는 데 우편번호는 꼭 필요하다.

우편물을 구분하는 기본 코드가 우편번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편번호가 써 있지 않은 우편물은 우체국 직원이 수작업으로 써 넣는다.

그만큼 시간과 인력 소모가 큰 것이다.

우편번호의 의미나 규칙은 나라마다 다르다.

우리는 6자리 중 앞의 3자리를 발송지역, 뒤의 3자리를 배달지역을 구분하는 데 쓴다.

서울 광화문우체국의 우편번호 110-110을 예로 들면

맨 앞의 1은 서울, 10은 종로구를 나타내며 뒤의 110은 상세 지역과 집배순로(順路)를 의미한다.

110 우편물을 전담 배달하는 집배원을 두는 식이다.

미국은 발송지를 구분하는 5자리에 배달용 4자리를 더해 9자리 우편번호를 쓴다.

뒤의 4자리는 특정한 구역, 빌딩을 가리키는 것으로

필수 기재 사항은 아니지만 기재하면 더 정확히 배달된다는 이점이 있다.

우편번호라고 해서 숫자만 쓰는 것은 아니다.

캐나다, 영국, 네덜란드 등 9개 나라는 숫자와 문자를 같이 쓴다.

캐나다 오타와에 있는 우정공사의 우편번호가 K1A 0B1인 식이다. 영국 하원의 경우 SW1A 0AA이다.

우편물을 분류할 때 OCR카드에서 혼동을 일으킬 수 있는 6글자(D F I O Q U)는

우편번호로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도 흥미롭다.

근대 우편제도를 처음 시행한 나라는 영국이지만 우편번호는 1941년 독일에서 처음 도입했다.

이어 1959년 영국, 63년 미국이 도입했고, 우리나라는 1970년에 시행했다.

2005년 2월 현재 우편번호를 쓰는 나라는 117개국.

홍콩, 파나마, 아일랜드 같은 작은 나라를 빼면 대부분 우편번호의 중요성을 알고 있는 것이다.

우정사업자에게 한 가지 애로사항이 있다면 우편번호가 고정불변이 아니라는 점이다.

허허벌판에 빌딩이 들어서면 주소와 우편번호를 부여해야 하고,

어떤 지역이 개발되어 송달되는 우편물이 갑자기 늘어나면

집배구역을 새로 조정해야 해 번호를 바꿔야 한다.

이런 일이 보통 한 해에 4~5차례 되는데, 모두 관련법에 따라 고시하도록 돼 있다.

우정사업본부(우본)는 얼마 전

서울 은평구 진관동 은평뉴타운 상림마을 1-14단지 아파트의 우편번호를 122-720에서 122-738로

바꾸는 등 595곳의 번호를 신설·조정한다고 고시했다.

우편번호가 바뀌면 이메일로 알려달라고 등록해놓은 고객이 8만 명이다.

이들 외엔 거의 변경 사실을 모를 것이니

한동안 우편번호를 잘못 적은 우편물 때문에 집배원들은 더 고행을 하게 생겼다.

더 큰 문제는 2012년 새 주소를 시행할 때다.

현재의 우편번호는 지번체계로 돼 있어 5만 개로 커버할 수 있지만

새 주소는 도로명과 건물번호로 이뤄져 있어 30만 개는 있어야 표현할 수 있다.

새 주소체계에 맞게 우편번호를 전면 개편해야 하는 것이다.

우정사업본부(우본)이 고민하고 또 고민해야 할 문제다. 
- 이종탁 <출판국 기획위원> jtlee@kyunghyang.com

- 2009 05/12   위클리경향 824호

 

 

 


 

 

 

 (11) 오드리 헵번 우표 한 장에 1억2000만원

 

 

1억2천만원에 팔린 독일판 오드리 햅번 우표와

평범한 미국판 오드리 햅번 우표.


"편지 한 통에 숨겨진 대박.”
얼마 전 독일에서 있은 우표 경매를 보면서 드는 생각이다.
베를린 켐핀스키 호텔에서 벌어진 이 경매에서
영화배우 오드리 헵번의 사진이 실린 우표 한 장이 6만7000유로(미화 9만3800달러),
우리돈 1억2000만 원에 팔렸다.
순수 낙찰 가격은 5만3500유로이나 커미션과 세금이 붙어 1억 원을 훌쩍 넘긴 것이다.

이 금액이 우표 거래 가격으로 세계 최고기록은 아니다. 세상에는 이보다 더 비싼 우표도 꽤 있다.
하지만 그런 우표들은 거의 18~19세기 근대 우편제도가 시행된 초기에 나온 희귀품이다.
오드리 헵번 우표는 모든 시스템이 안정된 2000년 이후 나온 것이라는 데 특이점이 있다.
근래 나온 우표 중에서는 세계 최고가인 것이다.

오드리 헵번 우표는 왜 비쌀까. 그 배경을 살펴보면 흥미로운 스토리가 숨어 있다.

우표의 가치는 본디 희소성에 있다.
디자인이 예술적이라거나 오래되었다고 해서, 또는 등장인물의 몸값이 비싸다고 해서
가치가 높아지는 게 아니다.
미국 우정청에서 발행한 오드리 헵번 우표는 평범한 가격대를 벗어나지 않는다.
누구든 쉽게 손에 넣을 수 있는 우표는 귀한 대접을 받을 수 없는 것이다.
우정당국에서 공식적으로 제작한 우표지만 이런저런 일로 없어지고 몇 장 안 남아 있는 것,
수집가들은 그런 우표에 눈독을 들인다.

문제의 헵번 우표는 독일 우정당국이 2001년 유명 배우 특별기획으로 제작한 것이다.
여기에는 찰리 채플린, 마릴린 먼로, 그레타 가르보 등도 등장한다.
말썽이 난 것은 우표에 쓴 헵번의 얼굴 사진이다.
헵번이 모자를 깊숙이 눌러쓰고 긴 담뱃대를 입에 물고 있는 모습,
영화 ‘티파니에서의 아침을’에 나오는 바로 그 장면이다.

독일 우정은 이 사진을 우표에 담는 데 장애가 있을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초상권을 가진 헵번의 아들 숀 페러가 뜻밖에도 사진 사용을 허락할 수 없다고 통보해왔다.
어머니가 암으로 죽었는데 담배를 물고 있는 모습을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때는 이미 독일 재무부에서 우표 1400만 장을 인쇄해 우정당국으로 보낸 뒤였다.
우정당국은 어쩔 수 없이 문제의 우표 전량을 폐기하도록 조치했다.
그런데 그중 30장이 누군가의 주머니 속에 들어가 밖으로 유출됐다.
누구 소행인지는 지금도 알려지지 않고 있는 데,
이런 우표가 돈이 된다는 것을 알아채고 마음 먹고 빼돌린 것은 아니라는 게 정설이다.

2004년 이 우표의 존재가 세상에 알려졌을 때 보니
우표 위에 발행 당시 베를린 우체국 소인이 찍혀 있었기 때문이다.
8년만 기다리면 1억 원 이상 받을 수 있는 귀중품을 당시 600원짜리 편지 발송에 써버리고 만 셈이다.

우표를 유출한 직원은 지금 기분이 어떨까.
상부의 지침을 어긴 잘못이 있으니 선뜻 고백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입 다물고 있자니
손 안에 들어온 대박을 스스로 차버렸다는 생각에 속이 쓰려 잠이 안 올지 모르겠다.
그 때문인지 이 우표는 파는 사람이나 사는 사람 모두 철저히 익명으로 거래됐다.
특히 파는 사람이 노출되기를 꺼린다고 한다.
신문에 얼굴이 나면 헵번 우표를 붙여 편지를 보낸 친구가 나타나
“어이 그 우표 내 것이야”라며 소유권을 주장할지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라는 게 중개 전문가의 분석이다.

유출된 30장 가운데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으로 확인된 것은 5장이다.
이중 한 장은 2005년 뒤셀도르프 옥션에서 5만3000유로에 팔린 적이 있다.
나머지 25장은 어디로 갔을까. 누군가의 서랍 속에서 잠자고 있을 수도 있고,
쓰레기통에 버려져 영영 사라졌을 수도 있다.
우표의 가치를 모르면 호박이 넝쿨째 굴러들어와도 모르는 것이다.

본의 아니게 대박 우표를 만들어낸 헵번의 아들 페러는 어떤 반응일까.
그는 “우표 판 사람이 그 횡재한 돈으로
암연구나 금연캠페인 하는 데 도움을 주었으면 하는 바람밖에 없다”고 말했다고 한다.
생전에 골초였던 어머니가 1993년 암으로 사망한 것을 의식한 말이다.
- 이종탁 <출판국 기획위원>
jtlee@kyunghyang.com
- 2009 06/30   위클리경향 831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