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경궁에 동물원이 들어선 까닭
12월17일 오후 전주동물원에서 끔찍한 일이 벌어졌다. 백수의 제왕으로 알려진 사자와 호랑이가
관람객을 보호하기 위한 울타리 앞의 구덩이에 뛰어들면서 싸움이 일어난 것.
결과는 구덩이로 떨어질 때 착지가 불안했던 호랑이의 참패로 나타났다.
사자는 순식간에 호랑이의 급소인 목을 물어뜯었고, 호랑이는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우리나라 동물원 역사상 최악의 사고 중 하나로 기록될 만한 사고였다.
우리나라 최초의 동물원은 창경원이다.
1909년 11월 1일자의 ‘순종실록’을 보면 이에 대한 기록이 나타나 있다.
“창경궁 내에 동물원과 식물원을 설치하고 개원식을 행하고 나서 일반 사람들에게 관람을 허락하였다.”
창경궁은 세종이 상왕인 태종을 모시기 위해 지은 '수강궁'을 시초로 하고 있다.
그 후 성종 때 명정전ㆍ문정전ㆍ통명전 등의 건물을 더 짓고 나서 '창경궁'으로 부르게 되었다.
성종은 할머니인 세조비 정희왕후와 생모인 덕종비 소혜왕후, 양모이자 숙모인 예종비 인순왕후 등
세 명의 대비와 왕후들을 모시기 위해 창경궁을 지었다.
그런 연유로 창경궁은 임금과 사별한 왕비들의 거처로 사용되었는데,
전염병이나 전란 등의 국가 비상사태시 왕이 임시로 머무는 이궁의 역할도 겸해 왔다.
이 창경궁에 순종은 왜 갑자기 동물원과 식물원을 설치하고 백성들에게까지 관람을 허락한 것일까.
여기에는 조선의 마지막 순간을 엿볼 수 있는 슬픈 역사가 감춰져 있다.
창덕궁 전하의 소일거리
1907년 헤이그 특사사건이 일어나자 일제는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켰고, 순종이 등극하게 되었다.
그러나 순종이 즉위하자마자 일제는 한일신협약을 맺어 국정 전반을 일본인 통감이 간섭할 수 있게 하고,
정부 각부의 장관을 자신들이 임명하기 시작했다.
▲ 1918년 창경궁 동물원을 관람하며 하마를 사진기로 촬영하고 있는 영친왕(가운데). |
순종은 즉위와 더불어 거처를 덕수궁에서 창덕궁으로 옮겼는데,
이렇게 되자 졸지에 하릴없는 ‘창덕궁 전하’로 전락한 신세가 되었다.
이에 일제는 순종을 위로한다는 구실 아래 식물원과 동물원을 창덕궁 바로 옆인 창경궁에 설치했다.
즉, 국사는 자기들한테 맡겨두고 진기한 동식물이나 구경하며 소일거리로 삼아라는 의미나 다름없었다.
공사가 시작되자 화려하고 웅장했던 전각ㆍ궁장ㆍ문루 등이 헐리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고 눈에 거슬린 순종이 공사를 중지하라는 명을 내렸으나
이미 정부 요직을 친일 매국노들이 장악하고 있던 터라 어명은 통하지 않았다.
이때 일제가 헐어버린 전각은 무려 60여 채에 달했는데, 거기서 나온 부속물은 모두 경매로 팔려나갔다.
그 후 일제는 대궐 북쪽으로 잇닿은 춘당대 쪽에 식물원을, 종묘와 인접한 보루각 자리에 동물원을 각각 지었다.
또 영화당 옆의 과거 응시장은 춘당지라는 연못으로 만들고,
바로 옆의 임금이 매년 농사를 짓던 전답 자리는 연꽃이 피는 소춘당지로 만들었다.
공사가 거의 마무리되어 가던 1909년 초부터 일제는
우리나라에 서식하던 각종 동물과 진귀한 식물을 수집하기 시작했다.
또 우리나라에 서식하지 않는 동물인 코끼리ㆍ사자ㆍ원숭이ㆍ낙타 등의 희귀 동물과
파초ㆍ바나나ㆍ고무나무 등의 열대식물도 일본으로부터 들여왔다.
그리하여 1909년 11월 1일 오전 10시, 연미복 차림의 예복을 입은 순종을 비롯해
문무백관 및 외국 사신들까지 참석한 동식물원 개원식이 거행되었다.
이날 개원식에는 무려 1천명에 달하는 축하객이 참석했는데,
이 행사가 순종으로서는 대한제국 황제 폐하로서 베푸는 마지막 대잔치가 되고 말았다.
이때 전시된 동물은 포유류 29종과 조류 43종 등 총 72종 361마리였다.
이로써 창경궁 동물원은 19세기 이래 설립된 동물원 가운데 36번째이자
아시아에서는 7번째로 문을 연 동물원이 되었다. 당시 입장료는 어른 10전, 어린이 5전이었으며,
개원 첫해의 관람객 수만 1만5천명이었고 이듬해에는 11만명에 달했다.
사실 동물원의 역사는 기원전 15세기경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고대 이집트나 바빌로니아, 그리스, 로마에서는 대규모로 동물을 수집해 사육했다.
알렉산더 대왕이나 네로 황제 등 숱한 권력자들이 진기한 동물들을 모아서 기르는 것을 취미로 삼았다.
특히 고대 로마의 트라야누스 황제는 약 1만1천 마리의 동물을 모은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는 일종의 권력과 부에 대한 과시였다.
▲ 창경원 시절의 동물 우리 |
중세시대에도 왕이나 귀족들이 이방의 동물들을 구해 기르곤 했다. 그러한 동물들로 기이한 구경거리를 제공하면서 자신의 정치적인 힘을 과시하기 위해서였다.
정복왕으로 알려진 월리엄 1세의 아들 헨리 1세도 우드스톡에 동물원을 세웠는데, 그로부터 이국동물을 키우는 영국 왕실의 전통이 시작되었다.
또 인도 무굴제국의 3대 황제인 아크바르도 수천 마리의 동물을 길렀다.
군주들의 이 같은 개인 동물원을 ‘미네저리’라 하는데, 오늘날의 동물원(zoo)과는 그 의미가 매우 달랐다.
일반인이 구경할 수 있는 근대 동물원의 경우 과학 연구와 공공 교육, 위락, 동물 보호의 성격이 짙은 반면,
미네저리는 개인의 호기심과 주인의 부를 과시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미네저리의 또 다른 목적은 일반인에게 공포심을 조성하는 것이기도 했다.
미네저리의 맹수가 가끔 정치범의 사형 집행인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또 말과 기린, 사자 등으로 서로 싸움을 붙이기도 했으며,
자신이 기르는 동물들이 번식을 많이 하거나 상태가 좋지 않은 것을 보고 길조나 흉조를 점치기도 했다.
하지만 근대적 공공 동물원의 탄생 역시 제국주의적인 힘의 과시 및 약탈의 역사와 잇닿아 있었다.
19세기 이후 생기기 시작한 공공 동물원도 식민지 지배력을 증명하는 상징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했기 때문이다.
그 당시로서는 보기 힘든 동물을 잡아온다는 사실 자체가
머나먼 이국 땅을 정복할 수 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시절이었다.
따라서 영국이나 독일 등 제국주의 열강들은 아프리카나 아시아의 침략 과정에서 동물 약탈도 겸했다.
19세기 후반 세계 최대 동물상이었던 독일의 칼 하겐베크의 경우 20년 동안
“사자 1천 마리, 호랑이 300~400마리, 표범 600~700마리, 곰 1천 마리, 하이에나 800마리를 팔았다”는
기록이 남아 있을 만큼 당시 동물 거래량은 엄청났다.
사람도 동물처럼 전시해
희귀한 이국 동물을 포획하는 데 남다른 수완을 보였던 칼 하겐베크가
1907년 독일 함부르크 근처의 슈텔링겐에 개설한 하겐베크동물원은 현대식 동물원의 원형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이 동물원에 철책 우리 대신 해자를 둔 방사식 동물 수용방식을 채택하여
육식동물과 초식동물이 공존하는 파노라마 형태의 야외동물원으로 만들었다.
▲ 현대 동물원의 원형이 된 하겐베크동물원 |
생선중개상이었던 하겐베크는 어느 날 상어 그물에 걸린 물개 6마리를 ‘인어’라고 부르며
함부르크에 유료로 전시하여 큰돈을 벌면서 동물 사업에 뛰어들었다.
특히 그는 동물뿐만 아니라 사람을 전시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1875년 하겐베크는 라플란드의 라피족 남자 3명과 여자, 갓난아기, 순록을 ‘사람쇼’라는 이름으로 전시했는데,
라피족 여자가 가슴을 드러내놓고 아기에게 젖을 물리고 순록의 젖을 짜먹는 것을 보며 사람들은 열광했다.
그 후 하겐베크는 라피족을 비롯해 에스키모, 아프리카인, 인디언, 호주 식인종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인종들을 전시장 속으로 몰아넣었다.
한밤중의 창경원 동물 독살사건
‘사람쇼’로 유럽 각 도시를 순회하며 성공을 거둔 하겐베크는
우리나라의 창경원에도 동물을 팔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창경원의 후신인 서울대공원 자료에 의하면, 1912년 인도에서 포획된 아시아코끼리가 하겐베크를 거쳐
창경원으로 팔려와 하마와 함께 전시되었다고 한다.
▲ 1911년부터 창경궁 내에 설치된 동물원과 식물원, 박물관을 통칭하여 창경원으로 부르게 했다 |
그런데 한일병합 다음해인 1911년 4월 26일 창경궁 내에 설치된 동물원과 식물원, 박물관을 그때부터 ‘창경원’으로 통칭하게 되었다.
‘원(苑)’이란 울타리를 쳐 짐승과 나무를 키우는 곳이란 의미로서,
사냥이나 야유 등 놀이를 하는 장소를 일컫는 말이다.
비록 국권을 상실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왕과 왕실이 거주하는 궁을 왜 놀이 장소로 격하시켜 부르게 한 것일까.
순종실록 부록에 의하면
그해 4월 11일 창경궁 내의 동ㆍ식물원과 박물관을 가리켜
동원(東苑)이라 했다가 그날 다시 개정했는데,
그 이유는 창경궁 내에 있기 때문이라고 적혀 있다.
어쨌든 그 이후부터 창경궁은 궁궐이라기보다는
놀이 장소의 의미인 창경원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창경원으로 개칭한 것은 일제가 아니라 순종의 뜻이었다.
대신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순종이 창경원이라는 명칭을 고집한 것은,
‘궁’이라고 하면 백성들이 드나들기 불편할 것이므로
‘원’으로 바꾸어 좀 더 많은 사람들이 이용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배려였다. 어쩌면 그것은 나라를 잃은 국왕이 백성들에게 베풀 수 있었던 마지막 성은이었는지도 모른다.
한편 일각에서는 순종이 굳이 개칭을 하면서까지 창경궁의 문턱을 낮춘 까닭은
비밀리에 독립운동을 추진하던 이들과 보다 쉽게 접촉하가 위해서였다는 의견을 내놓기도 한다.
그 후 조선왕조실록에서 창경원 동물원의 기록이 나타나는 것은 1914년 때의 순종실록 부록이다.
그에 의하면 5월 7일에는 동물원 기사 오카다 노부토시를 파견해
경기도에서 야생 조수와 새집ㆍ새알을 수집해
창경원 동물원에서 키워 공중의 관람 및 학술연구 자료로 삼도록 하고 있다.
또 5월 27일에는 오카다 노부토시를 도쿄제국대학 및 교토동물원에 파견하여
동물원에서 기르는 동물의 질병 원인 및 사육 방법을 조사 연구하도록 명하였다.
이처럼 동물원 기사 오카다 노부토시는 수시로 출장을 간 것으로 나타나는데,
이는 창경원 동물원의 관리에 그만큼 신경을 썼다는 이야기가 된다.
▲ 1960년대 창경원에 몰려든 관람객들 |
애초 일제는 창경원 동물원 개원에 앞서 극비리에 일본 최초의 근대 동물원인 우에노동물원에서 일본인 사육사 20명을 교육시켰다. 그 후 창경원 동물원의 개원과 함께 그들이 사육 관리를 일체 담당했는데, 한국인 사육사를 두지 않은 것은 나름대로 속셈이 있었다.
일제에 저항하는 인사가 한국인 사육사와 접촉하여 고의적으로 맹수사의 문을 열어 맹수에 의한 백성들의 인명 피해가 나기라도 하면 민심이 동요하고 민족적 반감이 더욱 깊어질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 같은 일제의 우려가 실제 상황이 된
황당한 사건이 벌어지고 말았다.
일본 천황이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기 20일 전인 1945년 7월 25일,
당시 창경원 동물원 회계과장이던 사토는 전 직원을 불러 모아놓고 은밀한 지령을 내렸다.
그는 이름 모를 독약을 사육사들에게 일일이 건네주며,
사자와 호랑이ㆍ코끼리ㆍ악어ㆍ뱀 등 사람을 해칠 만한 동물은 모조리 오늘 밤에 죽여야 한다고 지시했다.
그 명령은 도쿄로부터 직접 하달된 것이었는데,
미군이 폭격해올 경우 동물들이 우리를 뛰쳐나와 사람을 해치는 사태를 막기 위한 조치였다.
그날 밤, 독약이 든 먹이를 먹은 동물들의 울부짖는 소리가 밤새 창경원 내에 메아리쳤다.
1993년 서울시가 발행한 ‘한국동물원 80년사’에 의하면 그날 죽임을 당한 동물은 21종 38마리였다.
그러나 태평양전쟁 중반 이후 수세에 몰리기 시작했을 때부터
일제는 이미 창경원의 동물 수를 줄여 나가고 있었다.
이유는 전쟁으로 인한 물자 부족 때문인데, 동물사의 철책을 뜯어내 무기의 재료로 사용하기도 했다.
그들이 동물의 수를 줄이는 방법은 독립투사들에게 행한 만행만큼이나 끔찍했다.
낙타에게는 사료를 주지 않아 굶겨 죽였고,
추위에 약한 아프리카산 하마는 난방을 해주지 않아 얼어 죽였다.
심지어 전시된 초식 동물을 다른 육식 동물의 먹잇감으로 제공하기도 했다.
그 참상의 와중에서 살아남아 광복을 맞은 동물 수는 약 280여 마리였다.
그럭저럭 동물원이 안정을 찾을 즈음인 1950년 다시 한국전쟁이 터졌다.
사흘 만에 북한군이 서울로 밀고 내려와 창경원 사육사들은 미처 피난을 가지 못했다.
이데올로기 문제에 있어 비교적 자유로운 동물 덕분에 창경원 동물원은
북한군 치하에서도 사육사들의 보살핌으로 살아남을 수 있었다.
하지만 9ㆍ28 서울 수복 이후 중공군의 참전으로 인해 다시 전세가 불리해진 1ㆍ4후퇴 때는
동물원 사육사들도 피난 행렬에 동참했다.
▲ 3년간의 복원 공사 끝에 창경궁은 옛 모습을 다시 회복했다 |
약 2개월여 후인 1951년 3월 서울이 재수복된 후 창경원 동물원의 광경은 처참했다.
낙타ㆍ사슴ㆍ얼룩말 등은 도살을 당한 듯 머리만 남아 있었고, 여우와 너구리ㆍ오소리ㆍ삵 등은 굴 속에서 혹은 돌 틈에 끼어 죽어 있었다.
다른 동물들도 모두 굶어 죽거나 얼어 죽어서 열어둔 동물사에 살아 움직이는 동물은 한 마리도 없었다.
지금도 동물원마다 실제 전쟁 상황이 벌어졌을 때를 가정한 처리 지침이 마련되어 있다. 이에 의하면 일부 동물은 해방 직전 일제가 행했던 것처럼 죽임을 당해야 하고, 일부 동물은 풀어주게 되어 있다.
죽임을 당하는 동물은 당연히 사람을 해칠 우려가 높은 맹수들이다.
맹수의 경우 새끼들이라 할지라도 모두 죽이게 되어 있으며, 또 코끼리나 하마ㆍ코뿔소 등
성격이 포악하거나 덩치가 커서 사람에게 해를 끼칠 만한 초식동물들도 모두 이에 포함된다.
우리 밖으로 방사되는 동물은 주로 조류와 순한 초식동물들이다.
방사해도 인간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 스스로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을 갖춘 동물들이 이에 포함된다.
동물에 대한 살 처분은 먹이에 약을 타거나 총기사용권이 있는 경찰이 참여해 총살 처리를 하게 되어 있다.
휴전이 체결되고 창경원의 텅 빈 우리에 일선 장병들이 잡아서 보낸 곰과 산양ㆍ노루ㆍ삵 등이
다시 들어오자, 전쟁 후 피폐한 삶에 위안을 얻고자 하는 시민들이 그것을 구경하러 몰려들었다.
그러자 전택보 천우사(주) 사장과 윤우경 구 황실 재산사무총국장이 주도한 동식물원재건위원회가
발족되어 정부기관 및 기업체, 독지가들로부터 42만2천 달러의 재건 기금을 모았다.
▲ 1960년대 창경원에서 밤벚꽃놀이를 즐기는 시민들 |
그로 인해 드디어 1954년 7월 15일 창경원의 동ㆍ식물원이 다시 일반에 공개되었다.
또 1955년 사자와 호랑이ㆍ코끼리ㆍ백곰ㆍ물개ㆍ하마ㆍ낙타 등 10여 종의 동물을 외국으로부터 수입하는 등 지속적인 노력으로 동물원 재건 2년 만에 100종 500마리를 전시하여 동물원다운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이후 창경원은 한동안 서울 시민들의 대표적인 휴식처이자 놀이공간의 역할을 했다. 휴일이면 김밥에 보온병을 싸들고 나와 동물 구경을 하고 놀이기구를 타는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였다. 또 벚꽃이 필 무렵이면 밤벚꽃놀이를 나온 시민들로 밤늦도록 몸살을 앓곤 했다.
때문에 월요일만 되면 창경원의 동물들은 단체로 ‘월요병’을 앓아야 했다. 전날 관람객들이 던져준 음식을 과식하거나
일부 몰지각한 사람들이 비닐봉지째 던져준 먹이를 잘못 먹어 고생을 하는 동물들이 허다했다.
개원한 지 74년 만인 1983년 12월 31일 창경원은 마지막 관람객을 맞은 후 문을 닫았다.
그리고 3년간에 걸친 복원 공사 후 창경궁이란 이름과 함께 옛 모습을 되찾았다.
창경원에 있던 동물과 식물들은 보금자리를 서울대공원으로 옮겨갔다.
내년이 바로 창경원의 전통을 이어받은 서울대공원 동물원의 개원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 이성규 기자, 2noel@paran.com
- 2008.12.19/ 12.25 ⓒ ScienceTimes [이야기 과학 실록 (34)-(35)]
'나아가는(문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新 서울견문록 ④] 송파구 (0) | 2008.12.26 |
---|---|
창덕궁 후원에서 조선시대 어정(御井) 2기 발굴 (0) | 2008.12.24 |
오무라 마스오 와세다大 명예교수 - 50년간 조선문학 연구 (0) | 2008.12.20 |
김지하의 '오적(五賊)' (0) | 2008.12.20 |
5, 오(五), 다섯 가지 (0) | 2008.12.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