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아가는(문화)

조선시대의 쌍둥이 기록

Gijuzzang Dream 2009. 1. 29. 19:13

 

 

 

 

 

 

 조선시대의 쌍둥이 기록

 

 

 

 

(1) 사람 몸에 개의 머리가 달린 세 쌍둥이

 

 

 

1533년(중종 28) 어느 날, 정말 해괴한 일이 벌어졌다.

왕실의 종친인 서성정의 집에서 한 여종이 아이를 낳았다.

그런데 여종이 낳은 아이는 한 명이 아니라 아들 세 쌍둥이였다.
즉, 아들로만 한꺼번에 세 명을 낳았는데,
조선왕조실록에서는 그에 대해

사람 몸둥이에 개의 머리여서 사람들이 모두 해괴하게 여겼다고 적고 있다.

또 이는 음양의 기가 서로 화합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나름대로 원인도 밝혀 놓았다.

어떻게 사람 몸에 개의 머리를 한 아이가, 그것도 한꺼번에 세 명씩이나 나올 수 있단 말인가.

이 같은 현상은 이제까지 전 세계 어디에서도 보고된 바 없고, 일어날 수도 없는 일이다.

그럼 왜 실록은 그 같은 괴이한 일을 버젓이 사실처럼 적어놓았던 것일까.

이제까지 전 세계적으로 한 배에서 한 번에 태어난 최다 쌍둥이 기록은 아홉 쌍둥이이다.

기네스북에도 올라 있는 이 기록은 1971년 호주 시드니에서 출산한 어느 여인이 세웠다.

하지만 출산 당시 이미 세 명의 아이가 죽어 버려 6명만이 살아남았다.

 

▲ 지난해 10회 생일을 맞은

추크우 부인의 일곱 쌍둥이 

그 후 1997년 11월 미국 아이오와에서 바비 매코이로

부인이 4남 3녀의 일곱 쌍둥이를 모두 건강하게

출산하여 쌍둥이 최고 기록을 세웠다.

 

하지만 그 기록은 다음해 미국 텍사스 주의

엔켐 추크우라는 여성에 의해 곧 갱신된다.
추크우 부인은 2남6녀의 여덟 쌍둥이를 제왕절개에 의해

모두 산 채로 출산했다.

 

여덟 쌍둥이 출산은 그 전에도 몇 차례 있었지만,

매번 그 중 몇 명이 죽은 채로 출산되었었다.

 

따라서 추크우 부인은 유일하게 생존한 채 출산한 최다 쌍둥이 기록을 세우게 되었다.
그러나 추크우 부인의 쌍둥이들은 산 채로 태어나긴 했지만 모두 중태로 밝혀져

출산 즉시 인근 소아과 병원으로 옮겨져 치료를 받아야 했다.

그 중 체중이 가장 적었던 여아가 출산 1주일 만에 사망했고, 나머지 일곱 명은 건강하게 자라고 있다.

 


69명의 아이를 낳은 러시아 여인

그럼 한 명의 여인이 일생 동안 아이를 가장 많이 낳은 기록은 과연 몇 명이나 될까.

이에 관한 세계 최고 기록은 러시아의 페오르드 바실리예바 부인이 지니고 있는데,

그녀는 1725년부터 1765년까지 모두 69명의 아이를 낳았다.

여자의 생리기간을 감안할 때 일생 동안 25회 이상은 출산이 불가능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1년에 한 번씩 출산해도 아이는 총 25명에 불과하게 된다.

바실리예바 부인의 경우 40년간 아이를 출산했다고 하니, 그래도 40명에 지나지 않는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그 비밀은 쌍둥이에 있었다.

바실리예바 부인은 총 27번 출산했는데

쌍둥이만 16번, 세 쌍둥이를 7번, 네 쌍둥이를 4번 출산해 모두 69명의 자녀가 되었다.

그 중 2명만 유아기 때 사망하고 나머지는 모두 건강하게 자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에서 기록상 가장 많은 쌍둥이를 낳은 사례는 신라 벌휴왕 때인 193년 3월의 다섯 쌍둥이이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한지부(漢祗部)의 한 여인이 4남 1녀의 다섯 쌍둥이를 한꺼번에 낳았다고 되어 있다.

네 쌍둥이와 세 쌍둥이 기록은 비교적 흔해서

조선시대만 해도 네 쌍둥이는 5회, 세 쌍둥이는 약 140여 회 기록되어 있다.

쌍둥이는 비교적 흔한 일이므로 기록조차 되지 않았지만,

세 쌍둥이 이상의 경우 국가에서 곡식을 하사하며 축하해 주었다.

1420년(세종 2) 12월 20일 “경상도 언양 이신기의 처가 한 번에 세 아들을 낳았으므로 쌀을 하사했다”고

되어 있으며, 1436년(세종 18)에는 “광주 사람 한막금의 아내가 한꺼번에 세 남자 아이를 분만하여

쌀과 콩을 아울러 10석을 주었다”는 기록 등이 그것이다.
이렇게 포상한 것은 인구 증가가 절실히 필요했던 농업국가에서 인구장려책의 일환으로

쌍둥이 출산을 반갑게 여겼기 때문으로 해석할 수 있다.

참고로 조선시대 인구 현황을 살펴보면,

1669년(현종 10) 서울과 지방의 호수는 134만 2천74호이고, 인구는 516만 4천524명으로 집계되어 있다.

그 후 1747년(영조 23) 인구 조사에 의하면

전국 팔도의 호수가 172만 5천538호, 인구는 734만 318명으로 비로소 700만을 넘고 있다.

그러나 조선시대의 호구 조사는 주로 과세대상 인구만 파악했으므로

노인과 어린이, 노비, 여자들이 빠져 있을 가능성이 많았다.

또한 서민들의 경우 과세대상에서 빼기 위해

고의로 16~60세까지의 장정들을 호구 조사에 포함시키지 않았을 수도 있다.

 


후기로 갈수록 포상 줄어들어

그런데 조선시대 쌍둥이 기록을 면밀하게 살펴보면 특이한 점을 몇 가지 발견할 수 있다.

첫 번째는 세 쌍둥이 중 3남의 기록이 제일 많다는 점이다. 이는 당시의 남아 선호사상이

출산 당사자 및 관원들의 보고체계에 영향을 끼쳤기 때문인 것으로 풀이된다.

그러나 정부에서는 세 쌍둥이의 출산시 남녀를 불문하고 곡식을 하사했으므로,

3녀 세 쌍둥이의 출산도 심심찮게 기록으로 남아 있다.

조선시대 세 쌍둥이의 출산은

천민과 지방에서 많이 나왔다는 특징이 있다.

(사진은 조선시대 어린이 모습) 


두 번째는 세 쌍둥이를 낳은 이가 대부분 종이나 천민 또는 상민들이라는 점이다.

양반이 세 쌍둥이를 낳았다는 기록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이렇게 볼 때

지체 있는 집안의 경우 세 쌍둥이를 낳은 사실을 숨기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이 가능하다.

예전의 경우 쌍둥이만 낳아도 좀 특이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는데,

세 쌍둥이를 낳았다고 하면 지체 있는 양반 가문에서는 그리 품위 있는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천민들의 경우 그런 일을 숨길 수도 없었고,

나라에서 하사하는 곡식 때문에라도 스스로 보고한 것으로 보인다.

서울이나 경기 지역보다 주로 지방에서 세 쌍둥이를 출산했다는 기록이 많은 것도

그런 사실을 뒷받침해 준다. 즉, 세 쌍둥이를 출산했을 경우 겉으로는 축하해 주는 분위기였으나,

정작 당사자로서는 그리 경사스러운 일만은 아니었다는 얘기다.

이 같은 경향은 조선 후기로 가면서

점차 세 쌍둥이 출산에 대한 포상이 줄어들고 있다는 사실에서도 감지할 수 있다.

1502년(연산군 8) 강릉에 사는 백성이 한 배에 사내 아이 둘과 계집 아이 하나를 낳았다는 보고가

올라오자 쌀과 콩을 하사하도록 했다. 그러나 나흘 후 연산군은 그에 대해 제재를 걸었다.

즉, 한 배에 세 쌍둥이를 낳은 것은 괴이한 일인데, 왜 쌀을 내려주는지를 해당부서에 따지고 든 것이다.

이에 대해 예조에서는 ‘어린애를 기르기 어렵기 때문에 내려주는 것으로 생각한다’고 보고했다.

세 쌍둥이 출산의 경우 조선 전기에는 곡식 포상이 10석, 7석, 5석 등으로 명확히 기록되어 있지만,

후기로 갈수록 곡식을 하사했다는 기록만 있을 뿐 그 양이 밝혀져 있지 않다.

또 후기로 갈수록 세 쌍둥이의 출산 건수도 점차 줄어들고 있다.

이는 세 쌍둥이의 출현을 더 이상 길조나 경사로 받아들이지 않고 있음을 뜻한다.

중종 때의 개 머리 형상을 한 세 쌍둥이에 대한 기록도 그런 연유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그날 중종실록에는 세 쌍둥이의 출산 기록에 앞서 이상한 형상을 한 유성이 북극성 아래에 출현한

사실을 기록하며 천변(天變)이 극도에 이르렀다고 적고 있다.

이는 이상 천문현상과 세 쌍둥이의 출현 사실을 불길한 재이로 함께 다루고 있다는 증거이다.

 

 

 

 

 

 (2) 세계 최연소 산모, 종단이 사건

사람 몸에 개의 머리가 달린 세 쌍둥이

 

 


한편 조선왕조실록 속에는 아주 특이한 케이스인 샴쌍둥이의 출산 사실도 기록되어 있다.

1667년(현종 8) 3월 10일자의 조선왕조실록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통진현의 사비(私婢 ; 사가에서 부리던 종) 사옥이 한 배에 세 쌍둥이 딸을 낳았다.

두 딸은 각각 얼굴과 팔다리가 있었지만 두 배가 합쳐져서 하나였는데 곧바로 다 죽었다.”

사옥이 낳은 세 쌍둥이 중 배가 합쳐진 두 딸은 샴쌍둥이임을 의미한다.

샴쌍둥이란 이처럼 신체 일부가 결합된 상태로 태어나는 쌍둥이로서,

주로 가슴과 배ㆍ등ㆍ엉덩이ㆍ머리 등이 결합된 채로 태어난다.

신체의 일부가 붙은 샴쌍둥이는 약 95%가 죽어서 태어나거나 출생 후 곧바로 사망한다. 

정상 출산 10만회 중 1회꼴로 발생하는 샴쌍둥이의 경우

약 60%가 죽은 채로 태어난다.

또 약 35%는 사옥이가 낳은 쌍둥이처럼 출생 후

24시간 이내 사망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샴쌍둥이와 다른 한 명의 태아인 세 쌍둥이를 낳은

사옥은 매우 특이한 케이스라고 볼 수 있다.

그것은 쌍둥이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공감이 간다. 정자와 난자가 수정되어 만들어진 수정란은

세포분열을 하며 2개→4개→8개→16개의 세포로 분열되는

난할기를 거치면서 배엽이 만들어지고

신체의 각 기관이 만들어져 새 생명이 태어나게 된다.

이때 하나의 수정란에서 2개로 분열된 세포(난할구)가

완전하게 분리된 채 따로따로 독자적인 발생과정을 거쳐서

생명이 자라게 된 경우가 바로 일란성 쌍둥이다.

때문에 일란성 쌍둥이는 염색체와 유전자 구성이 똑같아,

성별도 동일하고 생긴 모습도 똑같다.

그런데 간혹 하나의 수정란에서 2개의 세포로 분리될 때 난할구가 불완전하게 분리된 채

따로따로 독자적인 발생과정을 거쳐서 태어나는 쌍둥이도 생길 수 있다.

이런 경우 신체의 일부분이 붙어 있는 샴쌍둥이가 된다.
따라서 샴쌍둥이는 초기에 나누어진 태아 중 한쪽은 정상적으로 발생하고,

다른 한쪽은 신체 일부만이 발생되어 정상아의 몸에 붙은 채 태어나는 경우도 간혹 있다.

예를 들면 정상적으로 출생한 태아의 배에 다른 쌍둥이의 다리 혹은 팔 부분만이

붙어 있을 수도 있는 것이다.

이에 비해 생김새가 다르고 혹은 성별이 다르게 태어날 수 있는 이란성 쌍둥이는

두 개의 난자에 두 개의 정자가 각각 수정되어 태어나는 경우이다.

만약 여성이 3개의 난자를 배출하여 거기에 3개의 정자가 각각 수정된다면

염색체와 유전자 구성이 서로 다른 삼란성 쌍둥이가 태어나게 된다.

거기에다 이 삼란성 쌍둥이가 2세포기에서 모두 똑같이 독자적인 발생과정을 거친다면

세 쌍의 일란성 쌍둥이인 여섯 쌍둥이가 태어날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통진현에 살던 사옥이는 두 개의 난자를 배출하여 두 개의 정자가 각각 수정된 후,

다시 하나의 수정란에서 일란성 쌍둥이가 만들어질 때 불완전하게 분리되어

일란성 샴쌍둥이와 또 다른 이란성 쌍둥이의 세 쌍둥이를 낳은 것으로 보인다.

 


조정이 발칵 뒤집어지다

우리나라의 쌍둥이 출산 비율은 1970년대 말 무렵 임산부 250명당 1명꼴이었다.

그러다 1992년에는 약 100명당 1명꼴로 늘어났고, 2006년에는 약 50명당 1명꼴인 2.14%의

쌍둥이 출산 비율을 나타내는 등 급속히 증가하고 있는 추세다.
이처럼 쌍둥이가 증가하는 것은 배란촉진제의 사용 및 시험관 아기 시술 증가에 그 원인이 있다.

여성 불임의 원인 중 하나는 나팔관이 막혀 난소에서 난자가 배란되지 않기 때문에 생기는 경우가 많다.

인공수정 시술은 난소에서 난자를 직접 꺼내 정자와 시험관에서 수정시킨 뒤

다시 자궁 속에 넣어 착상시키는 방법이다.

그런데 인공수정 시술에서 착상에 성공하는 비율은 25~35% 정도에 불과하다.

따라서 병원에서는 인공수정의 성공률을 높이기 위해 많은 수의 난자를 사용한다.

배란을 촉진시키는 호르몬을 여성에게 주입하면 보통 10개 정도의 난자가 발생한다.

이 가운데 60~70% 정도가 인공수정에 성공하며,

성공한 6~7개의 수정란 중 다시 3~4개를 자궁에 착상시킨다.

이는 25~35%인 착상 성공률을 감안한 조치인 것.

그런데 그 수정란 중 2개 이상에서 발생이 된다면 쌍둥이가 태어나게 된다.

이와 같은 시험관 아기 시술로 임신했을 때 쌍둥이가 태어날 확률은 약 30%에 달한다.

1985년 10월 12일에 태어난 우리나라 최초의 시험관 아기도 남자와 여자 아이의 이란성 쌍둥이였다.

또한 시험관 아기가 아니더라도 여성에게 배란촉진제를 사용하면 여러 개의 난자가 배란돼

이란성 쌍둥이를 낳을 확률이 높아진다.

조선시대에 출산과 관련된 사건 중 조정에까지 큰 파문을 일으켰던 것은

1767년(영조 43)에 있었던 ‘종단이 사건’이다.

종단이는 경상도 산음현(山陰縣)에 살던 일곱 살짜리 여자 아이였다.

그런데 그해 봄부터 종단이의 배가 점점 불러 오더니 한여름에 덜컥 사내 아이를 출산하고 말았다.
일곱 살 먹은 여자 아이가 아기를 낳았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조정을 발칵 뒤집어졌다.

영조는 그 아이를 가리켜 요괴의 인물 중의 큰 것이라고 하며 크게 우려했고,

대신들은 아이를 없애버리자고 청했다.

하지만 영조는 “이 역시 나의 백성 중의 한 아이이다. 어찌 무고한 사람을 죽일 수 있단 말인가”

라고 말하며 만류했다. 대신 어사(御使)를 산음에 파견해 상세한 내막을 알아오게 했다.

외신을 접하다 보면 가끔 어린 아이의 뱃속에서 태아가 발견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곤 한다.

2008년 5월 그리스에 사는 아홉 살짜리 소녀의 뱃속에서

머리와 머리털, 눈 등이 있는 태아가 발견된 적이 있었다.

심지어 2008년 12월에는 사우디아라비아에서 한 살배기 여자 아이의 뱃속에

태아가 있는 것이 밝혀져 충격을 주었다.

 

이 아이들의 뱃속에서 발견된 태아는 바로 자신의 쌍둥이 형제들이었다.

이를 의학적 용어로 ‘기태류(寄胎瘤)’ 또는 ‘태아 속 태아(fetus in fetu)’라고 한다.

즉, 뱃속의 쌍둥이 중 한 쪽이 죽을 경우 죽은 아이가 살아 있는 아이의 몸속으로 흡수되는 현상이다.
아직까지 원인이 규명되지 않은 이 현상은

전 세계적으로 약 100건 정도만 보고됐을 만큼 아주 희귀한 사례이다.

2006년 중국 충칭의 한 오지마을에 사는 30대 남자의 뱃속에서도 기태류가 발견되었다. 

이 남자는 불어 오른 배 때문에 농사일을 제대로 하지 못할 만큼 힘들어 했는데,

수술 결과 9㎏의 죽은 태아를 뱃속에서 꺼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어머니 뱃속에서

그 남자의 몸에 들어간 쌍둥이가 그 상태에서 일정 기간 자란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2006년 파키스탄에서는 생후 2개월 된 여자 아이의 몸속에서 2명의 죽은 태아가 발견되기도 했다.

이는 원래 세 쌍둥이가 한 뱃속에서 자라다 2명이 다른 한 명의 몸속으로 들어간 경우이다.

 


소금장수가 아비로 드러나

그럼 종단이도 죽은 쌍둥이 형제의 기태류가 뒤늦게 발견된 경우일까?

영조가 파견한 어사의 현지 조사 결과, 그 진상이 낱낱이 밝혀졌다.

종단이의 경우 죽은 태아가 아닌, 살아 있는 건강한 사내아이를 출산했고 그 아비도 있었다.
종단의 언니인 이단을 심문한 결과, 종단이를 임신하게 한 이는 소금장수 송지명이었다.

이에 송지명은 곧 관가로 끌려오게 됐는데,

곤장을 한 대 치기도 전에 그는 자신이 한 일을 스스로 털어놓았다.

보고를 받은 영조는 종단이와 송지명, 종단이의 어미, 그리고 갓 태어난 남자 아이를

섬에다 나누어 귀양 보내 노비로 삼으라고 명했다.

그리고 다음날 영조는 산음과 안음(安陰)의 고을 명을

각각 산청(山淸)과 안의(安義 )로 고치라는 명을 내렸다.
산음에는 일곱 살짜리 음부가 생겼고, 안음은 정치량의 고향이라는 이유에서였다.

정치량은 1728년 이인좌, 박필현 등과 공모하여 영조를 밀어내고

밀풍군을 추대하기 위해 난을 일으킨 역신이었다.


그런데 영조는 일곱 살짜리 여자 아이가 남자 아이를 낳은 사건에 대해

왜 이리 민감하게 반응했을까. 그 이유는 그 해 8월 1일자의 ‘영조실록’에서 찾아볼 수 있다.

“종단의 일은 정말 괴이하다. 포사와 견훤의 일이 있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매우 동심(動心 ; 자극을 받아 마음이 움직임)되었는데,

다시 생각해 보니 필시 이러한 여자가 이러한 사람을 낳을 리는 없기 때문에 마음을 쓰지 않았다.”

여기서 포사는 주나라 유왕의 사랑을 받던 여자로서,

나이 어린 어떤 후궁이 도마뱀과 접하여 낳은 아이라는 고사가 있다.

또 견훤은 어머니가 큰 지렁이와 동침하여 낳게 되었다는 설화를 지니고 있다.

즉, 영조는 종단이 낳은 아이가 혹시 포사와 견훤의 경우처럼

나라를 위협할 인물이 아닐까 하고 내심 염려했던 것이다.

또한 영조는 종단이의 사건으로 인해 ‘남녀 칠세 부동석’이란 옛말에서

성인이 남녀를 일곱 살로 한계 삼았던 이유를 알 것 같다고 말했다. 그렇게 볼 때

이번에 경상도 산음에서 생긴 일을 이상하게 여길 것이 없다고 스스로 위안을 삼기도 했다.

그럼 세계에서 나이가 가장 어린 산모는 과연 누구였을까.

현재까지 해외 인터넷 사이트 등을 통해 알려진 바로는 페루의 리나 메디나(Lina Medina)이다.

리나는 1933년 9월 27일에 태어나 1939년 5월 14일에 아들 제라도(Gerardo)를 출산했다.

출산 다음해인 1940년

리나 메디나와 11개월 된 아들,

담당 의사를 찍은 사진 

제왕절개에 의해 태어난 제라도는 몸무게 2.7㎏으로서,

건강하게 자랐다.

하지만 페루 정부에서 어사를 파견하지 않은 탓에

제라도의 아빠가 누구인지는 끝내 밝혀지지 않았다.

리나를 오랫동안 관찰한 의사에 의하면

리나는 생후 8개월부터 생리를 시작할 정도로

성조숙증이었다고 한다.

종단이도 태어난 지 스무하루가 되는 삼칠일에

이미 생리를 시작했고, 아이를 밴 뒤 쑥쑥 자라서

열네댓 살 된 여자와 같았다는 기록이 있다.

그런데 여기서 잠깐 의문이 생긴다.

리나는 5세 8개월 만에 아이를 출산했지만

우리나라 식으로 계산해 보면 종단이와 똑같은 일곱 살이다.

그럼 종단이와 리나 중 세계 최연소 산모는 과연 누구일까.

종단이의 생일이 확인되지 않아 그것은 따질 수 없다.

다만 리나는 제왕절개에 의해 현대 의학의 도음을 받아가며

아이를 출산한 데 비해 종단이는 자연 분만으로

출산했다는 점이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종단이가 낳은 아이도 몹시 건강했는데, 유배지인 흑산도에 도착한 지 얼마 안 돼

종단이와 아들 모두 죽었다고 전해진다.

한편 리나가 낳은 아들인 제라도는 40세가 되던 해인 1979년에 병으로 죽었으나,

모친의 조기 임신과는 무관한 것으로 밝혀졌다.

 

- 2009년 01월 23일, 01월30일, 이성규 기자

- 이야기 과학실록 (38) (39) ⓒ ScienceTim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