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끼며(시,서,화)

민중미술 작가는 다 어디로 갔을까

Gijuzzang Dream 2009. 1. 16. 01:17

 

 

 

 

 

 

 민중미술 작가는 다 어디로 갔을까

 

 

 


80년대 전성기… 90년대 중반 운동현장 벗어나 전시장으로


 

홍성담 <대동세상 1>(1984),

오윤 <칼의 노래>(1985),

신학철 <모내기>(1987) (위부터)

1980년대 군사독재시절 시위 현장이나 대중집회에 어김없이 등장한 대형 걸개그림.

당시 대학 건물 외벽과 담벼락에는 학생들이 완성한 벽화도 꽤 많았다. 이른바 민중미술이다.

 


신학철씨 5년 만의 개인전


민중미술은 한국 사회의 암울한 정치 · 사회적 환경 속에서

자연스럽게 탄생했다. 1979년 10·26으로 군부독재시대가

종말을 맞은 것으로 기대했으나

오히려 1980년 광주학살과 함께 제5공화국이 들어서면서

혹독한 철권정치가 연장됐기 때문이다.

민중미술의 모태는 1979년 첫선을 보인 <현실과 발언>이다.

당시 젊은 미술가들이 주축이 돼 불안하고 폭력적인 사회 현실 속에서 미술가의 역할을 재정립하자며 결집한 단체다.

 

이들은 기성 제도권 미술계의 구태에서 벗어나 현실과 괴리되지 않는 발언이 담긴 미술을 추구했다.

정권의 갖은 탄압 속에서도 시위 현장에서 밤을 새워 걸개그림을 그리거나 노동자 · 농민 등 자본주의 소득분배에서 불리한 계층의 삶을 조명했다.

 

민중과 원활히 소통하기 위해 대중적인 표현 양식을 개발하는 데 주목하고, 사실적인 기법을 사용해 농민과 노동자, 도시 빈민의 척박한 삶의 단면을 표현했다.

신학철 · 임옥상 · 최병수 · 강요배 · 홍성담 · 안창홍 · 오윤 · 이종구 등이 1980년대 민중미술을 대표하는 작가다.

민중미술은 민주화운동, 노동운동과 궤를 같이 했다.

때문에 군사정권에 민중미술과 민중미술 작가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그로 인해 그림이 압수되고, 화가가 구속되고, 벽화가 지워지는 일이 흔했다.

전정호 · 이상호가 1987년 9월 공동제작한 걸개그림 <백두의 산자락 아래, 밝아오는 통일의 새날이여>는 노동자와 농민이 미국의 성조기를 찢는 장면이 빌미가 돼 제주도에서 전시 도중 작품이 탈취되고 두 작가는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됐다.

 

1987년 8월 민족미술협의회가 주최한 제1회 통일미술전에 신학철이 출품한 <모내기>도

공안당국이 이적표현물로 분류해 작품을 압수하고 작가를 구속했다.

<모내기>의 윗부분은 추수철을 맞은 농민들이 잔치를 벌이고,

아랫부분은 농부가 람보와 코카콜라로 대변되는 미국 대중문화와 3.8선, 탱크와 핵무기 등을 쓸어내는

모습이다. 당시 경찰과 검찰은 이 그림의 윗부분은 북한을, 아랫부분은 남한을 상징해

북한을 이상향으로 그린 이적표현물로 규정했다.

 

전정호 · 이상호가 1987년 그린 걸개그림 <백두산의 산자락 아래, 밝아오는 통일의 새날이여>는

경찰에 의해 파괴됐으며, <민족해방운동사>를 기록한 슬라이드를 평양에 보낸 홍성담은

1989년 구속된 후 간첩으로 날조돼 극심한 고문을 당했다. 차일환 · 정하수 · 최열도 구속됐다.

 

이처럼 민중미술은 1979년 <현실과 발언>을 통해 태동해 1980년대 중반부터 조직화했고

1980년대 후반에 절정기를 누렸다.

민중미술이 남긴 성과는 적지 않다.

윤범모 경원대 회화과 교수는 “민중미술은 변혁에 동참하는 미술로 자리매김함으로써

미술의 역할을 전 사회적인 영역으로 확장시켰고, 판화 · 사진 · 출판미술 등에 주목함으로써

다양한 성과물을 낳게 했으며, 무엇보다 사실주의적인 형상을 복원함으로써

대중과 소통을 원활하게 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민중미술의 전성기는 그리 길지 않았다.

민중미술은 1990년대 중반 급격히 쇠퇴의 길을 걸었다.

일정한 민주화 달성과 대중운동의 퇴조, 냉전구조의 붕괴와 국제사회의 상황 변화,

그에 따른 한국 사회의 급속한 변화 등으로 민중미술이 힘을 잃었다는 게 미술계의 중론이다.

또 민중미술가들이 1990년대 들어서면서 운동 현장을 벗어나 전시장으로 회귀한 것도 한 이유로 꼽힌다.


 

포스트 민중미술은 정치적 상황에 민감하다는 점에서

민중미술과 닮았다. 사진은 조습 <습이를 살려내라>(왼쪽),

플라잉시티 <외쳐도 대답 없는 죽어버린 주택가>.


 

국민대학교 대학원 미술학과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후지무라 마이씨는

2007년 석사 논문 <한국민중미술의 연구>에서

“민중미술이 갖는 한계의 본질은 민중미술가들의 의도적인 태도 변화에 있다고 생각했다”면서

“1994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민중미술 15년展>은

민중미술 진영이 스스로 내린 ‘사망진단서’였다”고 주장했다.

 

경희대학 경영대 문화예술경영학과 박신의 교수는

“현재 민중미술은 제도적 관점에서 양식이나 사조로 남아 있다고 보는 것이 현실적인 진단”이라고

말했다. 1994년 <민중미술 15년展> 이후 지금까지 본격적인 민중미술 전시는 주로 해외에서 개최됐다.

그렇다면 1980년대를 수놓은 민중미술 작가들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또 민중미술이 역사의 뒤안길로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니라면,

1980년대 민중미술의 계보를 잇는 이들은 누구일까.

지난해 5월 5년 만에 서울의 한 갤러리에서 개인전을 열기도 한 신학철은

여전히 민중미술의 시각과 어법으로 민족의 역사와 삶을 그려왔다.

2002년 광주비엔날레에 출품한 <한국현대사-갑돌이와 갑순이>는

탱크 모양의 거대한 고체덩이가 화면 상단부에 있고

그 아래는 일반 촌놈들이, 위에는 양복을 입은 출세한 촌놈들이 배치돼 있다.

상단부에는 전두환 · 정주영의 얼굴도 있다.

또 여기저기에 코카콜라와 원더우먼 이미지, ‘강한 걸로 넣어주세요’라는 한 정유회사 광고 문구 등이

현대 사회의 상징물로 담겨 있다.

 

1989년 구속된 홍성담은 1992년 석방 후 물고문을 주제로 제작한 <물속에서 스무날> 시리즈를

포함해 1990년대의 인권유린 문제를 다룬 작품을 내놓았다.

2002년에는 월드컵의 붉은 악마 모습을 그린 <아바타> 시리즈를 발표했다.

2004년에는 서울 학고재 화랑에서 열린 전시 ‘가화’에서

동북아시아의 문화적 정체성을 화두로 삼은 작품들을 발표했다.

 


임옥상씨 공공미술 쪽으로 방향 틀어


회화보다 조각 작품 활동을 더 활발하게 하고 있는 임옥상은

서울숲 조각공원 ‘무장애 놀이터’를 만드는 등 공공미술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하지만 2000년 매향리에서 수집한 미군 폭탄의 탄피를 사용한 작품 ‘자유의 신 in KOREA’ 등에서는

그가 여전히 정치 · 사회적 이슈에 무감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농촌 출신인 이종구는 변함없이 농사를 짓는 그의 가족이나 마을사람들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몇몇 민중미술 작가는 명성과 함께 작품이 전시되는 족족 팔려나갈 만큼 인기를 끌고 있기도 하다.

광부 출신 작가로 20년째 탄광촌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는 황재형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민중미술은 한국 미술에서 변방에 놓여 있다.

하지만 민중미술의 계보를 이은 현상은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박신의 교수는 “80년대 걸개그림이나 벽화운동이 보여준 ‘현장미술’ 개념 등은

오늘의 보편적인 예술활동 속에서 말할 수 있다”면서

“즉 퍼블릭 아트(공공미술·미술을 공공공간의 활동으로 보는 다양한 시도)나

커뮤니티 아트(공공미술의 일종으로 지역 주민과 지역 사회에 개입하는 미술),

액티비스트 아트(행동주의 미술·사회적 이슈에 개입하는 활동) 등에서 연속성이 가능하다”고 밝혔다.

설치미술가 겸 미술평론가인 박찬경씨는

“민중미술의 영혼은 누구나 취할 수 있는 것이 됐고,

민중미술은 그것이 공격당하든 잊히든 의도적으로 계승되든,

어쨌든 그 자신에 대한 편견으로부터 해방돼 널리 분산됐다”면서

“정치적인 상황에 민감하고 작품에 정치적인 발언을 담고 있는 포스트 민중미술 작가들을

그 사례로 들 수 있다”고 밝혔다.

박찬경씨는 플라잉시티 · 조습 · 조해준 · 최원준 · 김상돈 · 고승욱 · 송상희 등을

포스트 민중미술 작가로 꼽았다.

- 박주연 기자 jypark@kyunghyang.com

- 2009 01/20   위클리경향 809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