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림트(G. Klimt)의 황금빛 비밀展
‘연인들의 화가’가 선물하는 뜨거운 입맞춤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클림트의 황금빛 비밀’展
2009년 2월2일-5월15일까지
개막한 뒤 1주일 만에 2만여 명의 관객이 다녀갔다.
‘입맞춤’ ‘베토벤 프리즈’ ‘유디트 I ’ 등의 빼어난 작품으로
‘연인들의 화가’라는 별칭을 얻은 클림트의 대표작 100여 점이 출품되었다.
평생 사랑을 테마로 그림을 그린 그의 불꽃같은 영혼을 만날 수 있다.
성인 1만6000원, 청소년 8000원, 어린이 5000원. 02)334-4254, www.klimtkorea.co.kr
클림트(Gustav Klimt)와 성
지식마저 해체되고 새 생명이 솟는다.
클림트, <키스>, 1908, 유화, 180x180cm, 빈 벨베데레궁 미술관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열리는 구스타프 클림트(G. Klimt) 展이
비싼 관람료에도 불구하고 많은 관객을 끌어 모으고 있다.
‘황금빛 유혹’이라는 수식어가 잘 어울리는, 도발적이고 관능적인 그의 예술은
이처럼 어디서나 대중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는다. 그 ‘치명적인 관능’은 도대체 어디서 온 걸까?
클림트(G. Klimt)의 걸작 <금붕어>를 보자.
<금붕어>는 깊은 심연에서 벌거벗은 세 여인이 부유하는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두 여인은 관객을 향해 등을 돌리고 있으나, 그 자태가 앞을 바라보는 여인 못지않게 유혹적이다.
특히 살짝 뒤를 돌아보며 빨간 머리를 휘날리는 맨 아래쪽 여인은
노골적인 도발 의지를 드러내고 있다.
이 그림은 그의 예술을 폄훼한 당시 사회 지도층의 위선과 몰이해를 비판하기 위해 그린 그림이다.
그 무렵 클림트는 교육부의 요청으로 빈 대학에 설치할 ‘학부 회화’를 그리고 있었다.
<철학>, <의학>, <법학>의 세 주제로 구성된 대작 ‘학부 회화’는,
이 세 학부를 ‘어둠을 극복한 빛’의 상징으로 나타내 이성의 위대함을 표현하도록 되어 있었다.
관능의 순수한 가치 부각 ‘가부장적 도덕률’ 파괴
근원적 존재로서의 여성 복권… 남성성과 화해도
하지만 중도에 공개된 ‘학부 회화’는 대학 당국과 사회 지도층을 경악하게 했다.
이성의 승리는커녕 관능적인 누드 이미지들이 욕망과 무질서의 곤죽을 빚어내는 듯한 그림이었기
때문이다. 87명의 빈 대학 교수가 교육부에 작품 설치 계획의 철회를 요구했고,
이에 격분한 클림트는 앞에서 말한 <금붕어>를 그려 그들의 태도를 비난했다.
클림트, <금붕어>,
1901~02, 유화, 150x46cm, 졸로투른 시립미술관
<금붕어>에서 우리가 인상적으로 보게 되는 것은 에로티시즘의 승리에 대한 화가의 확신이다.
심연을 떠도는 여인들은 그들의 관능으로 어떤 명철한 지성이라도 다 녹여버릴 태세다.
클림트는 세상의 그 어떤 학문도 이 생명의 힘을 이길 수 없다고 보았다.
그에게는 모든 지식과 문명이 다 이 힘의 자식이었다.
작품을 좀 더 분석해 보자.
<금붕어>뿐 아니라 <물뱀> 등 클림트의 그림에서는 곧잘 심연이 등장한다.
이 물은 한마디로 태초의 양수다.
모든 생명활동, 나아가 이성도, 학문도, 문명도 이 태초의 물로부터 나온 것이다.
그 작동원리가 에로티시즘이다.
이 원리를 그리지 않고 어떻게 이성과 학문의 진면을 표현할 수 있다는 말인가.
인간은 몸을 가진 존재고, 존재의 시작은 성에서 비롯되며, 성의 중심에는 여성이 있다.
이성이든 문명이든 호르몬을 전제하지 않고 인간을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 에로티시즘의 진실을 클림트는 부단히 조형으로 표현하고자 애썼던 것이다.
클림트, <다나에>
1907-07년경, 유화, 77x83cm, 빈 디한트 컬렉션.
제우스가 금비로 변신해 아이를 잉태하게 한 여인 다나에.
태아 같은 포즈가 생성과 창조의 원리로서 에로티시즘의 힘을 드러내 보인다.
클림트가 활동할 당시 빈은 파리 못지않은 예술과 사상의 중심지였다.
부르주아지의 문화적 열정은 빈의 살롱과 카페, 극장을 풍요롭게 했다.
하지만 곧(1918년) 무너져 내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수도로서 빈은
구체제의 모순이 압축된 곳이었다. 핵심 정치세력인 자유주의 세력은 사회 발전의 견인차 역할을
해내지 못하고 궁정귀족, 관료 등 보수적인 구세력과 타협하면서 근근이 명맥을 이어나갔다.
그러나 그마저도 사회주의, 민족주의, 반유대주의 등 제반 세력의 도전을 받아
1900년경 의회권력을 상실하기에 이른다. 무기력하고 분열된 사회에 대한 젊은 세대의 거부는
자유주의가 내세운 ‘합리적 인간’에 대한 거부로 나타났고,
이는 무의식과 본능의 세계로 대변되는 ‘심리적 인간’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다.
일종의 오이디푸스적 반항의 소산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런 지적 반항이 있었기에
프로이트의 위대한 정신분석학적 업적과 클림트의 우상파괴적인 에로티시즘 미학이 탄생할 수 있었다.
이는 어떤 면에서 해체를 앞둔 사회였기에 가능한 문화의 묵시록적 발효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해 우리가 주목해 볼 필요가 있는 부분은,
클림트 발효된 에로티시즘 안에는 나름의 페미니즘적 성격이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이다.
에로티시즘은 곧잘 성 상품화의 수단으로 지탄 받는다.
하지만 클림트의 전시에 유독 여성 관객이 많이 몰리는 데서 알 수 있듯
클림트의 에로티시즘은 그런 부정적인 미학으로 이해되지 않는다.
그의 그림은 퇴폐적이고 퇴영적인 요부들로 가득한 것 같으나,
그들은 한낱 유혹자라기보다는 생성과 창조의 여신인 대모(大母, Great Mother)에 가깝다.
전통사회는 물론 근대사회도 기본적으로 남성 중심의 사회였다.
남성 중심의 사회는 본질적으로 이분법의 사회다.
이성, 문명, 진보는 남성의 세계에 속하고, 광기, 자연, 정체는 여성의 영역에 속한다.
이런 이분법적 사고 아래서 여성의 권리를 주장하는 여성들은 곧잘 요부로 매도됐다.
클림트의 시대의 유럽 여성운동은
1884년 프랑스와 1894년 독일에서 본격적인 여성교육기관을 탄생시켰고,
핀란드(1906), 노르웨이(1913), 러시아(1917) 등지에서 참정권을 획득했다.
이런 진보적인 여성운동에 대한 가장 효과적인 제재는
그 선구자들에게 요부의 탈을 뒤집어씌우는 것이었다.
클림트의 ‘요부상’은 얼핏 이런 가부장문화의 ‘네거티브 전략’을 따르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유디트> 등 관능의 절정을 보여주는 그의 ‘요부’들은
오히려 에로티시즘이 거부할 수 없는 힘을 갖고 있고 그것이 우리의 운명을 좌우한다는 사실,
그리고 그것이 근본적으로 우주의 순환과 생성 원리로부터 나온 것이라는 사실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관능의 순수한 가치를 인정함으로써 가부장사회의 도덕률을 깨고
그럼으로써 대모, 곧 근원적 존재로서 여성을 인정하게 하는 힘이 그의 예술에는 있는 것이다.
이렇게 에로티시즘의 미학으로 여성을 복권시킨 그의 그림은
나아가 남성과 여성, 남성성과 여성성의 진정한 화해도 시도한다.
그 대표적인 걸작이 유명한 <키스>다. 그림의 구성은 단순하다.
꽃이 핀 벼랑 위에서 남녀가 서로 껴안고 있고 남자는 여자의 뺨에 키스를 한다.
둘 다 금빛 옷을 입었는데,
금장식은 남녀의 옷에 그치지 않고 여자의 뒤꿈치에서 남자의 어깨 부분까지
일종의 광배 같은 것을 형성한다. 옷과 광배를 한데 이어 보면 남성의 성기 형태가 만들어진다.
그러니까 지금 남성 성기 모양의 광채 안에서
두 사람의 젊은 남녀가 진한 화해의 키스를 나누고 있는 것이다.
이는 남성 안의 여성성과 남성성의 화해를 의미한다.
가부장사회에서는 성역할을 엄격히 구분하기 때문에
남성에게도 여성성이 있고 여성에게도 남성성이 있다는 사실은 결코 인정되지 않는다.
남성이든 여성이든 주어진 성역할을 철저히 따라야 하고
그렇지 않을 경우 그것은 기존 질서에 대한 도전으로 여겨진다.
따라서 남성 안의 여성성과 여성 안의 남성성은 시종일관 억압을 당한다.
여성 억압이 남성 억압이기도 한 것은 그것이 남성 안의 여성성에 대한 억압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남녀 화해란 남성과 여성의 화해를 넘어
이렇듯 남성 안의 여성성과 여성 안의 남성성이 그 반대의 정체성과도 화해를 하는 것이다.
남자도 사람들 앞에서 울 수 있고 여자도 ‘사내다운’ 호걸이 될 수 있다.
그것이 가능할 때 남성과 여성은 서로 동등한 인간으로서 진정한 의미의 동료가 될 수 있다.
클림트의 <키스>는 바로 그 사실에 대해 이야기하는 작품이다.
- 2009-03-09, 한겨레
- 이주헌의 알고싶은 미술
1. 클림트의 대표작 ‘유디트 I’ 2. 요하나 슈타우데 초상(1917년, 유화, 70X50cm) 3. ‘캄머성 공원의 산책로’(1912년, 유화, 110×110cm)
1. 관람객들이 클림트 말년의 대표작 ‘아담과 이브’를 보고 있다. 2. ‘클림트의 황금빛 비밀’ 전시회장 내부. 1862년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난 클림트는 동양적인 장식양식을 응용해 템페라·금박·은박·수채를 함께 사용한 다채롭고 독창적인 기법을 구사했다.
34.14m 길이의 거대한 벽화 ‘베토벤 프리즈’는 전시실 삼면의 벽을 아우르는 3개 섹션으로 구성돼 있다. 작품은 이 가운데 두 번째 섹션인 ‘적의 세력들’. - 정현상 기자 / 사진 · 장승윤 기자, 동아일보 - 2009.03.01 통권 594호(p338~341)
‘아담과 이브’, 1917년, 캔버스에 유화, 173X60cm, 벨베데레 미술관, 빈 봄날 늦은 아침 서울의 거리를 걷는다. 진눈깨비를 지나고, 꽃샘바람을 지나고, 안개와 황사를 지나, 마침내 4월의 햇빛 속으로 들어간다. 2009년 서울의 봄은 황금빛 황홀경에 빠져 있다. 우리의 수도 서울이 언제 이토록 금빛으로 눈부셨던가. 마치 오스트리아 빈이 통째로 서울로 옮겨온 느낌이다. 빈에서 서울까지, 클림트(G. Klimt · 1862∼1918)를 만나러 가는 길은 멀고도 가깝다. 몇 해 전 여름 오스트리아 빈의 벨베데레 궁 옆 호텔에 일주일 동안 머물렀다. 원래는 빈에서 사흘을 묵기로 예약돼 있었으나, 예정일에 앞당겨 도착했고, 오래 머물렀다. 그때 유럽의 동쪽에는 100년 만에 홍수가, 서쪽에는 혹서가 몰아닥쳤다. 나는 홍수로 갈 길이 막혀버린 채 신기루 속을 헤매 다니듯 8월의 빈을 순례했다. 천재지변은 뜻밖의 선물로 지치고 상심한 여행자를 위로했다. 클림트와의 만남이 그것이었다. 나는 수시로 벨베데레 궁의 오스트리아 미술관에 소장된 클림트의 작품들-특히 ‘유디트’와 ‘키스’-앞에 가 섰다. 1년 전 나는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라는 17세기 서양 최초의 여성화가의 일대기를 그린 소설을 한국에 번역 소개했고, 시대를 초월해 그녀의 존재를 예술사에 우뚝 세워준 ‘유디트’의 족적을 따라 로마와 피렌체의 현장을 섭렵한 뒤였다.
‘마리아 뭉크 초상’, 1912년, 캔버스에 유화, 50X50.5cm, 개인 소장 ‘유디트’와 마주한다는 것은 ‘유디트라는 하나의 역사’와의 대면을 의미한다. 유디트는 성서에 나오는 여성으로 앗시리아의 왕비다. 적장 홀로페르네스가 남편을 죽이고 자신과 백성을 정복하려 하자 미모로 꾀어서 동침을 가장, 잔혹하게 참수한다는 내용이다. 미켈란젤로를 비롯해 보티첼리, 카라바조, 루벤스 등 당대의 일급 화가들이 화제(畵題)로 다루면서 유디트는 하나의 미술적 화두가 되었다. 이 유디트의 역사에 혁명적인 획을 그은 두 사람이 있는데,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와 클림트다.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는 실제 자신이 겪은 강간 사건을 중첩시켜 잔혹한 복수의 현장을 묘사했고, 클림트는 복수의 격정 뒤에 오는 감정 상태를 황금빛 관능으로 승화했다. 클림트가 서울에 온다는 소식이 풍문으로 전해졌을 때, 나의 관심은 당연히 ‘유디트’의 동행 여부에 쏠렸다. 서울에서 만나는 ‘유디트’는 어떤 느낌일까. 벨베데레 오스트리아 미술관 현장에서 만난 그녀는 알려진 팜 파탈의 파괴적인 이미지보다는 에로스(큐피드)의 화살 앞에 놓인 성녀 테레사의 이미지가 강했다.
‘유디트Ⅰ’, 1901년, 캔퍼스에 유화, 84X42cm, 벨베데레 미술관, 빈 미의 역사에서 볼 때 에로티시즘의 정점인 ‘테레사 성녀의 황홀’이 (로마, 비토리오 대성당, 베르니니 作) 클림트의 ‘유디트’에서 언뜻 보이더니, 그의 또 다른 걸작 ‘키스’에서 확연하게 잡혔다. 미술사에는 ‘유디트의 역사’만큼이나 키스의 역사도 풍부한데, 로댕의 ‘키스’, 마르그리트의 ‘키스’, 뭉크의 ‘키스’, 그리고 클림트의 ‘키스’가 있다. 그런데 클림트의 ‘키스’는 여느 화가의 그것과는 달리 입맞춤이 아니다. 둘이 하나가 되는 첫 순간이 입술과 입술의 키스에서 비롯된다면, 클림트의 ‘키스’는 한 남자가 두 손으로 여인의 얼굴을 움켜쥐고 자신의 입술을 여자의 뺨에 대고 삼킬 듯이 빨아들일 뿐 여자의 입술에 포개지 않는다. 남자에게서 느껴지는 괴력의 보이지 않는 쾌락과 반대로 눈을 살포시 감은 여자의 표정은 그 어떤 외부의 힘(욕망)에도 깨어날 것 같지 않은 죽음과도 같은 고요와 관능의 내적 절정을 보여준다.
‘여자 누드’, 1883년경, 캔버스에 유화, 86.5x42.5cm, 개인 소장 우리가 한 점의 그림 앞에 서기 위해 오랜 시간 기획하고 먼 길을 떠나는 것은 ‘그것이 놓여 있는 자리’까지를 포함해서 하나의 작품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혹시 클림트가 살았던 세기말의 풍광을 고스란히 간직한 빈에서 숨을 쉬는 그의 작품들이 아시아의 첨단을 달리는 서울로 옮겨오면 그의 고유한 황금빛 아우라는 사라지고 마는 것은 아닐까.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만난 클림트의 걸작들은 아우라의 상실보다는 관람객의 열기에 한층 신비롭게 부활하고 있었다.
위: ‘누워 있는 소녀의 얼굴’, 27.3X42.2cm 아래: ‘누워 있는 남자의 얼굴’, 4.8X31.4cm 부르크테아터에서 상연한 셰익스피어의 연극을 위한 습작, 1887년경, 종이에 검은색 크레용과 연필, 알베르티나, 빈 서울에서의 클림트전은 희귀한 기회인만큼 적어도 세 번은 만나야 ‘클림트를 보았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빈의 벨베데레 옆 호텔에 일주일간 머물며 내가 실천했던 감상법이기도 하다. 한 번은 ‘유디트’와 그의 ‘빈의 여인들’을 위해, 또 한 번은 ‘베토벤 프리즈’를 위해. 마지막 한 번은 아쉽게도 벨베데레에 두고 온 ‘키스’를 위해, 오스트리아 빈으로!
아멜리 주커칸들 부인의 초상(Portrait of Amalie Zuckerkandl)
1917 unfinished, Oil on canvas, 128X128cm, Belvedere Museum, Vienna
주커칸들家와 클림트는 작가이자 비평가였던 베르타 주커칸들을 통하여 두터운 친분을 가지고 있었다.
베르타 주커칸들의 동서인 아멜리 주커칸들을 그린 이 초상화는
이르면 1913년 또는 1914년에 의뢰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본 작품은 클림트가 1917년 즈음에 작업 한 것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 부인의 초상Ⅱ>과
본 작품과 매우 흡사한 화법을 띠고 있는 것을 미루어 두 작품과 동시에 작업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제 1차 세계대전 중, 아멜리는 의사였던 남편을 따라 렘버그로 떠나 그곳에서 간호사 활동을 한다.
이런 연유로 클림트는 그녀가 떠난 1914년부터 작품 진행을 중단하게 된다.
미완성이기는 하나 작품에서 볼 수 있듯 클림트는 아멜리가 의자에 앉은 모습을 그리려고 구상했었다.
구성적인 면에서 클림트는 1907년 완성된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 부인의 초상Ⅰ>을 인용하고 있으나
아멜리의 초상화에서는 금을 아끼고 대신 밝은 녹색과 노란색을 사용했다.
아델레의 초상화에 많이 사용된 기하학적인 무늬 대신으로는 꽃 무늬를 사용하려던 것으로 보인다.
그녀의 얼굴과 어깨까지는 완벽히 완성된 상태이며
그녀의 하얀 피부는 어두운 색깔의 머리칼과 목 뒤로 묶은 레이스 목걸이와 강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이 작품의 포인트는 밝게 빛나며 관람객을 똑바로 응시하고 있는 그녀의 두 눈이다.
그녀의 어깨는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채로 검은 테두리에 둘러 쌓여 있다.
작품의 배경은 녹색으로 점철되어 있고 그녀의 드레스와 숄도 클림트의 능수능란한 스케치로
본 작품을 채우고 있다.
미아 뭉크 초상(Portrait of Maria Munk)
1912. Oil on canvas, 50 X 50.5cm. Private Collection, London
리아가 24세의 나이로 자살을 하자 뭉크 가족은 클림트에게 영정 그림을 부탁한다. 그 당시 그녀의 자살에 대한 기사는 젊은 여자의 비극적 죽음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어제 자신의 집에서 5mm 리볼버로 자신의 왼편을 쏘았다. 응급차가 도착했지만 담당자는 그녀가 이미 사망했다고 말해 줄 수 있는 것뿐이었다.” 리아의 어머니 아란카는 클림트의 중요한 후원자였던 세레나 레더러와 자매였다. 클림트는 리아의 젊고 아름다운 모습을 그의 초상화에 영속시켰다. 그는 그녀의 이목구비와 살짝 벌어진 입을 아주 세밀하게 표현했다. 그녀의 눈썹 한 올 한 올까지 볼 수 있는 정도이다. 그녀의 얼굴은 어깨로 자연스럽게 내려오는 갈색 머리칼로 강조 되어 있다. 섬세하고 세밀하게 표현된 그녀의 머리와 대비하며 그녀가 누워있는 베개와 옷은 거친 붓질로 표현 되어 있으며 그녀는 마치 장미 꽃 위에 누워 있는 것처럼 보인다. 푸른빛의 뒤 배경은 마치 꽃들이 헤엄을 치고 있는 듯한 물을 연상시킨다. 클림트의 이 작품은 셰익스피어의 오필리아와 연관 지어 지기도 한다. 오필리아는 셰익스피어의 작품에 등장하는 햄릿에 대한 뜨거운 사랑으로 물에 빠져 목숨을 끊은 여인이다. 어떤 기자가 리아의 죽음이 그녀의 행복 하지 못했던 사랑 때문이라고 한 것을 미루어 보아 같은 소재에 영감을 받은 클림트가 리아를 오필리아처럼 표현했을 가능성이 높다.
<Portrait of Marie Breunig> 1894, 155×75cm, Oil on canvas, Private Collection, Vienna,
이 <Portrait of Marie Breunig>는 드레스에 비치는 빛의 반사나 검은색 유리구슬, 반지 등의 장식처럼 작은 디테일을 묘사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했고 벽과 구분되는 윤곽선을 정확하고 정밀하게 그렸다. 퍼프소매의 드레스와 왼쪽 팔에 끼고 있는 긴 검은색 장갑은 하얀석회벽과 강한 대비를 이룬다. chaise longue라고 하는 뒤로 젖혀지는 긴 의자와 퍼프 소매는 연출된 직각의 배경과 맞물려 굉장히 포멀한 느낌을 주는데, 이 그림처럼 굉장히 장식적이고 포멀한 요소로써의 의자 묘사는 클림트 회화 초기의 특징적인 부분이기도 하다. 그림의 기본구조는 아래 그림인 존 싱어 사전트 John Singer Sargent(1856-1925)의 <Madame X>를 연상시키며, 이 그림은 이 시기에 그려진 가장 중요한 초상화 중 하나이다. 주위의 반발이 너무 심해 다시 어깨를 올려서 그렸다고 전한다.) John Singer Sargent, <MadameX(Madame Pierre Gautreau)> 1884, 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New York
(원래는 한 쪽 어깨끈이 내려와있는 그림이었는데 당시 시대에는 그것때문에 스캔들까지 일어났고
심지어 클림트는 사전트의 그림에서 가구에 손을 올려놓고 있는 모티브를 따온 것처럼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이 위대한 화가는 이 컴포지션을 더욱 발전시켜 단지 모방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얼마나 능력있는 데코레이터이며 창조자인지를 부여주고 있다.
그는 빈 미술사박물관 계단장식에서 삼각소간(spandrel: 인접한 두 아치 사이의 삼각형 모양의 빈 부분)에
그린 그림과 이전에도 올라온 포스트인 <Two Girls with Oleander>에서
초기 그림 배경에 건축적인 요소를 사용했던 것이다.
고대의 미술품에서 기원한 이러한 아이디어들은 딱닥한 직각형식으로 나타난다.
이 그림의 모델인 마리 브루니(Marie Breunig)는 보잘것 없는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성공한 비엔나 사업가와 결혼하였고, 또한 이 그림이 그려진 시기쯤에는 클림트의 연인이기도 했던
에밀레 플로제(Floge)자매들과 친했으며 자매들이 운영하던 패션 살롱의 고객이기도 했다.
Portrait of Adele Bloch-Bauer II. 1912.
Oil on canvas. 190 x 120 cm. Private collection.
클림트가 Adele Bloch-Bauer 을 그린 첫 작품이 앉아있는 모습이라면
이 작품의 Adele은 서있는 모습이며, 그리고 전 작품이 금은색이 강하게 들어 있다면
이 작품은 더 부드럽고 밝아진 화려한 색채를 사용하고 있다.
꽃과 기마병과 사람들, 집의 모습들이 모두 동양 모티브의 배경으로 이루어져 있다.
첫 작품과 이 작품이 5년의 간격을 가지고 있는데 분명히 클림트는 새로운 방법론을 선택한 것.
미술사학자 Hugo Harderfeld는 이런 변화를 '경의에 찬 시작'이라고 말한다.
이제 클림트는 부드럽고 자연스러운 초상을 그리게 되는데,
여기에서는 인생에 대한 갈망과 섬세한 여성의 모습이 우아하게 드러난다.
깃털 달린 검은 색 모자와 푸른 모피장식은 역시 그녀의 부유함을 드러내고 있지만
황금옷을 입은 관능적인 여인이 아닌
큰 모자와 아름다운 옷을 입은 비엔나 사교계의 여인으로 나타나고 있다.
<Portrait of Adele Bloch-Bauer I>. 1907.
Oil on canvas. 138 x 138 cm. Private collection
그녀는 은행가이자 사업가였던 Ferdinand Bloch와 결혼했고 클림트의 중요한 스폰서였다.
남편이 직접 빈에서 가장 유명한 화가 클림트에게 그녀의 초상화를 의뢰했고
그녀는 풍부한 재정상태를 과시하기 위해 화려한 목걸이와 모피를 착용하고 있다.
그녀는 클림트에게 1899년부터 여러 영향을 받았고 이런 관계는 몇년 동안 지속했다.
그 결과 그녀는 클림트가 두 번이나 그린 유일한 여성이었다.
또한 <유디트Ⅰ>의 모델이 되기도 하는데, 여기에서 보이는 목걸이와 유디트의 모델의 목걸이가 같다.
이 초상화는 클림트의 초상화 중에서 가장 화려한데, 금은박이 정교하게 입혀져
모델이 신비스럽게 보이기까지 한다. 1925년 Adele가 죽을 때 그녀는
그림을 Austrian State Gallery갤러리에 기증하기를 요구했지만 이는 실현되지 않았다.
1938년 나치가 오스트리아를 침략했을 때 그녀의 남편 Ferdinand는 유태인이었기 때문에
그의 재산을 포기하고 해외로 도피했고 그 재산 대부분을 몰수당했던 것이다.
이후 Ferdinand는 자식이 없었던 관계로 그의 재산을 조카들에게 물려주었다.
전쟁이 끝나고 한참 후에도 이 그림을 돌려받겠다는 시도는 번번이 무산되었고,
이후 미국의 대법원에 의해 비슷한 결정이 난 후 2006년에
겨우 오스트리아 법정은 상속인들에게 이 그림의 소유권이 있다는 판결을 결국 내리게 된다.
또한 이 그림은 경매될 때 당시 경매 사상 최고가로 1억3500만 달러에 낙찰되었는데,
낙찰자는 에스티로더 화장품 회사의 후계자인 로날드 로더였다고 한다.
<Portrait of Fritza Riedler> 1906
Oil on canvas, 153 x 133 cm, Vienna, Ôstereichische Galerie im Belvedere.
Fritza Riedler는 빈 추밀 고문관이었던 독일인의 아내였는데, 그녀도 예술 애호가였다고 한다.
Fritza Riedler의 남편이 직접 의뢰하였고, 초상화로 사각형 화면 구성은 다른 초상화와 비슷하지만
점점 장식 모티브가 강해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손과 얼굴은 매우 사실적인데 반해 배경의 기하학적 패턴은 굉장히 2차원적이고 화려하다.
이 초상화는 <아델블로흐 바우어Ⅰ>과 함께 클림트가 벨라스케스의 마리아 테레사 초상화에 자극받아
그린 그림이라고 한다. 클림트가 가장 좋아했던 화가가 바로 벨라스케스였다.
Sonja Knips 1898 ,Oil on canvas. 145 x 145 cm.
The Österreichische Galerie Belvedere, Vienna, Austria Tiroler Landesmuseumm
가난을 벗어나 부와 명예를 쥐어야만 했던 클림트가 그린 초상화는 굉장히 비쌌지만,
그는 버는대로 마구 쓰는 통에 별로 저축을 하진 못했다고 하는데,
이 Sonja Knips의 초상화는 클림트 최초의 정사각형 대형 초상화이다.
빈 분리파를 결성했던 시기의 작품으로
화면 색채를 의식적으로 분리해 어둡게 처리한 배경과 화사한 모델의 의상이 대비된다.
소냐는 빈 제국 육군 여단장의 딸이었고 사업가 안톤 클립스의 아내였는데,
그녀는 빈 분리파의 후원자빈 분리파의 후원자였다고 한다.
한편 벨베데르 궁에 걸린 Sonja Knips의 대형 초상화를 보면
관람자가 그림을 중앙에 두고 오른쪽 왼쪽으로 움직여도
모나리자처럼 초상화의 모델인 소냐의 눈동자가 계속해서 관람자를 쳐다보는 느낌을 준다고 한다.
● 구스타프 클림트 作 - 희망 1 = http://blog.daum.net/gijuzzang/1462148
● 구스타프 클림트 作 - 다나에 = http://blog.daum.net/gijuzzang/696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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