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비드의 <아내와 함께 있는 앙투안 로랑 라부아지에>
18세기 후반 유럽에 불어 닥친 사상과 혁명의 소용돌이는 계급의 변화를 가져왔다.
성직자나, 왕족, 귀족, 부르주아가 아니더라도 누구나 자신의 능력으로 성공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특권층의 지위가 보장받았던 사회에서 부르주아들은
자신의 고상한 모습만 표현된 초상화를 화가들에게 의뢰했다.
하지만 특권층의 지위가 내려가고 능력 있는 시민 계급의 등장으로
좀 더 사실적으로 묘사된 초상화가 등장한다.
부르주아만의 전유물이었던 초상화가
18세기 사회 변혁의 물결 속에 초상화를 원하는 사람 누구나 소유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다비드의 <아내와 함께 있는 앙투안 로랑 라부아지에>는
18세기 유럽에서 가장 저명한 화학자 앙투안 로랑 라부아지에(Antoine Laurent Lavoisier 1743~1794)와
그의 아내 마리 안느 피에레트 폴즈(Marie-Anne Pierrette Paulze 1758~1836)를 그린 초상화다.
이 작품은 다비드가 위대한 과학자를 그린 유일한 작품으로서
18세기 초상화의 발전을 볼 수 있는 지표가 되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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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내와 함께 있는 앙투안 로랑 라부아지에 Portrait of Monsieur Lavoisier(Antoine-Laurent de Lavoisier) and His Wife 1788년, 캔버스에 유채, 259×194,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소장 |
라부아지에는 20세에 변호사가 되었으나 법률가였던 아버지의 권유로 유능한 법률가가 되기 위해
프랑스 한림원 회원들에게 자연과학을 배웠다.
자연과학에 흥미를 느낀 라부아지에는 1766년 가로등을 발명한다.
가로등으로 한림원에서 금메달을 획득하고
또 한림원 회원인 게타르와 함께 알자스로렌 지방의 광물 지도 <1764~1770년>를 완성하고
그 공로로 25세에 한림원 회원이 됐다.
라부아지에는 관리로 일하면서 개인적으로 화학 실험을 멈추지 않았다.
그는 실험 결과를 통해 연소 반응에서 산소의 역할을 밝히고
화학반응에서 물질 보존의 법칙을 규명해 근대 화학의 토대를 만들었다.
그의 업적은 과학 분야에서 프랑스 혁명과 같은 큰 영향을 미쳤다.
실험 결과를 통해 새로운 이론을 정립한 라부아지에는 책을 출판한다.
그의 저서 <화학 명명법, 1787년>은 현재 사용하고 있는 화학용어의 기초가 된다.
라부아지에와 결혼한 마리는 다양한 분야에 재주가 많았다.
남편에게 화학과 수학을, 다비드에게 그림을 배웠다.
그녀는 어학에도 재능을 보여 남편을 위해 영어 논문을 번역하기도 했다.
또한 그녀는 라부아지에의 중요 저서 <화학이론>에 삽화를 그려 실험의 내용을 그림으로 설명했다.
하지만 혁명의 소용돌이를 라부아지에는 피하지 못하고 장인 자크 폴제와 함께 체포되고,
1794년 5월 8일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진다.
혁명파의 몰락으로 물러난 마리는 라부아지에의 실험노트를 정리하여 책을 출판했다.
<아내와 함께 있는 앙투안 로랑 라부아지에>에서
마리는 남편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관람자를 향해 미소 짓고 있다.
라부아지에는 오른손으로 깃털 펜을 쥔 채 시선을 아내의 얼굴에 고정시키고 있다.
책상 위와 아래에는 실험도구들이 놓여 있다.
라부아지에 앞에 놓인 실험 노트는 1년 후에 <화학 원론>으로 출간된다.
라부아지에는 검은색 양복을, 마리는 흰색의 드레스를 입어 대조를 이루고 있다.
다비드는 과학자와 법률가로 활동하고 있는 라부아지에의 직업을 나타내기 위해
검은색 양복으로 표현했다. 이 작품에서 검은색은 진지함과 안정감을 나타낸다.
마리의 흰색 드레스는 순결과 부부의 행복을 상징한다.
화면 왼쪽 배경에 있는 드로잉집은 마리의 것으로
그녀가 남편의 저서에 삽화를 그리고 있던 중이라는 것을 나타낸다.
자크 루이 다비드(Jacques-Louis David, 1748~1825)의 이 작품은
라부아지에는 도의원으로 있을 그에게 그림을 배운 마리의 의뢰로 제작한다.
당시 라부아지에는 프랑스에서 정치적으로 영향력이 있는 인물이었으며
과학자로서도 국제적으로 명성을 얻고 있었다.
다비드는 이 작품에서 라부아지에를 저명한 과학자로 표현하지 않고
따뜻하고 자상한 남편으로 묘사해 가정적인 이미지를 강조했다.
- 박희숙, 서양화가, 미술 칼럼니스트, bluep60@hanmail.net
- 2008.07.02 ⓒ ScienceTimes [명화산책]
'화학의 아버지' 라부아지에
라부아지에(Lavoisier, Antoine-Laurent de, 1743.8.26~1794.5.8)는
연소는 연료가 공기중의 산소와 화합하는 현상임을 입증하여
오랜 기간동아 진실로 받아들여져 왔던 고전적 연소 이론인 플로기스톤설을
과학적 방법에 의해 타파하였고, 화학 반응에서 반응 전후의 질량의 총합은 서로 같다는
'질량 보존의 법칙'을 실험을 통해 증명함으로써
화학 반응을 정량적으로 다루는 새로운 길을 연 위대한 과학자였다.
세금관리인으로 횡령한 돈으로 실험 도구를 구입하다
프랑스 파리에서 부유한 법률가의 아들로 태어난 라부아지에는 처음에는 법학을 공부했지만
나중에 화학으로 바꾸었다. 라부아지에가 법과대학을 졸업한 후에 선택한 길은
'세금관리인'이 되는 것이고, 25살 때 세금관리인조합의 간부가 되었다.
세금관리인조합은 세금을 걷기 위한 이른바 폭력조직으로 구성원들은 '징세 청부인'으로 불렸는데,
국가로부터 지시받은 세금의 서너 배를 징수하여 납부하고 나머지는 수수료로 횡령하는 조직이었다.
돈을 내지 못하는 가난한 집에서는 먹을 것마저 빼앗는 등 징수하는 방법도 지극히 가혹했다.
이처럼 가혹한 징수로 인해 세금관리인조합은 막대한 수입을 올렸고,
그 일부가 부르봉 왕조에게 헌납되었으며 외국과의 전쟁 경비나 왕실의 개인적인 소비 등의 비용으로
사용되었다. 따라서 왕실이나 귀족들은 간접적으로 국민들의 원성을 샀으며
그 증오심은 직접적으로 세금 징수를 대행하는 민간 기관이었던 세금관리인조합으로 향해졌던 것이다.
당시의 과학 연구는 오늘날과 같이 제도화된 것이 아니라 개인 연구의 성격이 강했다.
따라서 실험 도구나 약품을 스스로 구입할 수밖에 없었고 많은 연구를 하려면 막대한 자금이 필요했다.
과학아카데미 회원이었던 라부아지에가 과학계에서 이름을 떨치기 위해서는 여하튼 돈이 필요했으며,
그 때문에 세금관리인이 되었던 것이다.
세금관리인조합에 들어간 해에 얻은 많은 수입은 실험 도구나 약품 구입으로 쓰여졌다.
연구 자금을 얻기 위한 수단치고는 매우 위험한 길을 선택했던 셈이다.
세금관리인 일도 '더러운 돈도 깨끗하게 사용하면 용서된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결국 이 선택이 스스로를 파멸의 길을 이끌었다.
14살 연하의 재치있는 아내
라부아지에는 외로운 화학자였다고 한다. 그는 좋은 머리를 자랑했으며 남보다 발전속도도 빨랐다.
어느 누구도 그를 쫓아갈 수 없었기 때문에 공동 연구자가 생길 리 만무했다.
외로운 그를 도와준 것은 14살 연하의 재치있는 아내였다.
원래 그녀는 세금관리인조합장의 딸로서 조합간부였던 그와 가깝게 지내다가 결혼을 했다.
부인은 역사에 남은 라부아지에의 뛰어난 연구의 모든 것을 도와 준 공동연구자였으며,
동시에 조수도 없는 라부아지에의 조수역을 빈틈없이 수행했다.
실험도구 준비나 실험후의 뒷정리, 실험 내용을 그림으로 표현하는 것 등을 도와 준 사람은
바로 그의 부인이었다. 그림에 대한 전문적인 개인교습을 받았던 그녀는
남편의 실험하는 모습을 사실처럼 잘 묘사했는데, 오늘날의 사진처럼 라부아지에의 실험을 이해하고
재현할 수 있을 정도로 사실감 있는 그림들을 남겼다.
이 그림들을 토대로 라부아지에는 1789년에 물리학 분야에서 뉴턴의 <프린키피아>에 견줄 만한
역사적인 화학교과서인 <화학의 원리>를 출간했다.
실패를 몰랐던 천재
과학의 역사상 천재라는 사람들이 자기 생애의 모든 연구와 기술 발전에서 성공했고,
실수와 실패, 가치없는 일을 전혀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그들이 성공한 것은 다른 사람보다 많은 것을 시도했으며,
성공할 확률이 높았거나 아니면 성공한 것만이 아주 가치가 높았다고 할 수 있다.
아인슈타인의 성공은 특수상대성 이론, 브라운 운동 이론, 광양자설, 일반상대성 이론까지만
들 수 있겠고, 뉴턴은 만유인력의 법칙, 미적분법, 운동의 세 가지 법칙 등에서만 성공을 했으며,
에디슨 역시 빛나는 그의 발명 인생 중에는 오늘날 소개되지 못하는 아주 우스꽝스러운 발명도 많다.
그러나 라부아지에는 연소 이론, 비열 이론, 질량 보존의 법칙을 비롯한 거의 모든 실험에서 성공을 한,
'실패를 몰랐다'는 점에서 라부아지에는 천재 중의 천재였다고 할 수 있다.
1775.4.27 - 프랑스의 화학자 안톤 라부아지에,
수은을 가열하면 산화수은(HgO)이 되면서 주변의 공기의 부피가 줄어들고
결국은 연소가 중단된다는 실험 결과 발표
1789년 출판된 <화학요론, Traité Élémentaire de Chimie>에 실린 얼음 열량계의 그림
라부아지에의 화학체계는 〈화학요론 Traité élémentaire de chimie〉(1789)의 출판으로
더 큰 영향력을 발휘했다. 이 책은 그의 화학적 업적을 명료하게 보여주고 있을 뿐 아니라
화학에 대한 새로운 접근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서론부에서 적합한 과학적 탐구방법과 교수법을 열거하고, 새로운 명명법을 옹호했으며,
더이상 분해될 수 없는 물질을 단체(현대의 원소 개념)라고 정의하고,
이것들이 결합하여 다른 물질들을 만든다고 주장했다.
또한 화학반응의 전후에 있어서 물질은 보존되며,
따라서 생성되거나 소멸되는 것은 없고 단지 변형만이 있다고 믿었다(질량불변의 법칙).
단두대에서 처형되다
1789년 바스티유감옥 습격 사건이 발단이 되어 프랑스혁명이 일어나자
라부아지에는 역사의 격랑을 만나게 되었는데,
그는 국가범죄인으로 낙인 찍힌 세금관리인이었던 것이다. 그는 직접 세금을 거두지 않았지만
조합의 간부였기 때문에 당장 32살 때부터 겸임했던 화약고의 감독관을 그만두게 되었다.
그리고 1793년 11월, 세계 최고의 화학자는 국가범죄인으로서 혁명위원회에 체포되었다.
1794년 5월 8일 오전, 음모로 짜여진 재판에 따라 라부아지에는
다른 세금관리인과 함께 사형 판결을 받았다. 판결이 내려지기 전에 라부아지에는
어느 누구도 자신을 변호해주지 않는 가운데 유명한 자기 변론을 했다.
변호사의 도움도 없이 논리정연하게 자기 변호를 행한 피고는 이후에도 또 그 이전에도 없었기 때문에
더욱 유명하다. 그는 "나는 젊었을 때부터 화약 감독관으로서 국가에 공헌했으며,
도량형을 개정하는 데도 최선을 다해 좋은 성과를 올렸다.
또한 시대는 본인과 같은 뛰어난 능력이 있는 과학자가 필요할 것이며,
호평을 받은 <화학의 원리>도 내가 저술했다."며 자신을 변호했다.
많은 업적과 국가에 대한 공헌을 언급한 변호였지만, 재판장이었던 코피나르는
"공화국에는 과학자가 필요 없다."며 기각했다. 봉건국가 시대에 꽃을 피운 과학적 공헌은
공화제에서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으며 감형은 불가능했던 것이다.
운명의 사형 판결이 난 후, 그 날 오후에 파리의 콩코드 광장에서 단두대형이 집행되었다.
과학자로서는 원기 왕성한 51살, 인생의 최전성기에 있었던 라부아지에는
그렇게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이 사형 집행을 보고 있었던 수학자 조제프 루이 라그랑주는
이 불세출의 천재의 죽음으로 프랑스와 세계의 과학계가 입은 손실을 한탄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의 목을 자르는 데는 1초밖에 걸리지 않았지만, 그의 목을 만들려면 100년이 걸릴 것이다."
(프랑스어 : "Cela leur a pris seulement un instant pour lui couper la tête,
mais la France pourrait ne pas en produire un autre pareil en un siècle.")
- 오석봉의 에피소드 과학사 inepisode.com.n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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