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운현궁을 거닐다 >
서울역사박물관 최대의 컬렉션으로 자랑하는 운현궁의
기증 유물 6664건(평가액 약 85억4500만원) 가운데 150여 건과
국립중앙박물관 · 서울대박물관 등에 흩어져 있는 대원군의 애장품, 그림, 글씨 등이 전시되고 있다.
운현궁은 일제 때 국유재산으로 강제편입됐다가 1948년 대원군의 4대손 이청에게 반환됐으나,
지난 1993년 유지 관리의 어려움을 들어 후손들이 서울시에 양도한 뒤 지금은 시민에게 개방되고 있다.
박물관 쪽은 지난 2007년까지 9차례 운현궁 유물을 기증받은 바 있는데, 특별전 유물의 뼈대가 된다.
운현궁은 서울시에 매입된 뒤 9차례에 걸쳐 총 6664건의 유물을 서울시에 기증했다.
‘운현궁 컬렉션’은 서울역사박물관의 최대 · 최고 소장품이 됐다. 돈으로 환산하면 약 85억원에 이른다.
서울역사박물관은 이번 전시에서 6700여 점의 유물 가운데 명품 150여 건을 엄선했다.
또 흥선대원군의 예술세계를 보여주기 위해
국립중앙박물관, 국립진주박물관, 서울대학교박물관에 소장된 유물을 전시하며
현재 운현궁 후손들이 소장하는 유물도 함께 선보인다.
운현궁의 대표 인물인 흥선대원군 외에 그의 큰아들이자 고종의 형인 이재면(1845∼1912),
이재면의 아들인 이준용(1870∼1917), 의친왕의 아들이며 이준용의 양자인 이우(1912∼1945) 등
운현궁 인물들의 삶과 숨겨진 이야기를 보여준다.
<고종실록>의 기사를 보면 1863년 12월8일에 철종이 창덕궁 대조전에서 승하하자
중희당에서 중신회의를 열고 흥선대원군의 차남 명복(命福)을 익성군(翼成君)으로 봉작하고
수렴청정의 편전은 희정당으로 정하였고, 12월13일에는 인정문에서 고종의 즉위식이 거행된다.
이듬해(1864) 정월 7일 대원군궁에 17,830냥을 내려 신축과 보수공사를 거행하도록 호조에 하명한다.
고종 원년(1864) 6월6일에는 운현궁에 창덕궁 금위영과 접한 곳에 대문을 신설하도록
호조에 분부하게 되는데 이때 <고종실록>에 처음으로 ‘운현궁(雲峴宮)’이라는 명칭이 등장하고 있다.
연령군 신도비명(延齡君神道碑銘)
1720년, 종이, 58.9×236
문서에 쓰인 연령군(延齡君, 1699~1719)의 신도비명으로 절첩(折帖) 형태이다.
작성 시기는 1720년이며 비명은 판중추부사인 이이명(李頤命)이 지었다.
본문에 의하면 연령군은 숙종 15년(1719) 회현방 집에서 사망하여
그해 12월 금천현(衿川縣) 번당리(樊塘里)에 장사를 지냈다고 하였다.
당시 그는 21세였는데 후사가 없어서 밀풍군(密豊君) 탄(坦)의 아들로 후사를 삼았다고 한다.
공의 이름은 훤(昍)이고 자는 문숙(文叔)이며 모친은 명빈박씨(榠嬪朴氏)로 효건(孝建)의 딸이라 하였다.
5세에 모친이 돌아가셨으며, 9세 때 수찬 김동필(金東弼)의 딸과 혼인하였고,
17세가 되어서는 대궐을 나와서 거주하였다고 한다.
19세가 되어서는 종부시, 도총부, 사옹원의 별직(別職)을 맡기도 하였는데,
21세의 젊은 나이에 병을 얻어 졸하였다고 하였다.
참고로 연령군의 신도비는 1940년 그의 묘역이 예산군 덕산으로 이전한 이후로 그대로 남아 있다가
1967년 서울시 공릉동 육군사관학교로 옮겨졌으며 서울시유형문화재 43호로 지정되어 있다.
백자청화 낙천군 묘지(白磁靑畵洛川君墓誌)
도자기, 1/2)18.1×13.5×1.2 2/2)17.9×13.3×1.3
서울역사박물관 앞마당에 있는 <낙천군 묘표>
1737년(영조 13)에 제작된 연령군의 아들 낙천군(洛川君) 온(蘊)의 묘지석이다. 2장이며 청화백자이다.
묘지문은 두 장에 걸쳐 본인의 선대, 생년, 일생, 사망년도, 그리고 장례에 대하여 써 놓았다.
본문에 의하면 그의 6대조는 선조의 9남 경창군(慶昌君)이며,
부친은 채(埰)이고, 모친은 진주유씨라고 하였다. 공은 숙종 경자년(1720)에 태어났으며
장성해서는 영조의 명으로 연령군(延齡君)의 계통을 이어 양자가 되었고,
부모가 사망한 이후에는 낙천군(洛川君)으로 봉해졌다고 하였다.
을묘년(乙卯年, 1735)에 수덕대부(綬德大夫)가 되었고
정사년(丁巳年, 1737)에 서종수(徐宗秀)의 딸을 부인으로 맞아들였는데
그 해 9월에 병으로 생을 마쳤으니 당시 18세라고 하였다.
이어 윤9월을 지나서 10월 임인(壬寅, 18일)에 풍덕(豐德) 두릉곡(杜陵谷) 축좌(丑坐) 언덕에 장사지냈다.
지석의 뒷부분에는 특이하게 별도로 글자를 음각하였는데,
‘丑坐之原 臨穿壙 逢地中變 改占辛坐 葬以十月庚戌 : 축좌의 언덕에 광을 파는데, 땅 속의 변고를 만나
신좌로 고쳐서 점지하고 10월 경술(26일)에 장사하였다’고 하였다.
묘소의 광을 파던 중에 어려움에 봉착하여 묘소의 방위를 급히 바꾸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흥선군 교지(興宣君敎旨, Official Letter of Appointment)
1843년, 종이, 114×73.2
1843년(헌종 9) 흥선군이 받은 교지(敎旨)
敎旨
昰應爲昭義大夫興宣君者
道光二十三年九月 日
이하응(李昰應, 1820-1898)을 소의대부(昭義大夫, 종2품) 흥선군(興宣君)으로 피봉하는 내용의
1843년(헌종 9) 교지이다. 이후 왕족에 대한 안동김씨의 감시가 심해지자 의도적으로 불량배와 어울려,
궁도령(宮道令)이라는 비칭(卑稱)으로까지 불리며 안동김씨의 감시를 피하는 한편,
철종이 후사(後嗣)가 없이 병약해지자 조대비(趙大妃)에 접근하여
둘째 아들 명복(命福: 고종의 兒名)을 후계자로 삼을 것을 허락받았다.
이러한 생활은 1863년 철종 사후 둘째아들 재황의 고종등극 때까지 계속되었다.
*** 1845년(헌종 11) 흥선군이 받은 26세때의 교지(敎旨)
교지의 내용을 보면, 흥록대부(興祿大夫, 정1품) 흥선군에게 왕이 노비 6명과 밭 50결을 하사하고 있는데
50결은 가장 낮은 등급으로 환산한다 해도 약 16만평 정도가 된다.
敎旨
惟興祿大夫興宣君昰應卿以景陵守陵官
外居奴婢六口田五十結特賜賞卿可傳永世者
道光二十五年八月二十五 日
흥선대원군부인 민씨 교지
(興宣大院君婦人閔氏敎旨, Official Letter of Appointment)
1863년, 종이, 68.1×103.3
1863년(고종 즉위년) 흥선대원군, 흥선대원군부인 민씨 교지(敎旨)
敎旨
郡夫人 閔氏
驪興府大夫人封爵
同治二年十二月初九日
1863년 흥선군을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부인 민씨(1818~1897)를 ‘부대부인(驪興 府大夫人)’으로 작호를 주는 교지가 내려지면서
흥선군의 사저도 ‘운현궁(雲峴宮)’ 이라 불리게 되었다.
운현궁은 고종 즉위(1863년 12월 13일) 한 달 뒤 새로 증축을 시작하여
1864년 8월에 노락당과 노안당의 준공을 보았고, 6년 후 이로당이 증축되었다.
사적 제257호로 지정되어 있는 운현궁의 건물은, 고종이 태어난 노락당(老樂堂),
흥선대원군의 사랑채 노안당(老安堂), 부대부인 민씨의 공간인 안채 이로당(二老堂),
운현궁의 경비와 관리를 위한 수직사(守直舍), 이승만대통령이 심었다는 100년 된 큰 느티나무와 평상,
그리고 한창 전성기였을 때는 정문, 후문, 경근문(敬覲門), 공근문(恭覲門)의 4대문이 있었으나
현재는 후문 하나만 남아 있다.
경근문은 고종이 운현궁을 출입할 때 전용하던 문으로 창덕궁과 운현궁 사이에 있었다.
또 솟을대문이 서향을 하고 있는데 특이한 점은 지붕 끝선을 따라서 차양을 두었다는 것이다.
서쪽뿐만이 아니라 북쪽과 남쪽, 그리고 동쪽 부분도 일부 되어있는 것으로 미루어
차양 이외에 낙수를 건물에서 멀리 하는 역할도 한 것 같다.
본래 흥선군의 사저였을 때 운현궁의 위치는 창덕궁과 경복궁의 중간부근으로
지금의 운현궁과 덕성여대 자리에 해당된다. 그러나 증축하여 규모가 가장 커졌을 때는
주위 담장 길이가 수리(數理)나 되고 4개의 대문이 웅장하여 마치 궁궐처럼 엄숙하였다고 하는데,
현재의 덕성여대, 舊TBC방송국, 일본문화원, 교동초등학교, 삼환기업 일대라고 한다.
노안당 편액(老安堂扁額, Plaque of Noandang)
김정희(金正喜, 1786-1856) 글씨 집자, 19세기 후반, 종이. 나무, 73.0×225.2×3.2
운현궁의 사랑채 건물인 노안당의 편액이다.
노안당은 주로 이하응이 사용하던 건물로 ‘노안(老安)’이란 당호는
공자의 ‘노자(老者)를 안지(安之)하며’라는 글에서 인용한 것이다.
관서에는 ‘書爲石坡先生 老阮 : 석파선생에게 써서 준다, 노완(老阮)’이라고 되어 있다.
그러나 추사가 세상을 떠난 지 10여 년이 지난 후에 지어진 건물로
추사가 직접 이 현판 글씨를 써 주는 일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이는 후에 추사글씨를 집자하여 만든 현판으로 추정된다.
또한, 글씨는 목판에 직접 새긴 것이 아니라 종이를 여러 겹 붙인 두꺼운 판에
역시 여러 겹 종이를 붙여 만든 편액 글씨를 덧붙인 장지공예형식으로 제작되었다.
노안당(老安堂)은 대원군이 사랑채로 사용하던 건물이다.
그가 임오군란 당시 청에 납치되었다가 환국한 이후 민씨 척족의 세도 정치 아래에서 유배되다시피
은둔생활을 한 곳이 이 건물이고, 만년에 임종한 곳도 노안당의 큰방 뒤쪽에 있던 속방이었다.
노안당은 전형적인 한식 기와집으로 추녀 끝이 섬세하고 아름다운 것이 특징이며,
중문을 들어서면 바로 보이는 영화루(迎和樓)는 기둥만으로 이루어져
마루 밑 구조도 훤히 볼 수 있게 되어 있는 일반적인 루(樓)의 구조와는 다르다.
그 이유는 흥선대원군을 제거하려는 자객들이 숨어들거나 루 아래에 폭탄을 장치하는 일이 있게 되자
이를 방지하기 위해 할 수 없이 폐쇄한 구조이다. 강(康), 부(富)자를 새긴 꽃담을 설치하였다.
노안당 상량문(老安堂上樑文, Architectural Record of Noandang)
조두순(趙斗淳, 1796~1870) 攢, 1864년, 중국산 홍색비단, 97.3×151.5
고종 1년(1864) 노안당 상량 때 제작된 것으로 붉은색 비단에 금니로 쓰여졌으며 총 29행, 661자이다.
1994년 5월 27일 운현궁 보수공사 당시 노안당의 대들보 밑에서 발견되었다.
상량문의 내용은 운현궁이 고종의 잠저(潛邸)였던 만큼 제왕의 출생 및 생장지로서의 중요성과
형제간의 돈독한 우의로 고종이 왕위계승자로 지명된 배경, 방계가 대를 이었던 중국의 많은 사례,
그리고 길일을 택해 운현궁의 토목공사를 일으키게 된 사정과 함께 ‘노안당’이라는 당호의 설명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노안당의 당호는 공자가 '老者를 安之하며' 라고 한 글에서 인용한 것으로 되어 있다.
노락당과 노안당 증축 당시 대원군의 권세를 이처럼 상량문에서도 잘 대변하고 있다.
또, 대원군의 호칭을 ‘전하(殿下)’ 다음의 존칭어인 ‘합하(閤下)’라 칭하였으며,
지위는 모든 문무백관의 으뜸이라 적고 있어 당시 대원군의 지위를 알 수 있다.
‘아랑위포량동(兒郞偉抛粱東) 어기여차 동쪽에 들보를 올려라’로 시작되는
동서남북상하 상량시문(上樑詩文)에서는 미사여구로 고종과 이하응을 찬양하고 있다.
글은 경복궁 근정전의 상량문을 찬하기도 했던 좌의정 조두순이 지었고,
글씨를 쓴 사람은 밝혀져 있지 않으나 반듯한 정해서(正楷書)체로 쓰여진 글씨는
구양순과 유공권의 필의가 보이며 탄탄한 필력으로 쓰여 있다.
이 상량문은 발견 당시 ‘억년무강(億年无彊)’이라는 눌림쇠(진자, 鎭子)와 함께 발견되었다.
老安堂 上樑文 解題
(「雲峴宮 補修工事報告書」, 서울특별시, 1996)
상량문은 총 29행 661자, 제작일(상량일)은 高宗 1年(1864) 3월 乙丑日(24일),
즉 “崇禎紀元後四甲子聖上卽位祚元年春三月乙丑申時”이며 글을 지은이는 左議政 趙斗淳이다.
먼저 帝王의 출생 및 생장지의 중요성을 언급하고 있다.
帝王의 潛龍之宅은 하늘과 사람이 돕는 것으로 마을과 담을 잇대어 北斗의 별자리에 접하면서
남은 老人(父母)이 무궁토록 편안히 지내는 곳이라는 것이다.
운현궁 각 건물 당호에 모두 老자가 들어가 있는데 이 의미에 대한 보다 깊은 해석은
개별 건물 성격파악에도 도움을 줄 것으로 보인다.
고종이 왕위 계승자로 지명된 배경을 형제간의 우의가 돈독했던 집안내력과 대원군의 인품에서 찾아
서술하면서 이와 관련되는 중국의 고대의 고사들을 많이 인용하고 있다.
‘大院君閤下’라는 표현을 쓰고 忠敬公(麟坪大君: 인조의 3남)의 자손이며
순조가 형제를 잘 보살핀 것이 자손이 번성하는 토대가 마련되어 철종에서 직계후사가 끊어졌지만
방계가 대통을 이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요지로 하여 이와 유사한 중국 역사상의 예들을 들었다.
漢나라 河間王 故事, 宋나라 英王 고사, 漢나라 宣帝 고사 등이 그 예로서
그 고사들은 모두 황실의 방계자손으로 민간 속에 살다가 끊어진 직계황위를 이어 선정을 베푼 경우로
역사에 잘 알려지고 있는 것들이다.
그리고 趙大妃에 의해 흥선군의 제2자가 왕위계승자로 지명된 후 대원군의 지위가 높아지고,
왕의 師弟에 대한 특별한 배려도 특별히 가해지는 점, 吉日을 택해 토목공사를 일으키게 되는 사정,
그리고 새로 지은 집의 이름을 '노안당'이라고 하게 되는 근거 등을 밝히고 있다.
즉 아들이 왕이 됨으로써 숭작(崇爵)을 받고 존귀를 다하게 되어 私第를 돌보면서 表式을 헤아리게 되어
“百僚들의 列位에 세우니 등급이 저절로 확실해졌다”라고 하였다.
堂號 '老安堂' 당호는 宣尼, 즉 공자가 한 말 “老者를 安之하며” 에서 딴 말이라고 밝혔다.
이는 論語 公冶長 편에 나오는 글귀로, 아들이 임금이 된 덕택으로 공자가 말한,
좋은 집에서 나이 먹은 어른을 편안하게 하는 혜택을 입게 된 것을 自足하는 뜻으로 지은 것으로 풀이된다.
이러한 내용 뒤에 上樑賦(상량부)를 “兒郞偉(아랑위)! 抛樑(포량) - 어기여차 들보를 올려라 ”라는
앞매김소리로 시작해서 東西南北上下 6方을 노래하였다.
이 뒤에는 撰者의 기원으로 상량한 후 家國이 편안해지고
民物이 모두 번성하여 집주인이 壽福을 최대로 누리면서 政事가 잘 이루어지기를 기원하고 있다.
그리고 서술시기와 撰述者를 부언하면서 상량문은 끝을 맺고 있다.
노안당 눌림쇠(老安堂鎭子, Ritual Silver Bar) ‘억년무강(億年無疆)’
1864년, 은, 16.8×4.6, 운현궁 소장
운현궁 중수 공사 때(1994년) 노안당 상량문과 함께 발견된 눌림쇠이다.
상량하는 노안당 건물과 운현궁의 ‘억년무강(億年无彊)’을 축원하는 네 글자를 양각으로 새겼다.
글씨는 추사체 특유의 예서로 특히 ‘무(无)’자는 지금도 노안당에 걸려 있는
추사의 대흥사 ‘무량수각(无量壽閣)’ 모각 편액의 ‘无’자와 자형이 같은 것을 볼 수 있다.
추사 글씨를 집자하여 만든 노안당과 이로당(二老堂) 현판을 비롯하여 이 눌림쇠의 글씨에서도
운현궁의 주인인 이하응이 추사 글씨를 얼마나 선호하였는지를 알려주는 유물이다.
노락당 편액(老樂堂 扁額, Plaque of Norakdang)
신관호(申觀浩, 1810-1888), 19세기 후반, 나무, 60.5×202.9×3.0
운현궁 안채인 노락당(老樂堂) 당호를 쓴 편액이다.
노락당은 운현궁의 가장 중심이 되는 건물로 명성황후가 삼간택을 마친 후 왕비수업을 받았던 곳이고
고종 3년(1866) 고종과 명성황후가 가례를 치른 곳이기도 하다.
노락당의 현판 글씨는 좌참찬을 지낸 신관호(申觀浩, 1810~1888, 후에 신헌(申櫶)으로 개명)가 썼다.
신관호는 특히, 시, 서, 금석학에서 추사 김정희의 의발을 전수받은 문무를 겸비한 제자로 알려졌다.
추사가 ‘예서첩은 가르친 나보다 훨씬 나은 기쁨이 있으니 문득 내 글씨가 형편없는 것을 깨닫겠네’라고
말할 정도로 예서를 잘 썼다.
이 현판은 추사의 그러한 평을 잘 보여주는 예로 무인의 기개가 넘치는 힘찬 필치이면서도
예서 특유의 파세를 간직하고 있어, 한예(漢隸書)의 기본에 충실하게 쓴 글씨이다.
관지로는 백문방인의 ‘대사마대장군(大司馬大將軍)’, 주문방인의 ‘신관호인(申觀浩印)’이 찍혀 있다.
노락당 눌림쇠(老樂堂鎭子, Ritual Silver Bar) ‘억년무강(億年無疆)’
1864년, 은, 17.5×4.7×0.5
운현궁 중수 공사 때(1994년) 고종 원년(1894)에 제작된 노락당 상량문과 함께 발견된 눌림쇠로
직사각형 은판에 ‘억년무강(億年無疆)’의 네 글자를 양각처럼 만들어 붙여
노락당 건물이 무사하게 오래 보존되기를 기원하는 일종의 부적과 같은 성격을 지니고 있다.
상량하는 노락당 건물과 운현궁의 ‘억년무강(億年无彊)’을 축원하는 네 글자를 양각으로 새겼다.
노안당 눌림쇠와 형태가 같지만 글자크기가 조금 작다. 전체적으로 색이 변색되어 검은 빛을 띤다.
노락당 기(老樂堂記)
1864년, 나무, 61.5×204.8×4.3, 운현궁유물전시관 소장
1864년(고종 원년)에 제작하여 운현궁의 노락당에 걸어 두었던 현판이다.
내용은 당시 예조판서이던 김병학(金炳學)이 짓고, 승정원 도승지이던 박규수(朴珪壽)가 글씨를 썼다.
현판의 내용은 노락당의 건립과 이와 관련된 제반 내용을 담고 있다.
먼저 성상(聖上) 원년(元年) 갑자 9월에 대원군의 새로운 집이 조성되었는데,
건물의 경관은 당당하고 매우 웅대하였다고 하였다.
또한 성상께서는 대왕대비와 왕대비를 모시고 길일을 택하여 행차하시었고,
젊은 유생들이 운집하여 시험을 치렀으니 성대히 거행하였다고 하였다.
또한, 성상께서는 잠저에서 나와 임금이 되셨으니 이러한 것은 땅과 하늘의 영험과 징조의 결과라고
하는 등 국왕과 그 일가에 대해 칭송하면서 내용을 전개하였다.
노락당기에 ‘노락당과 하늘 사이가 한 자 다섯 치 밖에 안된다’라는 내용은
당시 운현궁으로 대표되는 대원군의 위세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잘 나타내준다.
이로당 편액(二老堂扁額, Plaque of Irodang)
김정희(金正喜, 1786-1856) 글씨 집자(集子), 19세기 후반, 나무,
63.5×198.8×3.7, 운1436
‘이로당(二老堂)’ 편액은 노안당 편액과 마찬가지로 추사의 글씨를 집자하여 모각한 것으로,
글씨를 쓴 추사 뿐 아니라 이를 세련된 조형미로 집자하여 모각한 대원군의 안목 또한 돋보이는 작품이다.
특히, ‘老’ 자와 ‘堂’자는 노안당의 글씨와 일치하여
추사의 글씨 중 같은 것을 범본으로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두인은 백문방인인 ‘솔진(率眞)’인이 찍혀 있고,
관지는 주문방인의 성명인인 ‘김정희인(金正喜印)’과 백문방인의 호인 ‘완당(阮堂)’인이 찍혀 있는데
이들 전각들은 당호의 글자처럼 각을 하지 않고 액판에 그대로 써 놓았다.
이로당(二老堂)은 노안당 및 노락당과 함께 운현궁의 대표적인 건물 중의 하나이다.
노락당이 운현궁의 중심건물로서, 잔치와 같은 큰 행사 때 주로 이용하였다면
운현궁의 별당인 이로당은 그야말로 운현궁의 안주인이 기거하던 곳으로
바깥으로 출입문을 내지 않은 폐쇄적인 口자 건물로 노락당과 복도로 연결되어
오로지 안채에서만 드나들 수 있었던 금남의 공간이다.
흥선대원군의 손자 이준용은 흥선대원군 사후 이로당(二老堂)에서 기거하다가
아버지 이재면이 세상을 뜨자 그가 살던 영로당(永老堂)으로 거처를 옮겨,
이준용은 그의 계실 광산 김씨와 영로당(永老堂)에서 살았으며,
계실 김씨는 57년간 운현궁의 안주인으로 지냈다.
그 뒤 이준용의 아들 흥영군(興永君) 이우(李鍝, 1912-1945)의 부인 박찬주(철종의 사위 박영효의 손녀)가
잠시 이로당 살림을 맡았고, 영로당(永老堂)은 광산 김문인 김승현家에 1949년 팔려 넘어갔는데,
김승현은 이승만 전대통령의 주치의였으며 낙원동에서 김승현내과를 운영하다 1993년 세상을 떴다.
이로당 마당에 있는 유물들은,
‘운하연지(雲下硯池)’ - 이로당 전면에 자리한 수조는 흥선대원군이 글씨를 쓰고 난을 칠 때
사용하는 물을 조달하기도 했으며, 비상시 방화수 저장역할도 담당했다.
‘경송비(慶松碑)’ - 이로당 동쪽 고종이 왕위에 오르기 전 즐겨 올랐다는 소나무가 있던 자리에 세워진
비이며, 후면에는 김병기가 지은 ‘경송기(慶松記)’가 새겨져 있다.
‘석물’ - 경송비(慶松碑) 근처에 있는 북모양의 석물은 아소당에 있던 사당의 상석용 석물로,
흥선대원군은 아소당을 자신의 사후 묘자리와 사당으로 지으면서 다양한 석물을 마련하였는데,
지금도 그때 함께 사용했던 석물들이 몇 군데 남아 있다.
‘무승대(茂承臺)’ - 후원으로 나가는 낙양문을 지나, 흥선대원군이 좋아하던 蘭을 올려놓던 곳
*** 운현궁 양관(洋館)
현재 운현궁 뒤쪽에 있는 양관(洋館)은 본래 흥선대원군의 손자인 이준용의 거처였던 곳이다.
본래의 집은 이준용의 호 송정(松亭)을 본떠 ‘송정(松亭)’사랑이라 불렸지만
일제에 의해 헐리고 지금의 양관(洋館)이 건립되었다.
일제는 이준용을 감시하기 위해 이곳에 순사 40여 명을 주둔시켰다고 한다.
양관(洋館)은 1907-1911년 사이로 추정되지만 확실한 기록이 없어 정확하지 않다.
건축구조는 석재와 목재를 혼용한 2층 벽돌 건물로 전체구성은
좌우대칭의 프렌치 르네상스양식으로 지어졌다. 1층 정면 현관에는 포치(Porch)가 있으며
중앙 아치(Arch)를 붙임기둥으로 마감하였고, 2층 기둥의 주두(柱頭)는 이오니아식이다.
지붕은 피라미드형 지붕 2개와 넓고 큰 중앙의 돔(dome)으로 하고, 그 위에 철제로 장식하였다.
건물내부 바닥은 목조로 마감하였으며 방마다 벽난로를 설치하였다.
양관(洋館)은 한때 운현궁 사람들이 사용하였으나 1946년 8월 덕성여대로 소유권이 넘어가
그 후 덕성여대 본관으로 사용되었다. 현재는 법인사무국으로 사용되고 있다.
석파산장 편액(石坡山莊扁額, Plaque of Seokpasangjang)
(Tablet, Seokpasangjang)
고종(高宗, 1852-1919), 1864년, 나무, 55.9×205.9×2.8
서울시 종로구 부암동 인왕산 자락에 위치한 이하응의 별장인 석파정에 걸었던 현판이다.
석파정은 원래 ‘삼계동정사’라 불린, 안동김씨 세도가 김흥근(金興根, 1796-1870)의 별장이었다가
후에 이하응의 소유가 되었다.
서울 성곽 북서쪽의 수려한 경관을 배경으로
현재에도 안태각(安泰閣), 망원정(望遠亭), 유수성중관풍루(流水聲中觀風樓) 등의 건물이 남아있다.
‘갑자중춘경서이게록동지실(甲子仲春敬書以揭鹿洞之室)’이라고 관서되어 있어
1864년(고종 1)에 13살이던 고종이 아버지인 이하응을 위해 쓴 것임을 알 수 있다.
큰 글씨는 구양순체 필의가 물씬 풍기는 건실한 필획으로 썼고,
낙관 글씨에는 아직 어린 나이의 천진함이 묻어 있다.
파란색 안료를 칠한 바탕에 양각을 한 글자에는 금니를 칠했다.
아소당 기(我笑堂記, Plaque Recording Construction of Asodang)(Tablet,Asodanggi)
신응조(申應朝, 1804-1899) 기(記), 1888년, 나무, 41.0×122.7×2.7
서울시 마포구 공덕동 동도공업고등학교 운동장자리에 있던 이하응의 별장인 아소당(我笑堂)에 걸었던
현판으로 아소당을 짓게 된 동기와 규모, 위치 등에 대하여 적고 있다.
아소당(我笑堂)은 아소정(我笑亭)이라고도 불리는데, 이곳은 당시 매우 산세가 수려한 명당자리로서
이하응이 일찍이 본인의 묘자리로 쓰고자 별장 옆에 가묘를 만들어 놓기도 한 곳이다.
그리고 뜻대로 사후, 이곳에 묻혔다. 아소당 건물은 6 ․ 25 이후 봉원사(奉元寺)로 이전되어
현재 큰방으로 사용되고 있다. 아소정(我笑亭)은 1962년 10월 13일 철거되었고,
지금의 공덕동로터리에 아소정터를 함부로 출입하지 말 것을 경고하는 공덕리금표(孔德里禁標)가 있었다.
흥선대원군은 자신의 가묘 옆에 아소당을 짓고 나서
신응조(申應朝, 1804-1899)에게 아소당기를 쓰도록 하였다.
첫 단락은 중국의 성인들이 웃음에 관해 한 말을 인용하였고,
두 번째 단락에서는 아소당을 짓게 된 동기와 규모 및 위치 등을 적었다.
‘喜而樂樂而笑 樂者喜之廣而笑則其發也… 기쁘면 즐거워지고 즐거우면 웃는다.
즐거움이란 기쁨이 확대된 것이며 웃음이란 그것이 외부로 나타난 것이다.’라고 시작되는 이 기문에는
‘무릇 당(堂)에서 만나는 자 중 누가 나의 웃는 뜻을 알 자가 있겠는가’라고 하여
‘아소당’이라 이름 지은 뜻을 호기 있게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하응은 이런 패기만만한 의미와는 사뭇 다른,
또 다른 ‘아소당시(我笑堂詩)’를 남겨놓고 있어 주목된다.
그 내용은 ‘지난일 생각하면 모두 다 꿈인 것이, 어쩌다 남은 생애 세상 물정 따를거나…
이 내 인생 백년간에 무슨 일을 어떻게 하나. 전생도 이생도 내 스스로 웃을 일이네.’라고 되어 있는데
이는 아마도 이하응이 1894년 제3차 집권에 실패한 후 이곳 아소당에 유폐되다시피 했을 때
그 심경을 담은 시로 추정된다.
吾負吾身任不輕 내가 내 몸 저바리니 책임 스스로 중한 것이
退公閒日酒樽傾 벼슬 물러나 나날을 한가히 술잔 기울이네.
從知往事皆吾夢 지나간 일 생각하면 모두 다 꿈인 것이
惟愧餘年任世情 어쩌다 남은 생애 세상 물정 따를거나
履극山村俚談好 산촌에 앉아 있으니 속된 말도 좋은 것이
聞蟬溪柳古詩成 시냇가 버드나무, 매미소리 들으며 詩 짓는다네.
世論百歲安排地 이 내 인생 백년간에 무슨 일을 어떻게 하나
我笑前生又此生 전생도 이생도 내 스스로 웃을 일이네.
*** 아소당(我笑堂)
실각한 흥선대원군이 물러나 한을 달래던 ‘아소정(我笑亭)’은 한강가 삼개(麻浦)의 공덕리에 있었으나
지금은 白凡路(백범로)변에 위치한 동도중 ․ 공고의 운동장이 되어버려 그 흔적조차 찾을 수 없다.
갑오개혁 뒤 대원군의 문인들이 동학당을 사주, 서울에 진주시키고
대원군의 손자인 이준용(李埈鎔)이 거느린 친영병으로 하여금 왕궁을 습격,
군주와 세자를 시해하고 김홍집을 비롯한 각료를 살해한 뒤 이준용을 임금으로 받든다는 음모설로
일대 옥사가 일어났다. 결국 이준용이 의금부에 갇히자 대원군은 "손자와 같이 옥에 갇히겠다"고
여러 차례 의금부에 들어가려 시도했으나 끝내 들어가지 못하자
의금부의 정면에 있는 과실전 도가를 숙소로 정하고 버티었다.
이 사건은 5명에게 사형, 10명에게 종신형이 내려졌고
이준용은 고종의 육친이라는 이유로 강화 교동섬으로 종신유배형을 받았다.
이때 대원군도 공덕리에 있는 별장 아소정에 연금을 당하는 신세가 되었다.
고종 32년(1895) 10월 8일 새벽, 일본공사 미우라(三浦梧樓)는 수비대를 보내
공덕동 아소정에 칩거하던 흥선군을 호위하고 서대문으로 향했다.
명성황후 시해의 명분을 세우기 위해서는 대원군을 앞에 내세우지 않으면 안되었기 때문이었다.
이 음모가 제시되었을 때 대원군은 “나는 이미 늙어 근기가 없다. 이대로 죽어 가는 것을 내 운명으로
알고 체념하고 있다."말했다. 당시 아소정을 나올 때의 광경을 그의 문인이 회고해 놓은 것을 보면
“한 소동이 갓을 씌우고 두루마기를 입히는데 당황해서 두루마기를 거꾸로 대주는 바람에
소매가 들어가지 않자 대원군은 쓴웃음(辛笑)을 지으며
‘너 역시 천하의 변천을 아는가. 어찌 너마저 거꾸로 나를 입히려 하느냐'고 했다" 한다.
흥선대원군 장례식 사진 첫 발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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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제26대 군주 고종의 생부인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장례식 장면을 담은 사진이 발굴됐다.
그의 장례식 관련 사진이 발견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청계천문화관 김영관 관장은 마이니치신문사에서 1978년 발간한 <일본식민지사 1, 조선(朝鮮)>이란 책자 67쪽에 이 사진이 수록돼 있음을 확인했다고 6일 밝혔다.
이 사진은 운현궁으로 여겨지는 건물을 중심으로 수많은 조문객들이 몰린 장면을 찍은 것으로 보인다. 사진 아래에는 <대원군의 장의(葬儀). 이조(李朝) 제26대 고종의 생부. 만년의 실의(失意)의 사람이었다. 메이지(明治) 32년(1899) 사거(死去)>라는 설명이 붙어 있다.
하지만 대원군은 1898년 2월22일(음력 2월2일) 79세로 사망했고,
발인은 그 해 5월15일(음력 윤 3월25일)이었으므로
그의 사거(死去) 시점을 1899년으로 표기한 것은 오류다.
김 관장은 “이 사진이 정확히 언제 촬영된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운현궁에 그의 빈소가 마련되고 발인하기까지 어느 시점이었던 것은 분명하다.”고 말했다.
대한제국시대사를 전공한 서울역사박물관 연갑수 학예부장은 “이 사진은 처음 본다."고 말했다. 또 이민원 동아역사연구소장은 “대원군 장례식 장면을 담은 사진 자체가 지금까지 알려진 바가 전혀 없다”고 밝혔다.
대원군은 고종 35년(광무 2) 2월에 지금의 서울 마포구 공덕동에 있던 운현궁 별장 아소당에서
사망했고, 그의 빈소는 운현궁에 마련됐다가 그해 5월에 공덕동에 묻혔다.
이후 그의 무덤은 파주로 갔다가 다시 마석으로 옮겨져 지금에 이른다.
- 서동철 문화전문기자 dcsuh@seoul.co.kr, 서울신문
- taeshik@yna.co.kr (c)연합뉴스.
- 2008-07-0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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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원천봉등록(興園遷奉謄錄)
1908년, 종이(紙), 31.1×19.8×1.8
흥원(興園 : 흥선대원군의 무덤)의 천봉
(1)1898년 - 경기도 고양군 공덕리(아소당 뒤뜰)
(2)1908년 - 경기도 파주 운천면 대덕동
(3)1966년 -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창현리(현재)
흥선대원군 이하응과 부인 여흥부대부인 민씨의 원소인 ‘흥원(興園)’의 천봉(遷奉)에 대한 기록이다.
흥선대원군은 광무 2년(1898) 2월22일 경기도 고양군 공덕리(현 서울 마포구 공덕4동)의
운현궁 별장 ‘아소당’에서 세상을 떠났는데, 그대로 ‘아소당’ 뒤뜰에 묻혔다.
1908년[융희 원년(1907) 12월 26일(양, 1908년 1월 29일)]에
이하응이 흥선대원군에서 흥선대원왕(興宣大院王)으로 추봉(追封), 시호는 헌의(獻懿)로 승격되면서
무덤을 아소당 뒤뜰에서 경기도 파주 운천면 대덕동(현 경기도 파주군 문산읍 운천리)
옛 장릉(인조와 인렬왕비릉)터로 옮기고 명칭도 ‘흥원(興園)’으로 변경되었다.
본래 장릉은 1636년(인조 14) 4월 인렬왕후를 장사지내면서 조성되어
그 이후 1649년 인조가 승하하자 그곳에 함께 장사지냈는데,
1731년(영조 7) 장릉에 뱀이 무리를 지으니 옮겨야 하겠다는 주장에 따라
현재의 장릉자리인 파주 탄현면 갈현리로 천봉하여 비어있었던 것이다.
첫 번째 천봉(遷奉 : 왕실의 묘를 이장하는 일)이었다.
<흥원천봉등록(興園遷奉謄錄)>은 흥원을 경기도 파주로 천봉할 당시의 기록을 옮겨 적은 책이다.
여기에는 당시 국가차원에서 시행한 ‘흥원’의 천봉에 소용되었던 각종 문서들,
국왕에게 상주해 결재를 마친 문서인 주본(奏本)을 비롯해
보고(報告), 조회(照會), 통첩(通牒), 청구서(請求書) 등 사용 물품과 금전 등의 물력(物力)을 기재했다.
천봉에 소요된 비용은 구원(舊園)을 헐고 벽실을 봉출한 비용 68환31전 등
총 3만2천51환41전6리로 기록돼 있다.
등록의 마지막 부분에는 헌의대원왕원지(獻懿大院王園誌)와 순목대원비원지(純穆大院妃園誌),
신도비명(神道碑銘), 상량문(上樑文)이 기재돼 있다.
이를 통해 천봉은 1907년 11월 10일에 시작해 1908년 2월 1일에 마쳤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융희 연간(순종 재위)에 사용된 관문서와 당시의 용어와
당대의 국가적 차원에서 시행된 천봉의 규모를 파악할 수 있다는 점에서도 귀중한 자료이다.
그런데, ‘흥원’은 1966년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창현리 지금의 자리로 또 한번 옮긴다.
흥원 일대에 미군 군사시설이 들어섰기 때문이다.
흥원 신도비명첩(興園神道碑銘帖)
Robbed Copy Album of Heungseondaewongun's Epitaph
김학진(金鶴鎭, 1838~?) 찬(撰), 이재극(李載克, 1864~?) 서(書)
1908년, 종이 탁본첩장, 39.3×24.9×1.8
원소(園所)인 흥원의 신도비를 탁본한 첩이다.
흥선대원군 이하응은 1898년 사후, 고양군 공덕리(현 서울 마포구 공덕동)에 처음 묻혔다.
그러나 순종이 즉위한 후에 흥선대원군을 헌의대원왕(獻懿大院王)으로 추봉하고
묘를 경기도 파주군 운천면 대덕동(현 파주시 문산읍 운천리)으로 천장하면서
묘의 호칭을 흥원(興園)으로 하였다.
이 신도비첩은 이때 새로 세운 신도비의 탁본첩이다.
신도비는 이후 다시 한 번 더, 자리를 옮겨
현재 남양주시 화도읍 창현리에 있으며 경기도 기념물 제48호로 지정되어 있다.
고종의 명으로 규장각 대제학 김학진(金鶴鎭, 1838~?)이 찬한 비문의 내용은
시호가 내려진 사실과 가계, 그리고 흥선대원군에 봉해진 후의 치적, 서화에 대한 재능 등
이하응의 일생을 적고 있다.
글씨는 표훈원 총재 이재극(李載克, 1864~?)이 전액과 비문을 모두 썼다.
전액(篆額) ‘대한헌의대원왕신도비명(大韓獻懿大院王興園神道碑銘)’ 13자를 1엽에 2행 2자씩 오려서
첩을 만들었다. 전액은 자로 잰 듯 좌우대칭이 정확하여 오히려 도식화된 느낌이다.
비면의 글씨는 비석의 글씨로는 비교적 큰 해서로 썼는데 안진경체 필의로 썼다.
대원왕대원비침각상량문(大院王大院妃寢閣上樑文)
Writing of Completing a Framework ofDaewonwang Daewonbi Chimgak
남정철(南廷哲, 1840~1916) 찬(撰), 조한국(趙漢國, 1865~?) 書, 1908년, 종이 25.4×83.4
흥선대원군 이하응과 여흥부대부인 민씨의 첫 번째 원소였던 서울 마포구 공덕동의 원소(園所)를
1908년에 경기도 파주군 운천면 대덕동으로 천봉(遷奉)하면서 세운 침각(寢閣)의 상량문(上樑文)이다.
내용은 대원왕과 대원왕비의 덕을 칭송하고 파주의 묘지가 명당자리임을 고하고 있으며
마지막으로 7언 24구의 시(詩)인 상량가를 붙였다.
글은 종1품 숭정대부 남정철(南廷哲)이 지었고,
글씨는 정2품 자헌대부 규장각제학 조한국(趙漢國)이 썼다.
추봉책봉의궤(追封冊封儀軌 Chubong Chaegbong Uigwe)
1907년, 종이, 45×31.5×2.4
흥선대원군 이하응과 여흥부대부인 민씨,
그리고 고종의 아들인 완화군과 그의 부인 연원군 부안김씨를
융희 원년(1907년) 8월에 왕과 왕비로 추봉한 전말을 기록한 의궤이다.
의궤는 조선시대 왕실이나 국가에 큰 행사가 있을 때 후세에 참고하기 위해
그 일의 전말과 경과, 소요된 재용, 인원, 의식절차, 행사 후의 논상 등을 기록하였다.
앞부분에는 추봉책봉을 위한 내역 일체가 기록되어 있으며,
뒷부분에는 행사의 전 과정을 보여주는 반차도(班次圖)와 각종 물품의 모습을 그린 도설(圖說)이
수록되어 있어 당시의 복제, 장구, 의물 등 제도 및 풍속적 자료들을 알려준다.
외부는 녹색의 비단과 화려한 장식으로 장정하여 견고함과 화려함을 주었다.
반차도와 도설의 그림은 모두 목판으로 찍은 후 색만 따로 칠하였다.
** 흥원(興園) 출토 유물
경기도 파주시 운천면에 있던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무덤인 흥원(興園)을
1966년 남양주시 화도읍으로 천봉(遷奉)할 당시 출토되었다.
회중시계를 비롯하여 은제 합과 신선로, 은제젓가락 등의 은공예품이 포함되어 있다.
이 중에는 이화문(李花紋)에 원권(圓圈)을 두른 운현궁 문양이 뚜렷하게 남아있는 예가 있으며,
대한제국 때 왕실기물의 제작을 담당했던 이왕직미술품제작소(李王職美術品製作所, 1911~1922)의
작품임을 알려주는 美라는 명문을 가진 유물이 있어 주목된다.
특히 이왕직미술품제작소에서 만든 유물은 흥선대원군이 세상을 떠난 1898년 이후에 제작된 것으로
이는 1908년 흥선대원군의 공덕리원소(孔德里園所, 현재 서울특별시 마포구 공덕동 일대)를
파주로 천봉할 당시 새로 만들어 넣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은제 합(銀製盒, Bowl)
20세기, 은, 7.9×4.2×1.9
흥원에서 출토된 은제합이다. 형태는 장방형이고, 뚜껑은 밀어서 여닫는 형식이다.
뚜껑의 중앙에는 운현궁 문양을 정교하게 양각하였는데,
꽃잎의 입체감이 나타나도록 양감을 살리고 꽃술을 정교하게 조각하였다.
또한 뚜껑의 한쪽 끝에는 여닫기 편하도록 약 0.6cm 정도의 턱을 만들었다.
몸체는 별다른 장식이 없고, 측면 내부에 뚜껑을 받치기 위한 턱을 만들었을 뿐이다.
바닥에는 SILVER 950이라는 명문이 있다.
은제 합(銀製 盒, Bowl)
20세기, 은, 전체높이 4.7 입지름 7.3 바닥지름 5.5 뚜껑지름 5.9
흥원에서 출토된 은제합으로 몸체와 뚜껑이 분리된다. 몸체에 둥근 전이 달려 형태가 솥과 유사하다.
바닥에는 '美'자가 각인된 명문이 있어 이왕직미술품제작소에서 제작된 것임을 알려준다.
뚜껑에는 이화문이 음각되어 있으며 중앙에는 버섯모양의 꼭지가 달려 있다.
외곽에는 아래로 꺾인 전을 만들어 몸체의 구연부를 덮도록 만들었다.
은제 신선로(銀製神仙爐, Royal Hot Pot)
20세기, 은, 높이 3.8 입지름 4.2 바닥지름 2.2 몸통지름 4.7
흥원에서 출토된 은제 신선로이다. 실제 사용하는 신선로의 형태를 그대로 옮겨 놓았다.
몸체의 양쪽에 박쥐모양의 손잡이가 달려 있는데 현재는 하나가 결실되었다.
기면에는 북과 해금으로 보이는 악기가 조각되어 있다.
굽은 아래로 퍼지는 형태로 숯을 넣기 위한 구름모양의 구멍이 뚫려 있다.
또한 바닥에는 '순은'이라는 한글명문이 새겨져 있다.
뚜껑은 가운데 구멍을 중심으로 태평소와 해금으로 생각되는 악기가 조각되어 있고,
양 옆으로 박쥐모양의 장식을 만들어 놓았다.
은제 저(銀製箸, Chopsticks)
20세기, 은, 길이 10.8 최대길이 20.7
흥원에서 출토된 은제젓가락이다.
젓가락의 일부가 윗부분에 들어가도록 만들어 휴대용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젓가락의 상단에 운현궁 문양이 음각되어 있다.
은제 주전자(銀製酒煎子, Kettle)
20세기, 은, 전체높이 6.6 지름 4.1 높이 3.7 뚜껑높이 2.0 뚜껑지름 2.5
흥원에서 출토된 소형 은제주전자이다.
작은 크기임에도 불구하고 구성이 치밀하고 정교하게 만들어졌다.
몸체의 한 쪽 중앙에는 두 송이의 꽃과 잎이 시문되었고, 바닥에는 순은이라는 한글명문이 각인되어 있다.
뚜껑은 꽃문양을 가득 채우고 중앙에 초록색 구슬로 장식하였다.
시계(時計, Watch)
20세기, 금속, 유리, 전체길이 6.8 몸통지름 5.7 두께 1.9
둥근 형태의 휴대용 시계이다. 현재 시침과 분침이 남아있다.
앞면에는 로마자로 표시된 시계문자판을 배치하고 주변에는 금속으로 만든 테두리로 장식하였다.
아래에는 원형 안에 아라비아숫자로 60까지 표시된 부분이 있어 원래 초침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뒷면에는 뚜껑처럼 열리게 만들어 부속의 조정이나 수리를 할 수 있도록 하였는데,
내부는 유리를 끼워 부속품을 보호하고 있다.
시계의 위쪽에는 둥근 금속이 남아있는데, 가운데 구멍이 있어 시곗줄을 연결하던 것으로 보인다.
만경 병정둔 양안(萬頃丙丁屯量案, Land Register of Mangyeong)
조선(1853년), 종이紙, 55.0×32.7
만경(萬頃, 전라북도 김제 일대의 옛 이름)지역 병(丙), 정(丁)토지에 대한 조세 부과를 목적으로
전지(田地)를 측량하여 만든 토지대장이다.
양안(量案)은 농민층의 토지대장으로 전안(田案), 전적(田籍)이라고도 한다.
논밭의 소재 ․ 위치 ․ 등급 ․ 형상 ․ 면적 ․ 자호 등을 적어둔 책으로서
농민들의 경작 면적 ․ 소득 관계 등을 추정할 수 있는 유익한 자료이다.
객관적이고 구체적인 수치가 기재되어 있기 때문에 조선시대 경제사 자료로서 중요한 가치가 있다.
조선시대에는 20년에 한 번씩 전국적인 규모의 양전(量田)을 실시하고,
이를 토대로 양안(量案)을 작성하여 호조 및 해당 도 ․ 읍에서 보관하도록 하였다.
이 양안은 고종 1년(1864)에 김제, 만경, 전주, 익산에 있는 둔전(屯田)의 조세 가운데 일부를 제외하고
모두 운현궁에 바치라는 명(고종실록 권1)이 내려진 사실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준용 봉군 칙지(李埈鎔封君勅旨)
1907년, 종이(紙), 32.8×46
1907년에 순종이 내린 칙지(勅旨)로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손자인 이준용(李埈鎔, 1870-1917)을 종1품 숭정대부로 올린 후,
영선군(永宣君)으로 봉한다는 내용이다. 서체는 행서이며 주문방인이 찍혀있다.
금책(金冊)
- 완흥군 희(完興君 熹)
1910년, 금속, (1)21.6×10.1×0.6 (2)21.6×10.1×0.6
- 흥친왕비 홍씨(興親王妃 洪氏) / 흥친왕비 이씨(興親王妃 李氏)
흥친왕비 홍씨 - 1910년, 금속, (1)21.6×10.1×0.6 (2)21.6×10.1×0.6
흥친왕비 이씨 - 1910년, 금속, (1)21.6×10.1×0.6 (2)21.6×10.1×0.6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장남인 완흥군(完興君) 이재면(1845-1912)을
흥친왕(興親王)에 봉한다는 내용의 금책(金冊)이다.
완흥군 이재면의 전처(前妻)인 홍씨(洪氏)와 부인 이씨(李氏)를
흥친왕비(興親王妃)에 봉한다는 내용의 금책이다.
홍색의 운보문단(雲寶紋緞)으로 금책의 앞 ․ 뒷면을 장식하고 가장자리에는 간략한 선으로 용문을 새겼다.
내부의 글씨는 음각했으며 붉은색 안료를 채웠다.
○ 금책(金冊) : 1910년 7월 24일(음력), 8월 28일(양력)
維隆熙四年歲次庚戌七月壬寅朔 二十四日乙丑
皇帝命掌禮院卿成岐運, 封伯父完興君熹爲興親王
曰 嗚呼 惟王屬尊望 隆爲宗室範
體國忠貞 夙夜匪懈
朕篤不忘 若稽舊章 擇吉日良辰
備物典冊 錫之崇爵
王其益懋 乃德祗愼 厥服與國咸休 垂于無窮欽哉
융희 4년 경술 7월 임인 초하루, 24일 을축에
황제는 장례원경 성기운에게 명하여 백부 완흥군 희(熹)를 흥친왕으로 삼노라.
이르시길 오호라 왕께서는 존망을 품어서 크게 종실의 모범이 되시며
국가에 충정하고 밤낮으로 애쓰시니,
짐은 잊지 않고 옛 규범을 따라 길일을 택하여
좋은 물건과 전책을 갖추어 귀한 작위를 준다.
왕 노릇에 더욱 힘쓰고 덕스럽게 삼가고,
福德을 국가와 더불어 아름답게 하고 다함이 없이 공경하라.
** 이준용묘 출토 유물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창현리에 위치한 이준용의 묘에서 출토된 유물로 2005년 이장 중 발견되었다.
한성미술품제작소와 이왕직미술품제작소에서 제작된 은공예품을 비롯하여
옥로와 인장, 서양식파이프 등의 옥공예품과 벼루와 먹 등의 문방구류, 안경과 시계 등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이르는 다양한 유물이 포함되어 있다.
당시 공예품의 제작경향과 시대상을 반영하고 있는 유물로 근대 공예사 연구의 귀중한 자료이다.
이준용 호패(李埈鎔號牌) An identity tag
19세기, 골각패갑, 8.8×2.2×1.1
이준용 묘에서 출토된 것으로 서각(犀角)으로 만든 호패이다.
앞면 상단에는 ‘이준용(李埈鎔)’, 하단 좌우에는 각각 ‘병술대과(丙戌大科)’와 ‘경오생(庚午生)’을 새겨 넣어
성명과 문과합격연도, 출생년도의 간지를 명기하고,
뒷면 상단에는 호패를 제작한 해의 간지인 ‘병술(丙戌)’을 새겨 넣었다.
선각글씨에는 내용이 눈에 잘 띄도록 붉은색 안료를 채워 넣었다.
옥로(玉鷺)
19세기 말~1917년, 옥, 높이 6.3
이준용묘에서 출토된 옥로는 고위 관리들이나 외국에 가는 사신들이 갓머리에 달았던 장식품이다.
백옥으로 만들었으며 연잎에 둘러싸인 5마리의 백로를 조각되어 있다.
받침은 청동으로 별도 제작하여 부착하였으며 끈을 끼웠던 6개의 구멍이 있다.
금반지(金斑指, Gold Ring)
19세기 말~1917년, 금, 지름 2.4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마석에 있는 이준용(李埈鎔)의 묘에서 출토된 금반지이다.
반지의 중앙에는 지름 1.3cm가량의 타원형 장식을 만들고 ‘極’자를 새겨 넣었다.
이는 이준용의 자(子)인 ‘경극(景極)’에서 따온 것으로 중앙장식의 옆에는 4조의 음각선을 새겨놓았다.
‘한미’명 이화형 잔대(‘漢美’銘 李花形盞臺)
1908년~1910년, 은, 높이 1.5 지름 9.4 굽지름 3.1 굽높이 0.6
이준용묘에서 출토된 은제 잔받침이다. 기형자체가 대한제국 황실문장인 이화문의 형태를 따르고 있다.
꽃잎은 5개로 이루어져 있으며 각 꽃잎마다 3개의 꽃술이 조각되어 있다.
꽃술과 꽃술대는 크게 과장되었으며, 꽃술의 중간부터는 수(壽)字문을 음각하였다.
또한 가운데를 움푹 들어가게 성형하여 잔이 움직이지 않도록 고정하는 역할을 하는 동시에
굽의 역할을 하도록 만들었다.
외저면(外低面)의 명문은 ‘한미(漢美)’로 스탬핑(stamping)기법을 사용하였다.
‘한미’라는 명문은 한성미술품제작소를 뜻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제작 시기는 한성미술품제작소시기인 1908년에서 1910년 사이로 추정된다.
‘한미’명 이화문 잔(‘漢美’銘李花紋盞)
1908년~1910년, 은, 높이 2.1 입지름 6.0 굽지름 2.6 굽높이 0.4
이준용묘에서 출토된 소형 잔이다. 잔의 내저면에는 이화문이 새겨져있는데,
5개의 꽃잎과 각 꽃잎마다 3개의 꽃술을 가진 전형적인 형태로
광내기에 차이를 두어 다른 부분보다 더 빛이 나도록 하여 문양을 강조하였다.
또한 외저면에는 ‘漢美’라는 명문이 있어
1908년에서 1910년까지 있었던 한성미술품제작소에서 제작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옥연적(玉硯滴) A Chinese ink water container
19세기 말~1917년, 옥, 높이 6.3
이준용묘에서 출토된 연적이다. 옥으로 만들었으며 꽃봉오리와 크고 작은 잎이 가득 조각되어 있다.
잎의 잎맥까지 음각하여 작지만 세밀하게 제작되었다. 청동으로 만든 수저와 세트로 구성되어있다.
이화문 라이터(李花紋) Lighter
1908년~1917년, 은, 4.8×3.6×1.1
이준용묘에서 출토된 은제 라이터이다. 라이터의 겉면에는 이화문이 새겨져 있다.
옥상당명담배합(玉賞堂銘煙草盒) Tobacco Case
1900년~1917년, 은, 9×7.5×1.95
이준용묘에서 출토된 휴대용 담배합이다. 중간부분을 둥글게 들어가게 만들어 잡기 편리하게 만들었고
몸체와 뚜껑 2단으로 구성되었는데, 서로 엇갈리게 만든 3개 씩의 긴 경첩을 맞물려 고정하였다.
내부에는 담배가 쏟아지지 않도록 고무밴드를 부착하였다.
뚜껑에는 전통적인 도안과 서양식 도안이 절충되어 나타난 문양이 있다.
뚜껑 전체에 빈틈없이 조각된 C자형 식물문은 1
890년대부터 1910년대까지 유럽과 미국에서 유행한 아르누보(Art Nouveau)양식을 도입한
일본 명치도안(明治圖案)과 연관지을 수 있다. 이는 당시 이왕직미술품제작소와 한성미술품제작소 등에서
명치도안을 수용했던 사실을 알려주는 예라고 생각된다.
담배합 좌측 하단의 전통적인 3단 구도의 산수문(山水紋)과 상단의 화조문(花鳥紋)은
서양식 문양과 조화를 이룬 새로운 양식을 창출해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담배합 하단 잠금장치 안쪽에 제작소나 상점으로 생각되는 ‘옥상당(玉賞堂)’이라는 명문이 있다.
미명이화문합(美銘花紋盒) Bowl
1911년~1917년, 은, 5.9×5.9×2.6
이준용묘에서 출토된 은제 합이다.
뚜껑에 이화문이 있어 이왕직미술품제작소에서 만든 것임을 알 수 있다.
제작방법은 은판으로 밑판과 테두리를 만들어 결합하였다.
뚜껑의 가운데를 살짝 부풀리고 이화문을 새겨 넣었다.
이화문은 5개의 꽃잎과 3개씩의 꽃술을 가진 전형적인 형태이다.
뚜껑 내부에 원형으로 뚫린 은판을 부착하였는데 내용물이 움직이지 않도록 고안된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뚜껑이 있는 작은 병 등에 액체나 고체상태의 내용물을 넣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왕직미술품 제작소 마크인 ‘미美’ 라는 명문이 있고
이준용의 사망 시기를 고려해 볼 때 제작연대는 대략 1911년에서 1917년 사이로 추정된다.
운현궁(雲峴宮) - 고매한 과학적 건축미
지나가는 완연한 가을날에 서울 도심 속 조용하고 담담하게 자리한 운현궁(雲峴宮)으로 향한다.
경복궁에서 약 20분이면 갈 수 있고 창덕궁에서 도보10분 거리에 위치한 운현궁(雲峴宮).
경건한 마음을 갖고 어떠한 모습으로 마주할 지 호기심 어린 질문을 품으며 걸음을 재촉한다.
많은 문화유적지 중에서 운현궁(雲峴宮)을 선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서울의 중심에서 큰 규모를 자랑하는 4대 궁궐과 비견 될 만큼
한 켠에서 소리 없이 자신의 모습을 알리는 곳. 그곳이 바로 운현궁(雲峴宮)이다.
개인적으로 한국의 목조문화재를 대변하는 한옥의 묘미는 자연과 어울려
조용한 운치와 함께 고매하면서도 과학적인 건축미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한 점에서 운현궁은 조선의 옛 정취와 함께 구축적이고 복합적인 한옥의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유적지라고 판단했다.
운현궁(雲峴宮)은 조선후기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석파 이하응 (李昰應 1820~1898) 즉, 흥선대원군의 저택으로 조선의 임금인 고종(高宗 1852~1919)이 유년시절을 보낸
역사적으로 의미있는 곳이다.
근처의 고개이름 혹은 관현의 이름을 따서
지금까지 운현궁으로 불려지게 되었다고 하며
자연스레 운현궁(雲峴宮)은 역사의 중심무대로 파란만장한 역사가 펼쳐진 곳이다.
입구를 들어서는 순간, 맑은 푸른빛 하늘 아래
고고하게 자리한 운현궁(雲峴宮)이 한눈에 들어오며 전체적으로 고풍적인 왕실의 분위기에 매료된다.
분위기에 취해 첫 건물지인 노안당으로 출발한다.
노안당은 운현궁의 사랑채로, 흥선대원군이 거처하던 곳이었다.
그 전에 노안당으로 들어가기에 앞서 솟을대문을 지난다.
솟을대문은 문의 종류로 문이 설치되는 행랑채나 벽보다 대문의 높이를 더 높게 한 건축양식이다.
평대문이 아닌 솟을대문을 세운 이유는 지체 높은 왕실집안이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쉽사리 출입하는 곳이 아님을 각인한 뒤 노안당과 마주한다.
순간적으로 ‘아!’하고 탄성과 함께 그 위용에 저절로 감탄사가 나온다.
저 하늘까지 닿으려는 팔작지붕의 기세가 느껴지는가.
조용하면서도 웅장한 무게감은 표현하기 어려울 만치 강한 힘이 지니고 있었다.
노안(老安)이라는 명칭은 논어에서 인용한 것으로
편안한 노년을 위함과 노인을 편히 모셔야 한다는 치국의 뜻을 담아 노안당이라 명하였다고 한다.
이름 하나도 큰 뜻을 새겨 나라에 대한 열망과 기대를 담아내고자 한 정신에 다시금 놀란다.
노안당의 현판은 당대의 최고의 글씨를 자랑하는 추사체를 집자한 것이라고 한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부분은 햇빛을 차단하기 위해 설치한 차양(遮陽)의 존재였다.
차양은뜨거운 여름날 시원한 그늘이 되며
추운 겨울에는 햇빛이 더욱 깊게 들어와 따스함을 느낄 수 있도록 설계된 것으로,
조선후기건축의 시대적 특징 중 하나라고 한다. 하나의 부재 사용도 과학적이고 치밀하게 계획함으로써
‘한옥은 여름에 덥고 겨울에 춥다’는 편견에 상당한 오류가 있음을 말해준다.
대원군은 평소 난(蘭)을 잘 쳤다고 한다.
그것은 미술사적으로도 가치가 높은 대원군의 묵란도(墨蘭圖)가 여러 작품 남아 있어
그가 추구했던 예술성이 후대까지 전해지고 있다.
차양(遮陽)은 그러한 대원군의 미적 향유에도 큰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운현궁 곳곳에 있는 정원을 통해서도 대원군이 공간에 대한 심미안이 남달랐음을 보여준다.
노안당의 후면으로 들어서면
앞으로 보게 될 노안당의 측면과 함께
노락당과 이로당이 하나의 길로 연결된 장관을 볼 수 있다.
건물의 구조와 배치가 정교한 계획에 의하여 앉혀졌음에
감탄하고 잘 구획된 복합적인 구조미에 새삼 놀라워
말을 잃는다. 또한 그 길을 따라 걷다 보면 각 공간에 맞춰진 장식적인 벽체들로 인해 눈이 즐겁기까지 하다.
노안당을 지나 행각을 통해 노락당(老樂堂)으로 향했다.
노락당은 운현궁의 안채에 해당되는 곳으로
고종과 명성황후의 가례가 행해졌던 곳이다.
노안당과 마찬가지로 조용하고 단정하게 지어진 한옥의 모습이었다.
한옥은 모든 자제를 자연으로부터 얻으며 기단에서 기와까지 하나하나 다듬어 조립한 구조이다.
예로부터 한옥은 못을 사용하지 않았다고 한다.
즉, 모든 부재들이 서로 맞물리도록 이를 맞추고 끼워 넣어 만들어진 하나의 완전한 결정체인 것이다.
노락당은 겹처마의 구조로 진중함과 깊이감을 드러낸다.
하지만 답답하거나 무거워보이지 않음은 공포(栱包)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바로 초익공의 구조를 취하는 점이다.
익공 양식이란, 한옥에서 볼 수 있는 기법으로 주두 밑으로 익공이라는 부재를 끼운 것으로 새의 날개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기법이다.
종묘의 정전, 경복궁의 경회루와 같은 권위있는 건물이나 궁, 사대부집안에서 볼 수 있는 한옥의 구조 중 하나로, 장식적이면서도 정적이고 단아하다. 그런 점에서 노락당은 한층 격이 높고 고귀한 문화재적 가치를 지닌다고 말할 수 있다.
한동안 정신 없이 사진을 찍다가 내부공간으로 눈을 돌렸다.
실내는 한옥의 탁월한 통풍의 비법으로 설명되는 잘 발라진 창호지의 문과 창이 정갈하게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모든 구성은 정성과 성의가 담겨서 만들어졌으며
특히 잘 짜여진 불발기창은 한옥의 담담한 맛과 멋스러움을 한껏 살려내고 있었다.
옛 조선은 반상뿐만 아니라, 남녀간의 엄격한 규율과 제한이 있었다.
운현궁 역시 남자의 공간인 사랑채 노안당이 있다면,
여자들의 공간으로 바로 마지막으로 보게 될 운현궁 이로당(二老堂)이 그곳이다.
어쩌면 여자들의 공간이기에 소극적이며 조용하겠구나 하고 마음에 단정을 짓고 갔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생각했던 것과 달리 이로당은 앞마당이 비교적 넓게 틔여서 한껏 숨을 쉴 수 있는 공간이었다.
사실, 노안당과 노락당은 많은 공간 구획이 지어져 있기에 조용하고 사색적인 느낌이 강했다면
이로당은 또 다른 차원의 공간적 감각을 보여주고 있었다.
어쩌면 여자들의 공간이기에 같은 여자로서 나도 모르게 본연의 자취에 빠졌던 건지도 모를 일이다.
이로당에서 시선을 끌었던 것은 노락당과 연결되는 행각이 있는데 그 사이에 문의 형태이다.
구조적으로 문이 설치된 행각의 높낮이를 달리 지은 것이다.
기존의 한옥의 배치가 대칭을 선호했다면 이러한 운현궁의 비대칭적인 구조는 원칙을 지키되,
발상의 자유로움을 추구한 고도의 건축미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건축미와 더불에 문에 새겨진 당초문 조각은 가히 예술적인 한 폭의 조각작품을 보는 듯 하다.
자칫 딱딱할 수 있는 목조조각이 정갈한 한옥 안에서 충분히 큰 빛으로 작용할 수 있음을
여지없이 보여주고 있었다. 그 문을 통과하면 후원으로 들어선다.
앞서 말했던 노안당 후면으로부터 연결된 그 길의 끝에 해당되는 곳이다.
후원에는 넓은 공간이 확보되어 우물을 비롯하여 조경이 잘 되어 있었다.
도입에서 잠시 말했듯이 운현궁은 서울 도심 한복판에 자리하고 있다.
보고싶을 때 언제든지 찾아가서 건축적 아름다움과 옛스러움을 즐길 수 있다는 생각을 하니
벅찬 감동이 밀려온다. 조선 왕실가문의 품위와 궁으로서의 고매한 면모를 여실히 갖추고 있는 운현궁.
높은 권위를 상징했던 웅장하고도 과학적인 구조에서도 한옥이 갖는 소박함과 섬세함도 잃지 않았다.
이처럼 아름다운 우리 목조건축. 그 정점에 서있는 운현궁!
다시 돌이켜 생각하니 무한한 기쁨이 찾아온다.
많은 연구와 보존을 통해 세계가 자랑하는 목조문화재로서 자리매김할 수 있길 기대해본다.
- [2008 문화유산 답사기] 은상(2위) 라수진
- 2009-01-12, 문화재청, 문화재 답사기행
왕에 버금가는 최고 권력자 흥선대원군의 사저, 운현궁(雲峴宮)
일제강점기 조선왕조가 강제로 해체되는 와중에 왕실문화의 전통이 보존된 곳
흥선대원군을 소재로 한 역사소설이나 방송 드라마를 보면
대원군을 부를 때 흔히 '대원위대감(大院位大監), 합하(閤下)'라는 표현이 자주 나온다.
12세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른 아들 고종(高宗)을 대신하여 정국을 잡은 흥선대원군은
근 10년 동안 강력하고 과감한 혁신 정치를 펼치게 된다.
비록 정식 왕은 아니었지만 왕에 버금가는 최고의 대신이자 임금에 견줄 수 있는 합하라는 호칭으로
대표되는 최고의 권력자였다.
구름재 큰 집인 운현궁은 본래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이하응(李昰應)이 살던 집이었지만
둘째아들 명복(命福)이 고종으로 임금 자리에 오른 뒤 대폭 확장, 신축하면서 궁(宮)으로 부르게 되었다.
물론 경복궁이나 창덕궁처럼 왕이 항시 거주하면서 통치를 하는 궁궐은 아니지만
궁궐 밖에서 왕족이 살다가 왕으로 오른 경우에는 개인 소유의 집에서 국가가 관리하는 '궁'으로 승격이 된다. 사적 제 257호로 지정되어 종로구 운니동에 있으며,
궁궐과 더불어 조선시대 왕실문화를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다.
일제강점기에 조선왕조가 강제로 해체되는 와중에 왕실문화의 전통을 그나마 보존하고 있었던 곳은
운현궁이라고 할 수 있다.
운현궁은 1863년 고종이 임금에 오르고 흥선대원군이 집권을 하면서 근대 역사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원래 운현궁은 궁궐에 견줄 만큼 크고 웅장하였다고 하나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상당수 훼손되어
현재 남아 있는 건물은 대원군이 머물던 노안당, 고종과 명성황후가 가례를 올린 노락당,
운현궁 안주인의 거처였던 이로당 등이 운현궁 경내에 있고,
서양식 건물인 양관은 궁 바깥쪽 덕성학원 캠퍼스 내에 있다.
노안당(老安堂)의 당호는 공자의 ‘노자(老者)를 안지(安之)하며’에서 인용한 것으로
아들(고종)이 임금이 된 덕분에 노년을 편안하게 살게 되었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편액은 추사 김정희의 글씨를 집자하여 완성했는데
대원군은 젊은 시절, 추사에게 그림과 글씨를 배워 그의 글씨를 흠모하고 또 존경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서원철폐, 경복궁 중건, 세제개혁 등의 주요 정책이 이곳에서 논의돼
1864년 9월, 노안당 중수공사 당시 만들어진 상량문에 따르면,
흥선대원군의 호칭을 ‘전하(殿下)’ 다음의 존칭어인 ‘합하(閤下)’라고 하였으며,
지위는 문무백관의 으뜸이라고 하였다.
노안당은 대원군의 아지트이자 정치의 중심이었고 생애의 마지막 장소였다.
10여 년간의 집권기간 동안 행한 서원철폐, 경복궁 중건, 세제개혁 등의 주요 정책이 논의된 곳이었고,
1882년 임오군란 때 청나라 군대에게 납치되던 굴욕의 현장이었으며,
귀국한 이후에는 명성황후와 대립하여 골방 신세를 면치 못한 곳이었다.
특히 1898년 별세한 곳도 역시 노안당 큰방 뒤쪽에 있던 작은 속방이었다.
노락당(老樂堂)은 운현궁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건물로
결혼, 회갑 등 가족 행사를 하거나 대원군이 손님을 맞이하는 사랑채로 이용하였다.
1866년 당시 15세의 고종과 16세의 명성황후가 가례를 올린 곳도 바로 이곳이었다.
1864년 운현궁의 중수공사가 마무리되고 기공식이 열렸을 때
고종이 직접 참석하여 당시 예조판서였던 김병학에게 ‘노락당기(老樂堂記)’를 지어 올릴 것을 명하였다.
김병학은 노락당과 하늘 사이가 한자 다섯 치밖에 안 된다고 표현하여
당시 대원군의 높은 권세를 드러낸 바 있다.
이로당(二老堂)은 대원군의 부인인 여흥부대부인(驪興府大夫人) 민씨(閔氏)가 거처하던 별당으로서,
1869년에 완공되었다.
여자들만의 공간이기에 바깥으로 출입문을 내지 않고 노락당과 복도로 연결된 폐쇄적인 건물로서,
바깥 남자들이 쉽게 들어오지 못하도록 ㅁ자형 구조를 하고 있고 한가운데 작은 마당을 두었다.
양관(洋館)은 대한제국의 서양식 건축물로서 본래 대원군의 손자인 이준용(李埈鎔)의 거처이다.
원래의 집은 이준용의 호인 송정(松亭)을 본 따 송정 사랑이라 불렸지만
일제에 의해 헐리고 지금의 양관이 건립되었다.
일제는 이준용을 감시하기 위해 이곳에 순사 40여 명을 주둔시켰다고 한다.
양관의 건립 연대는 1907년에서 1911년 사이일 것으로 추정되지만 확실한 기록이 없어 정확치는 않다.
건축구조는 석재와 목재를 혼용한 2층 벽돌 건물로 내부 바닥은 목조로 마감하였으며,
방마다 벽난로를 설치하였다.
운현궁은 궁이니까 당연히 국가 소유이겠거니 하겠지만 덕성여자대학교의 덕성학원 소유이다.
해방 직후 미군정청이 잠시 이용하다가 1946년 8월 덕성학원으로 소유권이 넘어갔다.
한때 양관은 덕성여자대학교 본관건물이었지만 현재는 덕성학원 법인사무국으로 사용하고 있다.
- 사종민(서울역사박물관 교육홍보과장)
- 2010-06-24, 하이서울, 서울역사기행
흥선대원군에 대한 오해
젊은 시절 난봉꾼? 쇄국정책 일변도?
연갑수 박사 '대원군 정권' 재조명
"고종 즉위 전에도 주목받는 정치적 역할 맡아
부국강병 통해 새로운 세계 질서에 대응 노력"
조선 말기의 권력자였던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이하응(李昰應 · 1820~1898)은
양면적인 평가를 받고 있는 인물이다. 서원철폐나 세제개편 같은 그의 개혁적인 면모는
'쇄국으로 인해 조선의 근대화를 늦춘 인물'이라는 수구적인 이미지에 압도당해 왔다.
근대사학자인 연갑수 박사(서울역사박물관 학예연구부장)가 최근 출간한 연구서
《고종(高宗)대 정치변동 연구》(일지사)는 대원군과 그의 정권에 대해 상당부분 재평가를
시도해 주목된다. 대원군 정권은 시곗바늘을 거꾸로 돌리려 했던 것이 아니라
변화하는 세계 질서에 대해 나름대로 대응하려 했다는 것이다.
◆젊은 시절 파락호로 지냈던 건 아니었다
아들 고종이 즉위하기 전 젊은 시절의 대원군은 일부러 난봉꾼에 가까운 생활을 했다는 것이
지금까지의 통념이었다. 기방에 출입하다가 욕을 당하기도 하고
'상갓집 개'라는 비웃음을 사기도 했다는 등 야사류에 등장하는 이야기들은 권력을 쥔 뒤의 모습과
극적으로 대비된다.
하지만 연 박사는 "당시의 자료를 자세히 살펴보면 '파락호'의 모습과는 거리가 있다"고 말했다.
흥선군은 27세 때인 1847년(헌종 13) 종친부(宗親府)를 실질적으로 운영하는 직책인
유사당상(有司堂上)에 임명돼 선파인(璿派人·전주 이씨 중에서 왕실에서 갈려 나온 파에 속한 사람들)에 대한 신역 면제를 관장하는 등 종친부의 권한 확대를 추진했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당시의 세도가인 안동 김씨 세력과 정치적 거래를 시도한 흔적이 드러나기도 한다.
이미 상당히 주목 받는 정치적 역할을 맡고 있었다는 것이 된다.
◆무작정 문을 닫아걸었던 것도 아니었다
대원군의 대외정책의 기본 방향은 부국강병을 통해 외세로부터 자주권을 확보하려는 것이었다.
이는 구미 제국이 주도권을 쥔 새로운 세계 질서에 대응하기 위함이라는 것이 연 박사의 해석이다.
'부국강병'이라는 것 자체가 사림세력이 정권을 장악한 조선 후기에는 이단시되고 있던 개념이었는데,
대원군이 전통 성리학적 세계관에서 벗어난 법가적(法家的)인 인물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것이다.
비변사를 폐지하고 경복궁을 중건하는 등 그의 '복고정책'은 의도적으로 만들어 낸 이미지였다는
독특한 해석도 내렸다. '조선왕조 개창기'를 내세워 개혁의 명분을 얻기 위해서였을 뿐
실제로 '복고'를 지향한 것은 아니었다는 얘기다.
병인양요를 기점으로 해서 서양 군사기술의 도입을 시도하고,
1866년과 1868년에 각각 미국 함선이 나타나자 지방관을 통해 원만히 해결하는 등
대외관계의 유연한 측면도 드러난다는 것이다.
◆부국강병 추구 정책, 실각 뒤에도 계속돼
지금까지 '민씨 정권'이라 불렸던 1873년 대원군 실각 이후의 고종 친정기에서,
연 박사는 당시 고종의 역할에 대해 대단히 적극적인 해석을 내린다.
서양의 군사기술을 도입해야 한다는 인식 아래 통리기무아문을 설치하고,
임오군란 이후 청나라의 간섭이 심화되는 가운데서도 개혁의 방향을 담은 〈선후사의(善後事宜) 6조〉를 마련하는 등 이 시기 정책의 중심에는 고종이 있었다는 것이다.
연 박사는 "세도정치 때와는 달리 이 시기의 외척인 민씨 일족은 국왕의 통제를 받고 있었는데,
이 같은 왕권 강화는 대원군이 이뤄놓은 것으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결국 고종 친정기는 '부국강병 추구'라는 대원군 집권기의 기본적인 성격을 계승했다는 것이다.
이 같은 연 박사의 분석에 대해 김원모 단국대 명예교수는
"대원군의 군사개혁이 서양 세력에 저항할 수 없을 정도로 시대에 뒤떨어졌다는 점에서,
그 시대의 부국강병은 허장성세였다는 명백한 한계를 인식해야 한다"고 말했다.
- 조선, 2008년 5.13 유석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