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끼며(시,서,화)

알브레히트 알트도르퍼 - 이수스 전투

Gijuzzang Dream 2009. 3. 16. 01:05

 

 

 

 

 

 

 알브레히트 알트도르퍼의 <이수스 전투>

 

 

 

미술 역사상 가장 장엄한 작품 중 하나

 

16세기 인물화가 주류를 이루는 유럽 미술에서

인물이 없는 풍경화를 처음으로 제작해 풍경화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던 화가가

알브레히트 알트도르퍼(Albrecht Altdorfer, 1480-1538) 이다.

빛의 현상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자연과 풍경을 역동적인 빛으로 생생하게 묘사해

독일 미술에 혁신을 일으켰다.

알트도르퍼의 대표작 <이수스 전투, The Battle of Issus>는

전투가 최고조였을 때의 장면을 포착한 작품으로서

미술 역사상 가장 장엄한 장면 중의 하나로 꼽히고 있다.

<이수스 전투>

1529년, 패널에 유채, 158.4×120.3㎝, 뮌헨 알테 피나코텍 소장 


 

이 작품은 기원전 333년 이수스 전투에서 승리한 알렉산더 대왕의 승리를 묘사했다.

 

기원전 336년 알렉산드로스는 부왕 필리포스가 죽자 20세의 나이에 왕위에 올랐다.

젊고 패기가 넘쳤던 알렉산드로스 대왕(B.C 356-323)은

내정을 안정시키고 3만 5천명의 군사와 전함 160척을 이끌고 정복 전쟁에 나섰다.

20세에 왕이 됐고 문명세계의 90%를 통일했으며, 33세의 나이로 요절한 역사상 가장 뛰어난 영웅,

역사상 위대한 왕 알렉산드로스는 뛰어난 전술가였지만

전투 중에는 먼저 솔선수범해서 앞장서서 나가 부하들의 신임을 받았다.


당시 강력한 병사를 보유한 페르시아는 지중해는 물론 인도 서부까지 점령하고 있었다.

페르시아 왕 다리우스 3세는

정복 전쟁에 나선 알렉산드로스 군대를 봉쇄하기 위해 60만 군사를 끌어 모았다.

두 군대는 안타키아 부근의 이수스에서 맞붙었다.

뛰어난 전술가였던 알렉산드로스는 페르시아 군대의 경계가 허술한 곳을 공격해

적의 야영지를 점령했다. 막대한 병사와 전차를 보유했음에도 불구하고

페르시아 군대는 전멸하고 마케도니아인들은 완전한 승리를 거두었다.

이 전투로 페르시아군은 심각한 타격을 받았고

다리우스가 직접 지휘하는 군대로는 처음으로 알렉산드로스에게 완패하였다.

이는 알렉산드로스의 전술의 승리였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이수스 전투에서 승리한 후 남으로 내려가 정복 전쟁을 계속했다.

하지만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다른 전투와 마찬가지로

이수스 전투도 살아남은 병사들의 증언을 토대로 했기 때문에 역사적 기록은 미약한 편이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다리우스를 격퇴하다

이 작품에서 오른쪽 하늘에는 지는 해, 왼쪽 하늘에는 달이 떠오르고 있는데

신화에 나오는 장엄한 분위기를 창조하기 위해 해와 달을 동시에 화면에 그려 넣었다.


지는 해와 달 사이 구름이 소용돌이치는 가운데 비스듬히 매달린 대형 패널에

이 장면에 대한 설명문이 걸려 있다.


라틴어로 된 설명문에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다리우스를 격퇴하다.

10만 명의 페르시아 보병과 1만 기의 기병이 전사하다.

다리우스는 1천 기에 불과한 기병과 함께 도망쳤으나

그의 어머니, 아내, 자식이 모두 포로로 붙잡혔다.”라고 적혀 있다.

그 외에도 이 작품의 곳곳에 군단의 이름을 나타내는 설명이 붙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패널 아래 고리와 줄이 화면에서 정확하게 알렉산드로스 대왕을 가리키고 있다.

화면 전면에 병사들은 창과 칼을 휘두르며 전투를 계속하고 있고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다리우스를 생포하기 위해 세 마리의 백마가 이끄는 황금마차를 타고 있다.

공포에 사로잡힌 다리우스는 뒤를 돌아보며 전차를 타고 도망가고 있고

그 옆에는 공포에 질려 도망가는 다리우스 여자 수행원들과 죽은 페르시아 군인들이 널려 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포로로 잡은 다리우스의 일가 중에는 여자가 많았다.

알브레히트 알트도르퍼(Albrecht Altdorfer, 1480년경~1538)는

고대 전투나 페르시아 양식에 대해 알지 못해 이 작품을 제작하면서

자신이 잘 아는 알프스나 도나우 강 유역의 자연 풍경을 토대로 그릴 수밖에 없었다.
그는 지중해의 자연 풍경을 표현해 아수스 시를 유럽의 도시처럼 묘사했으며

건축가로도 활동한 경험으로 지중해 너머의 풍경을 조감도처럼 보여주고 있다.

고대의 역사와 후대의 풍경이 어울려 있는 이 작품은

기병대, 갑옷, 구름, 창을 든 병사 등 전투 장면이 사실적으로 그려졌지만 공상적인 느낌을 주고 있다.

이 작품은 독일 바이에른 공국의 빌헬름 4세가 여러 화가들에게 의뢰한

성서, 역사 속에 등장하는 영웅적인 남녀 열여섯 명의 일화로 구성된 연작 중에 하나다.

16장의 작품 모두 완성하는 데 15년이 넘게 걸렸다.
- 박희숙, 서양화가, 미술 칼럼니스트

- 2008.12.23 ⓒ ScienceTimes [명화산책]

 

 

 

 

 

 

바이에른 출신의 화가 알브레히트 알트도르퍼(Albrecht Altdorfer)는

도나우 강변의 레겐스부르크에 살았다.

그는 1511년 강을 따라 남쪽 알프스로 여행했는데 그 경치를 보고 깊이 감명받았다.

그 결과 그는 풍경을 단순히 작품 배경으로만 사용하지 않고 상상력과 감성을 담아

풍경 자체의 아름다움을 그려내는 최초의 화가가 되었다.

 

 

그의 <이수스 전투>는 바이에른 공작 빌헬름 4세(Wilhelm Ⅳ)를 위해 그린 것으로,

레지덴츠에 걸 교훈화로 주문한 작품으로 일련의 역사화 연작 중

고대의 유명한 전투장면을 담아낸 그림이다.

하늘 높이 허공에 떠 있는 장식판을 보면 이 작품이 기원전 333년에 있었던

알렉산드로 대왕의 페르시아 정벌을 묘사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갑옷이나 멀리 보이는 도시는 16세기의 것을 따랐다.

 

알렉도르퍼는 역사 속의 실제 전투상황에 맞는 웅장한 스케일을 표현하기 위해서

전투에 동원된 엄청난 인원을 강조하기 위해

인물을 아주 작게 축소하고 멀리 하늘 위에서 내려다 본 조감도법을 이용했다.

 

수많은 병사들 속에 묻혀 잘 보이지 않지만 산에서 화면 아래까지의 공간 가운데

이 작품의 주인공 모습이 보인다.

(전차를 타고 달아나는 페르시아의 왕 다리우스 3세와 말을 타고 추격하는 알렉산드로 대왕)

 

화면의 배경으로 키프로스 섬과 지중해가 보이고

화면이 왼쪽 구석 위로 지고 있는 달과 오른쪽 지중해 위로 뜨는 해는

전투가 일어났던 동틀 무렵의 시간을 나타내고 있으며,

하늘의 웅장한 풍경과 땅 위의 인간들의 전투가 드라마틱한 이미지를 표현하고 있다.

 

화가는 이수스 전투의 웅대함을 극적으로 그려냈다.

그림 아랫부분에는 수많은 군인들이 소용돌이치듯 밀집해 있고,

알프스산맥 너머로 태양이 구름을 헤치고 나와 달을 멀리 몰아낸다.

땅 위에서 벌어지는 전쟁의 규모는 하늘에서 요동치는 구름과 더불어

알렉산드로스가 품었던 세계 제패라는 거대한 욕망을 잘 표현하고 있다.

 

 

  

 

 

 

 이수스 전투  (Battle of Issus - B.C.333년)

 

적색은 페르시아 / 청색은 마케도니아

 

 

<이수스 전투(The Battle of Issus)>

기원전 333년 남부 아나톨리아의 이수스 평원에서 벌어진 전투로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페르시아 제국으로 침입해 약 4:1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아케메네스 왕조의 다리우스 3세를 물리친 전투이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다르다넬스 해협을 건너 소아시아로 침입해 들어가서

페르시아 속주 총독들의 군대를 물리치고 1년간 거의 모든 소아시아 지역을 손에 넣었다.

페르시아 제국의 황제 다리우스 3세는 페르시아 내부에서부터 군대를 끌어모아 반격을 준비하였고

이 소식을 들은 알렉산드로스는 파르미니온을 먼저 보내 이수스를 지키게 하였다.

이수스는 군사적 요충지로 페르시아가 이수스 일대를 차지하면

다리우스는 함대와 보급을 동시에 얻고 소아시아의 알렉산드로스의 배후를 위협하게 되기 때문이다.

 

다리우스는 파르미니온이 '요나의 길목'을 지키고 있는 것을 알고

대군을 이끌고 시리아에서 우회하여 북쪽에서 이수스 평원으로 진격했고

이수스를 먼저 저항없이 차지했다. 그는 남겨진 알렉산드로스의 부상병의 손을 모두 자르고는

 남쪽으로 내려왔는데 이때 자신이 마케도니아군의 보급로를 차단한 것을 알게 되었다.

알렉산드로스는 흩어져 있는 군사를 모아 남쪽에서 파르미니온과 합세했다.

   

다리우스의 군대는 좁은 해안가에 진을 쳤고 중앙의 강가에 말뚝을 박아 적을 저지하려고 했다.

다리우스는 그 자신이 중앙의 배후에 최정예 보병과 함께 위치하고

그 앞에 그리스 중장보병들과 페르시아 보병을 배치, 기병은 우익을 맡아 타격대로 배치했다.

왼편 산기슭에는 경보병 한 부대를 배치하여 알렉산드로스의 배후를 치려고 하였다.

 

한편 알렉산드로스는 그의 최정예 컴페니온 기병대을 직접 지휘하여 오른쪽 날개를 맡고

테살리아 연합군 기병을 좌익에 배치하고 중앙은 파르미니온이 이끄는 팔랑크스를 배치했다.

기병을 좌우익에 나누었지만 주력인 기병을 우익에 집중했다.

 

전투는 페르시아의 기병이 강을 건너 마케도니아의 왼쪽을 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알렉산드로스의 왼쪽 날개는, 2년후 가우가멜라 전투에서 전형적으로 보여주었던 것처럼,

전투에서 난제를 맡았는데 그것은 숫적으로 우세한 페르시아군을 맞아 최대한 버티면서

오른쪽에서 알렉산드로스의 정예 기병이 페르시아를 격파할 시간을 벌어주는 것이었다.

중앙의 마케도니아 중장보병은 강을 건너 페르시아의 전열에 가까스로 타격을 가하는데 성공했고

알렉산드로스는 컴페니온 기병대를 이끌고 직접 다리우스의 본진으로 돌파해 들어갔다.

 

페르시아의 전열은 급속히 무너지고 다리우스는 급히 후방으로 도망쳤고

알렉산드로스는 좌익이 무너지는 것을 보고 뒤로 돌아 페르시아의 그리스 용병의 뒤에서 공격했다.

다리우스가 도망가는 것을 본 페르시아 군대는 앞다투어 도망치기 바빴고 완전히 무너져 버렸다.

마케도니아군은 패주하는 페르시아군을 해질때까지 뒤쫓아 살육하였다.

이때 페르시아군의 시체로 강은 붉게 물들었고 댐을 이룰 정도였다고 한다.

 

 

 

 

 


 

 

 파올로 베르네세 <알렉산드로 대왕 앞의 다리우스 일가>

 

 

 

전쟁에 승리한 알렉산드로스의 자비

 

'알렉산드로스 대왕 앞의 다리우스 일가'

1565~1570년쯤, 캔버스에 유채, 236x475, 런던 내셔널 갤러리 소장. 

 

 

지도자가 되기도 힘들지만 지도자로서의 삶은 더 힘들다.

이래도 불만 저래도 불만인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지도자의 덕목을 그림 작품으로 베로네세의 ‘알렉산드로스 대왕 앞의 다리우스 일가’다.

파올로 베로네세(Paolo Veronese, 1528년경-1588)의 '알렉산드로스 대왕 앞의 다리우스 일가'는 화려한 색채가 돋보이는 작품으로, 16세기 전형적인 베네치아 풍을 보여주고 있다.

이 작품은 기원전 333년 이수스 전투에서 승리한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자비를 표현했다.

기원전 336년 필리포스가 암살되자 젊은 알렉산드로스는 갑작스럽게 왕위를 물려받는다.

20세의 나이로 왕위를 물려받은 그는 내정을 안정시킨 다음

3만5000명의 군사와 전함 160척을 이끌고 동방원정에 나섰다.

그 당시 강력한 병사를 보유한 페르시아는 지중해는 물론 인도 서부까지 점령하고 있었다.

기원전 333년 페르시아 왕 다리우스 3세는 알렉산드로스 군대를 봉쇄하기 위해 60만 군사를 끌어모았다.

두 나라의 군대는 안타키아 부근 이수스에서 만나 전투를 치렀다.

뛰어난 전술가였던 알렉산드로스는 페르시아 군대의 경계가 허술한 곳을 공격해 적의 야영지를 점령했다.

막대한 병사와 전차를 보유했음에도 불구하고 페르시아 군대는 전멸한다.

전투에 패한 다리우스 3세는 피신에 성공했지만 그의 모친과 아내, 자녀는 알렉산드로스의 포로가 되었다.

다리우스 3세는 가족을 되찾기 위해 알렉산드로스 대왕에게 평화 협상을 제의한다.

유프라테스 강 서쪽의 모든 땅을 알렉산드로스 왕에게 양도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이를 승낙한다.

‘알렉산드로스 대왕 앞의 다리우스 일가’는

전투에 패해 포로가 된 다리우스 3세의 가족들을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만나고 있는 장면을 묘사했다.
대리석으로 된 건물 안에 알렉산드로스 대왕과 그의 친구들이 갑옷을 입고 서 있다.

그들 앞에 다리우스 3세의 어머니와 아내 그리고 자녀가 앉아 있다.

이 작품에서 화면 오른쪽 주인공처럼 서 있는 붉은 옷을 입고 노인 앞에 있는 사람이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절친한 친구 하페스티온이다.

그는 자신을 알렉산드로스라고 잘못 생각한 다리우스 3세 어머니의 오해를 바로잡아주고 있다.

그가 왼손으로 가리키고 있는 사람이 알렉산드로스 대왕이다.

앞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포로임에도 불구하고 포로의 명예를 생각한 하페스티온의 태도는 무척 공손하다.

이 작품에서 다리우스 3세의 어머니의 오해를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아무렇지 않게 여기고 있다.

파올로 베로네세의 이 작품은 1570년쯤 피사니 가문에서 주문을 받아 제작했다.

화면 앞에 있는 주인공들은 피사니 가문의 사람들을 모델로 한 것이다.

사실적으로 묘사한 이 작품에서 배경과 앞쪽의 인물들이 대비를 이루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 박희수, 작가, 아트칼럼니스트

- 위클리경향,  뉴스메이커 751호[명화이야기]

 

 

 

 


 

 

 

 

 

 

 

 알렉산더는 영웅인가, 파괴자인가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한 사람의 동상 앞에서

그가 이미 전 세계를 정복했던 나이에 자신은 아무것도 한 게 없다는 자조의 한숨을 내쉬었다.

용감하게 살다가 자신의 명성이 영원하리라는 것을 알고 죽는다는 것은 멋진 일이라고 한 그는,

그리스인들이 야만인의 땅으로 여겼던 마케도니아에서 태어나

더는 정복할 땅이 남아 있지 않다고 한탄하며 흐느껴 울기도 했다.

역사는 그를 세계의 정복자, 동서양 문명을 처음으로 만나게 한 영웅으로 기록한다.

 

광활한 페르시아 제국을 정복하고 그리스 문명을 인도와 아프가니스탄까지 전파한

알렉산더(B.C. 356~B.C. 323)가 바로 그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자였던 그는

호메로스의 ‘일리아드’와 일리아드의 주인공인 아킬레우스를 유독 좋아해

세계 정복의 꿈 외에도 전 세계 문화를 그리스처럼 만드는 것이 소원이었다.

아버지 필립포스 왕이 페르시아 정벌 계획을 이루지 못한 채 부하에게 암살당하자

약관의 나이에 왕위에 오른 알렉산더는 귀족세력을 약화하고 왕권을 강화하는 한편,

화폐개혁을 통해 상공업을 장려한 개혁군주였다.

 

그는 또 상비군을 창설하고

무적의 ‘마케도니아 방진(중무장한 보병의 양 날개에 경보병, 선봉과 후미에 기병을 배치한 진)’을

고안해내기도 했다.

 

유명한 정복자 vs 난폭했던 청년 ‘엇갈린 평가’

 

기원전 333년, 마침내 알렉산더는 다리우스 3세의 군대를 크게 이기고

페르시아의 근거지인 시리아, 이집트를 정복한 뒤 이집트에 도시 알렉산드리아를 건설한다.  

인구 50만명이 넘는 상업항인 알렉산드리아는 그리스 학문과 예술 활동의 중심지로

‘없는 것은 눈(雪)뿐’이라고 할 만큼 번영을 누렸다.

 

이후 그는 이란고원, 인도의 인더스강까지 정복해

인류 역사상 최초로 유럽과 아시아, 아프리카에 걸친 광활한 영토를 갖게 됐다.

그러나 고국을 떠난 지 10여 년. 군사들은 지칠 대로 지쳐 열병에 걸렸고 장마가 계속되는 바람에

군대를 돌려 페르세폴리스로 되돌아가야만 했다.

귀로(歸路)는 매우 참담했다. 식량과 식수가 모자라 고통이 막심했다.

 

기원전 323년 바빌론으로 돌아와

아라비아-카르타고-로마 원정을 준비하던 알렉산더는 33세의 나이에 요절하고 만다.

후계자도 정해놓지 못한 갑작스런 죽음이었다.

심각한 왕권쟁탈전이 벌어지고 모친과 아내, 딸은 모두 반대파에게 죽임을 당했으며

대제국 영토는 장군들에 의해 마케도니아, 이집트 등 세 나라로 찢어지고 만다.

 

하지만 1863년 독일의 드로이젠이 ‘헬레니즘사’에서

'헬레니즘(Hellenism)'이란 용어를 쓰기 시작하면서

알렉산더는 서방의 그리스와 동방의 오리엔트를 사상 최초로 접속시킨 동서교류사의 영웅으로

칭송받는다. 아름다운 그리스식 조각상과 건축물이 동양에 건설되고,

동양의 천문학과 수학이 서양에 전파된 것도 그에게서 비롯됐다.

특히 모든 민족이 평등하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한 알렉산더는

그 자신부터 박트리아 귀족 출신의 로크사네와 결혼하며 마케도니아인과 동양여성의 결혼을 장려했다.

서양인이 동양인과 혼인하면 세금을 면제해주기도 했다.

 

헬레니즘은 이렇듯 동쪽과 서쪽이 최초로 만난 세계적인 문화였다.

그리스인은 더는 이민족을 야만시하지 않게 됐다.

그리스의 영향을 받은 인도 간다라 미술이 탄생했고

아리스토파네스는 지구의 둘레를, 아르키메데스는 부력(浮力)의 원리를 알아냈다.

히포크라테스의 의술, 디오게네스의 견유철학, 스토아 · 에피쿠로스 철학,

‘라오콘’  ‘밀로의 비너스’ 등이 모두 알렉산더가 일으킨 헬레니즘 문화의 상징이다.

하지만 알렉산더만이 (헬레니즘의) 영웅일까.

독일 시인 브레히트는 ‘어떤 책 읽는 노동자의 의문’이라는 시에서 이렇게 물은 적이 있다.

“젊은 알렉산더는 인도를 정복했다. 그가 혼자서 해냈을까?”

 

서구 중심의 역사관과

국왕 · 황제 중심 역사에서 탈피해 평범한 사람들과 소수, 주변 민족들에 대한 시선으로

세계사를 집필한 자와할랄 네루의 ‘세계사 편력’(일빛)은

알렉산더가 ‘진정한 영웅’은 아니라고 단언한다.

이수스 전투, 가우가멜라 전투 등 몇몇 싸움에서 눈부신 승리를 거둔

위대한 장군이자 유명한 정복자였지만,

그는 자신을 신이라 간주했고 일시적인 격분과 변덕으로 친구를 죽였으며 허영과 자만심이 가득하고,

도시를 깡그리 파괴해버릴 만큼 잔인하고 난폭하며 교만한 청년이었다고 한다.

 

우선 알렉산더의 업적 대부분은 부왕 필립포스가 일찍이 치밀하게 국사를 운영했기에 가능했다.

알렉산더는 반항하는 테베 시민을 학살하고 몇만의 시민을 노예로 삼는 야만의 공포정치로

그리스를 통치했다. 또한 알렉산더는 자신의 제국에 도로조차 남기지 않았고,

더는 정복할 땅이 없다고 한탄했다지만

인도의 서북부 작은 지역을 제외하고는 인도 전체를 정복하지 못했다.

그리고 이미 대국이었던 중국은 구경도 못했다.

 

알렉산더가 인도에 나타난 것은 기원전 327년의 일이었다.

그의 침략은 일종의 기습과 같아 인도는 거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

어떤 사람들은 알렉산더가 그리스와 인도 간 교섭사의 문을 열어줬다고 하지만

네루는 “알렉산더 시대 이전부터 동서를 연결하는 대로가 있었으며,

인도는 페르시아는 물론 그리스와도 계속 왕래하고 있었다”고 말한다.

 

젊은 알렉산더의 인도 정복 … 그가 혼자서 해냈을까

 

이런 점에서 볼 때 네루와 브레히트의 시가 갖는 역사관은 일맥상통한다.

 

“성문이 일곱 개나 되는 테베를 누가 건설했던가?

책 속에는 왕의 이름들만 나와 있다. 왕들이 손수 돌덩이를 운반해왔을까?

그리고 몇 차례나 파괴되었던 바빌론 그때마다 그 도시를 누가 재건했던가?

황금빛 찬란한 리마에서 건축노동자들은 어떤 집에 살았던가?

만리장성이 준공된 날 밤에 벽돌공들은 어디로 갔던가?

위대한 로마제국에는 개선문들이 참으로 많다. 누가 그것들을 세웠던가?

로마의 황제들은 누구를 정복하고 승리를 거두었던가?

끊임없이 노래되는 비잔틴에서는 시민을 위한 궁전들만 있었던가?

전설의 나라 아틀란티스에서조차 바다가 그 땅을 삼켜버리던 밤에

물에 빠져 죽어가는 사람들이 노예를 찾으며 울부짖었다고 한다.

젊은 알렉산더는 인도를 정복했다. 그가 혼자서 해냈을까?

카이사르는 갈리아를 토벌했다. 적어도 취사병 한 명쯤은 그가 데리고 있지 않았을까?

스페인의 필립 왕은 그의 함대가 침몰당하자 울었다. 그 이외에는 아무도 울지 않았을까?

프리드리히 2세는 7년 전쟁에서 승리했다. 그 이외에도 누군가 승리하지 않았을까?

역사의 페이지마다 승리가 나온다. 승리의 향연은 누가 차렸던가?

10년마다 위대한 인물이 나타난다. 거기에 드는 돈은 누가 냈던가?

그 많은 사실들, 그 많은 의문들.”

 

과연 ‘어떤 책 읽는 노동자가 역사에 갖는 의문’의 답은 무엇일까.

 

프랑스의 계몽사상가 베르나르 르 보비에 드 퐁트넬(1657~1757)이 쓴

‘죽은 자들의 새로운 대화’에 나오는 그리스인 매춘부 리네가 알렉산더에게 한 말이

그 답일는지도 모른다.

 

“그리스, 아시아, 페르시아, 인도. 이 모든 것을 정복했다는 것은 위대한 일입니다.

하지만 당신의 명성에 당신 몫이 아닌 것을 빼버린다면 어떻게 될까요?

병사들, 장군들 그리고 심지어 우연들의 몫을 인정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렇게 된다면 당신은 엄청나게 많은 것을 잃어버릴 거라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 노만수 서울디지털대 문창과 교수·도서출판 일빛 편집장

- 주간동아 2008-03-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