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끼며(시,서,화)

다비드 - 나폴레옹 1세의 대관식

Gijuzzang Dream 2009. 3. 18. 14:45

 

 

 

 

 

 

 

 천재의 붓끝을 망친 오만한 황제

 

 

 

 

 

 

  나폴레옹 1세의 대관식/ 캔버스에 유채, 629×979㎝, 1805-07년, 루브르미술관

 

 

자크 루이 다비드(Jacques-Louis David, 1748~1825)가 그린 <나폴레옹 1세의 대관식>은

역사적 인물의 본격적인 등장을 알리는 작품인 동시에

역사의 흐름을 다시는 되돌려놓을 수 없게 만든 장면이기도 하다.

천하의 전략가이며 프랑스혁명과 더불어 유럽을 영욕 속에 부대끼게 만든 권력자 나폴레옹 황제의 취임식,

그는 자신의 제위(帝位) 등극을 한층 영광스럽게, 보다 위대하게 연출하려는 욕심에서

프랑스 화단을 군림하던 ‘미술계황제’ 다비드를 불러 바로 이 기록화를 남기게 했다.

 

다비드는 역사적 사건이나 영웅의 모습 등 이른바 ‘고귀한 소재’를

애국적 사상으로 표현해 내는데 이력이 난 화가였다.

<독배를 드는 소크라테스> <사비니의 여인들> <암살당한 마라> 등이 그런 작품이다.

랑스혁명에 가담한 루이 16세의 사형에 동조하는 표를 던지기도 했던 다비드와

혁명의 부산물로 얻어진 조국과 국민의 영광을 교묘한 내셔널리즘으로 무장시킨 나폴레옹.

두 사람이 서로 축이 맞았던 것은

혁명의 대의(大義)보다는 혁명의 과실(果實)에 눈이 멀었기 때문이라는 견해도 있다.

 

어쨌거나 나폴레옹은 1804년 12월 인민투표 형식을 거쳐 황제에 즉위,

노트르담성당에서 근엄한 대관식을 치른다.

나폴레옹은 후세에 그 위용을 전하고 싶어 우두머리 어용화가인 다비드를 불렀다.

고관대작도 앉을 수 없는 자리에 앉은 다비드는 대관식을 스케치했다.

그는 그 자리에서 놀라운 광경을 목격하게 된다.

 

그림에 나온 것처럼 나폴레옹 황제, 조제핀 황후, 교황 피우스(비오) 7세,

그리고 두 명의 추기경, 장군과 막료들이 주요 참석자였다.

다비드가 자신의 눈을 의심하게 된 것은 황제의 머리에 관(冠)을 씌우는 순서에서였다.

그림의 오른쪽 의자에 앉은 교황이 나폴레옹의 이마와 두 팔, 두 손에 성유를 바르고 검을 채워 주었다.

황제의 홀(笏)을 건네준 교황이 관(冠)을 그의 머리에 얹으려 할 때였다.

나폴레옹은 벌떡 일어나 교황이 든 관을 뺏고는 자신이 직접 대관(戴冠)해 버렸다.

교황은 머쓱해져버렸고 참석자들은 아연실색했다.

 

  

대관식에서 나폴레옹이

조제핀에게 관을 씌워 주고 있다.

누구도 입밖에 내지 못하는 사이

황제는 조제핀에게 다가가

황후의 관(冠)을 얹고 있었다.

나폴레옹은 권좌의 상징인 관을

직접 써 보임으로써

비록 국민이 옹립한 황제자리지만

자신이 당연히 위대한 인물이기 때문에

이런 취임식이 열릴 수 있음을 과시한 것이다.

 

 

다비드의 그림은 3년이 지나 완성되었다.

나폴레옹의 간섭이 유별났기 때문이다.

 

자신의 어머니가 대관식에 참석하지 않았지만

그림의 뒤편에 버젓이 앉아 있는 것처럼

그리게 했고, 교황의 자세도 뜯어 고쳤다.

 

처음에 다비드는 머쓱해진 교황이

두 손을 무릎 위에 놓은 채

나 몰라라 하는 모습으로 그렸었다.

황제는 “교황이 그냥 의자에서 쉬기 위해 멀리서 왔겠느냐?”하며 다비드를 다그쳐

오른손을 들어 강복(降福)하는 장면으로 바꾸도록 했다.

 

 

 

 

취임식을 끝낸 나폴레옹이 어떻게 시정(施政)했는지는 역사에 쓰여 있다.

취임소식을 들은 베토벤이 <영웅교향곡>의 악보 위로 펜을 내던지며

“인민의 주권을 넘겨받은 영웅도 결국 속물이었던가”하며 탄식했다지만

권력의 화살은 독재의 과녁으로 날아가고 난 다음이었다.

- <그림, 아는만큼 보인다> 손철주, 효형출판, 1998, pp138-141

 

 

 

 

 

(1) 화가, 자크 루이 다비드(Jacques-Louis David, 1748~1825)

다비드는 나폴레옹의 궁정화가가 되었으나

나폴레옹이 실각한 후 벨기에에서 도피생활을 하게 된다.

1783년에 일어난 프랑스혁명은 왕정을 폐지하고 공화국 정부를 수립하였지만,

그 공화국은 겨우 10년밖에 지속되지 못했으며,

18세기가 끝나기 이전에 또다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에 의해 ‘자유, 평등, 박애’라는 혁명의 슬로건이

자기 나라의 국민들에게 미칠 영향을 두려워했던 이웃나라들이 프랑스를 공격하였을 때

나폴레옹은 공화국 군대의 지도자로 권력을 장악하게 된다.

그는 영국을 제외한 전 유럽을 정복하였으며,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올랐으나

10년 후에는 영국과 독일, 러시아의 연합군에 패하고 죄인의 몸이 된다.

나폴레옹은 자신을 고대 로마황제와 동일하게 여겼다.

거기에 혁명 전이나 혁명 중에 고대 공화국의 영웅적이 미덕을 설교했던 프랑스 화가들은

이제 로마제국 미술의 우아함과 찬란함을 그들의 모범으로 삼게 되는데 다비드는 그 대표적인 화가였다.

 

 

(2) 파리의 명품보석 브랜드 ‘쇼메(Chaumet)’의 창시자 마리 에티엔느 니토

루이 16세의 부인이었던 마리 앙투아네트(Queen Marie-Antoinette)의

공식 보석 세공사 오베르(Aubert)의 수제자이자 1780년 설립된 프랑스 파리의 명품 보석 브랜드

‘쇼메(Chaumet)’의 창시자인 마리 에티엔느 니토(Marie-Etienne Nitot)는

전쟁이 한창이던 어느 겨울 새벽, 자신의 가게 앞에 쓰러져 있는 군인을

가게 안으로 데리고 들어가 따뜻한 수프를 먹여주었다.

“은혜를 잊지 않겠다.”는 말을 남기고 사라진 이 군인은 훗날 프랑스의 황제가 된 나폴레옹이었고,

니토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왕가의 전속 보석세공사가 된 것이다.

자크 루이 다비드의 그림 <나폴레옹 1세의 대관식>에서 나폴레옹이 들고 있는 왕관이

바로 ‘쇼메’의 작품이다.

 

 

 

(3) 나폴레옹의 여동생 '폴린 보르게제'

 

 

위의 그림은 원작이 있는 루브르박물관의 <나폴레옹 1세의 대관식> 부분이고,

아래 그림은 베르사이유 궁전내 <나폴레옹 1세의 대관식> 부분. 

왼쪽에 핑크색 드레스 입은 여자가 나폴레옹의 여동생 폴린 보르게제이다.

 

위의 그림, 다비드가 루브르 박물관에 있는 원작을 그릴 때 폴린의 드레스를 흰색으로 그렸는데

베르사이유의 복사본을 그릴 때는 핑크색으로 그려 다비드가 폴린을 좋아했다는 말이 전한다.

 

 

(4) 나폴레옹의 형 '조제프'

<나폴레옹 1세의 대관식> 그림에서 보면,

말이 대관식이지 스스로 황제관을 쓴 나폴레옹이 황후 조제핀의 머리에 왕관을 씌워주고 있고,

교황 피우스(비오) 7세는 그저 뒤에 앉아 새 황제를 축복할 따름이다.

이처럼 나폴레옹은 어느 누구에게도 머리 숙이지 않았다. 딱 한 사람 예외가 있었다.

형 조제프였다. 열일곱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조제프는 8남매의 맏이로서 가장이 됐다.

나폴레옹보다 한 살 많을 뿐이었지만 그의 권위는 절대적이었다.

나폴레옹도 꼼짝 못했다. 월급을 몽땅 형에게 맡겨야 했다.

황제가 된 뒤 권력서열이 바뀌게 됐는데 형은 그것을 참기 힘들었나 보다.

동생을 찾아가 말했다. “나는 우리 집안의 가장이자 기둥이었네. 체면을 좀 세워주게.”

나폴레옹은 마뜩찮았지만 형을 나폴리 왕에 봉했다. 2년 뒤에는 스페인 왕까지 시켰다.

결과가 좋을 리 없었다. 얼마 못 버티고 쫓겨 오고 말았다.

나폴레옹의 몰락을 재촉했음은 물론이다.

 

 

(5)

역대 모든 프랑스 왕들의 대관식은 랭스 성당에서 거행되었고,

죽은 다음에는 생 드니 성당에 묻히는 것이 관례였다.

나폴레옹은 왕이 아니라 황제였고, 따라서 그는 랭스에 갈 필요가 없었다.

그의 시신도 마찬가지로 생 드니 성당의 지하가 아니라 앵발리드에 있다.

  

프랑스 신고전주의 화가 자크 루이 다비드가 그린 <나폴레옹 황제의 대관식>은

1804년 12월2일 파리 노트르담 성당에서 거행된 장면을 거의 그대로 기록한 역사화이다.

현재 루브르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그림은

높이가 6m에 가까운 대형화로서 회화사상 가장 큰 작품으로 꼽힌다.

캔버스 면적이 60평방미터에 달한다. 그림이 완성되는 데에만 꼬박 4년이 걸렸다.

베르사유 궁에 가면 화가가 1822년 벨기에에서 망명생활을 하며 그린 복사화가 한 점 더 있다.

 

원래 다비드는 4점의 그림을 그려 대관식을 축복하려고 했었다.

그중 대관식 장면을 포함해 두 점만 완성되었다.

꼭두각시를 만들어 일일이 예행연습을 하며 인물들을 배치할 정도로

나폴레옹은 물론이고 화가도 온갖 심혈을 기울였다. 하지만 문제는 교황과 어머니였다.

 

교황은 황제가 조제핀이 종교예식을 거치지 않고 결혼을 했다는 사실을 트집 잡았고

어머니는 연상인 며느리가 전혀 탐착치 않아 로마에 가서 움직일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나폴레옹은 따라서 전투를 하듯이 대관식을 할 수밖에 없었다.

다시 말해 포기할 것은 얼른 포기하고 포기하는 대신 얻어내야 할 것을 궁리해야만 했던 것이다.

나폴레옹은 대관식 전날 튈르리 궁에서 증인 없이 속성으로 종교예식을 치렀고

교황으로부터는 왕관은 자신의 손으로 직접 쓴다는 확약을 받아냈다.

후사가 없었던 조제핀은 이혼을 두려워했고 그래서 이혼이 어려운 종교예식을 고집했던 것이다.

하지만 나폴레옹은 증인을 세우지 않는 방법으로 허를 찔렀던 것이다.

'마담 메레'로 불리는 나폴레옹의 어머니는 어쩔 수 없었다.

아들의 대관식에 불참한 어머니(레티치아)였지만 화가 다비드에게 부탁해

어머니를 갤러리의 중앙에 묘사해 달라고 하는 수밖에 없었다.  

 

  

화가 다비드는 처음에는 스스로 왕관을 쓰는 황제를 묘사하려고 했지만 포기하고

조제핀에게 왕관을 씌워주는 장면을 그렸다.

황제보다 더 오래 남게 될 그림의 운명을 생각했을 것이다.

한편, 조제핀의 옷자락을 잡아주는 두 여인은

로베의 애인 '마담 에밀 루이즈 드 라 발레트'와

그녀를 섬기는‘마담 샤스툴레 드 라 로세푸콜드’이다.

 

 

 

 

화가는 눈발이 휘날리는 매서운 날씨에 거행된 대관식에 직접 참가해

많은 노트와 스케치를 해 두었다. 그림은 데생에만 1년이 넘게 걸렸고 그 후 채색에 3년이 소요되었다. 1807년 겨울 그림을 보던 나폴레옹의 입에서는 탄성이 새어 나왔다.

“저건 그림이 아니다. 사람들이 걸어다니고 있지 않은가!”

 

 

 

 

 

 

 

 

 <나폴레옹 1세의 대관식>에 보이는 인물

 

(1)나폴레옹 황제

(2)교황 ‘피우스(비오 Pivs) 7세’

(3)병중이어서 대관식에 참석하지 않았지만 그림에 삽입된 인물은 교황 바로 옆에 서 있는 추기경 ‘카프라라’

(4)대관식에 참석했으나 그림에는 빠진 사람도 있었는데, 이슬람교도이자 터키대사인 ‘모하메드 에펜디’는 

    자신이 교회 안에 있다는 사실이 이슬람경전‘코란’에 적절하지 않은 행동이므로 다비드에게 그림에서

    삭제 해달라고 요청했다.

(5)대관식에 참석하지 않은 ‘마담 메레’로 불린 나폴레옹의 어머니 ‘레티지아’

    갤러리 중앙, 조제핀을 바라볼 수 있는 위치에 그렸다.

    대관식에 참석하지 않은 이유는 아들 ‘루시앵’과 ‘제롬’이 나폴레옹이 반대하는 결혼을 하는 바람에

    눈밖에 나서 대관식에 참석하지 못한데 대한 반발로 로마로 추방된 루시앵을 만나러 갔기 때문이다.

(6)마담 메레 윗층 갤러리에는 상원의원 ‘비엥’, 그 옆에 목탄과 스케치북을 들고 있는 화가 ‘다비드’가 있다.

(7)조제핀의 기다란 옷자락을 잡아주는 두 여인은

    로베의 애인 ‘마담 에밀 루이즈 드 라 발레트’와 그녀를 섬기는 ‘마담 샤스툴레 드 라 로세푸콜드’이다.

(8)나폴레옹보다 여섯 살이 많은 41살의 ‘조제핀’을 젊은 신부로 묘사했다.

(9)그림 왼편 가장자리에 서 있는 사람은 나폴레옹의 형제들로 ‘조제프’와 ‘루이’이다.

    나폴레옹은 1806년 두 사람에게 왕국을 주어 조제프는 나폴리의 왕, 루이는 네덜란드 왕이 되었다.

(10)형제들 옆의 다섯 여인은 누이 ‘캐롤린 뮈라’, ‘폴린 보르게제’, ‘엘리사 바치오키오’

     그 옆에 왕자 ‘샤를’의 손을 잡고 있는 조제핀의 딸 ‘오르탕스 드 보아르네’는 나폴레옹의 형제 루이와

     결혼했으며, 그녀 옆에는 나폴레옹의 형 조제프의 아내 ‘줄리 클라리’이다.

(11)화면 오른편 등을 돌리고 서 있는 두 사람 중 한 명은 과거 나폴레옹이 총애하던 집정관으로

     회계국장관이 된 ‘샤를 프랑수아 레브룬’이고 다른 한 명은 대법관 ‘캉바세레스’인데

     모두 의식에 사용되는 왕위의 표상인 왕권의 홀과 정의의 손을 들고 있다.

(12)왕권을 상징하는 보주를 벨벳 쿠션 위에 받쳐 든 사람은 ‘그랑드 헌츠만’,

      그 옆에는 의전장관인 시종장 ‘탈레랑(Talleyrand-Perigord)’

(13)한편 오른쪽 합창단 단원 소년이 흥미로운 시선으로 검을 바라보고 있는데

      나폴레옹의 검을 지팡이처럼 짚고 있는 사람이 조제핀의 아들인 왕자 ‘외젠’이다.

 

 

 

 

 

 

 

 

자크 루이 다비드 <나폴레옹 황제의 대관식>

 대관식 속에 숨은 비밀들

 

 

<대관식> 그림은 운송이 거의 불가능한 가로 610×세로 930㎝인 그림으로

대략 면적만 60만평방미터에 달한다. 평수로 약 18평(25평 아파트의 전용면적)의 넓이다.

18세기 말-19세기 초에 걸쳐 활동했던 신고전주의 화가 자크 루이 다비드(Jacques-Louis David)

그린 나폴레옹의 대관식 그림의 이 엄청난 크기에는 이유가 있다.

그림 속에는 대략 150명이 넘는 인물들이 들어가 있고,

이들은 거의 모두 실제로 대관식에 참석한 실존인물들이다.

150명 인물들을 그것도 등신상으로 그려 넣자면 그림은 자연히 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진정한 이유는 다른 데에 있었다.

그 이유란 다름 아니라 다비드가 개인적으로 품고 있었던 정치적 야망에 있었다.

화가는 이 그림을 통해 나폴레옹 황제의 눈에 들어 수석화가라는 실속 없는 자리가 아니라

그 이상 가는 막강한 자리를 차지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림을 크게 그려 자신이 얼마나 황제의 대관식을 기뻐 감축하는지를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대관식> 그림이지만, 그림은 묘하게도 황제가 아니라 황후 조제핀의 대관식을 묘사하고 있다.

나폴레옹은 이미 순금으로 제작한 월계수 화관을 머리에 쓰고 있고,

황후에게 관을 씌워주고 있는 것이다. 실제의 상황도 그림과 같았다.

‘교황 피우스 7세’를 불러 뒷자리에 앉혀 놓았지만,

나폴레옹은 자신이 직접 관을 쓴 후 이제 막 조제핀에게 왕관을 씌워주고 있다.

 

 

 

 

 

화가는 이 부분을 그리며 많은 고심을 했다고 한다.

처음에는 나폴레옹 자신이 직접 관을 쓰는 모습을 그리려고 했지만

불경스럽게 보일 수도 있어 망설였다.

그러나 교황이 나폴레옹에게 관을 씌워주는 장면을 그릴 수는 없었다.

사실이 아닌 것도 문제였지만 무엇보다 나폴레옹이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공연히 그런 식으로 묘사를 했다가 어떤 봉변을 당할지 모를 일이라

화가는 황제의 대관식을 그린 그림에서 황후의 대관식 장면을 묘사하게 된 것이다.

 

 

그림을 잠시 살펴보면

왼편 가장자리에 서 있는 사람은 나폴레옹의 형제들로‘조제프’와‘루이’이다.

나폴레옹은 1806년 두 사람에게 왕국을 주어 조제프는 나폴리의 왕,

루이는 네덜란드 왕이 되었다.

 

나폴레옹의 형제들 왼쪽에 서 있는 5명의 여인들은 모두 나폴레옹 집안의 여인들이다.

왼쪽에서부터 ‘캐롤린 뮈라 ’,  ‘폴린 보르게제느’,  ‘엘리사 바치오키오’인데

이들 3명의 여인은 나폴레옹의 여동생들이다.

그 옆에 어린 사내아이(샤를 왕자)의 손을 잡고 있는 여인은

조제핀의 첫 번째 남편과의 사이에서 낳은 딸인 ‘오르탕스 드 보아르네’이고

나폴레옹의 형제인 루이와 결혼했으며,

가장 오른쪽에 있는 여인은 나폴레옹의 형인 조제프의 아내인 ‘줄리 클라리’이다. 

 

 

 

  

그렇다면 그림은 이 점에 있어서도 조금 이상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오빠가 결혼을 하는데 어느 여동생도

오빠의 아내이자 프랑스의 황후이기도 한 조제핀의 들러리를 서지 않고 있다.

조제핀의 옷을 들어주는 들러리는 전혀 다른 여인들이 맡고 있다.

그렇다고 여동생들의 심술이 전혀 근거 없는 것은 아니었다.

대관식 당시 황제는 35살, 황후 조제핀은 그보다 6살이 연상인 41살이었다.

이미 첫 남편과의 사이에서 낳은 장성한 딸과 아들이 있었다.

하지만 조제핀의 행실은 이미 소문이 자자할 정도로 문란했다.

나폴레옹이 원정을 간 사이 조제핀은 이미 결혼을 한 사이임에도 불구하고 바람을 피웠던 것이다.

이 사실을 나폴레옹이 모르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나폴레옹은 조제핀을 내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후일 세인트헬레나에서 고백했듯이 그는 ‘진정으로 그녀를 사랑’했기 때문이다.

결정적으로 조제핀을 내치기로 결심한 것은 조제핀이 아이를 낳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다비드의 그림에는 이외에도 많은 인물들이 등장한다.

발코니 이층 왼쪽 구석에 서서 스케치북에다 뭔가를 그리고 있는 사람이 바로 화가 ‘다비드’이다.

 

  

그림 오른쪽에 왕권을 상징하는 보주를 벨벳 쿠션 위에 받쳐 든 사람은 ‘그랑드 헌츠만’

그 옆에는 붉은 망토를 걸친 채 도도한 표정을 지으며 서 있는 사람이 

의전장관인 시종장 ‘탈레랑(Talleyrand-Perigord)’이다.

이 인물은 대관식 직후부터

나폴레옹에 관련된 비밀 정보를 오스트리아 등 적군에게 팔아먹은 간신배였다.   

 

   

 

  

          <대관식>그림을 그린 화가, 다비드 / 나폴레옹의 시종장 탈레

  

대관식은 1804년 12월 2일 파리 노트르담 성당에서 거행되었지만

노트르담이 아니라 북프랑스의 랭스성당에서 거행되는 것이 프랑스 왕가의 전통이었다.

나폴레옹은 고의로 이 전통을 부정한 것이다.

노트르담 성당에서 대관식을 치르기 위해서는 준비가 필요했다.

성당은 혁명 당시 대관식을 거행할 수 없을 정도로 파괴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다비드 등의 화가들은 판자와 마포로 급조한 별도의 무대를 마련해야 했다.

하지만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12월 2일은 유난히도 추워 이 역시 큰 장애물이었다.

초청을 받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두터운 옷을 준비했고

그것도 모자라는 사람들은 화로를 준비했던 것이다.

 

자크 루이 다비드의 <나폴레옹 황제의 대관식>은 잠시 튈르리에 걸렸다가

베르사유 궁으로 옮겨졌다가 19세기 말 다시 루브르로 옮겨 온다.

베르사유 궁의 빈 자리에는 잠시 다른 그림이 걸렸다가

1947년 같은 화가인 다비드가 브뤼셀에서 다시 그린 똑같은 그림으로 대체되었다.

 

나폴레옹이 몰락한 후 다비드는 벨기에로 몸을 피해 그곳에서 여생을 보내며

1822년 <나폴레옹 황제의 대관식>을 다시 그렸었다.

두 그림은 한 가지만 빼고 모든 것이 똑같다.

베르사유에 있는 <나폴레옹 황제의 대관식>에는

왼쪽에서 두 번째 여인의 드레스가 핑크빛으로 칠해져 있다.

일설에 의하면 이는 화가가 나폴레옹의 여동생 중 한 사람인 ‘폴린느’를 사랑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다비드의 <나폴레옹 황제의 대관식>은 25평 아파트와 맞먹는 그 엄청난 크기도 크기이지만,

역사적 자료로서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당시 정치상황과 나폴레옹 집안의 세세한 사정을 잘 전달하고 있는 그림이다.

화가 다비드는 그림을 그리면서 마네킹에 옷을 입혀서 직접 캔버스 위에 세워놓고

마치 장기판 위에서 말을 옮기듯이 리허설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

 

나폴레옹이 처음 이 그림을 보았을 때

그는 “내가 그림 속에서 직접 움직이는 것만 같다”며 감탄을 했다고 한다.

나폴레옹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지만

그의 말대로 그는 지금도 그림 속에서 직접 살아 움직이는 것만 같다.

그 무모하고도 허망한 야망과 함께...

- LES VACANCES / 명화로 보는 세계사

 

 

 

 

 

대관식 때 조제핀의 팔찌에 있는 카메오(cameo)

 

 

 

나폴레옹의 월계관과 조제핀의 의상, 팔목에 채워진 팔찌...

 

 

당시 지배적이었던 예술사조인 신고전주의는 패션과 장신구와도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789년 프랑스대혁명이 일어나면서 프랑스 장신구산업은 일순간 퇴락의 늪으로 떨어졌다.

그러나 1804년 나폴레옹이 제정을 선포하면서 다시 경기가 살아나기 시작하였다.

나폴레옹은 프랑스 선왕들이 남긴 왕실 보석을 신고전주의풍으로 다시 세팅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그 이유는 지지기반이 약했던 나폴레옹이 집권의 정당성을

고대 그리스와 로마와의 연계성에서 찾음으로써 황제로서의 권위를 내세우려고 했던 것이다.

 

로마황제에 버금가는 자신의 권력을 나타내기 위해 나폴레옹이 선택한 주얼리는 바로 카레오였다.

그는 이탈리아 원정에서 돌아오면서 고대 로마의 카메오를 다수 가져오기도 했으며

자신의 초상을 새긴 카메오를 제작해 공신들에게 선물로 하사하기도 했다.

 

대관식 이듬해에는 프랑스 보석 인그레이빙 학교를 설립하여

카메오 산업이 더욱 발전하는 계기를 만들어주었다.

대관식에서 보이는 조제핀의 팔찌 또한 카메오로 장식되어 있다.

당시 패션 리더이자 보석상의 주요한 후원자였던 조제핀 또한 카메오를 즐겨 착용하여

86점이나 소장하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카메오는 이탈리아 유명한 특산품으로

조개나 사도닉스(Sardonyx), 아케이트(agate,) 오닉스(onyx), 라피스 라줄리(lapis lazuli)와 같은 원석에

고대 신화의 장면이나 로마의 영웅 등을 양각으로 새긴 것을 말한다.

또한 아주 희귀하기는 하나 루비나 사파이어, 에메랄드로 된 카메오도 전해지고 있다.

: 사도닉스, 아게이트, 오닉스 = 화산암이 층을 이루어 침전하여 생긴 마노의 일종으로

  불순물의 색깔과 줄무늬에 따라 홍줄마노(sadonyx), 줄마노(onyx), 마노(agate) 등으로 나뉜다.

: 라피스 라줄리는 청금석이라고 불리며 아름다운 군청색 혹은 담청색으로 예로부터 보석으로 애용되어 왔다.

 

한편 보는 이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특이한 카메오로 라바 카메오라는 것도 있다.

라바는 폼페이 화산에서 뿜어 나온 용암의 미립자들이 섞인 석회암의 일종으로

포함된 불순물에 따라 다양한 색상을 띤다.

조각하기에 부드러워 높게 돋을새김을 하여 마치 조각된 인물상이 튀어나올 것 같은 느낌을 줄 정도이다.

이 외에도 산호나 상아, 제트도 카메오의 재료로 사용되었다.

- 월간 에세이, 2006년11월호

- 왕가의 보석이야기, 나폴레옹의 장신구 카메오, 홍지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