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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륵사지 석탑(서탑 해체 조사과정) - 백제 사리구 장엄 발견

Gijuzzang Dream 2009. 1. 23. 11:34

 

 

 

 

 

 

 

 

 미륵사지석탑에서 백제 사리장엄(舍利莊嚴) 발견

 

 

- 금제사리호와 사리봉안기 등 중요유물 500여점 수습-

 

 

 

 

 

- 금제사리호와 사리봉안기 등 중요유물 500여 점 수습 -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소장 김봉건)는 미륵사지 석탑(국보 제11호) 보수정비를 위한

해체조사 과정에서 백제 왕실의 안녕을 위해 조성한 사리장엄을 발견하였다.

  

2009년 1월 14일 1층 심주(心柱) 상면(上面) 중앙의 사리공(舍利孔)에서

금제사리호(金製舍利壺)와 금제사리봉안기(金製舍利奉安記), 은제관식(銀製冠飾) 등

유물 500여 점을 수습하였다.

금제사리호는 사리장엄의 핵심으로 사리공 중앙에 모셔져 있었다.

높이 13㎝, 어깨 폭 7.7㎝의 작은 병 형식이며 보주형(寶柱形) 뚜껑을 덮었는데

X선으로 내부를 투시한 결과 내외함(內外函)의 이중 구조로 이루어져 있음을 확인하였다.

사리호 표면의 다양한 문양과 세공기법(細工技法)은

백제 금속공예의 우수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금제사리봉안기는 가로 15.5㎝, 세로 10.5㎝ 크기의 금판(金板)에 음각(陰刻)하고

주칠(朱漆)하여 글씨가 선명하게 드러나도록 하였다.

백제 왕후가 재물을 희사(喜捨)하여 가람(伽藍)을 창건하고

기해년(己亥年, 639년)에 사리를 봉안하여 왕실의 안녕을 기원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미륵사의 창건목적과 시주(施主), 석탑의 건립연대 등을 정확히 밝힘으로써

문헌사(文獻史) 연구의 부족한 점을 보완할 수 있는 금석문(金石文) 자료인 동시에

백제시대 서체(書體) 연구에도 큰 획을 그을 수 있을 것으로 평가되는 유물이다.

미륵사지석탑에서 발견된 사리장엄은

다른 사례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다양한 종류가 일괄로 출토되었고

가공수법도 정교하고 세련되어 국보급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국보급 유물로 평가된다.

이번 사리장엄의 발견으로

미륵사 창건에 관한 삼국유사와 삼국사기 기록의 정확성이 입증되었고

백제석탑의 사리봉안 기법과 의례를 새로이 밝힐 수 있게 되었으며,

매납(埋納)된 유물의 절대연대 확정을 통해 동시기 유물의 편년(編年)이 가능해졌다.

이번 조사는 무령왕릉 발굴과 능산리 금동대향로 조사 이래

백제지역 최대의 고고학적 성과로 판단된다.

이를 바탕으로 백제문화 연구는 새로운 지평을 열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향후 수습된 유물을 보존처리한 후, 심층조사하고

그 결과를 이 분야에 관심 있는 연구자와 일반인에게 공개할 계획이다.

담당자 : 국립문화재연구소 건축문화재연구실 배병선, 남시진
전화번호 : 063-836-7932

- 2009-01-23, 문화재청

  

 

 

 

 

 

 

그림 1. 심주(心柱) 해체광경

 

 

그림 2. 사리장엄 출토 상태

 

그림 3. 금제사리호(金製舍利壺)

 

 

그림 4. 금제사리호 X선 사진

 

- 2009년 1월14일 1층 해체조사 조사 중 심주석 중앙(가운데 십자모양 가운데 정사각형)에서

사리공(舍利孔)에서 금제사리호가 나왔다.

높이 13㎝, 어깨폭 7.7㎝ 작은 병 형식이며 보주형(寶柱形) 뚜껑을 덮었는데

X선으로 내부를 투시한 결과 내외함(內外函)의 이중 구조로 이루어져 있음을 확인하였다.

금제 사리호는 동체 두 부분을 접합해 만들었으며,

연꽃 · 당초, 인동초문양 내부를 빗살무늬로 장식하면서 정교한 음각으로 가득 새긴

세공기법(細工技法)은 백제 금속공예의 우수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금제 사리호는 내부에 소형 사리병을 안치했고 동체를 상하로 분리했다는 게 특징.

주경미 부경대 연구교수는 “항아리나 무늬 양식 등에서 6세기 중엽의 부여 왕흥사터 사리병을

계승하면서도, 당시 중국 수나라에서 유행했던 사리함 문양제작 기술까지 독창적으로 응용했다”

며 “백제 금동대향로에 필적하는 백제 공예품의 걸작”이라고 말했다. 

 

그림 5. 금제사리봉안기(金製 舍利奉安記) 

- 금제사리봉안기는 가로 15.5㎝, 세로 10.5㎝ 크기의 금판(金板)에 음각(陰刻)하고

주칠(朱漆)하여 194자(字) 글씨가 선명하게 드러나도록 하였다.

글씨는 앞면과 뒷면에서 모두 확인됐다.

앞면에는 1행 9글자씩 모두 11행에 걸쳐 99자를 새겼으며

뒷면에도 11행에 걸쳐 모두 94글자를 확인하였다.

 

시주자의 신분이 무왕의 왕후로, 좌평(백제의 최고 관직)인 사택적덕의 딸이라는 사실이

새겨져 있어 백제 왕후가 재물을 희사(喜捨)하여 가람(伽藍)을 창건하고

기해년(己亥年, 639년)에 사리를 봉안하여 왕실의 안녕을 기원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적어도 서탑(西塔)의 경우 건립된 때가 기해년(639)이라는 내용을 한자 고체로 새겼다.

미륵사의 창건목적과 시주(施主), 석탑의 건립연대 등을 정확히 밝힘으로써

문헌사(文獻史) 연구의 부족한 점을 보완할 수 있는 금석문(金石文) 자료인 동시에

백제시대 서체(書體) 연구에도 큰 획을 그을 수 있을 것으로 평가되는 유물이다.

 

이 사리장엄을 통해 그동안 창건시기와 내력이 삼국유사 등에 ‘대중의 관심을 끄는 전설’로

널리 전해져온 익산 미륵사가 백제 제30대 무왕(武王.재위 600-641년) 때

무왕의 지원 아래 백제 왕후가 창건한 것으로 확실히 규명됐다.

그동안 익산 미륵사의 정확한 창건연대는 삼국유사는 물론이고, 삼국사기에도 보이지 않지만

이번 사리장엄 발굴로 기해년(己亥年), 즉 639년(무왕 재위 40년)으로 확인됐다.

 

그림 6. 은제관식 및 금제소형판 등 유물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는 미륵사지석탑(국보 제 11호) 보수정비를 위한 해체조사과정에서

사리장엄을 발견하고, 사리공에서 금제사리호와 금제사리봉안기, 은제관식 등 유물 500여 점을 수습해

현장에서 공개했다. 금제사리호은 높이 13cm, 어깨 폭 7.7cm의 작은 병 형식이며,

내외함의 이중구조로 이뤄졌음을 확인했다.

사리호 표면의 다양한 문양과 세공기법은 백제 금속공예의 우수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재질

유물명

크기(㎝)

수량

비고

금속제품

금제 사리호

7.7×13

1

내함+외함

금제 사리봉안기

15.3×10.3

1

기해년(639)

금제 소형판

1.5×8.6

18

시주자 명문

금제 족집게

0.8×5

1

 

금제 귀걸이

1.5

1

 

금괴

1.3×2.5

4

 

은제 관식

4.8×13.4

2

 

은제 과대장식

2×13.4

2

 

원형합

4.3×8

6

 

청동고리

1.2×2

1

 

도자

2.2×18

7

 

유리 및 옥제품

유리판

23×23

1

 

호박, 유리구슬, 옥구슬 등

3×2.5

460

 

기타

직물, 금사 등

 

일괄

 

- 석탑 1층의 심주석 작은 공간에서 505개에 이르는 국보급 유물이 무더기로 출토됐다.

다양한 문양이 표면에 새겨진 금제사리호(金製舍利壺), 은제사리합(銀製舍利盒), 은제관식(銀製冠飾),

금제소형판, 족집게 등의 유물은 서기 7세기 전반, 절정에 이르렀던

백제의 금속공예기술의 수준을 가늠할 척도가 될 전망이다.

 

400개가 넘는 유리구슬과 호박, 그리고 은제관식도 발견됐는데

유물이 발견된 장소도 지하가 아닌 지상이어서

이 탑이 목탑에서 석탑으로 넘어가는 과정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국립문화재연구소는 이번에 발굴된 금속유물들이 모두 중국에서 수입된 것이 아니라

백제에서 자체 제작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백제 석탑의 사리봉안 기법과 의례가 새롭게 드러나고,

더불어 공양품으로 함께 묻힌 은제관식을 비롯한 유물들이 다량으로 확인되면서

그 묻힌 연대가 확정됨으로써 다른 지역에서 이와 같은 유물을 출토한 백제 유적의 축조 시점을

판정하는 데도 결정적인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

문화재청은 올 상반기까지 미륵사지 석탑을 해체한 뒤,

오는 2014년쯤 보수 복원된 석탑을 일반인에게 공개할 예정이다. 

 

- 금제소형판과 족집게 / 손가락만한 18개의 금제소형판에는 개인이 시주한 내용까지 써 있다.

 

이 금제소형판은 백제의 4품 벼슬인 덕솔이 공양에 참가했음을 나타내주는 첫 유물이다

백제의 4급 관리인 '덕솔'이 공양에 참가했음을 나타내 주는 유물이 국내에서 첫 발견됐다.

이는 사리 공양에 참가하는 백제 관리들의 실태를 보여주는 증거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는 분석이다.

 

이한상 대전대 역사문화학과 교수는 미륵사지 석탑에서 출토된 사리장엄구의 유물 사진 중

금제소형판을 분석한 결과, 명문에 "'중부 덕솔이 금덩어리 1개를 바쳤다(中部德率支栗施金壹枚)'는

내용이 담겨있다"고 밝혔다. "공양 참가자의 직위가 있는 기록은 지금까지 없었다"며

"이를 통해 관료 중에서 4급 인물이 사리 공양에 관여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백제의 사리공양과 관련한 유물은

지금까지 지난 1995년 부여 능산리 절터에서 발견된

창왕 시대(567년) 석제 사리감(사리를 안치하는 시설),

2007년 부여 왕흥사지 목탑터 출토 창왕(昌王) 시대(577년) 사리장엄구에 이어

이번이 세번째지만 공양 참가자의 직위가 나온 건 이번이 처음이다.

 

이 교수는 "금이란 당시의 화폐이자 가장 중요한 패물"이라며

"금 크기도 상당히 큰 점에 비춰 4급 관리의 재력이 상당했음을 입증하는 단서"라고 덧붙였다.

또 "최소한 4급까지는 법회에 참가해 공양을 했음을 방증하는 증거"라며

"하지만 5, 6급이 공양에 참가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 백제 무왕시대의 은제 '원형합(圓形盒)

 

- 유리판

 

 

- 유리구슬

 

 

- 옥구슬

 

 - 은제 과대장식  / 금제 족집게

 

- 은제관식

백제시절 왕이 주도하는 사리 공양에는 몇급 관리까지 참여했을까.

백제의 4급 관리인 '덕솔'이 공양에 참가했음을 나타내 주는 유물이 국내에서 첫 발견됐다.

이는 사리 공양에 참가하는 백제 관리들의 실태를 보여주는 증거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는 분석이다.

출토된 은제관식 2개중 한 개는 매우 정교하게 세공돼 있고, 다른 하나는 정교함이 떨어지는 점에 비춰,

1,2,3급이 착용하는 은제관식과 4,5,6급이 차는 은제관식으로 나눠졌을 가능성이 크다.

중국 주서(周書)에는

백제 16개 관리 등급 중 6등급까지는 머리에 은제관식을 꽂을 수 있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금제사리봉안기 명문

 

사리장엄의 금제사리봉안기는 그 가능성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우리 백제 왕후께서는 좌평(佐平 · 백제 귀족) 사택적덕[沙乇(宅)積德]의 따님으로

지극히 오랜 세월[曠劫]에 선인(善因)을 심어 금생에 뛰어난 과보(勝報)를 받아

삼라만상을 어루만져 기르시고 불교(三寶)의 동량(棟梁)이 되셨기에

능히 정재(淨財)를 희사하여 가람(伽藍)을 세우시고,

기해년(己亥年=639) 정월 29일에 사리(舍利)를 받들어 맞이했다.”

 

금제사리봉안기는 백제 왕후가 재물의 희사해 가람을 창건하고

기해년(639년)에 사리를 봉안해 왕실의 안녕을 기원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미륵사의 창건 목적과 시주, 석탑의 건립연도를 정확히 밝힘으로써

문헌사 연구의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특히 시주자인 백제 왕후가 '사택'씨의 딸로 되어 기록되어 있어

그간에 삼국유사에 기록된 선화공주 설화와는 배치되는 것이다.

 

'사택' 또는 '사'씨 성은 백제 8대 귀족성 중의 하나이다.

삼국유사의 미륵사지 창건 설화에는 선화공주와 결혼한 후 왕이 된 무왕(600-641년)이

왕비와 더불어 미륵산 사자사에 있는 지명법사를 찾아 가던 중

못 속에서 미륵삼존이 출연하자 왕비가 무왕에게 절을 세우기를 청해

미륵삼존을 위한 절을 세웠다고 한다.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 김봉건 소장은

"금제사리봉안기의 기록은 '기해년'이 명기되어 미륵사지의 건립연대 뿐 아니라

삼국유사와 삼국사기 기록의 정확성이 입증되었다"며

"미륵사지 창건 시주자가 선화공주가 아닌 '사택'씨의 딸로 되어 있는 부분은

학문적인 연구가 더 필요하다"고 말했다.

 


 




[원문 해석]

가만히 생각하건데, 法王(부처님)께서 세상에 나오셔서 (중생들의) 근기(根機)에 따라 감응(感應)하시고, (중생들의) 바람에 맞추어 몸을 드러내심은 물속에 달이 비치는 것과 같다.

그래서 (석가모니께서는) 왕궁(王宮)에 태어나셔서 사라쌍수 아래에서 열반에 드시면서

8곡(斛)의 사리(舍利)를 남겨 3천 대천세계를 이익되게 하셨다.

(그러니) 마침내 오색(五色)으로 빛나는 사리(舍利)를

7번 요잡(遶迊, 오른쪽으로 돌면서 경의를 표함)하면 그 신통변화는 불가사의 할 것이다.

우리 백제 왕후께서는 좌평(佐平) 沙乇(宅)積德의 따님으로 지극히 오랜 세월[曠劫]에 선인(善因)을 심어

금생에 뛰어난 과보[勝報]를 받아 만민(萬民)을 어루만져 기르시고

불교[三寶]의 동량(棟梁)이 되셨기에 능히 정재(淨財)를 희사하여 가람(伽藍)을 세우시고,

기해년(己亥年) 정월 29일에 사리(舍利)를 받들어 맞이했다.

원하옵나니, 세세토록 공양하고 영원토록 다함이 없어서 이 선근(善根)을 자량(資糧)으로 하여

대왕폐하(大王陛下)의 수명은 산악과 같이 견고하고 치세[寶曆]는 천지와 함께 영구하여,

위로는 정법(正法)을 넓히고 아래로는 창생(蒼生)을 교화하게 하소서.

또 원하옵나니, 왕후(王后)의 신심(身心)은 수경(水鏡)과 같아서 법계(法界)를 비추어 항상 밝히시며,

금강 같은 몸은 허공과 나란히 불멸(不滅)하시어

칠세(七世)의 구원(久遠)까지도 함께 복리(福利)를 입게 하시고, 모든 중생들 함께 불도 이루게 하소서.

- 번역 : 김상현(동국대학교 교수)

-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 제공

 

 

 

 

 익산 미륵사지

 

미륵사지 항공사진 

 

 

 

   

국립문화재연구소 조사결과 백제 최고관직인 좌평의 딸이자 백제 무왕의 아내가 세운 절로 밝혀진

익산 미륵사는 당시로선 최첨단 기술이 접목된 백제 최대의 사찰이다.  

당초 이 절은 신라 진평왕의 딸로 미모가 빼어난 선화(善花) 공주를 아내로 맞아들인 백제 서동 왕자가

나중에 왕(제30대 무왕)이 된 뒤에 이 왕비를 위해 용화산(龍華山) 아래 지었다고 전해져 왔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무왕은 "모름지기 여기(용화산)에 큰 절을 지어주십시오. 제 소원입니다"라고

말하는 왕비의 청원을 받아들여 절 건축을 시작한다. 

"무왕이 이 자리(용화산)에 미륵삼존의 상(象)을 만들고,

회전과 탑과 낭무를 각각 세 곳에 세우고 절 이름을 미륵사라고 지었다"라는 기록이 남아있는 것.

 

또 신라의 왕인 진평왕이 여러 공인(工人)을 보내서 그 역사를 도왔다는 기록도 삼국유사에 전한다.

그러나 석탑 조성 내력을 적은 금판인 금제 사리봉안기(金製舍利奉安記)에 따르면

왕비는 신라 출신의 선화공주가 아니라 "좌평(佐平) 사택적덕(沙宅積德)의 따님"이라 밝히고 있다.

 

이에 따라 백제 최대의 탑인 미륵사 석탑은 신라의 도움을 받지 않고,

백제의 독자적인 기술로 만들어졌을 공산도 커졌다.

탑을 지은 주체가 선화공주가 아닐 가능성이 클 뿐더러

당시 국경지대를 중심으로 신라와 백제간의 전쟁이 빈번했기 때문이다.

 

미륵사지는 신라 황룡사지보다 크며 면적이 약 21만 m²에 이르는데,

현재 남아있는 절터 크기만 1천338만4천699 m²에 달할 정도로 엄청난 규모였다.

 

절 안에 세워진 석탑도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되고 커다란 규모를 자랑하며

국보 11호로 지정돼 있다. 이 탑은 양식상 목탑에서 석탑으로 이행하는 과정을 충실하게 보여주는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문화재이며, 현존 석탑 중 국내 최고(最古) 최대(最大)의 석탑이다.

 

이밖에 보물 제236호인 미륵사지 당간지주가 있으며,

1974년 8월 원광대학에서 실시한 발굴조사 때 동탑지(東塔址)도 발견된 바 있다.  

 

또 건물지(建物址)는 3개의 사찰을 한 곳에 세운 삼원병립식(三院竝立式) 가람 배치로

백제와 고구려의 유구(遺構)가 복합돼 있는 등

미륵사는 삼국시대 말기의 건축 기술이 총망라돼 있는 보고라 할 수 있다.

 

하지만 1300여 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미륵사는 불타버렸고 석탑 또한 예전의 위용을 잃고 점차 훼손됐다.

특히 일제 강점기 조선총독부의 어설픈 보존처리가 결정적이었다.

조선총독부는 1915년 당시 붕괴 직전이던 탑이 무너지지 않도록 한쪽 면을 콘크리트로 발라버렸다.

일제가 훼손한 미륵사지석탑을 온전한 형태로 복원해야 한다는 의견이 대세였지만,

엄청난 규모와 함께 일제가 발라 놓은 콘크리트 양이 너무 많아

미륵사지 석탑 복원은 늘 계획단계에서 좌초되곤 했다.

 

2001년부터 해체 · 보수작업에 들어간 문화재청 산하 국립문화재연구소는

현재 탑 1층과 기단부까지 해체한 상황. 해체 과정에서 옥개석과 탑신부가 대부분 보존돼 있고

기단 형태를 확인하는 등의 성과를 거두기도 했으나

일부 부재가 파손 또는 변형돼 있으며 부재 간 간격 또한 촘촘하지 않아

구조적으로 불안정하다는 조사 결과도 나왔다.

일본인들이 보강 작업을 하면서 부어넣은 콘크리트는 전통 석조각공이 일일이 정으로 쪼아내고 있는데,

현재까지 분리한 콘크리트의 무게만 200t에 이르는 것으로 전해진다.

 

그동안의 해체 과정에서 서탑은 백제시대 이후 끊임없이 보수되었음을 보여주는 흔적을 드러냈다.

2008년에는 서탑 남서쪽에서 탑을 지키는 수호신 역할을 했을 석인상(石人像)이 발견됐다.

앞서 2004년에는 서탑 내부에서 통일신라시대 항아리 조각 2개와 고려시대 기와 조각,

조선시대 상평통보 한 닢이 나오기도 했다. 각각의 시기에 대규모 보수작업이 있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미륵사터 석탑의 해체보수는 당초 2007년 마무리할 계획이었지만,

각종 유물이 출토되는 등 변수가 생김에 따라

문화재위원회는 조사 기간을 오는 2014년까지 연장하기로 지난해 결정했다.

문화재연구소는 2014년까지 총 예산 140억원을 들여 6층 규모로 석탑을 완전 복원한다는 계획이다.

 

 

 

 

미륵사지 이야기

 

조간신문의 기사 하나가 소설보다 흥미롭다.

익산 미륵사지의 발굴 기사는 5개 신문을 구해 읽고 또 읽었다.

돌탑 속에 천년 넘게 보관돼 있던 '사리봉안기'의 내용은

1400년 동안 내려오던 전설이 과연 사실인지 아닌지를 말해줬다.

그동안 익산의 미륵사지 석탑은 한쪽에 볼품없는 시멘트가 덧씌워진 채,

간신히 서 있는 허물어진 돌탑에 지나지 않았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서 선화공주가 지명법사의 도움을 받아 연못을 메우고

절을 세웠다는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기는 하였지만,

이를 입증할 만한 주변 정황이나 증거는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은

그야말로 완전한 침묵의 폐사지였다. 이처럼 완벽한 침묵이 가능한 것인가?

 

7세기의 폐사지가 1400년의 시공을 초월하여

21세기 사람들에게 굉장한 지적 호기심을 유발하는 이야기를 걸기 시작했다.

사실이 허구보다, 역사가 픽션보다 훨씬 박진감 넘친다는 교훈을 이번 미륵사지 발굴이 보여주고 있다.

소설보다 역사가 한 수 위고, 역사보다 고고학이 한 수 위라는 사실을 알았다.

위로 갈수록 더 실감이 난다.

이야기보다는 기록이, 기록보다는 고고학이 손으로 만질 수 있는 물증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인간은 물증에 약하다.

 

백제 무왕(武王)대의 과거가 음(陰)이라고 한다면 이번에 출토된 유물은 양(陽)이다.

음과 양이 거울처럼 서로를 비추어야만 과거와 현재가 대화를 나눈다.

중간에서 이 대화를 이끌고 가는 매개물은 '삼국유사'이고 '일연(一然)' 스님이다.

일연이라는 희대의 채담가(採談家)이자 영성가(靈性家)요, 역사가(歷史家)의

성실한 작업이 없었더라면, 신라의 공주와 백제 무왕의 기막힌 러브 스토리

그리고 미륵사(彌勒寺)의 거대한 석탑 이야기는 그냥 묻혀 버렸을 것이다.

 

출토된 '사리봉안기'는

무왕의 왕비가 신라의 선화공주가 아니라 백제 귀족의 딸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렇다면 왜 삼국유사에는 사실과 다른 이야기가 기록된 것인가?

왜 이러한 이야기가 만들어지게 된 것일까?

출신성분이 미천했던 무왕 쪽에서 의도를 가지고 유포한 이야기인가,

반대로 신라 쪽에서 만들어낸 이야기인가? 아니면 무왕의 부인이 여러 명 있었단 말인가?

의문을 멈출 수 없다.

- 조용헌 goat1356@hanmail.net

- 2009-01-20 [조용헌 살롱]

 

 

 

불멸의 상징

 

종교는 인생의 유한(有限)함에 대한 뼈저린 자각에서 시작된다.

유한함에 대항하기 위해서 인간은 '불멸'과 '영원'을 추구한다.

시간이 흘러도 남아 있는 것은 종교와 관련된 유물들이다.

 

익산의 미륵사지에서 나온 유물들도 불멸에 대한 염원에서 만들어진 것들이다.

우선 미륵사지 석탑이 그렇다. 초기불교에서는 불상이 없었다. 불상은 나중에 만들어졌다.

초기 불교 신앙의 중심은 탑에 있었다.

종교적 염원, 불교적 불멸의식을 담은 상징물은 바로 탑이었던 것이다.

1400년이 흘렀어도 남은 것은 돌로 된 탑이다. 가운데에 있었던 목탑은 사라졌지만

돌로 된 석탑은 역사의 비바람을 견디고 살아남았기 때문에 그 속에 유물을 보관할 수 있었다.

나무나 벽돌보다는 돌이 불멸을 상징하는 데에 적합한 재료이다.

 

미륵사지 석탑은 동양최대의 돌탑이니,

무왕의 불멸에 대한 염원이 얼마나 강했는가를 읽을 수 있다.

탑의 가장 심층부에 보관했던 것은 사리(舍利)였다.

인간의 뼈보다 더 오래가는 것이 화장한 뒤에 나오는 사리이다.

불교에서 사리는 정신의 결정체로 본다.

비록 육신의 일부이기는 하지만 정화된 정신의 결정체라고 보기 때문에 사리를 숭배한다.

사리는 수천 년을 간다. 일본에서는 고승들의 사리 하나를 수천만원씩 주고 구입하는 풍조가 있다.

벽사(�邪)의 기능, 즉 재수가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사리를 담아 놓는 병(사리호)과 금판의 재료도 금이다. 금은 변하지 않는 재질이다.

이번에 출토된 사리호(壺)는 그야말로 예술이다.

그 정교함과 아름다움이 백제 금속공예 수준의 절정을 보여준다.

당대 최고의 장인이 최고의 기술과 정성을 들여 만든 작품일 것이다.

 

사리를 넣게 된 사연을 적은 '사리봉안기' 글씨가 붉은색이라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붉은 물감의 재료가 무엇인지는 아직 조사되지는 않았지만,

필자가 추정컨대 경면주사(鏡面朱砂)로 썼을 가능성이 높다.

경면주사는 표면이 거울처럼 매끄러운 붉은색 돌이다.

고대부터 이 돌의 가루를 물감으로 만들어 벽사의 용도로 많이 사용하였다.

한자문화권에서 붉은색은 귀신을 쫓는 상서로운 색이었다.

탑, 돌, 사리, 금, 주사(朱砂)는 모두 불멸의 상징이다.

- 조용헌 goat1356@hanmail.net

- 2009-01-22 [조용헌 살롱]

 

 

 

 

 

 

'서동요'의 가치

 

'맛동(薯童ㆍ서동) 도령'. 어머니가 용의 정기를 받아 낳았고, 익산에서 자랐다.

생계를 위해 늘 마를 캐 팔러 다녔기에 사람들은 그렇게 불렀다.

때는 6세기말. 신라 26대 진평왕

에게는 아름답기로 소문난 셋째 딸 선화공주(善花公主)가 있었다.

소문은 이웃나라 산골에 사는 서동의 귀에도 들렸다. 서동은 스님으로 변장해 서라벌로 들어간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마를 공짜로 나눠주는 대신, 자신이 작사ㆍ작곡한 동요 하나를 부르게 한다.

일연이 쓴 <삼국유사> 가 전하는 가장 오래된 4구체 향가인 <서동요> 이다.

 

'선화 공주님은 남몰래 시집을 가 놓고 맛동 도련님을 밤에 몰래 안고 간다'는 짧은 한 구절로 된

노래의 위력은 대단했다. 노래를 듣고 대노한 진평왕은 딸을 쫓아냈고,

서동은 큰 힘 안들이고 그녀를 아내로 맞았다.

<서동요> 는 참요(讖謠)다. 참요란 미래의 어떤 징후를 암시하는 민요를 말한다.

후삼국시대 이후 각종 문헌에 기록되기 시작했으며, 고려 건국을 예언한 <계림요> 나

후백제의 내분을 예언했다는 <완산요> 가 대표적이다.

여론의 일종인 참요는 저절로 생기기도 하지만,

<서동요> 처럼 어떤 사람이 특별한 목적을 갖고 퍼뜨리기도 한다.

이순원의 신작 소설집 <첫 눈> 에 실린 단편 '푸른 모래의 시간'에 나오는

서라벌사진관 주인의 농담처럼 "여기 와서 동네 애들한테 공짜로 마를 구워 팔며

남의 나라 공주를 후려간 사나"인 서동은 백제 30대 무왕이 된다.

당연히 선화 공주도 백제 왕비가 돼 미륵사까지 창건했다고 <삼국유사> 는 전한다.

일연은 이 설화가 계략과 모함에 대한 비난이 아닌 국경을 뛰어넘은 '역사적 로맨스'로 남길 바랐다.

이후 무왕이 신라에 얼마나 적대적이었는지에 대해 언급하지 않은 것을 보면 더욱 그런 생각이 든다.

어떤 목적을 가지고 만들어지는 것은 참요만이 아니다. 설화나 신화도 마찬가지다.

<서동요> 의 목적이 노래를 이용한 유언비어로 여자 차지하기였다면,

일연에게는 설화적 기록을 통한 국민화합이 목표였지 않았을까.

후삼국으로 다시 찢어진 나라를 하나로 통합한 고려의 최우선 국가 과제가 사회 통합이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예나 지금이나 동서 갈등은 심각한 문제였고,

고위층의 결혼만큼 효과적인 '쇼'도 없었을 것이다.

물론 이 아름다운 설화도 미륵사지 석탑 안에서 발견한 기록(사리봉안기)으로 이젠 끝날 판이다.

역사는 이렇게 때론 잔인하다.

- 이대현 논설위원 leedh@hk.co.kr

- 2009.01.21 [지평선] ⓒ 인터넷한국일보(www.hankooki.com)

 

 

 

 

 

 

선화공주 퇴출? 어림없다

 

 

善化公主主隱      (선화공주님은)

他密只嫁良置古   (남 몰래 시집가 놓고)

薯童房乙            (맛둥 도련님을)

夜矣卯乙抱遺去如 (밤에 몰래 안고 간다) -《삼국유사(三國遺事)》권2 무왕조(武王條)

선화공주가 퇴출 위기에 몰렸다. 익산 미륵사지 석탑을 해체 · 보수하는 과정에서

창건 과정을 밝힌 사리봉안기가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봉안기에 따르면 백제 제30대 왕인 무왕의 왕후가 재물을 희사, 미륵사를 지어 639년 완공했다.

 문제는, 그 왕후가 신라 진평왕의 딸 선화공주가 아니라

당대의 세력가인 사택씨 집안 따님이라는 사실이다.

이를 두고 언론에서는 ‘서동요’가 허구일 가능성이 높으며,

선화공주도 실존 인물이 아닐 것이라는 보도를 쏟아냈다.

 

그렇다면 서동(무왕의 아명)과 선화공주의 로맨스는 빛을 잃는가.

또 선화공주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마는가. 천만의 말씀이다.

비록 미륵사 완공 당시의 왕후가 선화공주가 아니라 해도

‘미염무쌍(美艶無雙)’인 그녀의 역사적 지위에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서동과 선화공주에 관한 기록은 유일하게 ‘삼국유사’에 등장한다.

삼국유사 ‘무왕’조는

서동의 출생-선화공주와 결혼-등극-미륵사 창건으로 이어지는 한 덩어리의 기사이다.

그런데 역사학계 일각에서는 이 기사를 신빙성이 없다고 무시해 왔다.

그 근거는 의외로 단순하다. 이 시기에 백제 · 신라는 빈번히 전쟁을 벌였으므로

양국의 왕자·공주가 결혼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는 주장이다.

따라서 이런 학자들-고 이병도 박사가 대표적이다-은 무왕과 선화공주의 로맨스를,

무왕의 6대 위인 동성왕이 신라 왕녀와 혼인한 사실에 훗날 살을 붙여 만든 설화라고 본다.

그 연장선상에서 미륵사도 동성왕 재위시(479∼501년) 창건했으리라고 추정한다.

 

그러나 이번에 봉안기를 발견함으로써 삼국유사 관련 기록의 정확성이 입증됐다.

‘무왕’조 기사의 뒷부분이 역사적 사실이라면

앞부분인 서동 · 선화공주의 사연 또한 ‘사실’로 인정하는 게 마땅하다.

결론적으로 봉안기는 선화공주의 실존성을 부인하는 게 아니라 거꾸로 더욱 강화해준 셈이다.

게다가 서동은 신라 땅에 홀로 들어가 선화공주를 빼낸 뒤 백제로 돌아와 혼인한다.

양국관계가 우호적인 시기라면 왕가끼리의 혼사가 이처럼 이상하게 진행될 리 없다.

그 별난 과정이야말로 둘의 사랑이 적대적인 상황에서 꽃피웠음을 웅변하지 않는가.

 

그렇다면 왜 봉안기에 등장하는 왕후는 다른 여성인가라고 의문을 가질 만하다.

미륵사는 무왕 재위 40년째에 완공됐다. 같은 시대 왕흥사 건립에 35년 걸렸음을 감안하면

규모가 훨씬 큰 미륵사 창건에는 더 긴 세월이 소요됐으리라.

무왕이 선화공주의 소원을 들어주고자 미륵사를 지었다는 기록을 토대로 계산해 보자.

무왕 즉위시 선화공주의 보령을 20세로 추정하면 미륵사 완공시에는 60세쯤 된다.

당시 신라인의 평균수명은 40년쯤이었다.

완공을 보지 못하고 타계했더라도 하등 이상할 게 없다. 

 ‘좌평 사택적덕(沙宅積德)의 딸’은 계비(繼妃)일 것이다.

 

그래도 미심쩍다면 국문학자들의 학설도 소개한다.

현존하는 신라향가 14수 가운데 가장 이른 시기의 작품은 진평왕 때 나온 ‘서동요’와 ‘혜성가’이다.

 둘 중에서도, 향가의 발전과정을 짚어 보면 ‘서동요’가 먼저 나왔다는 데 이론이 없다.

곧 ‘서동요’는 진평왕 당대의 작품이라는 뜻이다.

진평왕이 다스리는 신라 땅에서 ‘있지도 않은 왕의 딸(선화공주)’을 등장시킨 노래가 유행하고

역사에도 남을 수 있을까.

 

선화공주 퇴출? 어림없는 소리이다.

선화공주는 건재하고 앞으로도 ‘민족의 연인’으로서 계속 사랑받을 것이다.

- 이용원 수석 논설위원 ywyi@seoul.co.kr

- 2009-01-22서울신문 [이용원 칼럼]

 

 

 

 

 

 

 

"서동요(薯童謠) , 사실 아니다" 학계서 계속 제기

 

백제 서동(薯童 · 훗날 30대 무왕·재위 600~641)과 신라 선화공주(善花公主)의 로맨스는 허구였을까.

 

<서동요(薯童謠)>는 백제의 서동(무왕의 어린 시절 이름)이 신라 26대 진평왕 때 지었다고 전해지는,

기록으로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最古) 4구체 향가다.

《삼국유사(三國遺事)》권2 무왕조(武王條)에 이두(吏讀)로 표기된 원문과 함께

두 사람의 러브 스토리가 실려 있다.

진평왕의 셋째 딸인 선화공주가 아름답다는 소문을 들은 서동이 머리를 깎고 스님으로 변장해

서라벌에 잠입한 뒤 아이들에게 마를 나눠주며 부르게 했다는 노래다.

 

善化公主主隱(선화공주님은)

他密只嫁良置古(남 몰래 시집가 놓고)

薯童房乙(맛둥 도련님을)

夜矣卯乙抱遺去如(밤에 몰래 안고 간다)

 

진평왕은 이 노래를 전해 듣고 진노해 선화공주를 내쫓았으며

이에 서동이 그녀를 백제로 데려가 왕비로 삼았다는 것이다.

삼국유사에는 무왕과 선화공주가 부부의 연을 맺은 뒤 용화산((龍華山) 사자사(師子寺)로 가던 중

미륵삼존을 만나게 되고, 그 영험에 감복해 미륵사를 창건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그러나 서동요와 미륵사 창건 연기(緣起) 설화 등은,

당시 신라와 백제 양국 관계로 미루어볼 때 사실일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주장이 일찌감치 제기돼 왔다.

 

18세기 실학자 안정복은 삼국유사에 소개된 서동설화에 대해

"사리에 맞지 않는 말이 많고, 본사(本史)에도 나오지 않으므로 취하지 않는다"고《동사강목》에 썼다.

 

국사학자 이병도(1896~1989)는 논문〈서동설화에 대한 신고찰(1976)〉에서

이 이야기가 493년 백제 동성왕이 신라 왕족 비지(比智)의 딸과 혼인한 사실을 바탕으로 만들어낸

설화일 것이라고 추측했다.

 

 

서동요(薯童謠) 의미 퇴색될 것 없다

 

학계 일각 "가짜 단정 짓기에 이르다"

 

미륵사지 석탑에서 발견된 '사리봉안기'로 인해 서동요 자체에 대한 불신이 증폭되고 있다.

익산 미륵사지 석탑에서 출토된 사리봉안기의 명문이

미륵사는 "639년 좌평 사택적덕(沙乇積德)의 딸인 백제왕후가 세웠다"고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국경을 넘나든 서동왕자와 선화공주의 러브스토리와 미륵사 창건 설화는 모두 거짓일까.

  

학계 일각에서는 서동과 선화의 사랑이야기를 담은 '삼국유사'의 내용을

가짜라고 단정짓기는 아직 이르다는 지적이다.

 

사리봉안기는 미륵사터 석탑이 완공된 서기 639년의 정황을 증거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미륵사의 건립을 시작한 단계의 상황은 전혀 달랐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미륵사가 백제 무왕대에 지어졌다는 삼국유사의 기록이 대부분 정확한 것으로 나타났음에도,

선화공주 대목만을 들어 삼국유사의 신빙성을 불신하는 분위기가 번져가는 것도

바람직스럽지 않다고 역사학계는 보고 있다.

     

명문을 번역한 김상현 동국대 교수

"명문은 오히려 '삼국유사'의 내용을 대부분 뒷받침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일단 무왕대(재위 600~641년)인 639년 미륵사가 창건되었다는 점,

또 왕후가 절의 창건을 주도했다는 명문 내용은 '삼국유사'의 기록과 일치한다"고 지적했다.

김 교수는 "삼국유사라는 것 자체가 역사와 설화가 혼재된 기록물"이라며

"선화공주 부분은 틀릴 수도 있지만 나머지 역사적 부분은 사리봉안기 기록과 일치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또 미륵사지가 '3금당3탑'이라는 독특한 가람구조를 이루고 있다는 점도

삼국유사 내용이 틀리지 않았음을 입증하는 것으로 지적되고 있다.

삼국유사에 "미륵삼존이 못 가운데서 나타나므로 수레를 멈추고 절을 했다"고 말하는데

미륵삼존이 바로 미륵사의 3가람 구조를 나타낸다는 것이다.

 

이번에 발견된 서탑 사리봉안기의 결정적 자구인 '나 백제 왕후는 좌평 사택적덕의 딸로'

(我百濟王后佐平沙乇積德女)라는 부분을 '백제 왕후와 사택적덕의 딸'로 읽을 수도 있다는 견해도

제기됐으나, 문화재청 의뢰로 사리봉안기를 번역한 김상현 동국대 교수는

"왕후 스스로를 이르는 1인칭이 분명하며, 그렇게 해석할 여지는 전혀 없다"고 못박았다.

 

이한상 대전대 교수

"백제 말기 시대 상황에서 볼 때 적국인 신라의 공주가 무왕의 왕비가 될 수 있었을지에 관해서는

역사학계에서 회의적인 시각이 많았다"며

" '서동요'를 비롯한 <삼국유사>의 관련 기록은 허구일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고 말했다.

"미륵사지 석탑에서 발견된 문서에 대한 판독 결과 미륵사를 창건한 백제왕후는 선화공주가 아니라

백제 좌평의 딸인 것으로 나타난 점에 비춰 설화 자체가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커졌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이어 "백제 성왕(554년)이 신라군에 붙잡혀 살해당한 후 더욱 격하게 전개되는

백제-신라간 전투 상황에서 과연 양국간의 결혼이 가능하겠냐"는 말도 곁들였다.

5세기 말 백제 동성왕이 신라 고위관료의 딸을 왕비로 맞는 등 잠시 동맹 관계를 맺기도 했지만,

554년 관산성 전투 패배로 백제 성왕이 신라의 노비에게 살해당하는 치욕을 겪은 후

양국 관계는 급격히 악화돼 회복되지 못했다는 것이다.  

"7세기 들어 잠시 사신이 오가는 등 교류는 있었지만, 워낙 원한이 깊어 혼인 동맹은 쉽지 않았을 것"

이라며 "미륵사지 석탑에서 발견된 사리봉안기를 통해 이런 가능성이 더 커졌다"고 말했다.

물론 '금제사리봉안기'에 적시된 "백제 왕후가 좌평 사택적덕의 따님으로 지극히 오랜 세월에

선인(善因)을 심어"라는 구절이 판독자에 따라서는 "백제 왕후와 사택적덕의 딸"로 읽는 견해도 있어

그 정확한 해석은 시간이 걸릴 전망이기에

서동요의 내용이 실제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는 형국이다.

 

백제사를 전공한 노중국 계명대 교

"선화공주가 발원하여 세운 곳은 서탑이 아니라 바로 중원(中院, 중앙목탑+금당)일 가능성이 있다"며

"절의 조성이 중원에서 시작해 서원과 동원으로 이어지는 등 시간차를 두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덧붙였다.

노 교수는 "미륵사 사리봉안기는 일단 무왕의 부인이 몇 사람인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그 가운데 한 사람이 사택씨라는 사실을 보여준다."면서

"미륵사는 3개의 영역이 하나의 사찰을 이루는 삼원(三院) 형식이라는 점에서,

해체 조사가 이루어지고 있는 서탑을 중심으로 하는 서쪽 가람만 사택씨 왕후가 짓고

나머지는 다른 왕후가 지었을 가능성도 있다."고 주장했다.

특히 "미륵사에선 이번 발굴 이전에 기축년(629)이라는 도장이 찍힌 기와가 출토된 적이 있다는 점에서

이 절의 중앙과 동서의 삼원구조는 서로 다른 시기에 조성됐을 가능성이 있다."고 덧붙였다.

또 "무왕의 재위 연수가 41년인데다가

절이 완성된 639년 이듬해인 640년에 왕이 사망한 점에 비춰

사탁적덕의 딸이 선화공주에 이어 후비였을 가능성도 있다"며

"고구려의 경우는 왕비가 3명이었다는 기록도 있다.

따라서 절을 발원한 사람이 선화공주가 아니라고 단정하기에는 현 시점에서 너무 이르다"고

잘라 말했다. 

노 교수는 외교적 적대관계였던 신라와 백제가 사돈을 맺고, 유독 무왕 관련 설화가 생겨난 것에 대해

"무왕이 몰락 왕족 출신이라면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라는 견해를 밝혔다.

무왕의 선왕인 법왕이 즉위 2년 만에 사망하자 귀족들이 세력 기반이 없는 서동을 옹립했으며,

왕이 된 서동이 왕권 강화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신라 왕녀와 결혼해 일시적 화평 관계를 맺는 동시에

외척 문제를 해결하려 했으리라는 추측이다.

 

임기중 동국대 교수

아예 서동요 자체의 의미가 퇴색될 이유가 전혀 없다는 입장이다.

역사적 사실과 설화적 내용을 분리해서 바라봐야 한다는 것이다.

임 교수는 "역사적 사실과 설화적 사실은 전혀 다르다"며

"설화를 소재로 한 서동요의 선화공주 이야기는 사리봉안기 내용과 관계없이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임 교수는 "서동요는 그 본질이 허구성을 띤 설화"라며

"따라서 새삼 서동요가 허구라는 지적은 논의 자체가 성립될 수 없다.

미륵사 유물과 설화로서의 서동요는 별개 사안"이라고 강조했다.

 

 

이도학 한국전통문화학교 교수

"이번에 미륵사터에서 출토된 사리봉안기를 꼭 삼국유사의 서동설화를 부정하는 것으로 읽어서는

안된다."고 말했다. 그는 "지난해 백제시대 사리장엄이 발견된 부여 왕흥사도 600년부터 634년까지

창건에 35년이 걸린 것으로 삼국유사는 전하고 있는 만큼 규모가 훨씬 큰 미륵사는 최소한 40년 정도

걸렸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따라서 재위기간이 600년에서 641년으로 매우 길었던 무왕 시대에는

사리봉안기에 기록된 사택적덕의 딸인 왕비 이전에 다른 왕비가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면서

"미륵사 창건 당시의 왕비가 선화공주일 가능성은 사리봉안기의 출토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달라지지 않았다."고 강조했다.

무왕이 40년 이상 재위한 만큼 선화공주가 먼저 세상을 떠나자 새로운 왕비를 들였을 것이고,

그 새로운 왕비가 사리봉안기에 나타난 사택덕적의 딸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왕실사찰에서 발견되는 대부분의 발원문에는

왕은 물론 태자의 안녕을 비는 대목이 들어가기 마련인데,

미륵사 석탑의 사리봉안기에는 태자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것도 근거가 된다고 설명했다.

선화공주가 세상을 떠난 뒤 무왕이 새로 맞이한 왕비가 아직 아들을 낳지 못했거나,

아들을 낳았어도 태자로 책봉되기는 어렸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미륵사는 한 왕비 집안이 재력을 투입해 지은 사찰이라기보다는

백제의 국가적 역량 총동원하여 조성한 사찰"이라면서

"따라서 미륵사 석탑의 사리봉안기는 미륵사 창건의 전모를 보여준다기보다는

무왕의 젊은 왕비가 이전의 왕비, 이를테면 선화공주의 흔적을 지워버린 당시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한편 이 교수는 그동안 알려진 무왕의 장인인 좌평 '사택적덕(沙積德)'은 '사탁적덕'으로 읽는 것이

옳다고 덧붙였다.

 

이렇듯 미륵사지 석탑의 사리장엄 발굴로 서동과 선화공주 이야기를 둘러싼 논란은 계속될 전망이다.

- 조선, 2009-01-20

- 국민일보, 2009-01-20

- 연합뉴스, 2009-01-21

서울, 한국, 2009-01-21

 

 

 

 

 

 

 

<미륵사, 석탑 세운 639년 창건됐을까?>

 

익산 미륵사지 석탑(서탑)에서 사찰 및 석탑 창건 내력을 담은 금판(金版)을 비롯한 사리장엄구가

발견됨으로써 미륵사 창건을 둘러싼 새로운 사실이 해명되는 길을 열었다.

 

이를 통해 무엇보다 미륵사는 백제 무왕의 왕후(王后)가 자기 재산을 희사함으로써 세웠으며,

그 일환으로 기해년(己亥年.639) 1월29일에는 동ㆍ서탑 중 적어도 서탑을 세웠다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사리장엄구 일부로 출토된 금판 사리 봉안기에서는

"우리 백제왕후(我百濟王后)께서…깨끗한 재산을 희사하시어 가람을 세우시고,

기축년 정월 29일에 사리(舍利)를 받들고 맞아들이시니"라는 구절이 발견된다.

(我百濟王后…謹捨淨財, 造立伽藍, 以己亥年, 正月卄九日, 奉迎舍利)

 

이를 근거로, 석탑뿐만 아니라 이를 포함한 미륵사라는 가람 전체도 이 무렵에

적어도 창건 공사를 시작하지 않았을까 하는 의견이 이 분야 전문가들 사이에서 제기되는 실정이다.  

나아가 이 때문에 종래 이보다 빠른 시기에 미륵사가 창건됐을 것으로 보던 일부 연구자는

당혹스런 표정을 감추지 못한다.  

 

그렇다면 문제의 이 구절이 미륵사라는 사찰 자체의 창건시기를 639년으로 확정하는 근거일까?

 

이 구절을 세밀히 검토하면, 전혀 그렇지 않을 가능성을 발견한다.

이 구절은 첫째, 백제왕후가 재산을 기부한 일,

둘째, 그것을 토대로 가람을 세운 일,

셋째, 기해년 정월에 사리를 석탑에 안치한 일의 세 가지 사건을 기술한다.

 

이 금판 어디에도 기해년 정월에 가람을 세웠다는 언급은 없다.

어느 때인가 백제왕후가 재산을 희사하고, 그것을 토대로 사찰을 창건한 다음에

기해년 정월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사리를 봉안한 사건을

시간 순서를 따라 차례로 기술한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그 가장 결정적인 증거는

백제왕후가 재산을 기부한 일과 사리를 봉안한 일이 결코 동시에 일어날 수 없다는 점에 있다.

이 두 사건만 비교하면, 말할 것도 없이 백제 왕후가 재산을 기부하고,

그런 다음에야 여러 가지 과정을 거쳐 비로소 탑을 쌓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요컨대 금판 사리봉안기는 사리를 봉안한 일이 639년에 있었지,

결코 백제왕후가 재산을 희사하거나, 가람을 만들기 시작한 시점이 이때라고 하지 않았다.

 

백제 불교사 전공인 길기태 국가기록원 박사는

미륵사 창건과 석탑 창건 시점을 달리해서 생각해야 한다는 데 동의하면서

"사찰 창건과 관련한 자세한 기록이 남은 고대 일본의 경우를 보아도,

사찰 창건과 탑 건축은 시기를 달리했을 공산이 크다"고 말했다.

 

그러한 고대 일본의 사례로 법흥사(法興寺)가 있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법흥사는

숭준천황(崇峻天皇) 즉위 원년(588), 백제에서 불사리(佛舍利)를 보내오자,

이를 안치할 사찰로 법흥사를 건립키로 하고 같은 해에 "법흥사를 짓기 시작(始作法興寺)"하고,

2년 뒤인 590년에는 산에 들어가 사찰 건축에 소요되는 목재를 벌채했다.

 

이어 다시 2년 뒤인 숭준(崇峻) 5년(592) 10월에는 불당(佛堂)과 보랑(步廊, 회랑) 공사를 시작하고,

이듬해인 추고천황(推古天皇) 원년(593)에 마침내 "불사리를 법흥사 찰주(刹柱) 심초석에 안치"했으며,

이를 거쳐 마침내 추고(推古) 4년(596) 11월에 모든 사찰 조성 사업이 대단원을 고하게 된다.

 

이에 대비할 때, 미륵사 또한 어느 때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왕후가 먼저 재산을 희사하고,

금당이나 회랑과 같은 건축물들을 먼저 세웠다가 639년 1월에 이르러 석탑을 세웠음을 알 수 있다.

 

 

나아가 '사탁씨' 출신인 백제왕후가 '희사한 재산'이 무엇인지 확실치는 않지만,

지금의 미륵사 부지를 포함하는 이 일대 토지가 포함됐다는 사실은 부인하기 어려운 만큼,

무왕시대 사탁씨의 근거지 중 하나가 지금의 익산 일대일 것이라는 추정도 가능하게 됐다.

 

미륵사 사리장엄구 발견은 그런 점에서 사비시대 백제사의 판도라 상자에 비유될 수 있다.

- 2009.01.27, 김태식기자, (c)연합뉴스

 

 

 

 

 

 

 

 

 

 

 

 

 미륵사탑 사리호에 ‘사리 12과’

 

 

ㆍ순금제 내호서 다량의 구슬도…전문가들 “진신사리 확실시”

지난 1월 익산 미륵사지 석탑(국보 제11호)에서 출토된 금동사리호에서

금제사리내호와 함께 부처님의 진신사리로 추정되는 사리가 확인됐다.

국립문화재연구소는

“금동사리호를 개봉한 결과 그 안에 순금제 사리내호(높이 5.9㎝, 폭 2.6㎝)가 확인됐고,

그 내호 안에 사리 12과(오른쪽)와 다량의 구슬, 성분을 알 수 없는 유기질 분말이 들어 있었다”고

2일 밝혔다.

 

 
  
 

 

미륵사지 석탑(국보 제11호) 심주(心柱) 사리공(舍利孔)에

사리장엄구와 금제사리호 및 금제사리봉안기 등의 유물이 발굴되었다.

지난 3월 31일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소장 김봉건) 보존과학센터는

익산 미륵사지석탑에서 출토된 금동사리호를 개봉하고 내부적 검토를 거쳐

금제사리내호와 사리 등 유물을 수습하였다.


발견된 국보급 유물들은 지난 1월 4일 미륵사지석탑 심주(心柱) 사리공에서

사리봉안기를 X-ray 투시한 결과, 사리호 내에 내호가 존재하는 것을 확인하고

사리외호와 내호의 분리 및 수습에서 얻은 소중한 결과다.
이번 사리호 개봉에는 보존과학센터에 새로 도입된 X-ray CT 장비가 적극 활용되었다.



금동사리호, 금제사리호, 사리 12과(顆), 성분 미상의 유기질 분말과 다량의 구슬이 수습되었다.


 

 

사리봉안기는 X선형광분석기로 실시한 성분분석에서, 외호는 금동제, 내호는 금제로 판명되었다.  

금제 사리내호(內壺, 높이 5.9 어깨 폭 2.6)는 보주형(寶柱形) 꼭지가 달린 뚜껑과

긴 목, 둥근 어깨의 동체(胴體)와 동체부를 분리할 수 있는 구조기법 등

전반적으로 외호(外壺, 높이 13, 어깨 폭 7.7)와 유사한 모습을 띠고 있으나

외호와는 달리 뚜껑과 동체 상부가 일체형(一體形)으로 제작되어 있다.

시문된 문양은 연판문(蓮瓣文, 연꽃무늬), 팔메트문(세잎넝쿨문), 어자문(魚子文, 聯珠文)을

배열하는 등 전반적으로 외호와 유사한 구성을 보이고 있다.

  

 

김상현 동국대 교수와 박상국 문화재위원, 그리고 손환일 경기대 연구교수 등은

“1월 확인된 사리봉안기 명문에 따르면 이 사리들은 부처님의 진신사리일 수밖에 없다”고 입을 모았다.

즉 사리봉안기 내용을 보면

“법왕(석가모니) 법왕(法王)께서 세상에 출현하시어~왕궁(王宮)에 태어나시고

사라쌍수 아래에서 열반을 보이셨으며,

8곡(斛)의 사리(舍利)를 남기시어 삼천대천세계(三千大天世界)를 이익되게 하셨다.

(그러니) 마침내 오색(五色)으로 빛나는 사리(舍利)를 7번 오른쪽으로 돌면서 경의를 표하면

그 신통변화는 불가사의할 것이다”라고 돼 있다.

 

전문가들은 “이 문장은 법왕, 즉 석가모니가 주어인 하나의 문장”이라면서

“이는 곧 석가모니의 사리를 모셨음을 입증해주는 내용”이라고 말했다.

박상국 위원은 특히 “원래 탑에는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시는 것”이라면서

“미륵사 서탑에도 당연히 부처님 사리를 모셨을 것이며, 이는 흔들림 없는 사실”이라고 단언했다.

부처님의 사리가 백제에 건너온 기록은 당나라 도선(道宣)의 <광홍명집(廣弘明集>이 유일하다.

이에 따르면 “무왕 2년(601) 고려 · 백제 · 신라 등 세 나라가 사신을 보내어 각각 사리 1과씩을 청해서

수나라 황제가 이를 허락했다”는 기록이 있다.

김 교수는 “이것이 정말로 부처님 사리냐고 묻는다면 할 말 없지만

적어도 당대 백제인들이 이 사리들은 부처님의 사리로 믿고 신앙의 대상으로 삼았던 것이 중요하다”

고 말했다.

- 이기환 선임기자 lkh@kyunghyang.com

- 2009-04-02, 경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