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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는 삼국시대인 4세기에 우리나라에 알려졌다.
그런데 고구려나 백제와 달리 신라에 불교가 소개되어 사람들이 불교를 알고 믿게 되기까지
적지 않은 진통이 있었다. 신라에 처음 불교가 알려진 지 백년이 지난 법흥왕(法興王) 때까지도
불교를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못하였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법흥왕의 뜻을 알고 공식적으로 불교를 인정하도록 도운 이가 이차돈(異次頓)이다.
이차돈은 신라의 전통 신앙에 몰두되어 있던 귀족층들의 반발로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불교를 공인하기 힘들다고 판단하자 비상한 방법을 생각해 냈다.
자신이 국가의 공식적인 허락도 없이 절을 지는 등 불법을 행하였으니
그에 마땅한 벌을 받겠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자신의 목숨을 내놓는 일이었다.
대신 자신이 죽을 때 보통 사람들이 죽는 것과 다른 일이 생긴다면 이는 불법의 영험함으로 인한 것이니
의심 없이 불법을 믿어야 한다는 조건이었다.
법흥왕은 불법을 널리 받아들이는 일도 중요하지만
그 때문에 무고한 인명을 희생할 수는 없다고 이차돈을 말렸다.
그러나 이차돈의 뜻은 너무도 확고했고 마침내 왕과 뭇 신료들이 보는 앞에서 이차돈의 목을 베었다.
그랬더니 붉은 피가 솟아나는 대신 흰 우유같은 액체가 한 길이나 하늘로 솟구쳤다.
사방 하늘이 깜깜해져 태양은 빛을 감추고 온 땅이 진동하며 하늘에서는 꽃비가 내렸다.
법흥왕은 눈물이 옷을 적셔 흘러내리게 애통해하였고
반대하던 재상들은 걱정이 커져 진땀이 머리의 관모를 따라 흘러 내렸다.
샘물은 갑자기 말라서 물고기와 자라가 다투어 뛰어 오르고
곧게 서 있던 나무가 부러지고 산짐승들은 떼지어 울어댔다.
이차돈과 뜻을 같이 하던 동지들은 피눈물을 흘리면서
서로 쳐다보고 창자가 끊어지는 듯 슬픔을 이기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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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중으로 솟아 오른 이차돈의 머리는 곧장 땅에 떨어지지 않고
도성 북쪽에 있는 금강산으로 날아가 떨어졌다.
사람들은 이곳이 신성한 곳이라고 생각하여 절을 지어 백률사(栢栗寺)라고 이름지었다.
얼마 뒤 이 절 바로 밑에는 땅에서 파낸 사면석불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기도 하였다.
그리고 이차돈이 불법이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지기를 기원하며 목숨을 바친 지 3백년이 지난 때
사람들은 이차돈의 숭고한 뜻을 되새기고자 함께 모여 일을 준비했다.
527년(법흥왕 14)에 이차돈이 순교했고, 비를 세운 것은 818년(헌덕왕 10)이었다.
이차돈순교비 / 경상북도 경주시 동천동 백률사 출토, 높이 106 ㎝, 국립경주박물관 소장.
이차돈이 순교한 지 290년이 지난 818년(헌덕왕 10) 그를 추모하여 세운 6면 비석이다.
새겨진 글씨는 거의 읽을 수 없으나 판독할 수 있는 단어들 중에는
<삼국유사>의 이차돈 순교기록과 일치하는 것이 있다. 인물의 옷은 부인의 통치마 같은 하의에
허리까지 덮는 상의로 신라복식을 연구하는 데 좋은 자료이기도 하다.
지금까지 보지 못하던 새로운 모습이었다.
여섯모난 기둥같은 빗돌에 이차돈의 숭고한 뜻을 새겨 길이 기념하려는 것이었다.
가운데 면에는 이차돈이 순교하던 모습을 그림으로 새겼다.
두 손을 맞잡고 바르게 서서 머리를 내민 이차돈의 몸은 이미 머리가 몸에서 떠나 있다.
머리는 몸에서 햇살처럼 솟구쳐 올랐다가 발 앞에 떨어져 있다.
사방에는 꽃이 휘날려 떨어지고 대지는 파도처럼 진동하여
온 천지자연이 모두 이차돈의 숭고한 죽음을 슬퍼하고 있다.
나머지 다섯 면에는 네모칸[井間]을 치서 한 면마다 7줄이 되고 한 줄에 25자가 되도록 칸을 마련하여
각 칸마다 글자 크기 3cm정도의 글씨를 써 새겼다.
그 내용은 법흥왕이 백성들을 위해 불법을 널리 펴고자 하는 마음과 이를 위해 이차돈이 순교한 사실
그리고 그때 사람들이 이차돈의 숭고한 뜻을 간절히 기리며 이 비를 세우는 사정으로 이루어졌다.
이 비는 본래 이차돈의 머리가 날아갔다고 전해 오던 백률사에 세운 것이었는데
1914년에 백률사가 일시 폐허가 되자 시내에 있던 고적보존회로 옮겨
지금은 국립경주박물관에 보관하고 있다.
처음에는 지금 남아 있는 비신(碑身)과 대좌와 함께 덮개도 있었을 터이지만
지금은 몸체돌과 받침돌만 남아 있다.
화강암으로 만든 여섯모 비신의 높이는 1.04m이며, 각 면의 너비는 29cm이다.
이렇게 기둥처럼 생긴 돌을 석당(石幢)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런 이름에 따라 이 비를 '백률사석당'이라고도 한다.
또 이차돈을 기념하여 만든 것이므로 '이차돈공양당(異次頓供養幢)'이라고도 부른다.
받침돌은 네모난 석재 윗면을 육각형으로 도드라지게 높이고 윗부분에 연꽃무늬(覆蓮)를 새겼다.
마모가 심하여 글자는 절반 정도만 읽을 수 있다.
현재 알 수 있는 글자로는 이 비문을 지은이와 쓴 이를 알 수 없다.
글씨체는 해서이면서도 예서의 기운을 담은 힘있는 글씨이다.
다행히도 비문이 다 닳아지기 전에 탑본을 해 두었던 것을 여러 책에 실어 그 내용의 대강은 알 수 있다.
또 이차돈의 순교 사실을 전하고 있는 『삼국유사』나 『삼국사기』의 기록과 견주어 보면
그 내용을 대체로 추정할 수 있으며, 어떤 부분은 내용이 일치하기도 한다.
『삼국유사』에는 이 비를 세운 해보다 1년 먼저인 817년에 남간사(南澗寺)의 스님인 일념(一念)이
이차돈을 기리는 모임을 만들어 승속(僧俗)의 많은 사람들과 뜻을 같이 하며
「이차돈의 향기로운 무덤에 예를 올리는 결사문[

이때 모임에서는 국통(國統)인 혜륭(惠隆) 등이 무덤을 새로 고치고
이차돈을 기념하는 비를 세웠다고 하였다. 이 비가 바로 지금 남아 있는 이차돈순교비로 생각된다.
모임에서 일을 추진한 지 1년만인 818년에 세웠음을 비문의 첫머리에서 알 수 있다.
이차돈순교비가 세워진 9세기 전반기는
신라 사회에 불교가 이미 크게 뿌리내려 온통 불법의 나라이던 때이다.
이때 신라 불교 수용의 최초 공로자인 이차돈을 기리는 기념사업이 이루어진 것을 증명해 주는 것이
이것이다. 다른 데서는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회화적인 조각을 포함한 비의 내용과
다라니당과 같은 모양의 형태가 유일한 예이다.
장면의 구성도 함축적이어서 빼어난 솜씨를 보여주며 글씨의 수준도 훌륭한 작품이다.
지금 추정할 수 있는 비문의 대강은 이렇다.
“818년(헌덕왕 10년) 8월 10일에 이차돈을 기리는 모임을 만들었다.
법흥왕은 백성들을 위해 불법을 일으키고자 하여 잘 때나 밥 먹을 때나 걱정이 많았다.
하늘을 우러러 부처를 부르며
천하에 누구와 더불어 불교를 일으켜 세우고 법을 남기리오 하고 한탄하였다.
이때 이차돈이라는 사람이 있어 왕에게 나아가 자신에게 묻기를 청했다.
왕은 주저하였으나 이차돈이 재차 간청하자 불법을 펴고 싶은 마음을 말하였다.
이차돈이 자신이 고의로 잘못을 범한 것으로 꾸며 목을 치게 하면
신하와 백성들의 오해가 풀릴 것이라고 방책을 건의했다.
왕이 아무리 좋은 일을 위한다고 한들 어찌 감히 무고한 목숨을 상하겠느냐고 하자
이차돈은 자신이 비록 죽어도 불법이 유행하게 된다면 그것이야말로 소중한 일이라고 우겼다.
왕은 이런 사람이라면 보살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하며 그 뜻을 따랐다.
왕이 신하들을 불러 불법을 일으키는 일에 대해 논의하다 결국 이차돈을 처형하게 되었다.
관리가 이차돈의 목을 베자 목 가운데서 흰 우유가 한 길장이나 솟구치고
하늘에서는 꽃비가 내리고 땅이 흔들렸다.
눈물을 흘리며 장례를 치르고 시신을 북산에 안장하고 서산에 사당을 세웠다.”
- 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보시스템 [금석문과 역사]
순교자(殉敎者) | |||||
이차돈, 527년 순교로 신라에 불법홍포 길 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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