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가며(자료)

백제 의자왕 증손녀 부부 묘지명

Gijuzzang Dream 2009. 1. 30. 22:25

 

 

 

 

 

 

 백제 의자왕 증손녀 부부 묘지명 발굴  

 

 

백제 중앙관서 '외경부' 목간도 공개

 

 

당으로 끌려간 백제 의자왕의 증손녀 부여태비의 묘지명

(백제 의자왕의 증손녀 부여태비 묘지의 덮개돌 탁본)

중국 산시성 당나라 옛 도읍 장안(長安)인 시안(西安)의 당 고조 이연(李淵. 566-635)의 무덤인 헌릉(獻陵) 주변 도굴된 무덤에서 그의 남편 이옹(李邕) 묘지명과 함께 발견됐다. 이 묘지명은 2004년 조사에서 출토된 것으로 부여태비의 가계와 생애, 인품 등을 기록했다.


 

 

백제가 나당연합군에게 멸망하고 당으로 끌려간 백제 의자왕(재위 641-660)의

증손녀 부부의 묘지명이 당나라 도읍 시안(西安)에서 발견됐다. 
백제 부흥운동사 전공인 김영관 청계천문화관장은 2004년 중국 산시(陝西)고고연구소가

시안 북쪽에 있는 당 고조 이연(李淵, 566-635)의 무덤인 헌릉(獻陵) 주변의 도굴된 무덤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의자왕 증손녀인 부여태비(扶餘太妃)와 그의 남편인 이옹(李邕) 부부의 묘지명을

각각 찾아냈다는 사실을 공개하였다. 

김 관장은 이 묘지(墓誌)에는 덮개돌이 별도로 있다고 말했다. 
덮개돌은 가로 74cm, 세로 70cm, 두께 13cm로,

'唐故괵王妃墓扶餘誌銘(당고괵왕비묘부여지명)'이라는 글자를 음각했다.

'괵'이란 그의 남편 이옹이 왕으로 분봉을 받은 지명이다. 
본문격인 묘지는 가로 74cm, 세로 70cm이며, 두께는 9cm로 표면을 연마해 광택을 냈다.

이에는 전문(全文) 30행, 1행 각 31글자, 총 831자에 이르는 문장을 해서(楷書)로 음각해 새겼다.

글자체는 날렵하면서도 활달하고, 깔끔하면서 분명하고 힘이 있다고 김 관장은 덧붙였다. 

 

백제 의자왕의 증손녀의 남편 이옹(李邕) 묘지명.

부여태비(의자왕 증손녀) 묘지명과 함께 당나라 옛 도읍 장안(長安)인 시안의 당 고조 이연(李淵.566-635)의 무덤인 헌릉(獻陵) 주변 도굴된 무덤에서 같이 발견된 이 묘지명은 2004년 조사에서 출토됐다.


 

묘지명에는 “부여태비가 이옹과 혼인한 후 집안을 일으킨 덕에 조정의 충신이 되고 제후가 되었다”는

칭송과 함께 “개원중 사괵왕비에 책봉되어 20년간 부귀를 누렸고, 이옹이 세상을 떠난 뒤

다섯 아들을 잘 길러 사괵왕을 잇게 했고, 731년 태비로 책봉되었다”고 쓰여 있다.

부여태비는 이름은 알 수 없으나 이옹의 아들이 '괵왕'이라는 봉작을 이어받음에 따라

'괵왕태비(王太妃)가 되었음을 이 묘지명을 알려준다.

부여태비는 부여씨 성을 가진 왕의 어머니라는 뜻이다. 

 

나아가 김 관장은 이 묘지명에 기록된 내용을 통해

부여태비는 증조부가 의자왕이고, 조부는 부여융이며, 아버지는 부여덕장이라는 사실과 함께

그가 당 황실 자제인 이옹과 혼인해 아들 다섯을 두었다는 사실을 새롭게 알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김 관장은 “이로써 백제 왕족이 당에서 왕비족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직접적인 기록을 확보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또 “지금까지 당에 끌려간 의자왕의 후손으로

태자 부여융(隆), 부여융의 손자 부여경(敬), 왕자 태, 효, 연 등만 알려져 있었지만,

이번 묘지명을 통해 부여융의 아들로 덕장(德璋), 문선 등이 있으며,

덕장의 딸 부여태비(扶餘太妃) 등이 있음을 알아냈다”며

“의자왕과 그 후손들의 가계를 부족하나마 복원해낼 수 있었다”고 의의를 설명했다.
김 관장은 "부여태비의 생애를 알려줄 뿐 아니라 백제 멸망 후 당으로 끌려간 왕족들의 행적을

재구성하는 데 중요한 자료"라며

"앞으로 의자왕이 묻힌 뤄양(洛陽)의 망산에 대한 중국측 조사결과에도 주목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끌려간 의자왕의 후손들 가계도

최근 중국에서 발견된 백제 의자왕 증손녀 묘지명을 토대로 당으로 끌려간 의자왕 후손들 가계도를 김영관 청계천문화관장이 문헌기록과 묘지명을 통해 드러난 새로운 사실들을 토대로 복원했다.

 
더불어 묘지명과 문헌기록을 분석한 결과

부여태비는 690년 의자왕의 손자인 부여덕장의 차녀(次女)로 태어나

711년 당의 황족인 이옹의 두 번째 부인으로 혼인해 괵왕비에 책봉되었으며,

727년 이옹이 먼저 세상을 뜨자 731년 태비로 책봉됐다는 사실도 드러났다. 

묘지명에 의하면 부여태비는

738년 8월9일 장안(長安)의 숭현방 사저에서 49세로 세상을 떠나고

그 해 11월15일 먼저 죽은 남편 이옹과 합장됐다.

묘지명은 부여태비가 백제의 왕족으로 정숙한 삶을 살았다고 기록했다. 


 

의자왕 증손녀는 단풍처럼 아름다왔다


당으로 끌려갔던 백제 의자왕의 증손녀 부부의 묘지명이 당나라 도읍 시안(西安)에서 발견됐다.
의자왕 증손녀의 묘지명은 당나라 옛 도읍 장안(長安)인 시안의 당 고조 이연(李淵 566-635)의 무덤(헌릉)

주변에서 지난 2004년 그의 남편 이옹(李邕) 묘지명과 함께 발견됐다.

이 묘지명은 부여태비(夫餘太妃)의 가계와 인품 등을 기록해 눈길을 끈다.

비문에는 훗날 당 제후의 왕비가 된 백제여인을

"남국(南國) 사람의 얼굴처럼 아름다우니 봄날의 숲과 가을단풍 같았다.

아주 좋은 집에 살았으나 아침 햇살처럼 조용히 움직여 드러나지 않으니 세상에 드물게 어진 사람이며

덕이 있어 외롭지 않았고 속마음과 겉으로 드러난 모습이 같았다"고 기록돼 있다.

부여태비의 존재가 드러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백제사를 전공하는 김영관 청계천문화관관장은

"중국 산시성 고고연구소가 2004년 중국 산시성의 헌릉(당 고조의 무덤)에 딸린 무덤을 발굴하는 과정에서

부여태비와 남편 이옹의 묘지와 묘비석을 발견했다"며

"최근 묘지 비문의 글자 831자를 판독한 결과 부여태비의 생애와 의자왕 후손의 가계도를 밝혀냈다"고

말했다. 김관장은 이같은 조사결과를 15일 백제학회에서 발표한다.

이옹은 당 현종의 아저씨뻘 황족으로, 부여태비가 황족과 결혼했다는 사실이 밝혀짐에 따라

'백제왕실의 후손이 당으로 끌려가 핍박을 받았을 것'이라는 그간의 추정은 오류였다고

김관장은 분석했다.

비문에는 부여태비가

의자왕의 아들인 부여융(隆)의 손녀이자, 부여융의 아들인 부여덕장(德璋)의 차녀로 기록돼 있다.

690년에 태어난 부여태비는 711년 이옹과 결혼했고 718년 괵왕비에 책봉됐다.

이옹은 당나라를 건국한 고조 이연(李淵)의 증손자로,

장안 외곽의 영토를 다스리는 괵왕(王)으로 봉해진 제후왕이었다.
727년 이옹이 죽고 맏아들 이거(李巨)가 왕위를 이어받은 4년 후인 731년 태비로 책봉됐으며,

부여덕장은 당나라에서 종5품 고위 관직을 지냈다. 738년 49세로 세상을 떠나 이옹과 합장됐다.
이번 발견은 백제 왕실 후손의 행적과 가계도의 공백을 메울 수 있는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 헤럴드경제, 2008.11.14

 

 

 

  

의자왕 증손녀 남편 - 첫부인 효용 상실하자 '헌신짝' 처분

중국에서 백제 의자왕의 증손녀인 부여태비(扶餘太妃) 묘지명이 남편 이옹(李邕)의 묘지명과 함께

같은 무덤에서 발굴되고 공개됨으로써 이 남편 또한 어떤 사람인지 궁금증을 자아낸다.
이옹은 당나라를 건국한 고조(高祖) 이연(李淵)의 증손자로서 당 황실 일원이며,

제후왕에까지 책봉된 적이 있는 까닭에

이번 묘지명 외에도 그의 족적은 다행하게도 문헌에서 제법 찾을 수 있다.

이를 종합하면 이옹은 "나쁜 남자"라는 결론밖에 나오지 않는다.
그는 출세와 위기 탈출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은 냉혈한이었다.
먼저 출세를 위해서는 권력은 있으나 남편을 잃고 과부가 된 여인을 첫부인으로 맞아들이더니,

정국의 변화에 따라 이 여인이 효용 가치를 갑자기 상실하게 되자

 가차없이 자기 손으로 부인의 목을 벤 인물로 기록됐기 때문이다.

구당서(舊唐書) 중 고조 이연의 아들 22명과 그 후손의 행적을 정리한 항목에 의하면

이옹의 할아버지는 이연의 15번째 아들이자 '괵왕'에 책봉된 이봉(李鳳)이며,

아버지는 측천무후 집권 초반기에 조주자사(曺州刺史)를 역임한 이굉(李宏)이다.

당시 당나라는 황제의 아들을 비롯한 황족들을 각 지역 제후왕(諸侯王)으로 책봉하는

소위 분봉제(分封制)를 가미해 지방을 다스렸으므로,

이렇게 분봉된 제후왕은 맏아들을 통해 계속 이어지는 것이 상례였다.
이런 시스템 때문에 이옹의 직계 조상은 이미 셋째 아들인 아버지 때부터 '괵왕'이 될 수는 없었다.

나아가 정국에서도 일대 변혁이 일어났다.

측천무후가 당 왕조를 단절시키고 주(周)라는 새로운 왕조를 만든 일이 발생한 것이다.

이를 통해 측천무후는 중국사에서는 전무후무한 여성 황제로 등극한 것이다.
이렇게 되자 종래의 당 황실 친족들에게 대대적인 '과거사 청산' 바람이 몰아쳤다.

이 와중에 이옹의 사촌형으로서 괵왕이라는 제후왕으로 있던 이우(李寓)라는 사람 또한

688년에는 제후왕의 지위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이 기간에 이옹이 어떤 처지에 내몰렸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는 나날을 보냈을 것으로 짐작된다. 하지만, 이씨 집안에 다시 서광이 찾아온다.

측천무후가 죽고 중종(中宗)이 황제에 복위하면서 당 황실이 부활한 것이다.
이에 편승해 이옹 또한 큰집으로 넘어갔던 '괵왕'이란 제후왕 타이틀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 데 성공한다.

구당서에 수록된 그의 짧은 열전에서는

"이옹이 위서인(韋庶人)의 누이동생을 아내로 맞아들이니

이때부터 중종 시대에 남다른 총애를 입어 비서감(秘書監)이 되더니

갑자기 또 '괵광'으로 고쳐 책봉되어서는 (중앙정부와는 다른 별도의) 지방정부를 열고 관리까지 두었다"

고 했다.

위서인이라는 여자의 배경을 이용해 벼락출세했다는 뜻이다.

위서인은 글자 그대로는 위씨(韋氏) 성을 지닌 서인(평민여자)라는 의미지만

중종의 정비로서 권력을 한 손에 쥐고 휘둘렀던 위황후(韋皇后)를 말한다.

이옹이 어떤 방식으로 위황후에게 접근했는지는 분명치 않으나

용케도 황후의 여동생과 인연이 닿아 그를 아내로까지 맞아들이는 데 성공했던 것이며

이를 발판으로 벼락출세의 가도를 달리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행보에서 또 하나 주목되는 사실은

이 위황후의 여동생이 한 번 결혼한 적이 있는 '과부' 출신이라는 점이다.

같은 구당서 중 외척(外戚) 일원인 위온(韋溫)이란 사람의 행적을 기록한 열전에 의하면

위황후의 여동생은 남편이 태상소경(太常少卿)이라는 벼슬까지 지낸 풍태화(馮太和)라는 사람이지만

남편이 죽자 이내 이옹에게 개가했다고 한다.
이로 본다면 이옹은 출세를 위해 최고 권력자의 여동생으로서 과부가 된 위씨를

아내로 삼는 전략을 구사했던 것이다.
이 위씨부인은 남편 풍태화의 생전에는 숭국부인(崇國夫人)이라고 불리면서

언니를 등에 업고 역시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다.

하지만 이옹에게 다시금 시련이 닥친다.

위황후가 얼마 뒤 실각하고 평민으로 쫓겨나 '위서인'(韋庶人)이 된 것이다.

이옹에게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사건이었다.

그 뿐만 아니라 위황후 주변 인물들이 대거 숙청되는 마당에

그 일원인 그 자신은 자칫 생명까지 위태로울 수 있는 절체절명의 순간에 내몰린 것이다.
하지만 이옹은 이 위기를 실로 드라마틱한 기법으로 탈출하고자 한다.
구당서 그의 열전에는 "(이옹이 괵왕에 책봉된 지) 한달 남짓만에 위씨(韋氏.위황후)가 실각하자

이옹은 칼을 빼어들고는 그 처(위씨부인)의 목을 베어서는 조종에다 바쳤다"고 했다.
자신의 출세 도구였던 부인을 그냥 내친 것이 아니라,

아예 자기가 직접 죽이고, 그 목을 베어 조정에 받쳤던 것이다.

하지만 이런 행태가 "당시 세상인심이 비루한 행동이라고 여긴 까닭에
(그는) 심주자사(沁州刺史)로

강등됐고 그 주(州)의 사무를 몰라 봉읍(封邑. 분봉받은 땅) 또한 삭감당했다"(구당서 이옹 열전)고 한다.

그렇지만 이옹은 이번에도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선다.
구당서 그의 열전에는 이옹이 "경운(景雲) 2년(711)에 다시 괵왕에 책봉되어

200호(戶)를 봉읍으로 하사받았으며 누차 승진하여 위위경(衛尉卿)이 되고

개원(開元) 15년(727)에 죽었다"고 했다.

이로써 보면 의자왕의 증손녀인 부여태비는

이옹이 첫 부인인 위씨를 자기 손으로 죽여버린 뒤에 맞아들인 두번째 부인이 된다.

그렇다면 이런 이옹의 행각이 부여태비 묘지명에는 어떻게 기록됐을까?
김영관 관장은 "뜻밖에도 묘지명에는 그런 내용이 어디에도 보이지 않고,

심지어 부여태비가 두번째 부인이라는 사실도 빠져 있다"고 전했다.
다만, 그의 묘지명과 함께 발견된 이옹 자신의 묘지명에는
이에 대해 언급한 대목이 발견된다고

김 관장은 덧붙였다.
- 연합뉴스, 2008.11.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