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운현궁을 거닐다 >
예술(藝) - 운현궁의 서화
평생 난(蘭)을 즐겨 그렸던 흥선대원군 이하응(1820-1898)은
조선말기 묵란화(墨蘭畵)의 대가(大家)였다.
이러한 명성만큼 그의 작품에는 품격 높은 격조(格調)와 사의(寫意)가 넘쳐흐른다.
망설임 없이 뻗은 날렵한 필선과 군더더기 없는 여백의 충만함은 선계(仙界)의 바람처럼 맑고 청아하다.
뛰어난 예술가로서의 그의 면모가 드러난다.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난초그림(墨蘭)은 가짜가 많기로 유명하다.
“대원군 난초의 절반 이상은 가짜”라는 것이 정설. 대원군 난초는 그의 생전부터 가짜가 많았다.
당시 그의 난초를 원하는 사람이 늘어나자 대원군은
사랑방에 사람을 앉혀놓고 대신 그리게 한 다음 자신은 거기에 이름을 쓰고 도장만 찍었기 때문.
가짜가 많다는 것은 대원군의 난초가 그만큼 뛰어남을 뜻한다.
추사 김정희의 극찬이 이를 입증한다.
추사 김정희에게 서법과 묵란(墨蘭)을 배운 대원군은
“압록강 동쪽에는 흥선대원군을 따를 사람이 없다.”고 추사에게 극찬을 받았는데
그 이유는 “타고난 기틀이 맑고 신묘하여 그 오묘한 경지에 가까이 가 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석파 이하응의 난 그림에 화제를 단 글을 보면 난을 어떻게 그려야 하는지 가늠할 수 있다.
“난초 그림의 품격을 말한다면, 생긴 모양대로 비슷하게 하는 데 있지 않고
남이 하는 법식을 따르는 데도 있지 않다. 다만 많이 그린 연후에 좋은 작품이 나온다.
선 자리에서 부처가 될 수 없고, 맨 손으로 용을 잡을 수 없는 이치와 같은 것이다.
비록 만 가운데 구천구백구십구까지 이른다 해도 나머지 일이 쉽지 않으니,
이것은 사람의 힘으로 이룰 수 없는 부분이며, 또한 사람의 힘 밖에서 나오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석파 이하응 묵란의 특징은 초년에는 주로 화첩이나 편화 형식이었으나 점차 벗어나
바위와 어우러진 혜란(蕙蘭)을 병풍그림과 같은 대폭에서 다루고 있다.
이는 대나무나 매화와는 달리 대폭 그림에서는 거의 그려지지 않거나,
간혹 죽석(竹石)의 보조적 소재로 쓰였던 난을 대폭 그림의 독자적 소재로 운용하였다는 점에서
한국 묵란화 전개에 획을 긋는 형식의 변화라 할 수 있다.
그가 말년에 이룩한 독자적인 화경(畵境)은
공중에 걸려있는 듯 도현(倒懸)된 바위 절벽에 뿌리내린 난을 속도감 있는 필치로 자신 있게 그려내는데
유려한 가운데 예리함과 강직함이 녹아든 외유내강의 절묘한 조화가 일품이다.
또한 바위의 표면과 윤곽선의 강한 농담의 대비와
난의 미묘한 농담의 차이도 빼놓을 수 없는 이하응 묵란의 특징이다.
또 흥선대원군은 여백을 살리고 화면 한쪽에 한 떨기 춘란(春蘭)을 즐겨 그렸는데
난은 섬세하고 동적이며 칼날처럼 예리하다. 특히 줄기가 가늘고 날카롭다.
뿌리에서 굵고 힘차게 시작하지만 갑자기 가늘어지고 끝부분에 이르면 길고 예리하게 쭉 뻗어나간다.
또 중간중간 섬세한 각을 이루며 반전을 거듭한다. 그래서 난의 줄기는 입체적이고 극적이다.
■ 난그림(墨蘭)에 의한 이하응의 생애 구분(1기-4기)
예술창작 활동을 기준으로 하여 이하응의 화풍 변화에 초점을 맞추어 볼 때,
그의 생애는 청(淸) 보정부(保定府)로 연행되기 전과 돌아온 이후로 크게 2단계로 나눌 수 있다.
그의 작품들은 화풍의 변화를 기준으로 하여 크게 두시기로 나눌 수 있는데,
30대 초반부터 청(淸) 보정부(保定府)로 유폐되기 전까지는 전반부(1851-1882: 32-63세)로,
이후의 시기는 후반부(1883-1897: 64-78세)로 구분된다.
조사된 작품 가운데 전반부에 제작된 작품은 54점이고, 후반부에 제작된 작품은 47점이다.
전반부의 작품은 후반부에 비해 다양한 방식으로 제작되었다.
그중에서도 1차 집권에서 실각한 후, 직곡산방에 머물렀던 1874-1875(55-56세)에는
단기간에 여러 가지 형식의 작품이 제작되어 주목되는데, 현재 이 시기의 약 23점이 조사되었다.
후반부에는 석란화 형식이 위주가 되었으나,
1887-1891년(68-72세)사이에 제작된 작품에서는 기명괴석란도(器皿怪石蘭圖)가 제작되기도 하여
특이한 면모를 보이다. 또한 후반부에 제작된 석란화 가운데
특히 1887-1891년(68-72세) 사이에 제작된 작품에서는 괴석의 형태 묘사에 집중하는 경향을 보였다.
직곡산방 이후 가장 많은 작품이 제작된 해는 1891년(72세)으로 현재 약 8점이 조사되었다.
1891년은 그가 결혼한 지 60년이 되는 해로서
자신의 회혼(回婚)을 기념하기 위해 많은 작품을 제작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정치적 부침과 관련하여 좀 더 자세히 구분하면 4기로 구분할 수 있다.
제1기는 집권 전 안동 김씨 세도 하에서 불우한 청년기를 보내며
추사 김정희의 서화에 경도된 시기(1820-1862)로 그의 나이 43세까지 해당된다.
이 시기는 그가 불우한 청년 시절을 보내면서도 김정희의 영향 아래 예술적 기반을 굳건히 하던
시기라 할 수 있다. 그는 김정희로부터
“예자(隸字)는 가호(佳好)하여 난(蘭)과 더불어 쌍미(雙美)할 만합니다.
옥두(屋頭)에 무지개빛이 관통하겠습니다.”
“(석파의 묵란은) 압록강 이동(以東)에 그와 견줄 만한 작품이 없을 정도로 탁월하다”라는 평가를
김정희로부터 받기도 하였다.
그런데 이하응이 대원군이 된 것은 김정희가 세상을 떠난 지 7년이 넘은 44살 때의 일이다.
따라서 김정희가 사망한 것이 그가 대원군이 되기 전인 1856년(37세)이었다는 사실로 미루어보면,
이하응은 안동 김씨 세도가들로부터 무시당하던 30대 전반에
이미 금강안(金剛眼)을 자부하는 김정희로부터 높은 평을 받은 셈이다.
제2기는 대원군이 되어 과감한 정치를 수행한 1차 집권기(1864-1873)와 명성왕후와의 갈등으로
하야하여 은거하던 시기(1874-1882.5)로 그의 나이 44세부터 62세까지 해당한다.
뛰어난 정략가로서 국정을 요리할 식견을 갖추고 있었던 그는 정권을 잡게 되자
안으로는 세도정치를 분쇄하고 쇠락한 왕권을 다시 공고히 하며,
밖으로는 침략적 접근을 꾀하는 외세에 대적할 실력을 키워 혁신정책을 강력히 추진해 나갔다.
그러나 그는 명성황후와 완화군문제로 사이가 멀어진 후, 개화정책에 대한 견해 차이로 인해
정치적 대결을 벌이게 되었고, 마침내 하야하여 은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시기에 그는 묵란화 제작에 심취한 듯, 그의 난 그림은 괄목할 만한 발전을 보인다.
무엇보다 김정희의 필법을 계승하면서도
자신만의 개성적 구도법과 특징적 묘사 방식을 모색해 나간 점이 주목된다.
특히 1차 집권에서 실각한 후, 직곡산방(直谷山房)과 운현궁(蕓峴宮)에서 은거한 기간 동안
많은 작품을 제작했다(1874-1881: 55-62세).
직곡산방에서는‘군란화(群蘭畵)’‘석란화(石蘭畵)’‘총란화(叢蘭畵)’형식이라는 세 가지 유형의 묵란화를
제작했는데, 이 세 가지 형식의 묵란화 구도법은 운현궁으로 돌아온 이후에도 지속되었다.
이는 스승 추사의 영향에서 벗어나 이하응 자신의 개성적 화풍을 수립한 것으로,
이후 석파란의 전형이 되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제3기는 임오군란 때 잠시 재집권(2차 집권)했으나, 청군의 개입으로
천진(天津) 보정부(保定府)로 연행되어 3년간 유폐생활을 하던 시기(1882.7-1885.8.27)로
그의 나이 63세부터 66세까지 해당된다.
《매천야록》의 기록에 의하면 대원군이 머물렀던 보정(保定)은 수질이 좋지 않았으며,
의식(衣食) 또한 마땅치 않아 청나라 고관에게 뇌물을 주고 조금 더 편안한 삶을 영위하고자 하였다고
한다. 우물을 파고 고국으로부터 상선을 통해 식료품을 조달받는 등 대원군은 보정에 머무는 기간 동안
10년간의 세도정치를 하면서 끌어모은 재산을 거의 탕진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보정부(保定府)에서의 유폐기간동안 그는 안으로 한을 삭이며 난을 치면서 세월을 보냈던 것으로
짐작된다. 유폐 초기에는 작품을 제작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던지 전해지는 작품이 없고,
시간이 경과하면서 안정을 되찾은 듯 유폐기 중후반에 제작된 일련의 작품이 전해진다.
특히, 귀국직전에 제작된 석란화에서 난엽이 힘차게 위로 향하는 등
운필에 힘이 넘쳐 당시 그의 정치적 재기의 의지를 보는 듯하여 흥미롭다.
이 시기는 그의 생애의 다른 시기에 비해 기간은 비록 짧지만,
이후부터 그의 묵란화에 변화가 일어나기 때문에 창작 활동 면에서는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제4기는 청으로부터 귀국한 후 정권에 더욱 집착하여 명성왕후와 대립하게 된
말년(1885.9-1898.2)으로 그의 나이 66세부터 79세까지에 해당된다.
이하응은 청에서 귀국한 뒤에도 끊임없이 재기의 기회를 꿈꾸었지만 거듭 실패하고 만다.
따라서 은거하는 기간이 길어져서인지 이시기에 제작된 그림이 가장 많이 전해진다.
- 운현궁시절의 석란화(1886-1897: 67-78세)
이하응은 1885년 청에서 귀환한 후 생을 마감할 때까지 재집권을 위해 부단히 노력했지만
정치적 실패가 반복되었고, 그런 심리상태를 묵란화로 표출했던 것 같다.
조사된 작품 101점 가운데
1886년(67세)부터 1897년(78세)까지 약 12년간 제작된 작품 수는 41점 정도이며
그 가운데 기년작(紀年作)은 32점이다.
이 시기는 생애구분 중 제4기로 분류되며, 주로 괴석의 표현이 두드러지는 석란화가 제작되었다.
∇1750년 ∇1800년 ∇1850년 ∇1900년
←─ 김정희(1786-1856) →
←─ 이하응(1820-1898) ───→
←── 정학교(1832-1914) ────→
← 장승업(1843-1897) →
괴석(怪石)이란 평범하지 않고 괴이하게 생긴 돌을 말하는 것으로
기석(奇石), 수석(壽石), 수석(水石), 이석(異石), 노석(老石) 등 다양하게 일컬어진다.
괴석은 천지창조와 함께 그 존재가 시작되어 태고의 신비성과 자연의 조화를 간직한 채
세월의 풍우에도 변하지 않는 속성 때문에 장수(長壽)의 상징으로 이해되어 왔다.
이러한 돌의 불변성과 부동성(不動性)은 다른 한편으로 지조와 절개를 지닌 동양의 신비정신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따라서 선비들은 괴석 가운데 큰 것은 정원에 두고,
작은 것은 책상머리에 놓아 정신적 소요의 대상으로 삼았다.
그들은 괴석으로부터 지조와 절개를 닮으려했으며, 자연의 축소와도 같은 괴석을 통해
자신의 기상을 다스리려는 구도적 자세를 지니고자 했다.
이러한 애석사상(愛石思想)이 문인이나 화가들에 의해 시와 그림으로 표현되었다.
중국에서 애석(愛石) 풍조는 한(漢)대에 왕후 귀족이 석가산(石假山)을 조성한데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석가산이란 정원 내부에 여러 가지 형태의 괴석을 모아
대자연을 연상할 수 있도록 인공적으로 만든 산을 말한다. 이후 중국에서는 각종 정원이 발달했으며,
정원의 구성 요소 가운데서도 바위는 험산 준령의 상징 내지 축소품으로서 애호되었다.
여러 가지 종류의 바위 가운데서도 문사들로부터 특별히 사랑을 받았던 것은 태호석(太湖石)이다.
태호석은 중당(中唐)의 시인 백거이(白居易, 772-846)가 처음으로 그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시로 예찬했는데 이후 개인의 정원 속에 태호석을 두고 감상하는 것이 크게 유행하였다.
조선시대 문인들 역시 자연의 축소와도 같은 괴석의 다양한 면목을 감상하며
그것을 시나 문장으로 표현했다. 또한 괴석을 통해 태고의 신비성을 추구하기도 했으며
그 불변적 속성에서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선비정신을 배우려고도 했다.
이러한 애석(愛石) 풍조는 조선시대 궁중에서도 만연했던 듯하다.
우리나라 궁궐의 정원에서는 정교하게 조각된 대석(臺石) 위에 괴석을 올려놓은 전래석(傳來石)을
흔히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괴석도(怪石圖)와 관련해볼 때, 조선 말기에 이르러 괴석도가 본격적으로 성행한 것은
무엇보다 김정희를 비롯하여 당시 문인들의 애석사상(愛石思想)에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그 자신이 애석가였던 김정희는 자하(紫霞) 신위(申緯, 1769-1847)의 지극한 애석(愛石)태도를
희롱조의 시로 읊기도 했다.
자하 신위가 상산(象山, 황해도 谷山의 옛이름)에서 돌아오는데 가득 싣고 온 것이 모두 다 돌이었다.
先生爲在日 선생이 이 세상에 나오실 때부터
愛石戱愛錢 돌을 돈보다 더 좋아하셨지.
...(중략)...
及其歸去來 벼슬을 내놓고 돌아오게되자
惟石載之前 돌만 한 무더기 싣고서 앞에 보냈지.
家人不知石 집사람들은 돌인 줄 알지 못하고
迎門喜色溢 문에서 즐겁게 맞아들이네.
...(중략)...
自憐?石交 아! 나는 굳게 맺은 우정에 누가 미칠까 걱정되어
對石屢發歎 돌을 대하면 항상 겁부터 난다.
이러한 애석(愛石) 풍조로 인해 문인화의 주요 소재로 자리매김하게 된 괴석은
조선 후기에 이르러 그 표현이 더욱 발전하여
형사(形似)보다는 사의(寫意)를 강조하는 중요한 표현의 대상이 되었다.
조선 후기의 그림에서 보이는 괴석표현은 대체로 화훼화, 초충화의 부분으로서 표현되는 경우가 많다.
그밖에 사군자와 함께 그려지거나 풍속화, 고사인물도의 점경으로 그려지기도 했다.
그러나 조선 말기에는 돌의 ‘불변부동(不變不動)’하는 물성(物性)이
선비의 굳은 지조를 상징하는 존재로 해석되면서 괴이한 형태의 돌에 적절한 농감과 준법을 사용하여
‘괴석도(怪石圖)’라는 새로운 화목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조선시대 화가들 가운데 괴석도로 가장 유명한 화가는 정학교(1832-1914)이다.
예리한 필치로 바위의 구조적 견고함이 잘 표현되어 있으며,
괴석과 함께 간결한 대나무와 가시나무가 곁들여져 있다.
또한 제화시(題畵詩)가 쓰여있는 것이 많아 시서화 삼절의 문인화정신이 잘 구현되어 있다.
정학교 이전의 문인화가로서 괴석으로 유명한 사람은 황산(黃山) 김유근(1785-1840)을 들 수 있다.
김유근의 괴석도는 풀도 나무도 없는 진공상태의 화면에 돌만을 그리고
여백에 제시(所貴神勝何求形似)를 써넣어 정신성이 강조된 문인화의 경지를 잘 보여준다.
흥선대원군 이하응필 묵란도병(興宣大院君 李昰應筆 墨蘭圖屛) Orchids
이하응(李昰應, 1820~1898), 1891년, 비단에 먹, 주지 135.8×22.0 펼친 길이 616.8
흥선대원군 이하응이 72세 되던 1891년에 회혼(回婚)을 기념하며 그린 12폭의 석란도(石蘭圖) 이다.
두 폭씩 대련으로 구성되어 총 6쌍이며,
각 대련의 가운데 부분에는 흥선대원군의 친필 화제(畵題)가 쓰여 있다.
제1폭과 제2폭, 제11폭과 제12폭에는 난이 무리를 이루며 촘촘하게 모여 있고, 난 잎의 휘어짐이 완만하다.
이에 반해, 나머지 폭의 난은 포기 수는 적지만 난 잎의 휘어짐이 심해 대조적이다.
또한, 제10폭에는 절벽에 거꾸로 매달린 난이 표현되어 구성에 있어 단조로움을 피하며 변화를 주고 있다.
괴석은 구륵법으로 먹의 농담과 번짐을 자유자재로 구사하였으며
제작 규모면에서나 예술적 표현의 측면에서 흥선대원군 말년의 원숙한 기량을 보여주는 수작이다.
담묵으로 상부가 크고 불안정한 각진 입석형(제3폭), 농묵으로 둥근 질감(제4폭),
동글동글한 덩어리들이 모여 있는 모습(제5폭), 절벽의 한쪽 단면을 묘사한 현애석(懸崖石, 제10폭),
수평의 직선이 반복적으로 표현되어 바위의 결이 강조되어 있는 층층이 쌓인 모습(제12폭)으로 그려져
부드러운 느낌을 주고 있다. 먹의 농담과 번짐을 자유자재로 구사하였으며
제작규모면에서나 예술적 표현의 측면에서 흥선대원군 말년의 원숙한 기량을 보여주는 수작이다.
*화제(畵題)
△제1폭 :
現我耆耊 唫病無力 他求蘭政 一切謝之 此次劉姓小史 來噣數叢蘭 稱以湖南韻人金員外之要以○之 蓋劉人本
지금 나는 늙고 병들고 무력하여 다른 사람들이 난 그림을 구하여도 모두 사양하였는데,
이번에 유소사(劉小史)가 와서 총란도(叢蘭圖) 몇 폭을 구하며
호남의 운인(韻人) 김원외(金員外)의 요구로 ○하는 것이라 하였다. 생각건대, 유소사는 본시
△제2폭 :
家庭 聞見深於書畵者也 具稱韻士已求數朶 勢難却之 應以索紙 此非珠聯 乃是大屛也 意難違約 雖以朶墨 然以屛者
가정에서 서화에 견문이 깊은 사람일 것이다. 또 운사가 이미 몇 가지를 구하였다고 하니,
일의 형세가 물리치기 어려워 응하여 종이를 찾았다.
이것은 주련(珠聯)이 아니라 바로 큰 병풍이다.
약속을 어기기 어려워 비록 그림을 그리기는 하나, 병풍이라는 것은
△제3폭 :
蓋謂珠聯二對曰屛也 此爲古所稱之者也 爾來東習悖戾 六摺曰小屛 八摺曰大屛 近又惡習尤甚以十二摺爲屛 分作六摺
대개 주련 2쌍을 병(屛)이라 하는데, 이것은 옛날에 일컫던 것이다.
근래에 와서 우리나라의 풍습이 어그러져 6첩을 소병(小屛)이라 하고
8첩을 대병(大屛)이라 하는데. 요사이 또 악습이 더욱 심해져
12첩을 병이라 하고 그것을 나누어 6첩 이병(二屛)을 만들고
△제4폭 :
二屛 自以謂奇幻竗計 過於我者誰也 云云者面目可憎 凡屛者多以山水翎毛折枝爲 繪蕙蘭爲屛者罕矣 現今
스스로 ‘기이하고 환상적인 묘계가 나보다 나은 자 누구인가’라고 한다 하니
그렇게 말하는 자는 면목(面目)이 가증스럽다. 무릇 병이라고 하는 것은
산수, 영모, 절지로 그린 것은 많지만, 혜란(蕙蘭)으로 병풍을 만든 것은 드물다. 지금
△제5폭 :
十二摺何以兼少 以求畵者之慾 金剛萬二千峰 猶不得充其心也 總論屛者 古以二對 掛壁 眞蹟書畵常目
12첩을 무엇 때문에 적다고 하는가? 그림을 구하는 자의 욕심이니 금강산 만이천봉도
오히려 그 마음을 채울 수는 없을 것이다.
총론하건대, 병(屛)이란 것은 옛날에는 2쌍을 벽에 걸어 진적 서화를 늘 눈앞에 두었지만,
△제6폭 :
在之 近俗 以屛爲生涯物件 養病之所爲要緊物 祭祝之堂爲第一件 文房之中爲主 張之品 巹禮之時爲無雙之媒.
요즘 풍속은 생애의 물건으로 삼으니 병조리하는 것에 요긴한 것이요,
제사지내는 곳에 제일 먼저 갖추어야 할 것이요, 서재 안의 주요 물품이요,
혼례할 때 둘도 없는 매개체이다.
△제7폭 :
初不以爲傳家之物 便作借用件貰用件者 心所痛恨久矣 然今作此屛 想不借貰 以 是慰者存也 此繪
처음에는 대대로 전하는 물건으로 삼지 않고 빌려 쓰고 세내어 쓰는 물건으로 삼는 경우가
많아 이것을 애통해하고 한스럽게 여긴지 오래이다. 그러나 지금 이 병풍을 만듦에
빌려주거나 세내어 주지 않고 이것을 감상하며 위안을 삼을 사람이 있으리라 생각한다.
△제8폭 :
不以形似 兄以長徶爲貴 若以俗眼看之 長幀之內 排布無多 應可笑之 必以韻意評 之 自家貴之也 今日
형사에 뜻을 두지 않고 장별(길게 삐치는 서법)로써 귀함을 삼았는데,
만일 속된 눈으로 본다면, 긴 화폭 안에 배포가 많지 않아 비웃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반드시 운의로써 평한다면 절로 귀하게 여기게 될 것이다. 오늘
△제9폭 :
寫蘭 決非無難不筆 實是有意朶墨 未審金君如何可否 但老腕筆力有不能 千鈞爲 重 是愧是嘆
난을 그린 것은 결코 어렵지 않게 붓을 댄 것이 아니라 실로 뜻을 가지고 그렸는데,
김군이 괜찮게 여길는지 모르겠다. 다만 늙은 팔의 필력이 천근의 무게를 감당할 수 없으니
이것이 부끄럽고 한스럽다.
△제10폭 :
盖劉人淸明有心者也 金君勤恭有義者也 今求我蘭 豈可謝却 聞走墨海拿取水 穎 豪 放應之人
생각하건대 유인(劉人)은 청명하고 유심한 사람이고 김군은 근공(勤恭)하고 유의(有意)한
사람이니, 지금 나의 그림을 구하매 어찌 사양하여 물리칠 수 있겠는가.
듣건대, 묵해(墨海)를 달려 물을 움켜쥐는 호가(穎豪) 방응(放應)한 사람은
△제11폭 :
老矣 畵尙少矣 傍看者叩其何人求繪 我以韻人應之 其人再言 求畵者眞是大稿力 云耳
육신이 비록 늙었다 하더라도 그림은 오히려 젊다. 곁에서 보던 사람이
“어떤 사람이 그림을 구합니까?”라고 묻기에 “운인(韻人)이다.”라고 대답했더니,
그가 다시 말하기를, “그림을 구하는 자는 진실로 대고력(大稿力)입니다.” 하였다.
△제12폭 : 晩悟方家囑正 辛卯夏小滿節 石坡七十二歲回巹老人作
만오방가(晩悟方家)에게 질정(叱正)을 부탁하노라.
신묘년(1891) 여름 소만(小滿, 양력 5월20일경)에
일흔 두 살의 회근(回巹=回婚)노인 석파(石坡)가 그리다.
흥선대원군 묵란6폭 병풍(興宣大院君 墨蘭6幅屛) Orchids
이하응(李昰應), 조선 말기(연대미상, 59세경), 종이에 먹,
주지 133.5×29.7, 펼친 길이 160×300, 서울대박물관
과감하게 배경을 생략한 대련(對聯)형식의 묵란도 병풍이다.
오른쪽에는 5포기, 왼쪽에는 4포기의 난을 배치하여 변화를 주면서도 전체적으로 통일감을 느낄 수 있다.
또한 같은 폭 안에서도 잎이 휘어지는 방향을 교대로 달리한 점도 안정감을 준다.
전체적으로 여백을 살려 더욱 난을 돋보이게 하는 작품이다.
이러한 구성은 청대(淸代) 양주화파, 특히 나빙(羅聘, 1733~1799)의 묵란화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군란 6폭병풍(群蘭 6幅屛) Orchids
전(傳) 이하응(李昰應), 1874년(55세), 비단에 먹,
주지 82.0×32.0, 펼친 길이 240, 국립중앙박물관
종축(縱軸)의 화면에 아무런 배경 없이 묵란을 배치한 군란도 6폭 병풍이다.
하나의 화폭에 상 ․ 하 대각선으로 2포기의 난을 배치하여 안정감을 주었다.
또, 상단의 난은 담묵으로, 하단의 포기는 농묵으로 표현하였는데,
이는 먹의 농담 표현으로 원근감 또는 공간감을 부여하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거침없고 자유로운 필치로 그린 노근란(露根蘭)의 표현이 돋보인다.
사군자 중, 난초와 국화는 대나무와 매화보다는 한참 후에야 문인화의 소재로 등장하기 시작한다.
남송(南宋)의 조맹견(趙孟堅, 1199-1267경)이 묵란을 잘 그렸다는 기록은 있으나,
난초가 군자의 상징으로 각광받게 된 것은 원초(元初) 정사초(鄭思肖, 1239-1316)부터였다.
그는 이민족에게 국토를 잃은 망국대부(亡國大夫)의 심회를 땅에 뿌리를 박지 않고도 살아가는
노근란(露根蘭)을 통해 표출하고 있다.
한편 국화는 사군자 중 가장 뒤늦게 발달하였다. 송대나 원대부터 그 전조를 찾아볼 수는 있으나,
단일 소재로 본격적으로 그려지기 시작한 것은 청대(淸代) 이후이다.
이렇듯 사군자(四君子)는 꽃피는 시기에 따라 매란국죽(梅蘭菊竹)으로 칭하지만,
그림 배우는 순서는 맨 처음 난화(蘭畵)를 배우고 다음에 국화, 매화, 대나무의 순서(蘭菊梅梅)로
배우게 된다. 이는 문인들이 일상에서 글씨를 쓰던 붓과 먹을 이용하여 약간의 형상성을 가미하면
곧바로 그림이 될 만큼 난(蘭)의 생김새가 한자(漢字)의 서체(書體)와 유사성이 많아
서화동원(書畵同源)이라는 점에 까닭이 있기 때문이다.
석란도(石蘭圖) Orchids
전(傳) 이하응(李昰應), 1897년(78세), 비단에 먹,
주지 118.8×32.3, 펼친 길이 195.5×55.5, 국립진주박물관
이하응이 78세 때인 1897년에 일본 정치인 고오무치 도모쓰네(神鞕知常, 1848~1905)에게 그려준
석란도(石蘭圖)로 전해지는 작품이다.
현재까지 알려진 이하응의 묵란화 중 가장 늦은 시기에 제작된 것으로 생각된다.
묵색은 맑고 담백하면서 용필은 활기에 넘친다. 괴석의 표면을 담묵으로, 윤곽선은 농묵으로 표현하여
대비를 이룬다. 잎은 형태가 유려하면서도 힘이 넘치며 꽃잎은 담묵으로, 꽃술은 농묵으로 표현하여
긴장감을 준다. 말년에 이하응은 주로 대련 형식의 석란화를 많이 그렸고
특히, 괴석 표현에 있어 간결하고 빠른 필치를 선보여 이 시기를 특징짓는 중요한 구성요소가 되고 있다.
이 작품 역시 그런 경향을 잘 보여주는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다.
***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묵란도(墨蘭圖)
이하응은 일생동안 오직 난만을 소재로 그렸다는 점에서 독특한 작화태도를 보인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는 삶의 변화와 함께 묵란의 묘사를 다양하게 시도했으며,
특히 말년으로 갈수록 괴석 표현을 첨가하여 화풍의 변화를 도모한 것을 볼 수 있다.
(1) 난의 종류
난초는 꽃의 수에 따라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지는데,
한줄기에 한 송이의 꽃이 피는 춘란(春蘭)과 한줄기에 많은 꽃이 파는 혜란(蕙蘭)으로 구분된다.
<춘란>
<혜란>
김정희의 영향에서 그려진 초기의 몇 작품을 제외하고
그의 묵란화는 혜란이 주를 이룬다. 그런데 그가 춘란에 비해 꽃의 숫자가 많고 흔하여
품격이 떨어지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 혜란을 주로 그린 이유에 대해 정확한 내용을 알 수 없다.
다만 꽃이 많이 달린 풍성한 혜란의 이미지는
정치적 도약을 희구했던 그의 재기의 야심과 일맥상통하는 바가 있는 것으로 추측된다.
(2) 난엽 표현의 시기별 특징
김정희의 영향을 받은 이하응의 초기 묵란화는
힘차고 강한 필묵으로 대담하게 운필해 나간 것이 특징이다.
난엽은 짧고 굵게 시작하여 삼전법(三轉法: 붓을 세 번 꺾어 잎이 휘어지게 만드는 방법)과
당두가 강조되어 있으며, 끝은 뾰족하여 서미법(鼠尾法)에 충실했다.
이러한 초기의 묵란화풍은 1872년(53세)에 노근란을 중심으로 한 <군란도> 대련이 제작되면서
중대한 변화를 보이기 시작한다. 1872년(53세) 작 <군란도> 대련의 노근란의 표현에서
바로 이 장별법이 적용된 것을 볼 수 있다. 마치 철사를 구부려 놓은 듯이 표현된 난엽은
가늘고 탄력있는 선에 몇 번의 변화를 주어 강한 인상을 남긴다.
난엽의 표현은 1차 집권이후 하야하여 은거하는 기간 동안 더욱 다양한 변화를 보인다.
1874년(55세) 12월, 직곡산방에서 제작된 선문대박물관 소장<군란도>10폭 병풍에서는
붓을 눌렀다가 날카롭게 빼면서 생긴 서미(鼠尾)의 표현으로 인해 비수(脾?)의 대비가
극적으로 표현되었다. 같은 해 겨울에 제작된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군란도> 6폭 병풍에서는
비수의 변화가 더욱 심화되고, 전체적으로 거칠고 빠른 필치로 처리되었다.
특히 담묵의 난엽이 채 마르기 전에 거칠고 진한 난엽이 겹치면서
순간적으로 일어나는 파묵 현상으로 인해 당시의 격정적 심경이 전해지는 듯하다.
그러나 1875년(56세) 6월 22일, 운현궁으로 돌아온 후에는 운필이 안정되면서
비수의 변화가 큰 추사풍의 운필법으로 그리기도 하고 여러 가지 새로운 시도도 나타난다.
중국에서 귀국한 후에 제작된 묵란화에서는 난엽의 표현에 다시 한 번 변화가 보인다.
1887년(68세) 경에 명대 묵란화에서 볼 수 있는 너울거리는 듯한 유연한 선의 난엽묘사가 나타나다가,
말년의 그림에서는 속도감 있고 길고 예리한 곡선이 주류를 이룬다.
특히 1891년(72세)에 제작된 <석란도> 12폭 병풍에서는 더는 삼전을 의식하지 않은 채,
길게 뻗어나간 서미(鼠尾)로 인해 난엽이 시원스럽게 처리되었다.
아울러 1892년(73세)에 제작된 일련의 <석란도>에서는 난엽이 긴 곡선으로 되어 있으며
전체적으로 속도감과 힘이 느껴진다. 조사된 이하응의 작품 전체를 대상으로 할 때,
1891년과 1892년 무렵에 제작된 작품에서 난엽의 표현이 최고 기량에 도달한 듯하다.
(3) 특징적인 혜란(蕙蘭)의 묘사
묵란화만을 그린 이하응은 전반부에는 춘란과 혜란을 함께 그렸으나,
후반부에는 혜란을 주된 소재로 했다.
1875년(56세) 직곡산방에서 제작된 <석란도> 10폭 병풍에서는
탄력 있게 휜 꽃대로부터 다양한 모습의 혜란이 생기발랄하게 표현되었다.
그런데 1878년(59세)작 <총란도> 대련에서부터
혜란의 표현에 하나의 특징적인 묘사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긴 꽃대에 꽃봉오리와 꽃이 촘촘히 달린 혜란의 표현이 그것이다.
이렇듯 하나의 꽃대에 많은 꽃이 무리지어 피어 있는 혜란의 표현은
중국 보정부(保定府)에서 귀국할 무렵에 제작된 석란화에서 정형화되는 경향을 보인다.
예를 들면, 1885년(66세) 이하응이 보정부(保定府)에서 귀국하던 해에 제작한 <석란도>에서
직선에 가까운 긴 꽃대에 담묵의 꽃봉오리가 일정한 간격으로 반복적으로 달려있는 혜란의 묘사를
볼 수 있다. 직선적인 꽃대에 많은 꽃봉오리와 꽃이 달려 있는 이와 같은 혜란의 표현은,
이후 1892년(73세)무렵에 제작된 작품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그림에서 발견된다.
따라서 이러한 혜란의 묘사는 이하응 묵란화의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다.
(4) 노근란(露根蘭)의 표현
노근란은 1872년(53세) 작 <군란도> 대련을 시작으로 해서
1874년과 1875년에 직곡산방에서 제작된 일련의 군란화 병풍에서 집중적으로 표현되었다.
1872년과 1874년에 제작된 노근란에 보이는 뿌리의 표현은
담묵의 갈필로 마치 철시를 구부려 놓은 듯한 긴장된 필치로 되어 있으며,
힘있고 빠르게 운필하고 군데군데 농묵의 태점(胎占)을 찍었다.
그러나 직곡산방에서 운현궁으로 돌아오기 직전인 1875년 음력 3월경에 그린 <군란도> 8폭 병풍에는
뿌리의 표현에 태점이 생략되는 등 단순화되어 가는 변화를 보인다.
<노근란의 운필법>
그 후 1878년경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서울대박물관 소장 <군란도> 6폭 병풍에서는
더는 노근란의 표현을 볼 수 없다.
이하응은 이 그림 이후 군란도 대련 형식의 그림을 그리지 않았던 것 같다.
괴석모란 4폭병풍(怪石牡丹 四幅屛) Peonies and Rocks
작자미상, 19세기 말, 비단에 채색
1/2) 주지 186.1×49.2, 펼친 길이 233.4×228.4
2/2) 주지 184.8×46.6, 펼친 길이 231.4×217.2
모란과 괴석이 토파 위에 함께 그려져 있는 전형적인 궁중양식의 모란도로
운현궁 이로당에서 사용하던 것이다. 모란은 예부터 꽃 중의 왕으로 불리며 ‘부(富)’를 상징하는데,
또한 궁중의 각종 행사에 사용되는 모란은국가의 태평성대와 국태민안을 상징한다.
이 괴석모란사폭병 2틀은 모란과 괴석 색채의 미세한 차이를 제외하고는
거의 유사한 형태를 가지고 있어 동일한 화본에 의해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흰색과 붉은색의 모란은 수직의 화면에 ‘之’자 형태로 배치되었으며,
하단의 괴석은 모두 동일한 형태로 진한 청색과 연한 황토색을 번갈아 사용하여 변화를 주고 있다.
괴석 표면에 청색의 이끼 표현이 있는 것이 특징적이다. 괴석과 모란의 표현은 비교적 자세하고
적, 청, 황, 녹색의 짙고 화려한 농채로 그려내어 매우 화려하고 장식성과 기복성이 잘 드러나는 작품이다.
책가도 2폭병(冊架圖 二幅屛) Scholar's Accouterment
작자미상, 19세기 말, 비단에 채색, 174.7×120.3㎝ (주지 211×63.5)
화면을 4단의 책장으로 구획하고 각 단마다 각종 골동 기물과 표갑에 싸인 책을 그려 넣은 책가도로
이로당에서 사용하던 것이다.
전체적으로는 단일시점 방식을 취하고 있으며 각종 기물들을 매우 사실적으로 그렸다.
골동기물과 서책을 각 단마다 번갈아 그리고, 2폭의 화면에 서로 엇갈리게 배치하여 변화를 주고,
중간에는 서랍을 넣어서 단조로움을 피했다.
주목할 만한 것은 맨 아래 우측에 그려진 수진보작(壽進寶酌이다.
소라 모양의 술잔 표면에 ‘수진보작(壽進寶酌)’이라는 명문이 있어서 이것이 수진보작임을 나타내고 있다.
수진보작은 1865년 5월 경복궁 중건 역사를 시작할 때 석경루(石瓊樓)에서 발견된 소라모양의 술잔이다.
일반적으로 책가도에 나타나는 기물들은
중국 골동품에 기원을 두거나 기복적인 의미를 지니는 것들로써
대부분 여타의 다른 책가도에 나타나는 소라모양의 술잔은 한국이나 중국의 책가도에서는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기물로써,
술잔 표면에는‘수진보작(壽進寶酌)’이라는 명문까지 새겨져 있다.
본래 수진보작은 고종 2년(1865) 4월 박경회가 세검정 근처 석경루(石瓊樓) 아래에서 발견한 것으로
오늘날 실물이 전해지지 않는다.
대신 수진보작의 모양을 짐작해 볼 수 있는 <수진보작명첩(壽進寶酌銘帖)>이 운현궁에 전하고 있다.
그 첫 장에는 수진보작과 수진보작을 넣었던 합이 그림으로 그려져 있는데
이것을 운현궁 책가도에 기물로 등장하는 수진보작과 비교해보면
그 형태가 거의 동일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흥미로운 사실은 현재 필자미상이며
제작연대도 19세기로만 추정하고 있는 운현궁 책가도의 제작배경을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한 단서가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경복궁의 중건공사가 한창이던 1865년 경복궁의 서쪽에 위치하고 있던 석경루에서
수진보작이 발견되자 그 다음달인 5월4일 고종은 경연장에서 제신들에게 이것을 보이게 된다.
그 함 안에는 소라형의 술잔이 있고
뚜껑 바닥의 중앙 그 바닥에는‘壽進寶酌’이라는 명칭과 함께 다음과 같은 문구가 새겨져 있다.
화산도사(華山道士)의 소매 속 보물로
동방 국태공(國太公)께 축수하는 술잔 올립니다.
을축년 사월절(四月節)에
이를 열어볼 사람 옥천옹(玉泉翁)인가 합니다.
박규수(朴珪壽)를 비롯한 신하들은 이를 보고
고종의 효와 대원군의 후덕으로 이러한 보기(寶器)를 받게 되었으니
장차 국운이 장성할 것임을 나타내는 길조라고 하는 내용의 시문을 지어 올렸다.
그 시문을 모아 엮은 것이 바로 <수진보작명첩>이다.
수진보작명첩은 고종의 친형인 이재면(李載冕)을 포함한 100여 명의 신하에게 지급되었으며,
운현궁이 수진보작명첩도 이때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운현궁에는 고종의 친필표제가 있는 비단첩장본과 협판첩장본 두 가지가 있으며,
이 가운데 비단첩장본은 고종이 흥선대원군을 위해 특별히 만들어 보낸 것으로 추정된다.
수진보작의 발견은 경복궁의 중건으로 인해 동요하던 민심을 고무하고
흥선대원군의 집권을 더욱 공고히 하는데 십분 활용되었다.
신하들은 길조를 축하하며 고종과 국태공 흥선대원군의 후덕을 칭송하는 시문을 지어 올리고,
이를 첩으로 만들어 배포하였던 일은 모두 그 과정에 해당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운현궁 책가도는
기존에 등장하지 않은 기물인 수진보작을 넣어서 책가도를 만들었다는 점과,
뛰어난 궁중회화 양식이라는 점에서 볼 때 궁중에서 수진보작의 발견을 기리며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즉 1865년 5월 이후 수진보작의 발견을 축하하는 왕실사업의 일환으로 궁중화원,
혹은 그에 준하는 매우 뛰어난 실력의 화가가 이 작품을 그렸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실제 수진보작에는 새겨져 있지 않은 명칭까지 일부러 넣어서 책가도의 기물로 그렸다는 점은
이 작품의 제작의도를 더욱 분명하게 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오늘날 수진보작은 경복궁 중건을 원망하는 백성들의 동요를 막기 위해 만들어진 가공의 것이라고
보는 시각이 일반적이다. 조선 말기 국가의 재정을 어지럽히고 백성들의 원망의 대상이었던
경복궁이 오늘날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역설적이다.
- 정붓샘, 서울역사박물관 유물관리과 학예연구사
- 서울역사박물관, SEMU, 제21호, 2009년 봄 호.
수진보작 명첩(壽進寶酌銘帖, Robbed Copy Album of Sujinbojak)
1865년, 종이, 38.6×24.4×1.7
고종 2년(1865) 경복궁 증축 공사 당시,
석경루(石瓊樓) 아래에서 발견된 ‘수진보작(壽進寶酌)’의 출현을 기념하여 만든 첩이다.
華山道士袖中寶 화산도사(華山道士)의 소매속 보물로
獻壽東方國太公 동방 국태공(國太公)께 축수하는 술잔 드립니다.
靑牛十廻白巳節 을축년(乙丑年) 사월절(四月節)에
開封人是玉泉翁 이를 열어볼 사람 옥천옹(玉泉翁)인가 합니다.
술잔을 담고 있던 구리그릇 뚜껑에 동방의 국태공(國太公, 흥선대원군)에게 오래살기를 축원하며
술잔(수진보작)을 바친다는 내용의 글이 쓰여 있었다.
이를 본 고종이 상서롭게 여겨 신하들에게 명(銘)을 지어 바치도록 하고
이를 탁본해 두루마리 형태로 접어서 첩(帖)으로 만들어 100여 명의 신하에게 하사하였다.
탁본첩의 맨 앞장에는 나작(螺酌)과 뚜껑(盖), 기물(器物)의 그림이 음각되어 있다.
<참고: 수진보작>
■ 석경루지(石瓊樓址)
종로구 신영동 149번지인 세검정초등학교 정문 앞에는 큰 향나무 한 그루가 있어
지정보호수로 관리하고 있는데 이곳에 석경루(石瓊樓)가 있었다.
고종 2년(1865) 5월 경복궁 중건역사를 시작할 때 박경회(朴慶會)란 사람이
이곳에서 얻었다는 옥잔을 흥선대원군에게 바쳤는데,
그 명(銘)에 '수진보작(壽進寶酌)'이란 넉 자와 시문이 있어 대원군을 축수하고
을축년에 대원군이 궁궐을 지을 것을 암시하였다 하여 대원군은 크게 기뻐하고
더욱 경복궁 중건에 기운을 얻었다 한다. 이때 조정에서는 거액의 공사비 문제로 찬반양론이 있었는데
이 일 후에 더욱 박차를 가하니 일부에서는 대원군이 꾸민 일이라 하였다 한다.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동명연혁고(洞名沿革攷)》(Ⅲ) 서대문구편 1977 pp.217
■ 수진보작작첩(壽進寶酌帖)(奎10177),
金世鎬(朝鮮)等 製進. 1帖 拓本 39×24cm.
1865년(고종 2) 한성 북편 외곽에서 발견된, 바닥에 「壽進寶酌」이라 새겨져 있고
그 주위에「華山道士袖中寶獻壽東方國太公靑牛十廻白巳節開封人是玉泉翁」이란 글귀가 새겨져있는
소라형 작(螺形酌)에 대해 궁중에서 신하들이 쓴 글을 藝文館에서 모아 편집한 것이다.
이 글귀는 도가적 성격이 짙은데, 이것을 지님으로써 장수를 누릴 수 있다고 믿어져
고종이 경연(經筵)時에 들고 나와 이를 보이고 신하들에게 銘을 撰케 하고,
도승지 金世鎬에게 ‘수진보작기(壽進寶酌記)’를 쓰게 하였던 바
이에 대한 銘을 함께 모은 것이 이 帖이다.
이것은 고종이 즉위한 이듬해인 1865년 4月에 출토되었고 經筵은 5月 4日이었다.
이 帖에 실린 기사나 銘의 내용은,
대체로 이 酌이 王이 즉위한 이듬해 나왔으므로 國運의 길조를 상징하는 것이며
고종의 두터운 孝와 대원군의 후덕으로 인해 이러한 寶器를 받게 되었으니
국왕과 함께 국운이 앞으로 창성할 것을 바란다는 뜻이다.
銘을 撰한 사람들은 金學性, 金泰郁, 高景晙, 安翊豊, 趙康夏 등 5名이었다.
그리고 앞의 奉敎書는 李興敏이 썼다.
■ 大院君政權과 朴珪壽
- 金明昊(成均館大)
‥‥ 중략 ‥‥
그리하여 중건사업이 활기차게 추진되기 시작하던 고종 2년 5월 4일
<壽進寶酌>을 바친 朴慶會에게 五衛將을 加設하라는 명이 내렸다.
박경회는 창의문(일명 자하문) 근처의 石瓊樓라는 정자를 지키던 자였다.
그가 그 해 4월 정자 부근에 우물을 파다가 石函을 발견하니,
함 중에 뚜껑을 갖춘 구리 그릇이 있었는데 그 뚜껑에는 7언 절구 시 1수와 ‘수진보작’이란 글자가
쓰여 있었으며, 구리 그릇 안에는 소라 모양의 술잔(螺酌) 하나가 있었다고 한다.
이 ‘수진보작’을 운현궁에 바치자, 대원군이 이를 다시 궁궐에 들여보냈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 날 勸講을 마친 뒤 고종은 강관 박규수 이하 경연에 참석한 관원들에게 수진보작을 보이면서,
"이것은 석경루 아래에서 나온 것이다. 이를 보니 몹시 기쁘다.
효도의 도리상 기쁨을 기록하지 않을 수 없다.
內閣提學과 오늘 입시한 강관 ․ 玉堂 이하는 銘을 지어 들이라"고 했다.
다른 관원들과 함께 감상을 마친 박규수는 다음과 같이 소견을 아뢰었다.
‥‥ 그 시의 뜻을 살피건대, 대원군에게 바치며 祝壽한 것으로 太公에 비유한 듯합니다만,
대원군은 전하의 私親이십니다. 唐 ․ 宋 때 사람들의 말에 나라의 존속을 일러 '國太'라고 합니다.
그러니 지금 이 詩語는 아마 國泰에게 바치며 축수함을 이른 듯하옵니다. ‥‥
그러자 고종은 "오늘 경연에서 한 이야기를 朝紙에 반포함이 좋겠다"고 했다.
그 뒤 어명에 따라 金學性(內閣提學) ․ 박규수(강관) 등 7인이「壽進寶酌銘」을 지어 바쳤으며,
여기에 金世鎬(도승지)가 서문을 부치고 李興敏(藝文提學)이 글씨를 써서『壽進寶酌帖』을 만들었다.
규장각에 이 『수진보작첩』100건을 제작하게 하여 고위 관료들에게도 나누어주었으므로,
이를 하사받은 신하들도 잇달아 송축하는 글을 지어 바쳤다.
그런데 수진보작은 도참설을 이용하여 경복궁 중건에 대한 지지 여론을 조성하고자 조작한 물건일
가능성이 농후했다. 이 점은 수진보작 발굴을 전후한 시기에 그와 유사한 물건들이 출현한 사실로도
짐작할 수 있다. 고종 2년 3월 의정부 건물을 개수하던 중에도 석함(石函)을 발굴했는데,
거기에는 新王이 등극해도 경복궁을 중건하지 않으면 또 後嗣가 끊어질 것이라고 위협하는 내용의
'東方老人秘訣'이 새겨져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4월 수진보작의 발굴에 뒤이어, 5월에 경회루 연못에서도 秘記가 발굴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볼 때, 박규수가 수진보작을 대원군에게 바쳐진 물건으로 감정한 사실은,
그가 대원군과 결탁하여 수진보작의 조작에 주도적으로 관여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자아낼 법하다.
그러한 의심의 근거로, 수진보작이 발견된 석경루가 "許眞人"이 살았다는 전설이 있던 곳이자
젊은 시절 박규수가 공부하거나 벗들과 교유할 때 중요한 거점이 되던 곳이라는 점을 들었다.
그러나 석경루는 金正喜 ․ 金炳國 등이 번갈아 소유했던 정자로 당시의 이름난 유원지였으며,
허진인이 살았다는 곳은 석경루가 아니라 그 북쪽에 있는 "白石亭 舊址"이다.
그러나 수진보작의 詩 해석을 박규수가 처음으로 시도한 것은 아니라는 점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고종이 경연관들에게 수진보작을 보이면서
"이를 보니 몹시 기쁘다. 효도의 도리상 기쁨을 기록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한 것은,
박규수가 감정하기 이전에 이미 고종은 수진보작을 자신의 부친인 대원군에게 바쳐진 물건으로
알고 있었다는 증거이다.
또한 박규수는 문제의 詩 全文을 해석한 것이 아니라, '東方國太公'의 의미만을 논했을 뿐이다.
수진보작이 운현궁에 바쳐졌다가 다시 궁중으로 들여보내진 과정에서,
이를 둘러싸고 여러 사람들이 해석을 시도하여
그 시의 의미가 대충은 파악되었으리라고 봄이 자연스럽다.
단, 박규수의 해석은 경연 석상에서 강관이 공개적으로 한 발언이었기에 한층 더 권위가 있었을 터이고,
나아가 朝報에 실림으로써 세간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던 것이다.
「수진보작명」의 製進에서 보듯이, 대원군 정권에 참여한 대부분의 고위 관료들은
秘記와 異蹟을 사실로 받아들이고 이를 다투어 송축했다.
박규수도 그 점에서 예외가 아니었음은 사실이지만,
수진보작의 조작을 기도할 만큼 대원군과 밀착된 관계는 아니었으리라고 본다.
책가도 2폭병(冊架圖 二幅屛) Scholar's Accouterment
작자미상, 19세기 말, 비단에 채색, 주지 173.5×55.6
화면을 3단으로 나누어 서책과 각종 골동기물을 배치한 책가도이다.
앞에 설명한 책가도(운573)는 서책과 골동기물을 분리하여 그린 반면,
이 작품은 단과 칸을 거의 구별하지 않고 같은 곳에 서책과 골동기물을 배치한 점이 구별된다.
또한 우측 중간부분에는 단 구성에 변화를 준 점이 눈에 띤다.
전체적으로 골동기물의 수가 적고 서책을 중심으로 구성한 점,
4단 구성에서 3단 구성으로 단 구성이 줄어든 점 등으로 보아 화면 구성이 단순화 된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조선시대 궁중이나 상류층에서 유행한 책가도의 초기형태를 충실히 따르고 있어
19세기 후반에 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화접도 2폭병(花蝶圖 二幅屛) Flowers and Butterflies
작자미상, 19세기 말, 비단에 채색, 주지 207×60.7
괴석 위에 모란과 찔레, 나리와 작약을 각종 나비와 함께 그린 병풍으로 이로당에서 사용하던 것이다.
오른쪽 그림에는 모란과 찔레가, 왼쪽 그림에는 나리와 작약이 괴석 위에 만개한 모습이다.
각 소재들은 대련형식을 고려하여 그림의 양 바깥쪽에 배치하여 안정감을 준다.
괴석 위에 피어있는 붉은색의 꽃과 녹색의 잎이 대조를 이루어 더욱 화려한 느낌을 준다.
괴석에는 번지기 기법을 사용하여 이끼를 표현하였다.
세밀한 필치로 그려진 검은색과 흰색의 나비들은 화면 안쪽에 배치되어
그림에 활력과 율동감 생동감을 불어넣어주고 있다. 나비는 본래 부부의 금슬과 화합을 의미하며,
모란 역시 부귀영화를 상징하고 있어 모두 길상적 의미를 지닌다.
원체풍의 화려하면서도 우아한 채색을 통해 아름다움이 돋보이며
민화의 모태가 되는 궁중장식화의 일면을 엿볼 수 있는 19세기 작품으로 생각된다.
***흥선대원군 인장
흥선대원군 이하응은 그의 그림이나 글씨에 다양한 내용으로 구성된 많은 인장을 남겼다.
내용별로는 성명인(姓名印 - 李昰應印), 아호인(雅號印 - 石坡), 군호인(君號印 - 大院君章)이
기본이 되고, 그림에 따라 여러 종류의 사구인(詞句印)이나 길어인(吉語印)이 사용되었다.
인재(印材)로는 돌과 옥을 주로 사용하였고,
인뉴에 별다른 장식이 없는 직뉴의 정방형 인장들이 대부분이다.
인장의 용도는 대부분 묵란화의 낙관으로 사용하거나, 도서의 소장인으로 사용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서울역사박물관에 소장된 흥선대원군의 사인(私印)은 15점이다.
(1) 석파(石坡) Stone seal
- 19세기, 돌, 1.6×0.6×1.2
인면(印面) 가운데에 여백을 두고 두 부분으로 나누어 각각 ‘石’, ‘坡’라 각했다.
인뉴면에 일부 균열이 있으며 측면에 ‘上’이라 새겨져 있다.
주문과 백문을 혼용한 주백상간(朱白相間)이다. ‘석파’와 ‘이하응인’은 다양한 형태로 새겨졌으며
흥선대원군 이하응이 전 생애에 걸쳐 자주 사용한 인장이다.
(2) 석파(石坡) Stone seal
- 19세기, 돌, 2.3×2.3×2.7
- 1886년경, 돌, 5.7×5.6×3.1
정방형의 주문방인으로 인변(印邊)의 일부가 탈락되어 있다. 인문은 ‘석파(石坡)’이다.
(3) 이하응인(李昰應印) Stone seal
- 19세기, 돌, 2.3×2.3×2.6, 운1284
- 20세기, 돌, 1.7×1.7×5.2
인면을 세로로 구획해 각각 주문과 백문으로 새겼다.
백문방인으로 인문은 ‘이하응인’이다.
(4) 대원군장(大院君章) Stone seal
- 1886년경, 돌, 5.7×5.7×3.3
- 19세기, 돌, 2.1×2.1×6.0
문방인으로 인문은 ‘대원군장’이다. 인장의 상단 끝부분에 새가 조각되어 있다.
대원군장은 1870년작(51세)인『운계시첩』의 총란도를 비롯해
50대 이후에 그린 묵란도에서 많이 사용하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5) 하응인 ․ 석파거사(昰應印 ․ 石坡居士) Stone seal
- 19세기, 돌, 1.9×2.0×3.5
상하 양쪽에 인문이 있다. '하응인'은 백문방인으로, '석파거사'는 주문방인이다.
(6) 희기사란(喜氣寫蘭) Precious stone seal
- 19세기, 옥, 2.4×1.7×5.9
‘즐거운 마음으로 난초를 그린다’는 의미의 주문방인이다.
흥선대원군의 사구인(詞句印)으로 추정된다. 인장 측면에 인물이 조각되어 있다.
(7) 석파음시처(石坡吟詩處) Stone seal
- 19세기, 돌, 2.5×2.6×7.0
‘석파가 시를 읊는 곳’이란 의미로 백문방인이다.
측면에는 ‘學泉先生淸玩 丙午春日’이 선각되어 있다.
수조(水槽) Cistern
19세기 말~20세기 초, 대리석, 86×84.5×6.7
대리석으로 제작한 수조로 측4면에 이하응의 친필 예서와 행서,
그리고 묵란도와 이하응 작품으로는 보기 드문 대나무(竹) 그림이 각 1점씩 새겨져 있다.
제1면에는 수조의 이름을 ‘옥소(玉沼)’라 짓고 이를 예서로 썼다.
제2면에는 당나라 시인 백거이(白居易)의 시(詩) ‘官舍內新鑿小池(관사 내에 작은 연못을 새로 파다)’를
추사풍의 행서로 썼다.
제3면에는 석파 묵란화에서 보기 드문 비교적 큰 횡축의 난이 새겨져 있다.
화제 ‘與善人居如芝蘭之室(좋은 사람과 더불어 사는 것은 좋은 향이 나오는 방에 들어가는 것과 같다)’은
『설원(說苑)』에서 출전한 시로, 석파가 묵란도에 즐겨 썼던 화제이면서
사구인(詞句印)으로도 즐겨 찍었던 구절이다.
제4면에는 대나무가 그려져 있는데, 석파가 일생동안 오직 ‘난(蘭)’이라는 하나의 제재만을 그리고
다른 화목을 그린 예가 거의 없다는 점에서 매우 귀중한 작품이다.
화제는『예기(禮記)』에서 인용하여
‘猗二靑士貫四時不改顔(아름답구나 푸른 대나무여, 사시사철 그 모습을 바꾸지 않네)’라고 썼다.
이는 글씨와 그림, 시가 한데 어우러진 이하응의 시서화 일치의 경지를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옥소(玉沼)
簷下開小池 처마 아래에 작은 연못을 파니
盈盈水方積 넘실거리는 물이 네모진 연못에 가득하네,
中底鋪白沙 밑바닥에는 흰 모래를 깔고
四隅甃靑石 네 귀퉁이에는 푸른 벽돌을 쳤다.
勿言不深廣 깊고 넓다고 말하지 말라
但足幽人適 은자가 자적하기는 족할만하네.
泛灔微雨朝 이른 아침 가랑비에 출렁이고,
泓澄明月夕 저녁 무렵 명월에는 더욱 맑도다.
豈無大江水 큰 강물 생각이 없으랴마는
波浪連天白 물결은 하늘에 닫아 희도다.
未如床席間 침상에 두는 것 같지는 못하지만
一片秋天月 가을하늘의 한 조각달 떠 있네.
老石道人書 노석도인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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