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운현궁을 거닐다 >
대화 - 운현궁 사람들 (人)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이하응(李昰應, 1820~1898)과
첫째아들 이재면(李栽冕, 1845~1912), 손자인 이준용(李埈鎔, 1870~1917),
증손자인 이우(李鍝, 1912~1945) 등 운현궁 사람들의 모습을 초상화와 사진을 통해 만나볼 수 있다.
흥선대원군 자신이 직접 화제(畵題)를 쓴 초상화(보물 제1499-1호)와 후손들의 초상화는
그들의 정신세계를 담고 있고, 카메라에 투영된 흑백사진은
역사의 무게만큼 무거운 그들의 심정을 반영하고 있다.
또한 운현궁에는 고종, 순종(純宗)과 순종비(純宗妃), 영친왕(英親王)과 영친왕비(英親王妃),
덕혜옹주(德惠翁主) 등 왕실사람들의 사진들이 남아 있어 빛의 굴절을 통해 그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다.
흥선대원군 이하응 초상(금관조복본)
興宣大院君李昰應肖像(金冠朝服本) Portrait of Lee Ha-eung
이한철(李漢喆, 1812~1893 이후) ․ 유숙(劉淑, 1827~1873)
1869년, 비단에 채색, 130.8×66.2 , 보물 제1499-(1)호



X-선, 현미경조사 및 안료의 성분 분석결과를 종합적으로 검토해 본 결과
금관, 얼굴, 족좌대 및 화문석 등에 배채기법을 사용한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복식부분의 경우는 X-선 투과 사진에서 밝게 나타나고 있으나
배채 안료에 의한 영향이라기보다는 적색에 사용된 진사 안료 때문에 X-선 투과 사진에서
밝게 나타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어 배채 유무에 대하여 정확하게 알 수 없었다.
안면은 거의 채색하지 않고 연백과 진사를 혼합한 안료로 배채하였고,
이목구비의 윤곽선과 진하게 표현된 부분은 산화철이 주성분인 안료를 사용하였다.
X-Ray조사 결과 눈은 전체적으로 배채가 되어 있으며,
흰자는 전채 없이 연백으로 매우 두껍게 배채되어 있고 동공과 홍채는 먹으로 채색하였다.
관자와 옷깃은 전채 없이 연백으로만 배채되어져 있다.
옷깃과 소매 등 자색을 띠고 있는 부분에는 진사+연단+먹을 혼합하여 채색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적초의 붉은색은 진사로 채색되어 있으나 배채가 이루어져 있는지는 확인할 수 없었다.
격자무늬 패옥은 금으로 배채한 후 석청으로 격자선을 표현하였으며
표범 고리의 황색은 앞에서 채색하지 않고 자황과 연백을 혼합한 배채만으로 표현하고 있다.
족좌대는 전체적으로 연백 배채가 있으며, 족좌대 모서리 장식부분은 연백을 배채한 후
앞면에서 은을 사용하여 무늬를 표현한 것으로 판단된다.
(흥선대원군 이하응 초상의 X선 사진에서 나타나는 '배채' 부분)
(<조선시대 초상화 Ⅱ> 국립중앙박물관, 2008년, 287쪽)
금관조복에 홀을 들고 의자에 앉아있는 좌안8분면의 전신좌상으로
흥선대원군이 50세가 되는 1869년에 제작되었다.
그림의 우측에 친필로 제작시기와 화사, 장황을 담당한 장인을 써 넣어
이한철과 유숙이 합작으로 초상화를 그리고 한홍적이 장황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얼굴은 진한 갈색으로 이목구비를 그린 다음 가늘고 짧은 갈색 선을 그려 넣어 입체감을 살리고 있다.
의복 또한 굵고 진한 갈색으로 의습선을 그리고, 주변을 선염하였다.
교의에 있는 호피나 패옥, 바닥의 등메 등이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되었다.
부속구로 초상화함과 초상화보, 초상화함보, 향낭 3점과 열쇠가 있다.
*화제(畵題)
余年五十己巳肇夏自題 畵士 李漢喆 劉淑 粧䌙 韓弘迪
내가 50세 되던 기사년 초여름에 스스로 제하다. 화사 이한철 ․ 유숙, 장황 한홍적.
흥선대원군 이하응 초상(흑단령포본)
興宣大院君李昰應肖像(黑團領袍本) Portrait of Lee Ha-eung
이한철(李漢喆, 1812~1893 이후) ․ 유숙(劉淑, 1827~1873)
1869년, 비단에 채색, 131.9×67.7 , 보물 제1499-(1)호
오사모(烏紗帽)에 단령포를 갖추고 의자에 앉아 있는 좌안8분면(左顔八分面)의
전신교의좌상(全身交椅坐像)이다.
오사모는 앞부분에 발색효과를 넣어 앞으로 튀어나온 형태임을 표현하였으며,
흑단령포는 검은 선으로 외곽 및 주름선을 나타내고,
우묵하게 들어간 부분에는 어두운 선염기를 집어넣어 굴곡진 부위를 나타내었다.
바닥에는 화려한 문양의 등메가 깔려 있으며,
목화를 신은 두 발은 족좌대 위에서 자연스럽게 팔자형(八字形)으로 벌어져 있다.
그림 속 단령포의 가슴에 맨 기린흉배는 본래 대군이 착용하는 것이지만,
생전에 대원군이 된 사람은 흥선대원군이 처음이라 복식에 대한 규정이 없어
대군의 흉배를 원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대원군의 복식이 규정된 1885년(고종 22)이후에 찍은 사진에서는
거북 흉배를 착용한 흥선대원군의 사진을 볼 수 있다.
부속구로는 청색의 별지로 된 표제, 초상화함, 초상화함보, 초상화보가 있고 향낭 3점이 있다.
그림 오른쪽에 흥선대원군이 직접 써넣은 화제(畵題)와 영정함의 별폭 홍지 표제를 통해
1863년(고종 1), 흥선대원군이 44세 때 그려진 초본을 본으로 하여
50세가 되는 1869년에 옮겨 그린 것임을 알 수 있다.
*화제(畵題)
余年五十己巳肇夏自題 畵士 李漢喆 劉淑 粧䌙 韓弘迪
내가 50세 되던 기사년 초여름에 스스로 제하다. 화사 이한철 ․ 유숙, 장황 한홍적.
*초상화함 별폭 표제
黑團領袍本 癸亥草本 己巳移摹
흑단령포본 계해년에 그려진 초본을 본으로 기사년에 옮겨 그리다.
흥선대원군 이하응 초상(와룡관학창의본)
興宣大院君李昰應肖像(臥龍冠鶴氅衣本) Portrait of Lee Ha-eung
이한철(李漢喆, 1812~1893 이후) ․ 유숙(劉淑, 1827~1873)
1869년, 비단에 채색, 133.7×67.7, 보물 제1499-(1)호

학자의 평상복이던 학창의를 입고, 제갈량이 썼다는 와룡관을 쓴 뒤 서탁 앞에 앉아 있는
좌안8분면(左顔八分面)의 전신좌상(全身坐像)이다.
갈색의 짧은 선을 덧대어 그린 점이나 이목구비의 표현 등을 볼 때,
얼굴표현은 이한철이 담당하고 의복은 유숙이 담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초상화에서는 바닥에 배경 없이 놓여있는 탁자가 주목되는데 그 위에 놓인 기물들에서
18세기 후반부터 유행했던 문방청완(文房淸琓)이나 고동(古董) 취미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중국풍의 강하고 화려한 기물들이 눈에 띄는데,
서탁 위에 정교한 무늬로 장식된 중국제 서첩과 청화백자 인주함, 탁상시계, 용문양 벼루, 둥근 뿔테 등,
협탁에는 청동제 향로가 놓여있다. 또, 흥선대원군의 오른쪽에는 환도(環刀)가 보이며,
발 앞에는 비단천으로 꾸민 장침까지 있어 화려했던 대원군의 서재 모습을 잘 보여준다.
한편, 이렇게 인물 앞에 서탁이 배치되어 있는 구도는
화면 속 인물과 감상자 사이에 일종의 경계선을 그어 거리감을 유도함으로써
보는 이에게 안정감을 주는 의미가 있다.
그림 오른쪽 위에는 흥선대원군이 직접 쓴 화제가 있고,
초상화함 안에도 역시 친필로 써넣은 별폭의 홍지 표제가 있다. 분홍색의 별지로 된 표지와 초상화함,
초상화보, 초상화함보와 향이 들어있는 향낭 1점, 자물쇠가 부속구를 이루고 있다.
*화제(畵題)
余生於庚辰 模像於己巳 時年五十 畵士 李漢喆 劉淑, 粧䌙 韓弘迪
나는 경진년(1820년)에 태어났는데 기사년(1869년)에 초상화를 그리게 하니 이때 나이가 오십이다.
화가 이한철 ․ 유숙, 장황 한홍적.
*초상화함 홍지 표제
臥龍冠鶴氅衣本 癸亥初本 己巳移摹
와룡관학창의본. 계해년(1863년)에 그려진 초본을 기사년(1869년)에 옮겨 그리다.
타구(唾具) Spittoons
19세기, 놋쇠, 9.0×9.2×9.6×0.2, 운135-1, 운135-2
흥선대원군의 초상화<와룡관학창의 본>의 탁자 위에 놓은 타구를 볼 수 있는데
운현궁의 생활유물에서 주생활용품으로 분류되는 타구(唾具)(유물번호, 운 135)는
운현궁소장품 2점이 전하는데, 형태는 호리병 또는 모래시계와 유사하다.
타구는 실내에서 가래나 침을 뱉는 용기로
내용물이 밖에서 잘 보이지 않도록 하기 위해 가운데를 좁게 하여 위가 뚫려 있게 만들었다.
전체적으로 녹이 슬어 까맣게 변색이 되어 있다.
한편 음식물을 먹을 때 질긴 고기나 삼키기 어려운 것을 뱉을 때 사용되기도 하였는데
이 경우 토구(吐具), 또는 토기(吐器)로 명칭을 달리한다.
- 운현궁 생활유물 Ⅱ, 2004년, 서울역사박물관, 198쪽
흥선대원군 이하응 초상(흑건 청포본)
興宣大院君李昰應肖像(黑巾靑袍本) Portrait of Lee Ha-eung
이한철(李漢喆, 1812~1893 이후) ․ 이창옥(李昌鈺)
1880년, 비단에 채색, 126.0×64.9, 보물 제1499-(1)호

흰색 원형장식이 붙은 흑건에 사방에 검은단을 붙인 청색 학창의를 입고,
의자에 앉아있는 좌안8분면(左顔八分面)의 전신좌상(全身坐像)이다.
얼굴은 윤곽선 주위에 짙은 선염을 가하고 살색의 필선을 가늘게 반복하여 굴곡을 나타냈는데
전체적으로 무표정하고 다소 딱딱한 느낌을 준다.
의습은 청포의 외곽과 주름선을 짙은 청색선으로 칠하고 다시 먹선을 가했으며,
이러한 선묘를 따라 선염기(渲染氣)를 넣는 조선 후기 초상화의 전형적인 묘법을 따르고 있다.
허벅지 사이의 옷 주름선 묘사와 안정적인 앉음새, 화려한 카페트 묘사 등은 주목할 만하다.
흥선대원군의 환갑을 맞아 제작되었으며 50세에 제작된 초상화에 이어 흥선대원군이 직접 화제를 썼다.
그에 따르면 61세 때인 1880년에 이한철과 이창옥이 합작해 그린 그림이다.
부속구로는 초상화함과 초상화집, 초상화함보, 향이 들어있는 향낭 4점, 자물쇠와 열쇠, 열쇠낭이 있다.
*화제(畵題)
余年六十一周甲像 庚辰肇夏自題 畵士 李漢喆 李昌鈺 粧䌙 韓弘迪
내가 61세 되던 환갑 때의 모습이다. 경진년 초여름에 스스로 제하다. 화사 이한철 ․ 이창옥, 장황 한홍적.
흥선대원군 이하응 초상(복건심의본)
興宣大院君李昰應肖像(幅巾深衣本) Portrait of Lee Ha-eung
이한철(李漢喆, 1812~1893 이후) ․ 이창옥(李昌鈺)
1880년, 비단에 채색, 113.7×66.2, 보물 제1499-(1)호
검은 복건에 심의를 갖추고 공수자세(拱手姿勢)를 하고 부좌한
좌안8분면(左顔八分面)의 전신좌상(全身坐像)이다.
흥선대원군이 환갑을 맞아 <흑건청포본(黑巾靑袍本)>과 함께 제작했다.
얼굴은 어두운 갈색기를 띠고 있고 이목구비와 외곽선은 더욱 짙은 색으로 처리했으며
협(頰 : 뺨)과 법령(法令 : 코의 옆 날개에서부터 볼 쪽으로 내려온 주름)부분 역시
약간의 음영을 곁들인 짙은 갈색선으로 처리하였다.
얼굴에 깔려 있는 어두운 토광기와 깊은 주름묘사, 탄력 없이 처진 턱선 처리 등으로
노년기를 맞은 흥선대원군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옥색 포 위에 겹쳐 입은 심의와 머리에 쓴 복건 등 의복의 표현은 이창옥이 그렸을 것으로 추정된다.
굵은 단선으로 옷주름을 그리고 그 주변에 진한 색으로 선염을 가하여 복식의 입체감을 주었다.
흰색 바탕에 청색의 무늬가 있는 돗자리를 바닥에 두어 단아한 유학자의 모습을 잘 느낄 수 있다.
복건심의 초상은 조선 시대 사대부 초상에 줄곧 나타나는 형식으로, 특히 후기에 성행했다.
부속구로는 별지로 만든 표제와 초상화함, 초상화함보, 향낭 2점과 열쇠 그리고 귀주머니가 있다.
*화제(畵題)
余年六十一周甲像 庚辰肇夏自題 畵士 李漢喆 李昌鈺 粧䌙 韓弘迪
내 나이 61세 되던 환갑 때의 모습이다. 경진년 초여름에 스스로 제하다.
화사 이한철 ․ 이창옥, 장황 한홍적.
흥친왕 이재면 초상(興親王 李載冕肖像) Portrait of Lee Jae-myeon
이한철(李漢喆, 1812~1893 이후) 추정
1880년경, 비단에 채색, 73.0×53.0

흥선대원군의 장남이자 고종의 형인 이재면(李載冕, 1845~1912)을 그린
좌안8분면(左顔八分面)의 반신 초상화이다.
이재면의 자는 무경(武卿), 호는 우석(又石)이며 후에 희(熹)로 개명하였고,
1900년에 완흥군(完興君), 1910년에 흥친왕(興親王)에 책봉되었다.
사모(紗帽)에 단령을 입고 있는 모습으로
사모의 형태는 조선조 말의 모제에 따라 모정이 짧고 양각도 작다.
쌍학흉배를 달고 학정금대를 두르고 있어 당상관에 문관 종2품임을 말해준다.
의습은 단령색보다 짙은 선으로 외곽선과 대표적인 주름을 그리고,
굴곡진 부분에 선염기를 집어넣는 당대의 통상적인 방식으로 처리되었다.
안면의 필선은 거의 보이지 않고 연하게 얽은 자국을 표현한 것이 특징적이다.
웃는 듯한 모습의 온화한 인상이며 입술색은 진한 연지로 시채되어 있다.
진한 적갈색조의 안색과 눈썹묘사, 눈을 처리한 필법 등이 이한철의 흥선대원군 초상과 유사해
이재면이 35세 때인 1880년, 흥선대원군 61세像 제작 시 함께 그려졌을 가능성이 높다.
영선군 이준용 초상(永宣君 李埈鎔肖像) Portrait of Lee Jun-yong
김은호(金殷鎬, 1892~1979)
1918년, 비단에 채색, 140.0×81.0

흥선대원군의 손자인 이준용(李埈鎔, 1870~1917)의 전신초상화이다.
금관조복을 입고 홀을 들고 의자에 앉아있는 모습으로 얼굴은 우안에 가까운 정면관이다.
이는 좌안7분면의 전통기법과는 다른 것으로 당시 초상화에 끼친 서양화법의 영향을 짐작할 수 있다.
또, 안면묘사에 있어서도 짧고 가는 선들로 얼굴의 입체감을 표현하고 있으나,
입술에는 반사광을 표현하는 등 전체적으로는 서양의 음영기법이 드러나 보인다.
눈은 검은 선으로 윗눈꺼풀을 긋고, 아래눈꺼풀을 흐리게 처리했으며,
안두에는 약간의 갈색기가 삽입되어 있고 홍채부분에는 반사광의 광점이 묘사되어 있다.
의자에는 호피가 깔려 있으며 바닥에는 화문석이 깔려있다.
이 초상화는 이준용 사후(死後), 이당(以堂) 김은호(金殷鎬, 1892~1979)가 종중의 의뢰를 받아
사진을 보고 그린 것이며 현재 작품의 유지초본(油紙草本)은 국립현대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흥영군 이우 초상(興永君李鍝肖像) Portrait of Lee Wu
작자미상, 20세기, 비단에 채색, 155.7×66.5

이준용의 뒤를 이어 운현궁의 주인이 된 이우(李鍝, 1912~1945)의 전신초상화이다.
이우는 의친왕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으나 1917년에 이준용이 후사 없이 사망하자 양자로 입적되었다.
이 작품은 사진을 보고 제작한 것으로 보이며 정확한 제작자와 제작연대는 알 수 없다.
얼굴의 외곽선을 비롯하여 이목구비가 면面으로만 처리되어 있고, 가늘고 짧은 선으로 명암을 표현하였다.
윗눈꺼풀은 선을 긋는 대신 음영기로 묘사했으며, 흰자위에도 그림자처리를 하였다.
눈썹과 수염은 물기 없는 선으로 그렸고, 인중 양쪽에만 수염이 나있다.
머리에는 금관을 쓰고 조복을 입었는데 의복은 의습선만 간략하게 그려 넣어 완전히 평면적이다.
얼굴은 서양식 초상화 기법을 따르며 연하고 부드럽게 그려진 반면,
의복은 진한 채색의 평면적 표현으로 그려져 강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흥선대원군 사진(興宣大阮君 寫眞) Portrait
1882년, 26.6×21.4
왼쪽에 각종 기물이 놓인 서탁을 두고 의자에 앉아 있는 흥선대원군을 찍은 사진이다.
평상복 차림에 오른손을 가슴선까지 들어 책을 펴 들고 있으며, 왼손은 가볍게 무릎 위에 얹었다.
사진의 우측 하단에는 ‘高麗國 大院君 時 光緖八年 歲在 壬午 秋八月 孟日 照於 營務處’이,
좌측 하단의 ‘梁時泰 照像館’라고 쓰여 있다.
이를 통해 1882년 음력 8월 7일에 중국 천진 영무처에서 촬영했음을 알 수 있다.
▲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 사진 1882년에 톈진의 양시태사진관에서 촬영한 것으로 추정되는 대원군 사진 이다. 흥선대원군 사진의 복장이나 메모 등으로 볼 때 대원군의 청나라 유배시절의 희귀한 사진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흥선대원군 이하응이 1882년 임오군란 당시 청나라 톈진(天津)에 유배당했을 때 찍은 것으로 추정되는 사진이 국내 전시회 및 도록을 통해 처음 공개됐다. 쇄국정책을 시행한 대원군이 서양문물인 사진기 앞에 앉아 있는 모습이 이채롭다.
용인에 있는 경기도박물관에서 열고 있는 <조선의 개화기 풍경 특별사진전>을 통해서다. 전시회 제목은 <먼 나라 꼬레(Coree)-이폴리트 프랑댕의 기억 속으로> 1백51점의 사진은 소장자 이폴리트 프랑댕(Hippolyte Frandin, 1852~1924)이 당시 촬영하고 수집한 것으로 파리에 거주하고 있는 후손들에 의해 보관되다가 공개되는 것이다. 프랑댕은 1892년 4월부터 1894년 2월까지 제2대 조선 주재 프랑스 영사 및 전권공사를 역임한 인물이다.
흥선대원군의 사진 우측에는 '고려국 대원군 광서 8년'이라 새겨 있고, 좌측에는 '양시태 조상관(梁時泰 照像館)'이라 적혀 있다. 고려국은 조선을 말하고, 광서 8년은 1882년이다. ‘조상관(照像館)’은 사진관을 말한다.
경기도박물관의 김준권 학예연구사는 "당시 프랑댕은 조선에 오기 전 중국 톈진 주재 프랑스 영사로 있으면서 대원군을 처음 알게 됐고 그것을 인연으로 이 사진을 소장하게 된 것 같다"면서 "프랑댕이 조선에 와서도 대원군의 정치적 영향력 때문에 깊은 관심을 갖고 이 사진을 보관했던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 2003-01-17 문화일보 |
이재면 사진(李載冕 寫眞) Portrait
1910년, 27.8×21.2
융희 4년(1910)에 흥친왕(興親王) 이재면(李載冕, 1845~1912)이 다른 세 사람과 함께 찍은 흑백사진이다.
두꺼운 종이에 사진을 붙여 고정하고, 뒷면에는 촬영일자 및 사진 속 인물에 관한 내용이 기록돼 있다.
3인 중 중앙에 앉아 있는 사람이 흥친왕이며,
왼쪽에 서 있는 사람은 당시 궁내부(宮內府) 시종관(待從官) 겸 흥친왕 궁찬위(宮贊尉)였다고 한다.
나머지 2명의 신분은 알려져 있지 않다.
이준용 사진(李埈鎔 寫眞) Portrait
20세기 전반, 15.1×20.7
이준용 외 4인이 함께 찍은 흑백사진으로 앉아있는 4명의 노인 중 좌측에서 세 번째 인물이 이준용이다.
사진은 두꺼운 종이로 만든 사진틀에 붙어있는데, 물결 같은 무늬가 양각으로 장식되어 있다.
덕혜옹주 결혼식 사진(德惠翁主 結婚式寫眞) A Wedding Picture
1931년, 16.7×12.1
덕혜옹주(德惠翁主, 1912-1989)와 일본인 남편 소 다케시(宗武 志)의 결혼식 사진이다.
사진 뒷면에 ‘동경’, ‘사진통신사’라는 도장이 찍혀있어 동경에서 찍은 사진임을 알 수 있다.
덕혜옹주는 1912년 5월 25일 고종과 복녕당 양귀인 사이에서 태어나
여섯 살 때인 1917년 정식으로 황적에 입적되었다.
1919년에 일제에 딸을 빼앗기기 싫었던 고종에 의해 황실 시종인 김황진의 조카 김장한과 약혼하였다.
그러나 1925년, 결국 일본의 요구로 강제로 일본에 끌려갔고 학습원을 마친 뒤,
1931년 대마도(對馬島) 도주(島主)의 후예인 백작 소 다케시와 강제 결혼하고 딸을 낳았으나
1953년 이혼하였다. 이후 각종 병세에 시달리다 귀국하여 1989년 세상을 떠났다.
(1) 영친왕 사진(英親王 寫眞) Portrait
1928년, 17.5×12.4
(2) 이방자 사진(李方子 寫眞) Portrait
1928년, 17.6×12.4
(1) 영친왕(英親王) 이은(李垠, 1897-1970)의 사진으로 군복을 입고 훈장을 단 모습이다.
특별한 배경 없이 찍었으며 사진 아랫부분을 희미하게 처리했다.
사진 뒷면에는 ‘一九二八年 大典時의 正裝’이라는 문구가 연필로 적혀있다.
영친왕 이은은 고종과 귀비 엄씨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고종의 넷째아들로 순종과는 이복형제간이다.
1900년에 영친왕에 책봉되었고, 1907년 황태자가 되었다. 유학이라는 명목으로 일본에 인질로 갔다가
1920년 일본의 왕족인 마사코(이방자, 1901~1989)와 정략결혼을 했다.
이후 1963년까지 일본에 머물다 귀국했으나 병세가 심하여 7년간 투병생활을 한 후 1970년 사망하였다.
(2) 영친왕비인 이방자(李方子)의 반신사진으로 드레스에 왕관을 쓰고 있다.
사진의 배경은 없고 하반신으로 갈수록 흐려지는 효과를 주었다.
하단에는 마치 그림처럼 ‘YEGHL’이란 싸인이 있고
뒷면에는 ‘一九二八年 大典時의 正裝’이라고 연필로 기재되어 있다.
영친왕 이은의 사진과 같은 시기, 장소에서 촬영된 것으로 추정된다.
영친왕비인 이방자(李方子,1901-1989)는 일본 메이지 국왕의 조카인 모리마시 친왕(親王)의 딸로
1916년 영친왕과 약혼하고, 1920년에 황태자비가 되었다.
그러나 1945년 일본의 패망과 함께 일본왕족이라는 신분과 전 재산을 몰수당했다.
1963년 영친왕과 함께 귀국한 이후 사망할 때까지, 사회봉사활동에 전념하였다.
이우 금관조복 사진(李鍝 金冠朝服 寫眞) Portrait
1933년, 40.9×32.0×0.3
오량관에 금관조복을 이우(李鍝)의 사진이다. 십장생 병풍을 배경으로 찍었으며 촬영장소는 운현궁이다.
사진첩 위에 사진을 붙이고 그 위에 얇은 종이를 덮어 보호했다.
사진첩 표지에는 사진관 상호인 ‘Tanaka Photo Studio Keijo’를 은색으로 표기하고,
사진첩 안 왼쪽 하단에는 양각으로 ‘田中’이 찍혀 있다.
이우 ․ 박찬주 결혼식사진(李鍝 ․ 朴贊珠 結婚寫眞) A Wedding Picture
1935년
이우와 부인인 박찬주의 결혼식 사진이다. 이우는 군복에 훈장을 달고 칼을 차고 있으며,
박찬주(朴贊珠, 1914~1995)는 서양식 드레스를 입고 양손으로 부채를 잡고 있으며
가슴에는 훈장을 달았다. 두 사람은 1935년 5월 3일, 도쿄에서 결혼하였다.
이우는 일본 황족과 결혼시키려는 일제의 계획에도 불구하고 한국인과 결혼하였다.
박찬주 여사는 운현궁의 마지막 주인이었다.
철종의 무남독녀 영혜옹주는 박영효(朴泳孝 : 1861~1939)와 결혼 직후 젊은 나이로 사망하였기 때문에
왕실의 법도에 따르면 왕의 사위인 박영효는 재혼할 수 없었다.
그래서 왕실에서는 독수공방하는 젊은 청년 박영효에게 젊은 궁녀를 소실로 하사하여
낳은 서자의 딸이 곧 박찬주이다. 곧
박찬주는 개화파의 거두인 박영효의 손녀이다.
황실 가족사진(皇室 家族寫眞) Portrait
조선말기, 27.0×34.0
황실 가족 5명이 앉아있는 흑백사진으로 모두 정식으로 의관을 정제한 모습이다.
고종은 턱수염을 길렀고, 순종은 콧수염을 기르고 있으며 의자에 앉아 있다.
사진 뒷면에는 검은 볼펜으로 이름을 써놓았는데
사진 오른쪽부터 덕혜옹주(1912년-1989년 4월21일), 순정효황후, 고종, 순종, 영친왕 순이다.
이 사진은 한국 사진의 선각자이자 흥완군(대원군의 형)의 손자인
이해선(순종의 육촌 형제, 민영환의 사위) 선생의 유품에서 발견되었다.
다른 소장처의 같은 사진 가운데에는 뒷면에 1918년이라는 연도가 기재되어 있는 것이 있어서
당시 일본에 억류돼있던 영친왕의 일시 귀국을 축하하며 찍은 사진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1907년 일본의 이토오 히로부미에 의해 강제로 일본에 인질로 끌려간 이후
영친왕은 1911년 7월 생모 "황귀비 엄씨"가 돌아가시자 일시 귀국하고,
다시 사관학교를 마친 21세의 영친왕이 1918년 일시 귀국하여
덕수궁 석조전에서 황실가족이 모여 찍은 사진이다. 이 다음해에 고종황제가 의문의 독살을 당하였다.
순종황제 사진(純宗皇帝 寫眞) Portrait
1909년, 42.6×35.2×0.4
서양식 황제복장을 하고 서양식 의자에 앉아 있는 순종의 흑백사진이다.
순종의 우측에는 큰 꽃무늬가 있는 테이블보를 씌운 탁자가 있고, 위에는 깃털이 달린 모자가 놓여 있다.
순종은 손에 흰 장갑을 끼고 있으며, 왼손에 검을 들고 있다.
가슴에는 많은 훈장이 달려 있다.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이 사진은
두꺼운 판넬에 덧대어진 형태로 상단에 이화문이 금장으로 인쇄되어 있다.
순종황후 사진(純宗皇后 寫眞) Portrait
1909년, 전체 85.5×66.5×4.5 사진 56.1×43.7
순종의 계비인 순정효황후(純貞孝皇后, 1894~1966)가 어여머리를 하고
의자에 앉아 정면을 보고 있는 사진이다. 손은 드러나지 않았으며 가슴에 훈장을 달고 있다.
상단에는 이화문이 금장으로 인쇄되어 있다. 사진을 두꺼운 종이로 배접하여 만든 후,
점토로 액자 주변을 장식하고 금색으로 채색한 나무액자에 표구하였다.
액자 뒷면에 ‘雲峴宮’이라고 씌어 있다.
순정효황후는 윤택영(尹澤榮, 1876~1935)의 딸로 1906년에 동궁계비로 간택되었고
이듬해인 1907년 순종이 황제로 즉위하면서 황후가 되었다.
연령군파(延齡君 : 숙종 6남)
연령군(1699-1719)의 휘는 훤(昍), 자는 문숙(文叔), 시호는 효헌(孝憲).
숙종의 6남으로 어머니는 명빈 박씨이다.
연령군은 1703년(숙종 29)에 군으로 봉해지고 종친부 유사당상(有司堂上)이 되었다.
연령군이 5세 때 어머니 명빈 박씨가 별세했다.
1707년(숙종 33) 상산김씨 수찬(修撰) 동필(東弼)의 딸과 혼인했다.
1708년 연령군 저택을 마련해 주라는 왕명이 내렸는데
신하들이 호화주택을 반대하여 선조대왕의 딸 정명공주(貞明公主)의 집을 사서 주었다.
1718년(숙종 44) 4월에 도총관이 되었다가 이듬해인 1719년(숙종 45) 향년 21세로 별세했다.
그러나 후손이 없어 소현세자의 증손 밀풍군(密豊君) 탄(坦)의
차남 상대(尙大 : 譜名 晉錫 : ?∼1733)를 계자로 삼고 이름을 공( )이라 고쳤다.
1727년(영조 3) 12월에 계자 공을 상원군(商原君)으로 봉했다.
1733년(영조 9) 상원군이 자식도 없이 별세하여 파양(破養)하고,
낙천군(洛川君 : 1720-1737) 온(縕)으로 계자를 삼았다.
그리고 1736년(영조 12) 낙천군 온을 시직(侍直) 김치만(金致万)의 딸과 혼인시키려 했는데
김치만이 끝내 반대하자 김치만을 삭탈관직했다.
그러나 낙천군이 조졸하니 달선군(達善君) 영(泳)을 낙천군의 계자로 삼았다.
그러나 1750년(영조 26) 달선군 영을 파양했다.
이유인즉 낙천군 부인 서씨(徐氏)가 양아들 달선군 영과 며느리 신씨(愼氏)를 괴롭히자
달선군이 자살했기 때문이다.
마침내 1777년(정조 1) 은신군으로 연령군의 후사를 삼았다.
장조(사도세자)의 2남인 은신군(恩信君 :1755-1771)은 휘가 진(?)으로 어머니는 숙빈 임씨이다.
은신군은 1771년(영조 47) 장조를 아사케 충동질한 김구주(金龜柱 : ?∼1786) 등의 무고로
제주도에 귀양가서 병사했다.
정조가 즉위하자 현록대부(顯祿大夫)로 증직되고 소민(昭愍)이란 시호가 내려졌다.
1871년(고종 8)에 충헌(忠憲)이라고 개시(改諡)되었다.
후사가 없어 인평대군파 5대손 생원 병원(秉源)의 차남 유학(幼學) 채중(寀重)을 구(球)로 개명하고
남연군(南延君 : 1788-1836)으로 봉하여 은신군의 후사로 삼았다.
남연군(南延君) 구(球)는,
흥녕군(興寧君) 창응(昌應 : 1809-1828) · 흥완군(興完君) 정응(晸應 : 1815-1848) ·
흥인군(興寅君) 최응(最應 : 1815-1882) ·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하응(昰應 : 1820-1898)의
4남을 두었는데 흥선대원군의 아들이 대통을 이어 고종황제가 되자
고종황제의 아들 순종황제와 황태자 영왕으로 선원세계가 이어지고
그 나머지 지손들은 연령군파에 속하게 되었다.
연령군파의 인물로는 최응(最應)이 명성황후의 신임을 얻어 영의정을 지냈고
그 아들 재긍(載兢 : 1857-1881)은 판서를 지냈으며
재긍의 양자 지용(址鎔 : 1870∼? )은 한일병탄의 중역을 담당했다.
창응(昌應)의 아들 재원(載元 : 1831-1891)은 이조판서를 거쳐 갑신정변(3일천하) 때 영의정을 했으며,
정응(晸應)의 아들 재완(載完 : 1855∼?)은 이조판서 · 내무대신을 지냈다.
흥선대원군의 큰 아들 재면(載冕 : 1845-1922)은 판서 · 영돈녕을 지냈고,
그 아들 준용(埈鎔 : 1870-1917)은 참판을 거친 이른바 이준공(李埈 公)이다.
- 전주이씨 연령군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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