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가며(자료)

이차돈 순교비

Gijuzzang Dream 2009. 1. 29. 21:05

 

 

 

 

 

 

 

 

 

불교는 삼국시대인 4세기에 우리나라에 알려졌다.

그런데 고구려나 백제와 달리 신라에 불교가 소개되어 사람들이 불교를 알고 믿게 되기까지

적지 않은 진통이 있었다. 신라에 처음 불교가 알려진 지 백년이 지난 법흥왕(法興王) 때까지도

불교를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못하였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법흥왕의 뜻을 알고 공식적으로 불교를 인정하도록 도운 이가 이차돈(異次頓)이다.

 

이차돈은 신라의 전통 신앙에 몰두되어 있던 귀족층들의 반발로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불교를 공인하기 힘들다고 판단하자 비상한 방법을 생각해 냈다.

자신이 국가의 공식적인 허락도 없이 절을 지는 등 불법을 행하였으니

그에 마땅한 벌을 받겠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자신의 목숨을 내놓는 일이었다.

대신 자신이 죽을 때 보통 사람들이 죽는 것과 다른 일이 생긴다면 이는 불법의 영험함으로 인한 것이니

의심 없이 불법을 믿어야 한다는 조건이었다.

 

법흥왕은 불법을 널리 받아들이는 일도 중요하지만

그 때문에 무고한 인명을 희생할 수는 없다고 이차돈을 말렸다.

그러나 이차돈의 뜻은 너무도 확고했고 마침내 왕과 뭇 신료들이 보는 앞에서 이차돈의 목을 베었다.

그랬더니 붉은 피가 솟아나는 대신 흰 우유같은 액체가 한 길이나 하늘로 솟구쳤다.

사방 하늘이 깜깜해져 태양은 빛을 감추고 온 땅이 진동하며 하늘에서는 꽃비가 내렸다.

 

법흥왕은 눈물이 옷을 적셔 흘러내리게 애통해하였고

반대하던 재상들은 걱정이 커져 진땀이 머리의 관모를 따라 흘러 내렸다.

샘물은 갑자기 말라서 물고기와 자라가 다투어 뛰어 오르고

곧게 서 있던 나무가 부러지고 산짐승들은 떼지어 울어댔다.

이차돈과 뜻을 같이 하던 동지들은 피눈물을 흘리면서

서로 쳐다보고 창자가 끊어지는 듯 슬픔을 이기지 못하였다.

 


 

 

공중으로 솟아 오른 이차돈의 머리는 곧장 땅에 떨어지지 않고

도성 북쪽에 있는 금강산으로 날아가 떨어졌다.

사람들은 이곳이 신성한 곳이라고 생각하여 절을 지어 백률사(栢栗寺)라고 이름지었다.

얼마 뒤 이 절 바로 밑에는 땅에서 파낸 사면석불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기도 하였다.

그리고 이차돈이 불법이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지기를 기원하며 목숨을 바친 지 3백년이 지난 때

사람들은 이차돈의 숭고한 뜻을 되새기고자 함께 모여 일을 준비했다.

527년(법흥왕 14)에 이차돈이 순교했고, 비를 세운 것은 818년(헌덕왕 10)이었다.

 

 

 

 

 

이차돈순교비 / 경상북도 경주시 동천동 백률사 출토, 높이 106 ㎝, 국립경주박물관 소장.

이차돈이 순교한 지 290년이 지난 818년(헌덕왕 10) 그를 추모하여 세운 6면 비석이다.

새겨진 글씨는 거의 읽을 수 없으나 판독할 수 있는 단어들 중에는

<삼국유사>의 이차돈 순교기록과 일치하는 것이 있다. 인물의 옷은 부인의 통치마 같은 하의에

허리까지 덮는 상의로 신라복식을 연구하는 데 좋은 자료이기도 하다.  

 

 

 

지금까지 보지 못하던 새로운 모습이었다.

여섯모난 기둥같은 빗돌에 이차돈의 숭고한 뜻을 새겨 길이 기념하려는 것이었다.

가운데 면에는 이차돈이 순교하던 모습을 그림으로 새겼다.

두 손을 맞잡고 바르게 서서 머리를 내민 이차돈의 몸은 이미 머리가 몸에서 떠나 있다.

머리는 몸에서 햇살처럼 솟구쳐 올랐다가 발 앞에 떨어져 있다.

사방에는 꽃이 휘날려 떨어지고 대지는 파도처럼 진동하여

온 천지자연이 모두 이차돈의 숭고한 죽음을 슬퍼하고 있다.


나머지 다섯 면에는 네모칸[井間]을 치서 한 면마다 7줄이 되고 한 줄에 25자가 되도록 칸을 마련하여

각 칸마다 글자 크기 3cm정도의 글씨를 써 새겼다.

그 내용은 법흥왕이 백성들을 위해 불법을 널리 펴고자 하는 마음과 이를 위해 이차돈이 순교한 사실

그리고 그때 사람들이 이차돈의 숭고한 뜻을 간절히 기리며 이 비를 세우는 사정으로 이루어졌다.


이 비는 본래 이차돈의 머리가 날아갔다고 전해 오던 백률사에 세운 것이었는데

1914년에 백률사가 일시 폐허가 되자 시내에 있던 고적보존회로 옮겨

지금은 국립경주박물관에 보관하고 있다.

처음에는 지금 남아 있는 비신(碑身)과 대좌와 함께 덮개도 있었을 터이지만

지금은 몸체돌과 받침돌만 남아 있다.

 

화강암으로 만든 여섯모 비신의 높이는 1.04m이며, 각 면의 너비는 29cm이다.

이렇게 기둥처럼 생긴 돌을 석당(石幢)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런 이름에 따라 이 비를 '백률사석당'이라고도 한다.

또 이차돈을 기념하여 만든 것이므로 '이차돈공양당(異次頓供養幢)'이라고도 부른다.

받침돌은 네모난 석재 윗면을 육각형으로 도드라지게 높이고 윗부분에 연꽃무늬(覆蓮)를 새겼다.


마모가 심하여 글자는 절반 정도만 읽을 수 있다.

현재 알 수 있는 글자로는 이 비문을 지은이와 쓴 이를 알 수 없다.

글씨체는 해서이면서도 예서의 기운을 담은 힘있는 글씨이다.

다행히도 비문이 다 닳아지기 전에 탑본을 해 두었던 것을 여러 책에 실어 그 내용의 대강은 알 수 있다.

또 이차돈의 순교 사실을 전하고 있는 『삼국유사』나 『삼국사기』의 기록과 견주어 보면

그 내용을 대체로 추정할 수 있으며, 어떤 부분은 내용이 일치하기도 한다.


『삼국유사』에는 이 비를 세운 해보다 1년 먼저인 817년에 남간사(南澗寺)의 스님인 일념(一念)이

이차돈을 기리는 모임을 만들어 승속(僧俗)의 많은 사람들과 뜻을 같이 하며

「이차돈의 향기로운 무덤에 예를 올리는 결사문[香墳禮佛結社文]」을 지었다고 한다.

 

이때 모임에서는 국통(國統)인 혜륭(惠隆) 등이 무덤을 새로 고치고

이차돈을 기념하는 비를 세웠다고 하였다. 이 비가 바로 지금 남아 있는 이차돈순교비로 생각된다.

모임에서 일을 추진한 지 1년만인 818년에 세웠음을 비문의 첫머리에서 알 수 있다.


이차돈순교비가 세워진 9세기 전반기는

신라 사회에 불교가 이미 크게 뿌리내려 온통 불법의 나라이던 때이다.

이때 신라 불교 수용의 최초 공로자인 이차돈을 기리는 기념사업이 이루어진 것을 증명해 주는 것이

이것이다. 다른 데서는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회화적인 조각을 포함한 비의 내용과

다라니당과 같은 모양의 형태가 유일한 예이다.

장면의 구성도 함축적이어서 빼어난 솜씨를 보여주며 글씨의 수준도 훌륭한 작품이다.

 

 

 

 

지금 추정할 수 있는 비문의 대강은 이렇다.


“818년(헌덕왕 10년) 8월 10일에 이차돈을 기리는 모임을 만들었다.

법흥왕은 백성들을 위해 불법을 일으키고자 하여 잘 때나 밥 먹을 때나 걱정이 많았다.

하늘을 우러러 부처를 부르며

천하에 누구와 더불어 불교를 일으켜 세우고 법을 남기리오 하고 한탄하였다.

이때 이차돈이라는 사람이 있어 왕에게 나아가 자신에게 묻기를 청했다.

왕은 주저하였으나 이차돈이 재차 간청하자 불법을 펴고 싶은 마음을 말하였다.

이차돈이 자신이 고의로 잘못을 범한 것으로 꾸며 목을 치게 하면

신하와 백성들의 오해가 풀릴 것이라고 방책을 건의했다.

왕이 아무리 좋은 일을 위한다고 한들 어찌 감히 무고한 목숨을 상하겠느냐고 하자

이차돈은 자신이 비록 죽어도 불법이 유행하게 된다면 그것이야말로 소중한 일이라고 우겼다.

왕은 이런 사람이라면 보살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하며 그 뜻을 따랐다.

왕이 신하들을 불러 불법을 일으키는 일에 대해 논의하다 결국 이차돈을 처형하게 되었다.

관리가 이차돈의 목을 베자 목 가운데서 흰 우유가 한 길장이나 솟구치고

하늘에서는 꽃비가 내리고 땅이 흔들렸다.

눈물을 흘리며 장례를 치르고 시신을 북산에 안장하고 서산에 사당을 세웠다.”

 

- 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보시스템 [금석문과 역사]

 

 

 

 

 

 

 순교자(殉敎者)

 

이차돈, 527년 순교로 신라에 불법홍포 길 열다
 
 

 

문화체육관광부가 정한

이차돈 표준 영정(위)과

고려 말 나옹혜근의 진영

“참수할 때 목 가운데서
흰 젖이 한길이나 솟구치니
하늘에서는 꽃비가 내리고
땅이 뒤흔들렸다.
사람과 만물이 슬피 울고
동물과 식물이 동요하였다.
길에서 곡소리가 이어졌고
우물과 방앗간에서
인적이 끊겼다.”
- 헌덕왕 9년(817) 세운  이차돈 순교비에서 -

 

신라의 스물 세 번째 임금 법흥왕이 왕위에 오른지 14년(527)째인 어느날 양나라 무제가 향을 보내왔다.

불교가 전파되지 않았기에 향의 쓰임새를 모르던 법흥왕은 군신들을 모아놓고 “이것이 무엇에 쓰는 물건이냐”고 물었으나, 그 누구도 이것이 무엇이며 어디에 사용하는 물건인지 알지 못했다.

모두가 고개만 갸웃거리던 차에 미관말직의 사인(舍人) 신분이던 이차돈이 나서 모례의 집에 이를 알만한 인물이 있을 것이라고 고했다.

 

이에 법흥왕은 신하를 모례의 집에 보냈고, 이때 모례의 집에 기거하던 묵호자(혹은 아도)가 신하와 함께 입궁했다.

당시 법흥왕의 딸이 병중에 있었음을 알고 있던 묵호자가 향을 사르고 경전을 독송하자 거짓말같이 공주의 병이 나았다. 이후로 법흥왕은 자연스럽게 불교를 마음속에 담아두게 되었고, 때마침 귀족들을 통솔할 새로운 이데올로기의 필요성을 강하게 느꼈던 왕은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국민들의 뜻을 하나로 모아 나라의 안녕을 추구할 것을 다짐하기에 이르렀다.

 

 

법흥왕, 고심 끝에 순교 허락

 

그러나 국사에 깊이 관여해온 군신들의 반대가 완강하기 그지없었다.

“우리나라에도 명신(明神)이 있는데 왜 낯선 객신을 불러들여 나라 일을 그르치고 민심을 어지럽게 하려 하느냐”는 것이 군신들의 주장이었다.

군신들이 이처럼 강하게 반발하고 나선 이면에는

기득권 상실에 대한 우려가 있었음은 물론이다.

 

그때 다시 이차돈이 나섰다. 이차돈은 지증왕의 생부인 습보갈문왕의 후예이기는 했으나,

기득권 세력이 아니었기에 정치적으로 잃을 것이 없는 위치에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미 마음속으로 불교를 받아들여 불심이 깊었고

모례의 집에 묵호자가 있었음을 알고 있었던 그는

지금이 신라 땅에 불교를 전파할 수 있는 좋은 기회임을 확신했다.

 

왕 앞에 나간 이차돈은 “옛 사람들은 꼴을 베고 땔나무를 하는 비천한 사람에게도

계교를 물었다고 하니 신 또한 죄를 무릅쓰고 아뢰옵니다.

임금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은 곧 백성의 곧은 의리이기도 합니다.

왕께서 제게 거짓을 꾸몄다는 죄를 물어 목을 베시면 만민이 굴복하여

왕의 말씀을 어기지 못할 것입니다”라며 불교를 전파하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바치겠다는 뜻을 밝혔다.

 
 

그러나 이미 부처님 가르침을 접한 왕으로서는 산 사람의 목숨을 해하면서까지

불법을 전파할 수 없다는 신념이 있었기 때문에 쉽게 허락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차돈 역시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모든 것 중에서 가장 버리기 어려운 것이 목숨이지만

소신이 저녁에 죽어서 아침에 불법이 일어난다면,

불교가 융성하고 임금께서는 길이 편안하실 것”이라며

불법의 흥행은 물론 국가의 체제 확립과 안녕을 위해서도 필요한 일임을 충심으로 간청했다.

 

법흥왕이 고심에 고심을 거듭하다 마침내 이를 허락하자,

이차돈은 당시 귀족들이 자신들이 명신이라 믿는 토착신앙의 성지로 신봉하던

경주의 울창한 숲 천경림으로 달려가 나무를 베고 절을 짓기 시작했다.

이차돈이 왕명을 받아 천경림에 절을 짓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 귀족들과 군신들은

당장 임금에게 달려가 이 일을 따져 물었다. 그러나 이미 이차돈과 입을 맞춘 법흥왕은

“그런 명을 내린 적이 없다”며 이차돈을 잡아들여 목을 베도록 했다.

 

형장에 끌려나온 이차돈은 합장한 채

“불법을 일으켜 만백성을 일으키기 위해 이 몸을 버리오니

시방삼세 모든 부처님께서는 이 일을 증명하시고 큰 영험을 내려

불법이 흥행토록 해주십시오”라는 기원을 마치고 죽음을 맞았다.

 

수많은 군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이차돈의 목이 베어지는 순간,

갑자기 맑은 하늘에 천둥이치고 해가 사라져 빛을 잃으면서 천지가 크게 진동했다.

이어 하늘에서는 꽃비가 내리고 머리를 잃은 목에서는 흰 젖이 한길이나 솟아올랐으며

잘려나간 머리는 멀리 날아가 경주 북쪽의 금강산 꼭대기에 떨어졌다.

 

이 모습을 지켜본 수많은 군중들은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신비로운 이적(異蹟)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고, 이차돈의 참형을 주청했던 귀족과 군신들은 두려움에 떨며

의관이 흠뻑 젖어들 정도로 진땀을 흘려야만 했다.

 

불교를 배척해온 신라 땅에 불법이 널리 퍼지기를 서원하며 스스로 죽음을 맞아들인 이차돈은

이렇게 죽었고, 이는 곧 공식적으로 알려진 한국불교사상 첫 순교(殉敎)이다.

따라서 이차돈은 『삼국사기』,『삼국유사』등 옛 기록에

그 죽음 과정이 자세하게 나타난 첫 번째 순교자인 셈이다.

 

이차돈이 순교할 때의 장면은 헌덕왕 9년(817)에 세운 이차돈 순교비에도

“참수할 때 목 가운데서/ 흰 젖이 한길이나 솟구치니

이때 하늘에서는 꽃비가 내리고/ 땅이 뒤흔들렸다.

사람과 만물이 슬피 울고/ 동물과 식물이 동요하였다.

길에서 곡소리가 이어졌고/ 우물과 방앗간에서 인적이 끊겼다.”고 새겨져 있어

그 역사적 사실성을 뒷받침하고 있다.

 

 

이차돈 앞서 고구려 정방스님 참형

 

 

 

이 순교비는 1927년부터 경주국립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으며,

높이 1.04m에 몸체는 육각기둥 모양이다. 한 면에는 이차돈의 순교 장면을 부조했고,

나머지 다섯 면에 걸쳐 해서체로 그의 사적을 기록하고 있으나

읽을 수 없을 정도로 마멸이 심하다.

또 순교비는 아래쪽에 진동하는 땅을 파도처럼 표현했고

이차돈의 머리가 그 위에 나뒹굴고 있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이차돈은 두 손을 소매 속에 넣어 서있으며 그의 목에서는 기록에서 말하는 흰 젖이

하늘높이 솟아오르고 좌우에 꽃송이가 흩날리는 모습이 새겨져 있다.

 

법흥왕은 이차돈 순교 다음해에 불교를 공인했고,

이후 백성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며 왕권을 확립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때부터 짓기 시작한 절은 후대인 진흥왕 5년(544)에 완공해 대왕흥륜사로 명해졌다.

 

진흥왕은 이어 그해 3월부터 백성들이 출가하는 것을 허락하기에 이르렀다.

이차돈 순교 이후 해마다 그의 기일이면 많은 백성들이 흥륜사에서 추모행사를 가졌으며,

이후 흥륜사는 나라의 안녕을 기원하는 도량으로 자리매김했다.

이곳에 이차돈의 상이 그려져 있었으나,

조선시대 화재로 인해 소실됐고 이후 폐사지로 남아 있었으나

1971년 한 비구니 스님의 원력으로 중창불사가 진행됐다.

그리고 1999년에는 순교 1472주기를 맞아 추모비를 제작하기도 했다.

 

이처럼 이차돈은 순교 이후 때론 국가적 차원에서, 때론 백성들에 의해

그 뜻을 추모하는 일이 끊이지 않고 있다.
스스로 목숨을 버리는 것은 불교 교리상 맞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불교 역사 속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널리 전하고 융성하게 하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희생하거나 희생당한 이들이 적지 않았던 것 또한 사실이다.

 

옛 기록에서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는 이차돈의 순교 이전에도

신라 땅에 들어온 고구려 스님들이 참형을 당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니 이차돈이 최초의 순교자라고 단정할 수만은 없다.

다만, 이차돈 이전에 참형을 당한 스님들에 대한 이야기가 자세하게 전해지지 않고,

아도에 관한 이야기를 서술하는 부분에서 언급만 하고 있을 뿐이어서

그 실체를 확인하기 어려울 뿐이다.

 
『해동고승전』권1 아도전에

아도(阿道)가 일선군에 들어와 신라 최초의 재가불자로 알려진 모례(毛禮)의 집에 들렀을 때,

모례가 아도에게 “지난날 고구려 승려 정방(正方)이 신라에 왔을 때

군신들이 괴상하게 여기고 좋지 못하다 해서 그를 죽였으며,

그 뒤에 들어온 멸구자(滅垢?) 역시 그 전과 같이 죽임을 당했다”고 알려주었다는 대목이 있다.

 

이차돈이 참형을 당하기에 앞서 이미 정방, 멸구자 등 고구려 스님들이

신라에서 살해당했다는 기록이다. 뿐만 아니라 당시 신라에 들어가려던 고구려 스님들 가운데

상당수가 국경 근처에서 죽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따라서 고구려 스님들의 신라행이 불법 전파를 위한 것이었는지,

고구려의 정치 · 종교적 상황에 따른 망명이었는지가 먼저 분명하게 밝혀져야

이들의 죽음에 대한 평가도 정확하게 내려질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들 고구려 스님, 특히 정방이나 멸구자가 불법전파를 목적으로 신라에 들어온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는 만큼, 한국불교 역사에서 첫 번째 순교자는

이차돈이 아니라 『행동고승전』에 나타난 정방으로 정정될 가능성 또한 적지 않다.

 

한국불교에서 스님들의 순교는 고구려 스님들과 이차돈 이후에도 이어졌다.

고려 말기 유생들이 득세하면서 정권유지 차원에서

스님들을 탄압하거나 암살하는 사례가 있었고,

조선시대에는 본격적인 억불정책이 시작되면서 수없이 많은 스님들이 목숨을 잃어야만 했다.

 

 

고려 나옹-조선 보우도 죽임 당해

 

이들 가운데 고려말 나옹혜근은 스승 지공 선사의 유훈을 받들어 회암사를 중창하여

그곳을 중심으로 흥법하려 했으나, 중신들의 시기로 인해 뜻을 펴지 못하고 입적했다.

나옹 스님의 입적과 관련한 일반적 설은 회암사 낙성식에 구름처럼 몰려든 대중을 보고,

불교의 결집과 세력확산을 우려한 중신들의 모략으로 인해 밀양 영원사로 가던 도중

여주 신륵사에서 입적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역사학자들 사이에서는 나옹 스님이 암살당했다는데 무게를 두는 입장이 적지 않다.

동국대 역사교육학과 황인규 교수는 『불교평론』에 기고한 글 ‘한국불교사의 순교승’에서

“정부가 그를 밀양 영원사로 가도록 명을 내렸다.

가는 도중 여주 신륵사에서 입적하였다고 하였으나 사실은 주살되었던 것이다”라고

나옹의 암살을 기정사실화하고 있다.

당시 시대적 상황을 고려할 때 역사학자들의 주장이 더욱 설득력을 얻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고려말 나옹 스님 이후 조선시대 세종, 성종, 연산군, 중종대에서는 폐불을 방불케 하는

억불정책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천태종 승려 행호를 비롯해

설산, 월심, 계엄, 성명, 상금, 설의, 설은 등이 참형을 당했고

해초, 학전, 각돈, 설준 등도 온갖 누명을 쓰고 탄압을 받은 끝에 죽임을 당한 순교자들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훗날 명종은 문정왕후가 죽은 이후 대신들의 주청을 받다들여

허응당 보우를 제주도에 유배했고, 보우 역시 결국 참살 당하고 말았다.

 

이렇듯 한국불교사에서 순교는 조선시대 억불정책이 이어지는 동안 끊이질 않았고,

온갖 탄압과 생명을 위협받는 위험 속에서도 불법을 전파하겠다는

이들의 위법망구의 정신이 있었기에 오늘날의 불교도 존재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 법보신문 969호, 2008년 10월 16일 [이것이 한국불교 최초]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