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정비결의 저자는 토정이 아니다
토정비결은 19세기 중반에 등장… 토정은 16세기 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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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사본에서 인쇄본으로 바꿔온 토정비결의 여러 판본. |
우리가 흔히 정초에 보는 <토정비결>은
조선 중종 시기(16세기) 유학자 토정 이지함이 쓴 주역 관련서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토정비결>은 지금까지 많은 사람이 애용하는 책이지만
토정비결에 대한 정확한 연구는 사실상 전무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토정비결은 그후 많은 변화를 거쳤고
지금의 형태(매월 운까지 실린 것)로 정착한 것은 사실 해방 이후였다.
따라서 현재 <토정비결>을 토정의 작품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토정비결을 10여 년간 수집해온 박종평 골든 에이지(출판사) 대표는
“150여 년에 걸쳐 나온 60여 종의 토정비결을 보면 지금과 같은 형태로 된 것은 해방 이후”라고 지적했다.
이전까지는 그 해의 운만 적혀 있거나 여기에 덧붙여 한두 달의 운만 있었다.
하지만 해방 이후 출간한 토정비결에는 매월 운이 추가됐다. 누군가 가필해서 현재의 모습이 된 것이다.
‘동국세시기’에 언급 없어
60여 종의 토정비결을 분석해보면
토정비결은 크게 필사본, 일제강점기 인쇄본, 해방 이후 인쇄본으로 나눌 수 있다.
박 대표는 50여 종의 필사본과 10여 종의 인쇄본을 소장하고 있다.
박 대표는 “다른 조선시대 고서적처럼 목판본을 찾으려 했으나 찾지 못했다”면서
“박물관에서도 이 목판본을 보지 못했다”고 말했다.
박 대표가 소장하고 있는 목판본 점술서인 <직성행년편람>에는 토정비결이 나타나 있지 않다.
토정비결 필사본은 대부분 원본을 베낀 것이다. 때문에 글씨가 정자체가 아니다.
박 대표의 소장본 중 인쇄본이 1918년 일제히 발간된 것을 보면
이전에는 대부분 필사본으로 토정비결을 보았을 것으로 추정한다.
지금까지 학계에서는 토정비결이 19세기 중반 이후 등장한 것으로 보고 있다.
1849년에 발간한 것으로 보이는 <동국세시기>에 토정비결이 등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동국세시기>는 우리나라의 연중행사와 풍속 등을 정리한 책이다.
<동국세시기>에는 새해 첫날을 뜻하는 원일(元日)에서
“오행점을 던져서 그것으로써 신년의 몸의 운수를 점쳤다”라면서
새해 운수를 점치는 여러 방법이 나타나 있지만 요즘과 같이 토정비결을 보았다는 내용이 없다.
민속박물관 장장식 연구관은 “<동국세시기>는 물론
비슷한 시기에 쓴 <열양세시기> <경도잡기> 같은 책에도 토정비결을 보았다는 내용이 없는 것으로 보아
토정비결은 19세기 말 널리 보급된 것으로 봐야 한다”고 설명했다.
장 연구관의 설명에 따르면, 토정비결이 있었음에도 기록되지 않았을 가능성과
비결에 토정이라는 이름을 붙이지 않았을 가능성이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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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사본 토정비결의 여러 종류. 당년결, 석중결, 연운요감, 토정선생요결(왼쪽부터)이 있다. |
일년신수 · 석중결 등 명칭 다양
실제로 박 대표가 소장한 필사본 50여 종은 여러 가지 이름을 갖고 있다.
토정결(土亭訣), 토정선생요결, 토정비결, 당년결(當年訣), 당년신수결(當年身數訣), 일년신수( 一年身數),
석중결(石中訣), 유년결(流年訣), 연운요감(年運要鑑), 비밀(秘密), 태세수(太歲數), 산수책(算數冊),
영기결 등으로 토정비결의 명칭이 다양하다.
토정비결을 오랫동안 연구한 한중수 동방대학원대학교 교수(명리학 최고지도자 과정)는
“일제강점기 집에서 토정비결을 보았는데
그 명칭이 ‘석중결’로 ‘동굴에서 비결을 썼다는 뜻’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이들 책은 내용이 비슷해 모두 토정비결의 필사본임을 알 수 있다.
어떤 책에는 토정비결의 내용만 나와 있고, 어떤 책에는 다른 점의 내용 속에 토정비결을 담고 있다.
필사본에는 저자를 표시하지 않았다.
토정이라는 이름이 붙은 책에도 저자로 토정을 표시하지 않은 것이 대부분이다.
이 시기 책의 내용이 모두 똑같은 것은 아니다. 어떤 부분은 똑같고 어떤 부분은 서로 다르다.
토정비결의 첫괘(一,一,一괘)는 동풍해빙(東風解氷) 고목봉춘(枯木逢春)으로 시작한다.
‘동쪽 바람에 얼음이 풀리고, 마른 나무가 봄을 만났도다’라는 뜻이다.
천자문이 ‘하늘천 따지’로 시작하는 것처럼 이 구절은 토정비결임을 알려준다.
어떤 토정비결이든 이 구절로 시작한다.
필사본 <신수점>에는 一,一,一괘에 ‘동풍해빙’과 ‘고목봉춘’만 있다. 한 구(句)만 존재하는 것이다.
다른 필사본인 <토정결>에는 동풍해빙(東風解氷) 고목봉춘(枯木逢春)을 시작으로
재왕인해(才旺寅亥) 사해신유(事諧申酉) 물용태과(勿用太過) 사오지월(四五之月) 외인구설(畏人口舌)
등의 8구가 나와 있다.
대강 해석해보면 재물은 인해(寅亥) 때 왕성하고 일은 신유(申酉) 때 이루어진다는 것이고,
4월과 5월에 사람의 구설을 조심하라는 것이다.
또 다른 필사본인 <산수책>에는 4구가 적혀 있다.
역시 동풍해빙(東風解氷) 고목봉춘(枯木逢春)으로 시작한다.
수류성하(水流城下) 이소성대(以小成大) 몽각남천(夢覺南天) 낙양성동(洛陽城東) 도리생광(桃李生光)으로
돼 있다. 물은 성의 아래로 흐르니 작은 것으로써 크게 되며, 꽃나무가 무성하고 봄의 달이니,
남천의 꿈을 깨며, 낙양성의 동쪽에 복숭아꽃이 생생하게 빛을 발한다는 뜻이다.
이런 책이 1918년 이후 인쇄본으로 모아져 <토정비결>이라는 책으로 등장했다.
<사주복서 길흉판단법> <언문구해 토정비결> <윳(윷)과 점책> <토정비결>로,
<언문구해 토정비결>과 <토정비결>은 토정비결만 싣고 있지만,
다른 책은 여러 점술법 중 하나로 나타나 있다.
필사본이 한자로만 된 반면, 인쇄본에서는 한문 구절에 한글 토를 달았다. 또한 한글 설명까지 나왔다.
인쇄본으로 만든 토정비결은 필사본의 내용과 비슷하다.
<언문구해 토정비결>은 필사본 <토정결>의 내용과 비슷하며 몇 구절만 다를 뿐이다.
한글 번역에는 ‘동풍에 얼음이 풀리고 마른 나무가 봄을 만났도다.
재물은 인해에 왕성하고 일은 신유에 되리로다. 사오지월에는 사람에 구설을 조심하라’고 돼 있다.
<윳(윷)과 점책>의 내용은 필사본 <산수책>과 비슷하다.
<윳(윷)과 점책>에는 동풍해빙과 고목봉춘을 한자로 쓴 후 한글 해석을 붙여놓았다.
해석 원문을 인용하면 ‘동풍이 해동하니 고목이 봄을 만나고 물이 성가에 흐르니 이소성대로다.
알리로다 화춘이 저무니 꿈을 남천에 깼도다. 낙양성가에 도화가 생생한 것이로다’라는 뜻이다.
일제강점기에 발간한 책은 이처럼 4구~7구 정도로 크게 두 종류로 나뉜다.
‘재왕인해’가 나오는 종류와 ‘수류성하’가 나오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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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필사본 토정비결(맨왼쪽)에는 한 괘가 한 구(8자) 밖에 없다. 일제시대 인쇄본(가운데)에 한글 해설이 붙었다가 해방이후 인쇄본에는 내용이 크게 늘어났다. |
토정비결은 해방 이후 그 내용이 크게 늘어난다. 한문에 능한 한학자들이 가필한 것으로 추정된다.
세창서관에서 발간한 <원본 토정비결>은 모두 45구로 돼 있다. 모두 360자다.
기존의 내용에 비하면 10배가량 늘어난 것이다. 가장 두드러진 변화는 매월 괘가 붙었다는 것이다.
<원본 토정비결>은 총론 9구이며, 매월 3구씩 모두 36구다. 이렇게 45구가 된 것이다.
첫 구절인 동풍해빙과 고목봉춘은 같으나 기지봉충 수류성하 이소성대 몽각남천 낙양성도 도이생광 등
필사본과 인쇄본에 나타난 구절이 총괘에서 순서는 틀리나 비슷하게 나열돼 있다.
어떤 문구는 뜻은 비슷하나 다른 한자를 사용하고 있다.
예를 들면 수류성하(水流城下)가 수류성변(水流城邊)으로 나타나는 식이다.
또 하나의 특징으로 토정비결의 필사본과 인쇄본의 두 종류에 나오는 문구를 섞은 것이 보인다.
<토정결>에 나오는 ‘기지봉충’과 <산수책>에 나오는 ‘낙양성동’이 섞여 있다.
명문당에서 출간한 <64구 토정비결>(송정 김혁제 저) 역시 <원본 토정비결>의 특징과 크게 다르지 않다.
총괘가 16구, 매월괘가 4구씩 모두 48구로 모두 64구가 된다.
역시 동풍해빙과 고목봉춘으로 시작하며
소왕대래(小往大來·작게 가고 크게 오니) 적소성대(積小成大·작은 것을 쌓아 큰 것을 이룬다)로 이어진다.
이 부분은 필사본, 일제강점기 인쇄본과 비슷하지만 다른 문구가 등장한다. 다만 내용이 비슷할 뿐이다.
대부분 18구, 45구, 48구, 64구로 발간한 이 책들은
매년 민력(民曆)을 발간하는 명문당 출판사와 남산당 출판사에서
각각 45구와 48구로 된 토정비결을 펴내면서 40대구 토정비결이 일반화됐다.
문제는 이렇게 후에 월별 운세까지 늘어난 부분이 ‘정통’에 포함시킬 만큼 수준이 높지 않다는 것이다.
한중수 교수는 “달별로 나온 것은 문구가 유치해서 인정하고 싶지 않다”면서
“처음에 나온 한 구인 8자만 정통으로 본다”고 설명했다.
한 교수는 “앞 구절은 사마천의 <사기> 등 중국 고사성어를 많이 사용해
비유는 간단하지만 여러 가지 의미로 해석할 수 있는 반면,
뒷구절에 가필한 내용은 문구가 틀린 것도 있어 문제점이 많다”고 덧붙였다.
최근 순한글본 · 인터넷본으로 진화
토정 이지함의 영정. <토정기념사업회 제공> |
해방 이후 내용이 늘어난 이들 서적의 특징은
토정비결에 ‘원본’이라는 제목을 붙여놓았다는 점이다.
역설적으로 해석하자면 진짜 토정비결이라고 할 수 있는 필사본과 거리가 멀다고 볼 수 있다. 때문에 원본임을 책 제목에서 강조하고 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박 대표는 “지금 소장하고 있는 책은 50년대 이후의 것이지만 아마 해방 이후 가필한 책이 등장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한 교수 역시 “해방 전후 출판사에서 내용을 늘려 출간했다”고 말했다.
너무 간단하면 독자의 구미를 맞출 수 없으므로 월괘까지 나오도록 원본을 풀어서 길게 늘였다고 볼 수 있다.
최근 토정비결은 순한글본과 인터넷본으로 진화했다.
예전에는 한학에 밝은 어른들이 토정비결을 봐주다가 1970년대 이후 길거리에서도 토정비결을 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제는 집에서도 쉽게 토정비결을 볼 수 있다.
여성잡지에서는 매년 신년 부록으로 순한글본 토정비결을 발간한다. <레이디 경향> 1월호는 석파 이상인 선생이 순한글로 쓴 토정비결을 특별부록으로 냈다.
인터넷에서도 토정비결을 쉽게 볼 수 있다. 대부분 유료지만 웹사이트를 잘 검색하면 무료로도 가능하다.
자신의 생년월일을 넣으면 쉽게 한글본 내용을 읽을 수 있다.
최근 토정비결에서는 나쁜 내용을 없애고 좋은 내용만 담아 순화한 책도 있다.
토정비결을 본 사람들이 모두 기분 좋게 하기 위해서다.
이에 대해 한 교수는 “원문에 있으면 나쁜 내용도 그대로 담는 것이 좋다”고 강조했다.
한 교수는 “숙명적인 액이 있고 부주의로 당하는 액이 있다”면서
“토정비결을 통해 조심하면 부주의로 당하는 액을 피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좋은 괘 70%, 나쁜 괘 30%
인류학자인 김중순 교수(한국디지털대 총장)는 1980년대 ‘토정비결에 나타난 한국인의 가치관’이란
논문에서 7056개에 달하는 토정비결의 괘를 분석한 결과
좋은 괘와 나쁜 괘가 각각 70%, 30%인 것으로 분석했다.
김 교수가 분석한 토정비결은 48구 토정비결이다.
한 교수는 “토정비결에 나타난 내용을 어림짐작으로 보면 좋은 괘와 나쁜 괘가 6 대 4 정도”라고 말했다.
토정비결이 나쁘게 나올 경우 조심하거나
아니면 정월 대보름 때 물을 떠놓고 달에 비는 식으로 액땜하는 방법도 있다.
한 교수는 “나쁜 문구를 보더라도 부모 또는 자신이 절이나 교회에 가서 기도하면
오히려 긍정적으로 작용할 수 있고 무언의 교훈이 된다”면서
“토정비결도 좋게 받아들이면 약이 되고 그렇지 않으면 독이 된다”고 강조했다.
토정비결 5문 5답 토정 이지함은 16세기 중종대의 유학자다. 300여 년의 세월의 간극이 있다. 토정은 당시 유학자로서는 드물게 주역에 밝고 기인의 행적을 보인 인물로 정사와 야사에 기록됐다. 이런 이유로 19세기 백성들이 이 책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토정의 이름을 빌린(가탁한) 것으로 보고 있다.
민속박물관 장장식 연구관은 “이능화의 <조선무속고>에는 토정이 썼다고 나와 있지만 민속학자인 최상수 선생은 ‘토정 가탁설’을 주장했다”면서 “여러 가지 문헌으로 볼 때 ‘토정 가탁설’이 맞는 것 같다”고 설명했다.
역시 민속학자인 문화재연구소 임형진 연구관은 “떠돌아다니는 책에다 토정이란 이름을 붙인 것은 공신력을 획득하기 위한 것이며 그 책에다 ‘KS마크’를 찍어준 것으로 비유할 수 있다”고 해석했다.
한중수 교수는 “원문을 토정이 직접 썼는지, 한말의 학자가 썼는지 모르지만 토정 선생 같은 분이 아니면 이렇게 비중 있는 문장을 쓸 수 없었다고 본다”고 말했다.
토정비결은 모두 144괘가 있다. 144는 12×12의 수다. 111에서 863의 괘가 있다. 111에서 112, 113으로 나오고 난 뒤 121, 122, 123으로 연결된다. 이것이 161, 162, 163으로 나오고 난 뒤 211로 바뀐다. 이런 배열로 알다시피 세 자릿수 중 맨앞의 괘는 8개, 중간의 괘는 6개, 맨뒤의 괘는 3개다. 이를 곱하면 144개가 된다.
생년으로 맨앞의 괘인 8개 중 하나의 숫자를 얻는다. 생월로 6개의 괘중 하나의 숫자를 얻고, 생일로 3개의 괘 중 하나의 숫자를 얻는다. 모두 세 자릿수의 괘로 토정비결에 나타난 내용을 보면 된다. 토정비결의 괘는 그대로지만 매년 생년월일에 따른 괘는 달라진다. 매년 새로 발간되는 민력(民曆)을 보고 세 자릿수의 괘를 얻는다. 여성잡지의 부록에는 민력의 내용과 토정비결의 내용이 함께 들어 있다. 인터넷에서는 이를 자동으로 계산해 토정비결을 볼 수 있다.
<주역>에서 비롯했다는 것은 토정이 유학자지만 <주역>에 관심이 많았다는 역사 기록과 맥을 같이한다. 하지만 대부분 전문가는 주역과 크게 다르다는 입장이다. <토정비결>이 길흉화복을 점친다면 <주역>은 음양조화만으로 만물생성의 변화 세계를 설명하고 있다는 것이다. <주역>은 모두 64괘 384효(8×8×6괘)로 되어 있으나 <토정비결>은 모두 144괘에 불과하다.
토정비결은 생년월일만 보지만 사주는 생년월일에 시(時)를 덧붙여야 한다.
동방대학원대학교 박영창 교수는 “토정비결은 명리학과 상관이 없다”면서 “명리학은 생년월일시로 사주를 뽑아 음양오행을 보지만 토정비결은 생년월일 숫자로만 괘를 뽑는다”고 말했다. 남덕 역학연구원장은 “토정비결은 명리학에 비해 확률이 크게 낮다”면서 “토정비결은 그냥 재미로 보는 것으로 생각하면 된다”고 말했다. |
인터뷰 / 이지함 평전의 저자 신병주 교수
“토정 이름 내세우면 잘 팔린다고 생각했을 것” <토정비결>의 저자로 널리 알려진 토정 이지함(1517~1578)은 과연 어떤 인물일까? 역사학계에서 토정 이지함의 실제 행적을 다룬 책이 최근 발간됐다. <이지함 평전>의 저자인 신병주 교수(건국대 사학과)를 만났다. 신 교수는 <토정유고>와 조선왕조실록, <연려실기술> <대동야승> 등 정사와 야사에 나타난 토정을 통해 ‘진짜 토정’의 모습을 살려냈다.
“그렇지 않다고 본다. 첫 번째 이유는 토정이 죽은 이후 후손이 엮은 <토정유고>에 <토정비결>에 대한 이야기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당시 <토정비결>이 유행했고 토정이 저자였다면 <토정유고>에 <토정비결>의 내용이 있었을 것이다. 두 번째로는 조선 후기에 나온 <동국세시기> <열양세시기> 같은 풍속 관련 서적에 오행점 등의 풍속이 나와 있지만 <토정비결>의 내용이 없다는 점이다. 조선 후기에 나온 비결류 책에 토정의 이름을 가탁한 것으로 보인다. 실존 인물인 홍길동을 소설의 주인공으로 내세운 것처럼 토정의 이름을 내세우면 잘 팔린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기록에는 토정이 비기와 관상에 능했다고 나타나 있다. 이 점이 백성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을 가능성이 크다. 토정은 실제로 백성에게 친화적이었다. 비기에 능했고 백성의 어려움을 해결하려고 노력했고 스스로 남루한 옷을 입고 돌아다니기도 했다. 또 현감으로 재임하면서 걸인청을 만들어 백성들을 구휼하는 데 힘썼다. 이런 행적이 입으로 전해지면서 ‘토정이 점을 잘 친다’라고 과장됐을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야사에서 토정의 행적은 일부 과장된 점이 나타난다. 이런 과장과 상관없이 토정이 친민중적이고 친백성적이었다는 사실은 인정해야 한다.”
화담 서경덕과 남명 조식 같은 인물도 존재했고 이들과 가까운 토정이 존재했다. 이 같은 인물이 16세기 사상을 다양하게 했고 역동성을 보여줬다. 16세기에도 남사고비결 같은 비결이 유행했다. 사화가 계속되면서 피안처를 찾는 등 16세기도 비결의 시대라고 볼 수 있다. 이런 점에서 16세기와 19세기의 상황은 비슷하다. 토정이 비결을 전혀 쓰지 않았다고 볼 수만은 없는 구절이 있긴 하다. <토정비결>이 주역과 체제가 유사하고, 토정은 서경덕에게 주역을 배웠을 것이다. 그가 비기에 능했다는 기록도 있다. 이런 사실로 볼 때 토정의 사상과 <토정비결>이 완전히 별개라고 보기는 어렵다.”
조카인 이산해가 영의정을 지낼 정도로 명문가였다. 유학자가 기인의 행동을 보이니까 기인적 면만 강조됐다. 실록에는 관리로서 토정의 모습이 잘 나타나 있다. 그는 ‘유일’로 천거된 모범 관리였다. 또 백성들의 살림살이와 국부 증대책에 관심을 기울여 행동적 지식인의 면모를 보였다. 하지만 16세기의 시대에는 너무 앞서 나갔다고 볼 수 있다. 그 점이 안타깝다. 그의 생각은 조선후기 북학파보다 200여 년이 앞섰다. 때문에 기인으로 치부됐다. <토정비결>로 그의 기인적 면모만 부각됐다. 토정을 <토정비결>의 저자로만 보는 것은 문제가 있다. 그의 기인적 면모는 부차적이다. 핵심은 그가 사회사상가였고 실천적 지식인이었다는 것이다. 이지함을 16세기 지성의 흐름에서 봐야 한다. 비결이라는 유명세 때문에 그의 진면목이 가려진 면이 있다.” |
- 윤호우 기자 hou@kyunghyang.com
- 2009 02/03 위클리경향 810호
[토정비결 출판 양대산맥 명문당 · 남산당 르포]
“토정비결은 대한민국 최대 스테디셀러”
토정비결은 필사본 성격으로 손에서 손으로 전래됐다. 얼마나 필사해 읽었는지는 확인할 수 없다.
이러던 토정비결이 대략 1910년부터 인쇄본으로 유통되기 시작됐다.
물론 많은 출판사에서 인쇄했고 요즘도 2개 출판사에서 발행, 매년 1만 권 정도 꾸준히 팔린다.
우리 서적사(史)에서 100년 동안 꾸준히 인쇄돼 팔린 책이 있다면
그것은 분명 대단한 ‘스테디셀러’라고 할 수 있다.
게다가 한 번에 수만 부씩 발행하는 여성지 별책 부록으로 유통된 것까지 합하면
아마 <토정비결>은 ‘훈민정음 창제 이래 베스트셀러’라고 할 수 있다.
재야 한학자 김혁제 선생이 설립한 명문당
80년이 넘은 역사를 대변하듯 안국동에 있는 4층 건물의 명문당은 사무실로 가는 길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책으로 뒤덮여 있다.
토정비결을 본격적으로 출판하기 시작한 것은 일제강점기 때다. 당시 태화서관, 세창서관 등 3~4곳에서 토정비결이 나왔다.
하지만 지금까지 토정비결을 출판하는 곳은 명문당과 남산당 두 곳뿐이다.
명문당은 1930년대 <42구 토정비결>을 시작으로 본격적으로 <토정비결>을 펴냈고, 남산당 역시 1950년대부터 <48구 토정비결>을 출판하기 시작했다.
두 출판사가 토정비결의 역사를 대변하고 있는 셈이다.
현재 서울 종로구 안국동에 있는 명문당은 1903년생인 송정 김혁제 선생이 1923년 10월 설립한 출판사다(1970년대 후반 안국동에 터를 잡기 전에는 적선동에 있었다).
그 오래된 역사를 대변하듯이 보통의 출판사 건물과는 판이하다. 4층짜리 건물 곳곳이 온통 책으로 쌓여 있어 사무실로 들어가는 길을 찾기 힘들 정도.
명문당 배인준 이사는 “건물 전체가 온통 책이라서 예전에 나왔던 책을 정리하는 것도 힘들다”면서 “이곳 말고도 다른 곳에 책을 모아둔 창고가 있다”고 설명했다.
현재 명문당은 김혁제 선생의 아들인 김동구씨가 30여 년째 운영하고 있다.
김 대표는 “아버지는 재야 한학자로 한문에 관한 책을 많이 내셨다”면서
“명문당은 일제강점기 때 보통학교 교재·전과를 만들면서 번창했는데,
당시에는 만주까지 책을 팔 정도였다고 알고 있다”고 설명했다.
김 대표의 말대로 명문당은 1970년대까지만 해도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출판사였다.
김혁제 선생의 뛰어난 영업력과 출판기획 덕분이다. 명문당과 남산당에서 나오는 <토정비결>. 명문당은 <45구 토정비결>을, 남산당은 <48구 토정비결>을 펴내고 있다.
1920년대부터 1930년대까지 명문당은 <각 학년별 보통학교 모범대전과 참고서> <각 학년별 보통학교 창가집 교과서생도용> <각 학년별 보통학교 조선어통해> 등을 펴내 큰 인기를 끌었다.
1950년대 이후에도 <영영사전> <명심보감> <명문세계문학전집> 등을 펴냈고, 특히 <사서오경>을 처음 완역해서 출간한 출판사라는 명성을 가지고 있다.
또한 김혁제 선생은 <천기대요(天機大要)> <일년신수비결(一年身數秘訣)> <송정비결(松亭秘結)> <명자길흉자해법(名字吉凶自解法)> <해몽요결(解夢要結)> 등 수십 권의 역학책을 냈다.
역학자 김애영씨는 “한국역술인협회 회장직을 30년 이상 하셨던 지창용 선생께서
김혁제 선생이 뛰어난 분이었다는 이야기를 많이 하셨다”면서
“그분이 낸 책을 봐도 유식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고 설명했다.
한중수 교수 역시 “그분에 대한 여러 가지 평가가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그분 덕분에 역학의 자료가 지금까지 전해질 수 있었다는 것”이라며
“시절을 앞서 간 기업가이기도 하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김혁제 선생은 1970년대 교통사고로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도대체 <토정비결>은 몇 부나 인쇄돼 얼마나 팔렸을까.
과거의 자료가 없기 때문에 추정치만 있을 뿐이다.
배인준 이사는 “<토정비결>의 판매 부수는 1970년대 이후로 좋지 않지만
명문당의 이름을 알리는 데 가장 크게 영향을 끼친 책자기 때문에 계속 출판하고 있다”면서
“짐작하건대 1930년대 출판 이후로 매년 1만~2만 권 팔린 것으로 알고 있다”고 전했다.
한창 잘나갈 때는 2만 권을 넘은 적도 있다.
따라서 <토정비결>은 70여 년 동안 매년 인쇄하여 최소한 70쇄 이상이며
지금도 꾸준히 팔리는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스테디셀러’인 것이다.
3대째 가업으로 내려오는 남산당
명문당과 남산당은 현재 아들과 손녀가 운영하고 있다. 명문당의 김동구 대표, 남산당의 권현진 대표(왼쪽부터).
<토정비결> 출판사의 양대 산맥인 남산당은 현재 3대째 가업을 이어가고 있다.
남산당은 권기주 선생이 1949년 설립했고, 아들을 거쳐 지금은 손녀인 권현진씨가 운영하고 있다.
설립자인 권기주 선생은 일제강점기 때 보통고시를 통과해 원산 가마원(현재의 소년원) 서무과장, 총독부 후생사회국장(원조물자를 취급하는 자리)을 지낸 공무원 출신이다. 권 선생은 운영이 힘든 소규모 출판사를 위해 을유문화사, 현암사 등 출판사와 함께 출판협동조합을 설립했고, 1· 2· 4대 조합장을 맡을 정도로 출판계에서도 큰 영향력을 끼친 인물이다.
권 선생은 해방 후 공무원을 그만두고 출판사를 시작, 가마원 서무과장을 지내면서
경험했던 아이들의 심리를 정리한 <아동심리학>을 냈다.
당시 그의 집이 남산동에 있어 출판사 이름을 남산당이라 붙였다고 한다.
(지금은 서울 수유리로 자리를 옮겼다)
남산당은 1950년대부터 <토정비결>을 출판했다.
권 선생과 함께 남산당에서 일한 사위 이주성씨(1990년대 말까지 남산당 소장으로 일했다)는
“당시 어떤 분이 <토정비결> 지형(납 인쇄를 하기 위해 본을 뜬 두꺼운 종이)을 가지고 와
그 판권을 사 출판하기 시작했다”면서 “당시부터 명문당과 경쟁 관계였다”고 설명했다.
명문당과 남산당의 경쟁이 얼마나 치열했는지 알 수 있는 것이 바로 <대한민력>이다.
민간달력이라는 특수성 때문에 서점에 누가 먼저 배포하는지에 따라서 판매 부수가 확연히 달라졌다.
1950년대부터 두 출판사는
<대한민력>을 언제 인쇄하고 언제 서점에 배포하는지로 치열한 신경전을 벌였다.
남산당은 <대한민력>을 만드는 데 필요한 일출·일몰 시간 등 관련 자료를
관상대(현재 한국천문연구원)로부터 독점으로 제공받았다.
하지만 명문당이 영업력에서 앞섰기 때문에 남산당과 명문당은 자료를 공유해,
인쇄 시점과 배포 시점을 한날 한시에 하기로 하는 신사협정을 했는데
그 전통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남산당의 <토정비결> 판매 집계 역시 과거의 자료는 남아 있지 않아서 추정만 할 뿐이다.
이주성씨는 “매년 1만~2만 권 팔린 것으로 기억한다”면서
“1970년대까지는 잘 팔렸는데, 그 이후는 내리막길”이라고 설명했다.
이곳 역시 50여 년 동안 50쇄를 거치며 70여만 권이 팔린 셈이다.
지금도 <토정비결>은 매년 2만 권 정도 인쇄하고 있다.
권현진 대표는 “요즘 <토정비결>의 인기가 떨어져서 운영하기 힘들지만,
한 권도 안 팔릴 때까지는 계속 낼 것”이라면서
“<토정비결>은 남산당의 자부심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 글 · 사진 최영진 기자 cyj@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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