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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역사박물관] 운현궁을 거닐다 展 / 운현궁 가계

Gijuzzang Dream 2009. 3. 20. 02:44

 

 

 

 

 

 운형궁을 거닐다 표지

 

 

 

 

 

 

     

 

 

 

 

운현궁으로 들어가기 위한 정문 솟을대문에 붙어 있는<雲峴宮> 편액글씨는

한국서예 학술원장인 초정 권창륜 (艸丁 權昌倫, 1943~  )글씨이다.

초정은 예천군 용문면 능천리에 ‘전통서예 체험관’을 2006년도에 건립. 

지역출신 서예가들의 업적을 계승, 발전하고 후학 양성을 위해 힘쓰고 있다.

 

 

      

 

  

 

 

 

서울특별시 종로구 운니동에 위치한 운현궁(雲峴宮)은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이하응(李昰應, 1820~1898)의 사저(私邸)이자

둘째 아들인 고종(高宗, 1852~1919)이 왕위에 오르기 전 살던 잠저(潛邸)이다.

 

1863년 고종이 왕위에 오르면서 흥선군(興宣君)이었던 이하응은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으로,

이하응의 사저는 운현궁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후 운현궁은 흥선대원군의 정책과 개혁이 이루어지는 역사의 중심무대가 되었다.

 

운현(雲峴)이란 당시 서운관(書雲觀)이 있는 그 앞의 고개이름이었으며,

서운관은 세조 때 관상감(觀象監)으로 개칭되었으나 별호로 그대로 통용되었다.

서운관의 명칭인 운관(雲觀)과 운관 앞의 고개를 가리키는 운현(雲峴)이라는 명칭이 그대로 사용,

운현궁(雲峴宮)이었던 것이다.

 

운현궁에는 4대문이 있었다.

현재 덕성여대 정문이 운현궁의 서문이었고, 교동초등학교 남쪽에 남문이 있었고,

옛 금위영자리인 삼환기업 남쪽에 고종의 전용문인 경근문(敬覲門)이 운현궁의 동문이었으며,

지금 김승현家 주위로 흥선대원군의 전용문인 공근문(恭勤門)이 북문으로 있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인 1912년 토지조사를 실시하면서 대한제국의 황실재산을 몰수하여 국유화하고

이왕직 장관을 시켜서 운현궁을 관리하게 하였다. 그러나 실제로 운현궁을 유지, 관리하는 일은

소유권에 관계없이 이로당의 안주인들이 계속 맡아서 지켜왔다.

운현궁의 소유권이 다시 대원군의 후손에게 넘겨지게 된 것은 1948년 미군정청의 공문에 의해서였다.

이후 그 소유권을 중심으로 대한민국 정부와 대원군 후손 사이에 법적 공방이 있었으나

그 해 9월21일 결국 대원군의 5대손 이청씨에게 운현궁 소유권이 확정되었다.

그러던 것이 1991년 운현궁을 유지, 관리에서의 여러 가지 어려움으로 양도의사를 이청씨가 밝힘에 따라

서울시에서 매입하게 되었고, 1993년 12월부터 보수공사를 시작하여 현재의 모습으로 정비되었다.

 

본래 흥선군의 사저였을 때 운현궁의 위치는 동북쪽 뒤편 창덕궁과 경복궁의 중간 부근으로

지금의 운현궁과 덕성여대 자리였는데 1966년 헐리고 그 자리에 중앙문화센터가 세워졌다.

그러나 고종이 즉위한 이후 운현궁(雲峴宮)은

증축하여 규모가 가장 커졌을 때는 주위 담장 길이가 수리(數理)나 되고

4개의 대문이 웅장하여 마치 궁궐처럼 엄숙하였다고 하는데,

舊TBC방송국, 현재의 덕성여대 부설 평생교육원으로 사용하고 있는 양관(洋館), 일본문화원,

중앙문화센터, 교동초등학교, 삼환기업 일대까지 포함된 넓은 지역이었으나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규모가 크게 줄어들어

현재는 1996년 새로 증수하여 복원하면서 대지를 동서로 크게 양분하여 동편에는 세 건물들이 들어섰고,

서편은 빈 마당으로 남겨 도로와 접하고 있다.

 

동편에 있는 세 건물들은

남쪽에서 북쪽으로 대원군의 사랑채였던 노안당, 노락당, 그리고 이로당 순서로 자리 잡고 있다.

노안당 남쪽에 원래 아재당(我在堂)이 있었으나 없어졌고,

이로당 북쪽에 있던 영로당(永老堂)도 원래 운현궁의 건물이었으나 현재는 개인소유의 건물로 되어

운현궁 영역과는 담으로 구분되어 있다.

현재의 운현궁 건물들은 대원군이 섭정을 행하던 1863-1873년 사이에 지어진 것이 대부분인데

노락당과 노안당은 1864년 9월, 이로당은 1870년 준공되었다.

운현궁은 1977년 사적 257호로 지정되었다.

 

 

 

 

 운현궁家

 

 

  

 

 

                                                인조(仁祖 ; 1595-1623-1649)

 연령군(延齡君 : 숙종의 6남, 1699-1719)                 

             │                                        │

 낙천군(洛川君 : 선조의 7대손, 1720-1737                             

           ├ 계자                          인평대군(隣平大君 : 1622-1658, 인조 3남)

           │                                        │

           │                                        │        

 은신군(恩信君 : 장조의 4남, 1755-1771)        이병원(李秉源 : 인평대군의 5대손)

           ├ 계자                                   │

           │                                        │

 남연군(南延君 : 李球, 인평대군의 6대손, 1788-1836) …··

  ┌───┬──┴─┬────┐

흥녕군   흥완군      흥인군      흥선군

興寧君    興完君     興寅君       興宣君

(李昌應) (李晸應)   (李最應)    (李昰應):1820-1898

                      ┌───┼────┐

                    서자        장남        차남   

                                完恩君    完興君    翼成君

                                (載先)  (載冕, 興王) (載晃, 高宗) ── 익종(翼宗)에 입적

                           1845-1912

                        ┌──┴──┐

                     李埈鎔      李문(+汶)鎔 

                                 (永宣君)        1882-1901

                                1870-1917                           

                          

                           │                     

            계자 ─    李鍝 ─── 부인: 박찬주(박영효:1861-1939 의 손녀)

                  (의친왕 李堈의 차남)       1914-1995

                                1912-1945  

                          

                          

                    ┌──┴──┐

                    李淸         李淙

                           1936-    1940-1966

 

       

 

 

  

 

 

                      황실 가족사진(皇室 家族寫眞) Portrait / 조선말기, 27.0×34.0

                    황실 가족 5명이 앉아있는 흑백사진으로 모두 정식으로 의관을 정제한 모습이다.

                    고종은 턱수염을 길렀고, 순종은 콧수염을 기르고 있으며 의자에 앉아 있다.

                    오른쪽부터 덕혜옹주(1912-1989. 4월21일), 순정효황후, 고종, 순종, 영친왕.

 

 

 

 

 

 

● 운현궁의 주인들

 

흥선대원군에 의해 시작된 운현궁은 첫째 아들인 이재면(李栽冕, 1845~1912),

손자인 이준용(李埈鎔, 1870~1917), 증손자인 이우(李鍝, 1912~1945)에게 계승되었다.

   

 

은신군(1755-1771)

: 사도세자의 동생으로 숙빈임씨 소생. 은언군(1754-1801)의 동생,

제주도에 귀양 가서 병사함, 후에 정조가 비문을 작성하고 글씨를 씀

남연군(1788-1836)

: 인평대군의 6대손 병원(秉源)의 아들로 은신군의 계자(繼子)가 됨,

: 묘소는 충남 예산에 위치함

흥선대원군(1820-1898)

이재면(1485-1912)

: 1900년에 완흥군(完興君)

: 1910년 8월 흥왕(興王)으로 봉해짐, 휘는 희(熹), * 8월 29일 합방조칙

이준용(1870-1917)

: 1907년 순종 즉위 후 영선군(永宣君)에 봉해짐,

: 1912년 준(埈)으로 개명, 이준公으로 불려짐, 고종의 잠재적 대안자로 알려짐.

이우(1912-1945)

: 의친왕의 둘째아들, 양자로 들어옴, 일본군 중좌, 히로시마에서 사망

 

 

 

 1대 이하응(李昰應, 흥선대원군, 1820-1898)

자는 시백(時伯), 호는 석파(石坡), 이름은 하응(昰應). 본명은 채중.

영조의 5대손이며, 조선 제26대 왕 고종의 아버지이다.

이하응은 남연군(南延君) 구(球, 1788-1836)의 넷째아들로 태어났는데,

남연군은 본래 인조의 셋째아들 인평대군의 5대손 이병원의 둘째아들이다.

1815년(순조 15) 정조의 이복동생인 은신군(恩信君, 1755-1771)의 후사가 되면서 구(球)로 개명하고

군(君)에 봉작되었다.

이후 이하응을 비롯한 남연군의 다른 아들들도 왕실 종친으로서 관직에 임명되고 군(君)에 봉작되었다.

 

이하응이 처음 관직에 나아간 것은

그의 나이 15살인 1834년(순조 34) 흥선부정(興宣副正)에 임명되면서부터였다.

이후 몇 차례 가자(加資: 정3품 통정대부 이상 당상관의 품계를 올리는 것)를 통해

1843년(헌종 9) 흥선군(興宣君)에 봉해지게 되는데 이때 나이 24세였다.

1846년 수릉천장도감(綏陵遷葬都監)의 대존관(大尊官)이 된 뒤

종친부의 유사당상, 오위도총부의 도총관 등을 지냈지만,

안동김씨 세도정치 아래 왕족에 대한 감시가 심하자 호신책으로 시정의 무뢰한과 어울리고

구걸도 서슴치 않아 궁도령(宮道令)이라는 비웃음을 사기도 하였다.

왕실의 조대비(趙大妃)와 밀약하여 철종이 후사 없이 죽자

1863년 둘째아들 명복(命福)을 왕위에 세우고 그는 흥선대원군(大院君)에 봉해졌다.

 

흥선대원군은 섭정을 통해 강력한 혁신정치를 추진, 세도정치를 분쇄하고

당색과 문벌을 초월하여 인재를 등용하였으며, 당쟁의 기반이 된 서원을 정리하였다.

또 토호들의 토지겸병을 막고 종래 상민에게만 징수하던 군포를 양반에게도 징수하는 호포법(戶布法)을

실시하였으며, 환곡제를 사창제(社倉制)로 개혁하였다. 복식을 간소화하고 사치를 금하였으며,

《대전회통(大典會通)》《육전조례(六典條例)》《양전편고(兩銓便攷)》등 법전을 편찬하여

법질서 확립에 힘썼다. 반면 경복궁 중건을 위해 원납전(願納錢)을 징수하고, 역역(力役)을 부담시켜

백성의 원성을 사기도 하였다.

또한 서구세력의 차단을 위한 쇄국양이(鎖國洋夷) 정책을 시행하였는데

병인박해를 통해 9명의 프랑스 신부와 8,000여 명의 신도를 처형하는 등 가톨릭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을

가하였으며, 이를 구실로 침공한 프랑스와 제너럴셔먼호사건을 계기로 개국을 강요한 미국을 격퇴하였다.

 

한편 고종비 민비와 권력투쟁을 벌여 최익현 등 유림의 상소로 실각하였고,

1882년(고종 19) 임오군란(壬午軍亂)을 계기로 재집권하였으나

청나라 개입으로 톈진(天津)에 연행되어 3년간 유수생활(幽囚生活)을 하였다.

그 뒤 1886년 위안스카이(袁世凱)와 결탁하여 큰아들 재면(載冕)을 옹립하려다 실패하였고,

1895년 일본공사 미우라(三浦梧樓)가 일으킨 을미사변(乙未事變)을 통하여 정권을 장악하였다.

그러나 아관파천(俄館播遷)으로 친러정부가 성립되자 은퇴하였다.

1907년(순종 1) 8월24일 대원왕(大院王)에 추봉되었다. 시호는 헌의(獻懿).

 

 2대 이재면(李載冕: 1845-1912)

완흥군(完興君) 이재면은 흥선대원군의 장자로

동생 명복보다 7살이 위였으나 왕세자로 간택되지 못하였다.

그는 첫 번째 부인 홍씨를 상처하여 57세에 20세인 계실 이씨(1883-1978)와 결혼하였다.

그의 아들 이준용보다 13살 아래였다.

 

 3대 이준용(李埈鎔: 1870-1917)

흥선대원군의 손자, 이재면의 장자, 자 경극(景極). 호 석정(石庭) ․ 송정(松亭)

영선군 이준용은 노락당 뒤쪽에 송정 사랑채를 지어 그곳에서 기거하다가 운현궁으로 거처를 옮겼다.

1896년 을미사변 직후 일본으로 건너간 후 12년만인 1908년에 귀국하여 운현궁에서 살았다.

1907년 순종황제가 즉위하여 영선군(永宣君)에 봉해지고

1910년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에 승진, 육군참장(陸軍參將)이 되었다.

일본측의 압력으로 내부협판에서 물러났을 때는 극렬한 배일주의자였으나

뒤에 내무아문서리대신으로 있으면서 일본에 협조하여 1910년 한일합방 때 공작 작위를 받았다(이준 公).

그의 부친 이재면이 세상을 떠난 5년 후(1917년) 47세로 세상을 떠났다.

이준용의 뒤를 이을 혈육이 없이 세상을 떠나자 고종의 아들인 의친왕의 아들 이우를 양자로 맞이하였다.

운현궁의 내당 살림살이는 이재면의 부인 이씨가 맡았어야 하는데 한 세대를 건너

대원군의 손자며느리인 이준용의 계실 광산 김씨(1878-1955)가 내당살림을 맡게 되었다.

 

 4대 이우(李鍝: 1912-1945)

흥영군 이우는 이준용의 양자로 들어갈 때 나이가 6세였다.

10세에 일본으로 가서 일본군으로 복무하게 되었으니 이준용이 일본으로 건너간 것이나,

이우가 일본으로 가게 된 것은 모두 일본의 정략적인 음모술책에 기인한 것이다.

일본에서 이우와 결혼한 박찬주(1914-1995)는 박영효의 손녀이다.

 

 5대 이청(李淸: 1936- )

이우의 큰아들 이청은 흥선대원군의 5대손이 되고, 고종으로부터는 4대손이 되는데,

외모라든가 풍기는 모습이 고종을 닮았고, 왕족으로서의 품위를 갖추어 행동하려고 하였다.

일본에서 자란 이청은 어린 시절을 운현궁에서 살지 않았으며,

가끔 한국에 왔을 때 운현궁에서 지냈을 뿐이다.

일제강점기 1912년 토지조사를 실시하면서 대한제국의 황실재산을 몰수하여 국유화하고

이왕직 장관을 시켜 운현궁을 관리하게 하였는데

운현궁의 소유(관리)권이 1948년 미군정청의 공문에 의해서 다시 대원군의 후손에게 넘겨지게 되었다.

그러나 운현궁 관리에 어려움이 있어 이청씨가 1991년 서울특별시에 양도 의사를 밝힘에 따라

1993년 서울시에서 매입하여 1993년 11월부터 운현궁에 대한 보수 및 복원공사가 시작되어

서울정도 600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관리 운영하게 되었다.

 

 

                          흥선대원군 이하응(興宣大院君 李昰應 63세 때 사진

            Picture of Lee Ha-eung's 63 years old, 26.7×21.4cm, 서울역사박물관 소장

왼쪽에 각종 기물이 놓인 서탁을 두고 의자에 앉아 있는 흥선대원군을 찍은 사진이다.

평상복 차림에 오른손을 가슴선까지 들어 책을 펴 들고 있으며, 왼손은 가볍게 무릎 위에 얹었다.

사진의 우측 하단에는 ‘高麗國 大院君 時 光緖八年 歲在 壬午 秋八月 孟日 照於 營務處’,

좌측 하단의 ‘梁時泰 照像館’라고 쓰여 있다.

이를 통해 1882년 음력 8월 7일에 중국 천진 영무처에서 촬영했음을 알 수 있다.

 

 

 

왕(대원군, 1820-1898)은

성(姓)이 이씨(李氏)이고, 휘(諱)가 하응(昰應)이며, 자(字)가 시백(時伯)이고, 호(號)가 석파(石坡)인데,

남연군(南延君, 1788-1836) 충정공(忠正公) 휘 구(球)의 넷째 아드님이시자

은신군(恩信君, 1755-1771) 충헌공(忠獻公) 휘 진(禛)의 손자이시고,

장조(莊祖) 의황제(懿皇帝)의 증손자이시며, 영조대왕의 현손자이시다.

당초 은신군께서 후사가 없어서

인평대군(麟坪大君 : 仁祖의 왕자) 충경공(忠敬公) 휘 요(氵+窅)의 5세손(世孫)

증영의정(贈領議政) 휘 병원(秉源)의 둘째 아드님을 맞아 후사로 삼으셨으니, 이 분이 실로 남연군이시다. 남연군의 비(妣)는 여흥군부인(驪興郡夫人) 민씨(閔氏)이니,

감역(監役) 증우의정(贈右議政) 경혁(景爀)의 따님이시다.

 

 

비(妃)는 민씨(閔氏, 1818-1897)인데,

행판돈녕부사(行判敦寧府事) 증영의정(贈領議政) 민치구(閔致久, 1795-1874)의 따님이시다.

처음에 ‘여흥부대부인(驪興府大夫人)’으로 봉해지셨으며,

광무 원년 정유년(1897) 겨울 12월16일 신미일에 훙서(薨逝)하셨으니, 80세의 수(壽)를 누리셨다.

융희 정미년(1907)에 ‘대원왕비(大院王妃)’로 추봉하고 시호를 ‘순목(純穆)’이라 하였다.

당초 공덕리에 장례지냈으나 이 때에 이르러 합봉(合封)하였다.

 

 

 

 

왕께서는 3남3녀를 탄생하셨다.

맏 아드님은 재면(載冕, 1845-1922)으로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를 지냈고, 완흥군(完興君)에 봉해졌다.

둘째 아드님은 곧 우리 태황제 폐하(高宗, 1852-1919)이시다.

재면은 풍산홍씨(豐山洪氏) 통덕랑(通德郞) 홍병주(洪秉周)의 따님을 아내로 맞이했다가

여주이씨(驪州李氏) 이인구(李麟九)의 따님을 다시 아내로 맞이하였다.

맏 따님은 전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 조경호(趙慶鎬)에게 출가하였고,

둘째 따님은 전 판돈녕사사(判敦寧司事) 조정구(趙鼎九)에게 출가하였다.

 

서출의 아드님은 재선(載先, ?-1881)인데 가선대부(嘉善大夫)의 품계를 받았고

완은군(完恩君)에 추봉(追封)되었으며, 현감(縣監) 신석완(申錫完)의 따님을 아내로 맞이하였다.

서출의 따님은 궁내부(宮內府) 대신(大臣) 이윤용(李允用)에게 출가하였다.

 

재면은 2남3녀를 두었으니,

맏 아드님은 준용(埈鎔, 1870-1917)인데 전 참판(參判)이고, 영선군(永宣君)에 봉해졌으며,

둘째 아드님은 문용(汶鎔, 1882-1901)인데

시종관(侍從官)을 지내고 장례원 부경(掌禮院副卿)을 추증받았다.

따님들은 군수(郡守) 김인규(金仁圭), 전 비서승(秘書丞) 김두한(金斗漢)에게 각 출가하였고,

서출의 따님은 전 주사(主事) 김규정(金圭定)에게 출가하였다.

 

조경호의 아드님은 한국(漢國)인데 규장각 제학(奎章閣提學)이고,

따님들은 전 참판(參判) 김흥규(金興圭), 표훈원 총재(表勳院摠裁) 이재극(李載克),

참봉(參奉) 이면구(李勉九)에게 각각 출가하였다.

조정구의 아드님은 남승(南升)이 전 시종부경(侍從副卿)을 지냈고,

남익(南益)이 전 시종(侍從)을 지냈으며, 남복(南復)이 전 시종관(侍從官)을 지냈다.

- <흥원천봉등록> 헌의대원왕원지(獻懿大院王園誌)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