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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 고구려가 최강의 국가로 발돋움할 수 있었던 데는
한민족의 장기인 활이 중국에 비해 그 성능이 월등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삼국시대 활의 전통은 이민족과의 전쟁이 잦았던 고려시대에 들어와서도 역시 유효하였다.
《고려사》에 국왕이 행차하여 대장군 이하 병사에 이르기까지 활로 과녁을 쏘게 하였다든가
백관이 활쏘기를 연습하였다 내지는 숙위군이 약했을 때에는 궁수를 모집하여 유사시에 대비케 했다는
기록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 궁시가 전술상 중요한 무기였음을 알 수 있다.
특히 고려시대의 특수부대의 하나였던 경궁군(梗弓軍)은
관통력이 강한 활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부대였다.
이후 조선시대에 들어서서도 우리나라에서는 전통적으로 궁술을 중요하게 여겼으며,
화포가 출현하기 이전까지 궁시는 주된 전투무기의 하나로 활용되었다.
이는 궁시가 화약무기의 여러 가지 결함을 보완시켜 줄 수 있는 장점을 보유하고 있어
상호 보완적 역할을 통해서 전투력을 유지시켜 주기 때문이었다.
조선의 대표적인 전투무기, 각궁과 편전
각궁(角弓)과 편전(片箭)은 조선시대의 가장 대표적인 무기이다.
삼국시대의 맥궁(貊弓)에서 기원한 각궁은 무소뿔, 참나무, 소 힘줄, 실 등의 여러 재료를 복합해서
독특한 기술로 제작하였기 때문에 그 탄력성이 외국의 활에 비해 탁월하였다.
무소뿔을 활채의 안쪽에 붙였기 때문에 활을 당겼을 때 탄력이 좋고 오래 활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무소뿔은 가공하기도 좋고 활채의 한쪽 마디를 이음매 없이 댈 수 있을 정도로 길이가 길었다.
물론 각궁의 강력한 힘의 비밀이 반드시 무소뿔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각궁은 활채의 바깥쪽에 소의 힘줄을 붙이는데 이 힘줄은 활을 당겼을 때
강한 인장력으로 활채를 당겨서 활이 부러지는 것을 막고 활의 복원력을 극대화시켜 준다.
이렇듯 각궁을 만드는데 많은 시간과 기술이 요구되기 때문에 제작이 쉽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들 활을 사용한 것은 크기가 작아 다루기가 편리한데다가 위력이 대단하기 때문이다.
각궁의 성능에 대해서는 1488년(성종 19) 조선에 왔던 명나라 사신 동월(董越)이
“조선이 사용하는 화피궁(樺皮弓)은 중국 제도에 비해서 약간 짧으나 화살이 날아가는 힘은
심히 강하다.” 《조선부(朝鮮賦)》라고 평가한데서 익히 알 수 있다.
화피궁은 바로 조선의 각궁을 일컫는 것으로 궁력의 강함을 인정받고 있었던 것이다.
편전은 화살 크기가 작아 일명 ‘애기살’이라 하는데, 나무로 만든 대롱에 편전을 넣고 쏘도록 되어 있었다.
편전은 화살이 작아 가벼운 대신 가속도가 커서 관통력이 컸기 때문에
보병전은 물론이고 기병전에서도 크게 활용되었다.
또한 편전은 1,000보 이상의 거리까지 날아가 적을 맞혔기 때문에
조선의 가장 중요한 비밀 병기로 활용되었다.
그리하여 세종 때에는 북방의 야인에게 편전 제작 방법이 알려질까 염려하여
함경도 지방에서는 편전 교습을 하지 못하게 하였다.
당시 조선의 편전은 중국의 창, 일본의 조총과 더불어 천하의 제일로 여겨졌다.
조선 최대의 전란이었던 임진왜란때에도 조선의 궁시는 큰 위력을 발휘했다.
당시 일본군을 따라 참전했던 서구의 선교사였던 루이스 · 프로이스 신부가
조선인들이 “매우 힘이 좋고 활과 화살을 아주 잘 사용하며 그들의 활은 터어키 활과 같이 조그만하다.”
고 기록하고 있는 점에서 잘 드러난다고 하겠다.
무인 선발과 훈련의 기본 과목, 활쏘기
조선 왕조는 현실적으로 문치주의를 추구하였지만 이념상으로는 문무 양반체제여서
문무겸전을 이상적인 덕목으로 내세웠다. 따라서 문벌귀족 중심의 협착한 인재 등용에서 벗어나
관리 선발의 문호를 개방하여 능력 위주로 인재를 선발하려는 의도에서 무과(武科)도 실시하였다.
초기의 무인 선발은 취재(取才)라는 제도를 통하여 이루어졌으나,
이후 1402년(태종 2)에 정식 무과로 시행되었다.
다양한 축모양의 화살들 |
이러한 무과는 세종대를 거치면서 정비되어 『경국대전(經國大典)』으로 법제화되었다.
무과의 시험과목은 크게 무예(武藝)와 강서(
講書) 시험으로 구분되는데, 그중에서 무예는 활쏘기와 창을 중심으로 목전(木箭) · 철전(鐵箭) · 편전(片箭) · 기사(騎射) · 기창(
騎槍)의 다섯 가지 무예와 격구(擊毬)로 이루어진다.
이를 보면 무예시험이 궁술(弓術)과 기마술(騎馬術)을 중심으로 하고, 무기 측면에서 보면 네 종의 궁시와 한 종의 창으로 구성되어 있어 궁시의 비중이 높음을 보여준다.
또한 군사훈련에서도 궁술은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활쏘기는 군관들의 군사훈련인 동시에 체력 단련이었고, 오락이며 유희이기도 한 생활의 한 부분이었다.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이들은 거의 매일 활쏘기 연습을 하였다.
활은 10순(巡 : 1순은 다섯 발) 단위로 쏘았는데,
20순이나 30순을 쏜 경우도 많았지만 하루에 10순을 쏘는 것이 상례였다.
그런데 무관들의 활쏘기 솜씨가 뛰어나 50발 중 최소한 40발 이상을 명중시키는 실력을 보유한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특히 조선의 군사 퍼레이드였던 대열(大閱)과 군사훈련인 강무(講武)는 궁시와 연관성이 매우 크다.
대열은 전국에서 징발한 군사들을 대상으로 전투 대형인 진법 훈련을 실시하고,
여기에 국왕이 친히 나가 사열하는 것이고,
강무는 국왕이 군사를 동원하여 일정 지역에 출동한 다음
그 지역에서 사냥하고 복귀하는 일련의 활동을 말한다.
그런데 강무는 궁술을 위주로 치르는 훈련인 것이고,
대열과 강무가 끝난 뒤 행해지는 관무재의 과목 세 가지 중에서
모구와 삼갑사도 궁술과 관련이 있는 만큼
조선 전기의 궁술은 군사 전술의 중요한 부분으로 작용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활쏘기는 사대부의 기본 덕목
조선 사대부는 문신이라 할지라도 예(禮) · 악(樂) · 사(射) · 어(御) · 서(書) · 수(數)의 육예(六藝)를
배웠던 데서 알 수 있듯이 활쏘기(射)는 말타기(御)와 더불어 중요한 과목의 하나였다.
이렇듯 조선시대에는 사대부가 반드시 익혀야 하는 무예의 하나로 활쏘기를 꼽았는데,
이는 조선을 개국한 태조 이성계를 비롯한 역대 왕이 활쏘기를 즐겨하였고 장려하였기 때문이다.
이성계는 일찍부터 명궁으로 이름을 날렸다.
이성계의 활 솜씨와 관련된 이야기는 많이 있지만,
특히 1379년(우왕 5) 7월 운봉에 침입한 왜장 아기발도(阿其拔都)와의
일화가 유명하다.
당시 이성계는 운봉에 침입한 왜구를 상대로 대우전(大羽箭) · 유엽전(柳葉箭) 50여 개를 발사하여 적을 모두 명중시킬 정도로 활을 잘 쏘았다고 한다.
당시 왜구 장수는 아기발도라는 미소년으로 용모도 준수하고 용맹이 매우 뛰어났다. 특히 그는 갑옷과 투구를 착용하여 화살이 들어갈 만한 틈이 없어 고려군이 매우 두려워하였다.
이에 이성계가 휘하 장수 이두란(李豆蘭: 李之蘭)에게
“내가 왜장의 투구를 쏘아 벗길 것이니, 그때를 놓치지 말고
그대는 재빨리 그의 면상을 쏘아 맞히라.” 말하고,
시위를 당겨 아기발도의 투구 꼭대기를 정확히 명중시켜 투구를 땅에 떨어뜨렸다. 이에 이두란이 활을 쏘아 아기발도를 사살하여 결국 승리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물론 이 이야기에는 이성계의 뛰어난 활 솜씨를 강조하기 위해 과장된 측면이 있겠지만 그의 활 솜씨가 유달리 뛰어났던 것만은 사실이다.
이후 이성계는 한성으로 천도한 이후 활을 쏘기 위하여 궁중 후원에서도 사후(射候)를 많이 하였다.
이것은 태조가 자기의 무술을 단련하기 위하여 쏜 것으로 생각된다.
태조 이래 역대 왕 또한 활쏘기를 즐겨 무(武)의 중요성을 깨닫고 장려하는 바람에
문신들까지도 활을 잘 쏘았다. 특히 문종 연간에서는 임금이 친히 왕림한 가운데 궁술 대회가 자주 열려
문무반을 막론하고 종친이나 각 관서의 관리들도 활을 잘 쏘았다.
또 세조는 종친과 공신, 문무관들을 궁중 후원에 불러들여 궁술 대회를 열기도 하였는데,
당시 세조는 미리 알리지 않고 불시에 활쏘기를 하는 방식으로 진행하였기 때문에
당시의 무사 중에는 뛰어난 이들이 많았다고 한다.
이웃나라에서도 탐낸 조선의 활 솜씨
이렇듯 조선의 활쏘기는 널리 유행하였고, 그 솜씨는 중국이나 일본보다 훨씬 뛰어났기 때문에
이웃 나라에서는 어떻게든 조선의 활쏘기를 배우려고 하였다.
특히 조선은 편전 쏘는 법을 ‘아국장기(我國長技)’라 하여 중요한 군사 기밀로 취급하였다.
나아가 북방 야인들의 왕래가 잦은 함경도와 왜인들이 거주하는 삼포 지역에서는
편전을 가르치는 것 자체를 아예 금지하기도 하였다.
이는 외국인들에게 편전 제조 기술이 전해질까 염려하였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중국과 일본에서는 더욱 조선의 활쏘기를 배우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나 쉽지 않았다. 조선도 이런 점을 이용하여 국력을 과시하고자 하였다.
조선시대에 외국에서 사신들이 올 경우 그들이 구경하고자 했던 세 가지가 있었는데,
첫째는 조선의 신기에 가까운 궁술을 관람하는 관사(觀射)요,
둘째는 형형색색의 화약을 이용한 불꽃놀이인 관화(觀火)이고,
셋째는 금수강산의 대명사인 금강산 관광이다.
이 세 가지는 천하제일의 명기이자, 조선의 자랑이었다.
조선은 이들 관람을 국가 안보와 관련하여 엄격히 제한했기에
한 가지 구경만으로도 외국 사신들은 최고급 대우로 여겼다.
조선시대에 활쏘기에 사용되었던 완대, 궁대, 동개 |
그 중에서도 관사와 관화는 조선의 대표적인 군사무기이자 호국병기였다.
이 군사무기들은 주변의 다른 민족들도 중시하였지만, 조선의 기술력은 그들에 비해 분명히 한 차원 높았던 것이다.
따라서 조선은 이를 통해서 조선의 국력을 과시하려 했던 것이다.
한편 이러한 조선의 활과 화살 제작기술은 맥이 끊이지 않고 계속 이어져 오고 있는데, 무형문화재 제도 덕분이라 할 수 있다. 무형문화재 제도는 1962년 도입됐지만 1971년에 와서야 궁시장이 처음으로 정식 문화재로 지정됐다.
당시 활을 만드는 궁장(弓匠)의 경우 서울 · 경기 부천 · 경북 예천을 중심으로 활동했다.
장진섭 · 김장환 · 권영만이 각 지역 계보 중 대표적 장인이었다.
현재 무형문화재 47호 보유자로 지정된 인물은 활에서는 김박영 궁장, 화살에서는 유영기, 김종국, 박호준 시장이 있다.
부천 활 박물관 명예관장을 맡고 있는 김박영 궁장은 예천 계보로 입문,
중간에 부천 활의 대표격인 김장환의 문하생으로 들어간 인물이다.
경기 파주에서 영집궁시박물관장을 운영하고 있는 유영기 시장은
5대째 화살을 만들고 있는 뼈대 있는 장인 가문 출신이다.
유씨 가문은 구한말부터 장단 일대에서 화살을 제작하는 살방을 운영해 왔다.
6·25전쟁 때 집문서는 포기하면서도
화살 제작 장비 · 재료는 챙겨 피란할 만큼 자부심도 강하였다고 한다.
특히 아들인 유세현도 전수조교로서 가문의 전통적 기술에 전문적인 연구성과를 접목,
이미 사라진 고대 무기를 복원하는 작업도 하고 있다.
지금 전쟁기념관을 비롯한 국립진주박물관, 육군박물관, 해사박물관 등에는
당시 조선군이 사용했던 각궁과 편전들이 전시되어 있다.
이들 문화재를 통해서 국난극복을 위해 충절을 바친 선열들의 체취를 느끼고,
자랑스러운 우리의 문화유산을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 박재광 전쟁기념관 학예연구관
- 사진,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
- 2009년 3월6일, 월간문화재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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