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현박물관 - 종가의 전통
대한민국문화유산상 보존 · 관리 부문 수상
충현박물관 관감당(경기도 문화재자료 제90호) |
대한민국문화유산상의 의미
대한민국문화유산상은
문화재청에서 매년 문화유산 보존 · 활용 · 연구 분야에 공적이 현저한 사람이나 단체에게 주는 상으로,
국민들의 문화재 애호 의식 및 문화재에 대한 인식을 제고하여
민족문화 발전에 기여하기 위한 목적에 있다.
2008년 12월, 정부대전청사에서 대통령 상장 및 부상과 함께 시상이 있었다.
함금자 충현박물관 관장(69세)은 지난해 12월 대한민국 문화유산상(보존 및 관리 부문)을 받았다.
함금자 관장은 조선시대 3대 임금(선조, 광해군, 인조)에 걸쳐 영의정을 지내며,
그 업적과 공로뿐만 아니라 청백리로서 존경을 받은 오리 이원익(梧里 李元翼, 1547~1634) 선생의
13대 종부로, 남편인 이승규(69·충현문화재단 이사장, 전 연세대 소아과 교수) 박사와 함께
각종 유물 1천500여 점이 넘는 우리나라에 하나뿐인 종가 박물관을 꾸리고 있다.
충현박물관 종가(경기도문화재자료 제90호)
함금자 충현박물관장
굴레를 자긍심으로 바꾼 지혜
연세대 간호학과 2학년 때 오리 이원익 선생의 13대 종손인 남편을 만났다.
“처음엔 왜 안 그랬겠어요. 저도 굴레라는 생각을 했지요. 그때만 해도 종택이 정말 시골이었어요.
남편은 신촌까지 다섯 시간 걸려 출퇴근하고, 저는 논밭일하며, 아이들에, 제사에, 집안 대소사…,
종가집의 일은 짐작하실 겁니다. 그렇지만, 제가 성격이 그래요. 현재에 최선을 다하자.
그러니까 한편으로는 재미도 있었어요.”
당시 종택인 그의 집 다락에 올라가면 큼직한 버들고리가 있었다.
종이가 덧발라진 버들고리였는데, 그것을 열어보니 말린 종이가 하나 가득이요, 제기며, 놋그릇이며….
이걸 만지면 온몸에 쥐이가 옮아서 일주일씩 따갑기도 했지만 무엇 하나 버릴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귀한 유물이라서가 아니었다. 사실, 그때 그는 그것이 무엇인지도 정확히 알지 못했으니까.
다만 아는 것은 그것이 남편의, 남편 핏줄의 흔적이라는 것.
남편을 위하는 단심으로, 일일이 주머니에 넣어 보관하고 이사를 다닐 때마다 살뜰히 챙겨 다녔다.
이것이 지금 박물관에 전시된 오리 선생의 친필이다.
이 같은 노고가 박물관 설립의 바탕이 되었음을 남편인 이승규 박사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충현박물관의 관장은 종손인 이승규 박사가 아니라 종부인 함금자 관장이다.
“어느 날은 큰아이가 아버지가 부담스럽다고 해요. 깜짝 놀랐어요.
아이들 아버지가 소아과 의사이고, 아이들을 대견해했고,
또 일등보다는 최선을 다하는게 중요하다는 소신으로 아이들이 개성껏 자랄 수 있는 배경을 만들었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큰아이 말하길, ‘00집안의 00종손’이라는 소리 듣는 게 싫다고 해요.
일일이 이르지 않았어도, 분위기에 스스로 부담을 느낀 거예요.
하지만 그 ‘가문의 전통’에 대한 부담이 결과적으로는 아이들에게 커다란 준거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자라면서 자신의 행동거지를 판단하는 기준이 되었던 거지요.”
그렇다. 반드시 ‘00집안의 00종손’은 아니더라도 자신의 뿌리를 느끼고 사는 이라면
가지를 어디로 어떻게 뻗어내야 할지도 알게 마련이다.
역사에 길이 남는 명예를 가진 선조를 둔 남편도, 그 집안을 이끄는 종부인 자신도,
또 가문을 이어갈 자식도 모두 ‘00집안의 00종손’이라는 변하지 않는 사실은 부담이 되었다.
하지만, 그것에 무릎 꿇지 않고 오히려 자신을 지켜내는 비장의 무기 ‘자긍심’으로 바꾸었다.
그렇기에 오리 이원익 선생가가 대대로 명예와 존경을 받아온 것이 아닌가.
새록새록 곱씹어지는 가훈
충현박물관에는 다른 종가에서는 볼 수 없는 집 한 채가 있다.
인조가 이원익 선생에게 하사한 사택, 관감당(觀感堂)이다.
6차례나 영의정을 지낸 오리 이원익 선생이었건만,
당시 그가 사는 집은 ‘겨우 무릎을 들일 수 있는 두 칸 초가로,
그마저 허술하여 비바람을 가리지 못할 지경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원익 선생은 이를 여러 차례 사양하며 ‘신을 위해 집을 지으니
이것도 백성의 원망을 받는 일’이라 하였다. 참으로 당당하고 꼿꼿한 분이었음을 알 수 있겠다.
무원어인(無怨於人) 다른 사람에게는 원한을 사지 말고,
무오어기(無惡於己) 자신에게는 악함이 없도록 하며,
지행상방(志行上方) 뜻과 행실은 위를 향하고,
분복하비(分福下比) 분수와 복은 아래에 견주어라.
요즘 함 관장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이 가훈을 화제로 삼는다.
“저는 오만하지 않고 남의 원한을 사지 않으면서 자기를 사랑하면 발전을 이룰 수 있다는 뜻으로
읽습니다. 이것이 사람의 됨됨이를 만드는 기본이 아닐까요?”
전에는 마음 깊이 와 닿지 않았는데, 나이 들어서 읽으니 읽을수록 사무친다.
어디선가 들어본 듯도 하고, 한편으론 귀에 못이 박히게 들어온 말이 아니었던가 싶기도 했지만,
함 관장을 따라 조용히 읽어 보니 그가 느끼는 진정과 감동이 오롯이 마음의 양식으로 전해온다.
명문가, 헝그리 정신을 말하다
“자녀를 훌륭히 키워내고 싶은 부모라면, 자식들에게 본보기가 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부모라는 울타리 안에서 부모의 좋은 습관을 보고 자란 자녀는 크게 엇나가지는 않아요.”
함 관장은 슬하에 네 아들을 두었고, 모두 장성하여 일가를 이루었다.
하여 돌에 아홉 가지 고물을 묻힌 경단을 해준 손자 손녀가 일곱이다.
자신이 살아온 예사스럽지 않은 종부의 삶을 어어갈 며느리들에게는
어떤 ‘시집살이를 시킬까’ 호기심이 일었다.
“며느리를 맞을 때마다 이런 소리는 했습니다.
‘남에게 폐 끼치지 마라.’ ‘세상에 공짜는 없다. 받으면 반드시 갚아라.’
그리고 또 이런 말도 합니다. ‘검소하고 절약해라.’
아이들에게 금전적인 풍요는 독이 돼요. 발전에는 헝그리 정신이 필요한 거지요.”
내로라하는 명문가의 종부가 어찌 ‘헝그리 정신’을 말씀하시는가 싶었다.
그러나 알고 보니, 그것이야말로 오리 이원익 선생가의 오래된 정신, 가풍이 아닌가.
“형제가 화목치 못하는 것을 보면 대부분 부잣집에서 그러한데,
이것은 재물이 있으면 다툴 마음이 생겨 천륜을 상하게 하니, 재물이 바로 빌미가 되는 것이다.
자손들은 절대로 옳지 못한 재물을 모으지 말고 불인(不仁)한 부를 경영하지 말라(1599년 9월 15일).”
이원익 선생이 일찍부터, 이렇게 말씀하신 걸 보면 말이다.
400년의 시간이 흘러도, 표현은 다르지만 속내는 같은 이야기였던 것이다.
과연 명문가의 가풍이라는 것은 단순히 시간이 쌓은, 이름만 빛나는 명예는 아닌 성싶다.
누구나 알고 있는 평범한 진리일지라도 생활 속에, 행동의 지침으로,
부모가 자식에게, 그 자식이 또한 부모 되어서…,
그렇게 오래도록 실천하고 체득한 것이기에 DNA의 한 인자로서 진화하여 몸속에 아로새겨진 것이 아닐까.
그러나 종가의 전통이란 한 문중만의 것은 아니다. 비록 한 집안을 통해 내려오는 정신적 자산이지만,
그것을 인정하고 존경해온 선조들이 공동으로 일구어놓은 모두의 문화 자산이기도 하다.
때때로 현실의 지난함에 그것을 잠시잠깐 잊고, 허우적대는 모습을 보이긴 해도 잊지 말자.
우리에겐 이처럼 든든한 ‘공동의 백’이 있다.
부침 없는 인생이 어디 있고, 굴곡 없는 역사가 어디 있을 것인가.
자신을 믿고, 자신의 발전을 믿고, 우리 선조들이 해낸 눈부신 성과를 믿고, 우리 사회의 진보를 믿고,
떳떳하게 당당하게 세상에 나아가야 하리.
- 글, 박종분
- 월간문화재사랑, 2009년 2월9일
충현박물관
경기도 광명시 소하동 1084번지, 옛 지명 오리마을.
40여 년 전까지만 해도‘시흥군 서면 제일 큰 기와집’이라고만 써도 우편이 들어왔다는
일대를 통틀어 가장 큰 이 터에는 오리 대감이 말년을 보낸 5칸짜리 집과 종가와 함께
박물관, 사원 등 관련 유적들이 자리 잡고 있다.
이 규모 있게 건사된 유적은
오리 선생의 13대 종손인 이승규, 함금자 부부가 뜻을 합쳐 오랜 세월 가꿔온 결실이다.
이곳은 조선시대 오리(梧里) 이원익(李元翼, 1547-1634) 선생과
그의 직계 후손들의 유적과 유물이 보존되어 있는 곳이다.
선생은 태종의 12번째 아들 익령군(益寧君)의 4대손으로
선조, 광해군, 인조 3대에 걸쳐 영의정을 지냈으며 ‘오리정승’으로 널리 알려졌다.
선생은 투철한 책임감과 애민(愛民)정신으로 많은 업적을 남겼다.
예컨대 병졸의 입번(入番)제도를 개선하여 전국적으로 확대하게 하였고,
안주목사 (安州牧使) 시절에는 뽕나무를 권장하여 ‘이공상(李公桑)’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하였다.
또한 대동법(大同法)을 실시하여 백성의 세금부담을 덜어주었다.
임진왜란 당시 평안도 도순찰사(平安道都巡察使)로 평양 탈환에 공을 세웠고,
사도도체찰사(四道都體察使)로 군무를 총괄하여 왜란을 극복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그 공으로 호성공신(扈聖功臣)으로 녹훈되고, 완평부원군(完平府院君)에 봉해졌다.
성품이 소박하고 과장이나 과시할 줄 모르고 소임에 충실하고 정의감이 투철하였다.
청빈하게 살아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었고, 인조로부터 사제(私第)와 궤장(궤杖)을 하사받았다.
이 일대는 선생이 말년에 여생을 보내시던 곳으로,
인조께서 이원익에게 하사하신 관감당(觀感堂), 사당인 오리영우(梧里影宇),
충현서원지(忠賢書院址), 종택(宗宅) 등 지정문화재가 있다.
또한 선생이 거문고를 타시던 탄금암(彈琴岩)과 400년 수령의 측백나무,
최근 복원된 풍욕대(風浴坮), 삼상대(三相臺)와 같은 정자가 남아있어
조선시대 선비의 담백한 옛 풍류도 엿볼 수 있다.
전시관에는 이원익 선생의 영정(影幀), 친필, 교서, 문집, 사궤장연첩(賜궤杖宴貼)과,
그 후손들이 남긴 고문서ㆍ목가구ㆍ제기ㆍ집기 등이 전시되어 있다.
친필로 남기신 유서(遺書)와 사랑하는 손녀 계온이에게 주는 시(詩)를 통하여
한 가정의 어른으로서의 자상하고 따스한 정이 있는 가르침을 느낄 수 있다.
종가(宗家)의 생활용품을 통하여 급변하는 세태 속에서도
충효정신과 전통제례를 이어가던 선비가문의 청렴한 생활철학도 만나 볼 수 있다.
충현문화재단도 함께 설립하여 지역사회의 발전, 문화증진에 이바지하고자 하였던
충현박물관의 설립은 선생의 13대 종손 이승규(李升圭) 박사와 종부인 함금자(咸金子) 여사이다.
- 충현박물관 홈페이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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