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덕궁 후원에서 조선시대 어정(御井) 2기 발굴 - 각기 세조 때 만들고 숙종 때 보수한 것으로 추정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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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문화재연구소(소장 김봉건)는 창덕궁의「부용지 주변 관람로 정비」공사에 앞선 발굴조사를
실시한 결과 임금이 사용한 것으로 추정되는 조선시대 우물 2기를 발굴하였다고 밝혔다.
우물은 동궐도(東闕圖, 1826~1827년) 상에 표시된 부용지 북서쪽 모서리,
현 사정기비각[四井記碑閣, 세조 때 만든 네 우물(마니, 파려, 유리, 옥정)과 관련된 기록을 새긴 비각]
북쪽 지점에서 서로 5m 정도 거리를 두고 거의 완전한 모습으로 확인되었다.
▲ <동궐도>중에 나타난 사정기비각(四井記碑閣) 부분
▲ 김홍도의 <규장각도>에 나타난 사정기비각(四井記碑閣)
두 우물 모두 잘 다듬은 화강암으로 만든 팔각형의 형태이나 지층, 축조 방법, 출토 유물 등을 통해 볼 때,
사용 시기는 달랐던 것으로 추정된다.
부용지와 인접한 앞선 시기의 우물은 늦은 시기의 우물의 동편에서 그 보다 1.4m 깊은 상태로 발견되었다.
앞선 우물(지름 164cm, 깊이 175cm)은 1매의 화강암을 둥글게 파내어 바닥을 만들고
그 위로 안쪽을 둥글게 다듬은 화강암 석재 6단을 쌓아올려 완성하였다.
우물의 제일 윗부분은 안쪽은 둥글고 바깥쪽은 각 지게 깎은 석재 4매를 이어 붙여서
팔각형의 형태를 띠게끔 하였다.
우물 주변으로는 부채꼴 모양의 화강암(길이 85cm)을 덧대어 둥글게 깔아 사용면을 만들고,
바깥쪽에는 할석(割石, 깬돌)을 4~5단 쌓아 올린 호석(護石, 둘레돌, 보호석) 담장(지름 5.3m)을
원형으로 돌렸다. 그 사이에는 사용면보다 한 단 떨어지는 박석(薄石, 넓고 얇은 돌)이 깔려 있는데,
이는 물을 흘려보내기 위한 배수로로 추정된다.
우물 내부에서는 임란 전후 것으로 보이는
백자 바리(바닥에서 아가리 쪽으로 벌어져 올라가 아가리의 지름이 20cm 이상인 토기) 1점이 출토되었다.
늦은 우물(지름 85cm, 깊이 244cm)은 별다른 바닥 시설 없이 화강암을 7단 쌓아 완성하였다.
우물 주변으로는 역시 박석을 깔아 사용하였던 것으로 추정되나,
박석 아래에서 동궐도에 표시된 우물 울타리 격의 나무 판재가 박혀있는 것이 확인되어
동궐도 완성 이후에도 일부 변화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궁궐지(宮闕志, 1834~1849년) 기록1)을 통해 볼 때,
앞선 시기의 우물은 세조 때 판 네 우물 중의 하나로,
그리고 늦은 시기의 우물은 숙종 16년(1690년) 다시 보수한 두 우물 중 하나로 판단된다.
이번 발굴조사를 통하여
창덕궁 내 임금이 사용하던 이른 시기와 늦은 시기의 우물을 동시에 확인함으로써
조선시대 전, 후기의 유구가 잘 보존되어 있는 경복궁과 더불어
창덕궁의 궁궐 변천의 역사를 밝힐 수 있는 중요한 단서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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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세조 때에 종신(宗臣)에게 명하여 터를 잡아 우물을 파게 했는데
그 뒤에 여러 차례 병화(兵火)를 겪어 두 우물만 남았다.
숙종 16년(1690) 경오(庚午)에 그 고적(古跡)을 애석히 여겨 우물 둘만이라도 보수하라 명하고
이어 그 곁에 비를 세웠다.
숙종이 지은 ‘사정기(四井記)’에 이르기를,
"우리 세조대왕께서는 … 첫 번째 우물 이름을 마니(摩尼)라 하고
두 번째 우물은 파려(玻瓈), 세 번째 유리(琉璃), 네 번째 옥정(玉井)이라 하고 … "
담당자 : 국립문화재연구소 고고연구실 신희권, 이인숙
전화번호 : 02-720-7068
그림 1. 조사지 전경
그림 2. 우물지 발굴 전경
그림 3. 앞선 시기 우물지 전경
그림 4. 늦은 시기 우물지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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