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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무라 마스오 와세다大 명예교수 - 50년간 조선문학 연구

Gijuzzang Dream 2008. 12. 20. 23:56

 

 

 

 

 

 오무라 마스오 와세다大 명예교수

 50년간 조선문학 연구


 

“꼴 보기 싫은 일본인이라고? 하지만 누구보다 박지원과 윤동주를 사랑합니다”

 

 

 

50년 전 연암 박지원에 매료된 일본 젊은이가 있었다.

그는 이를 계기로 한평생 한국문학 외길을 걸었다.

수많은 업적을 남겼지만 윤동주 시인과의 인연이 유난히 깊다.

수풀 속에 사라질 뻔한 윤 시인의 묘소를 찾아낸 것도,

유가족이 윤 시인의 육필 원고를 처음 보여준 사람도도 그였다.

호주 시드니에서 오무라 마스오 와세다대 명예교수를 만났다.

 

 

 

50년 동안 한국문학 순례를 이어온 일본인 교수가 있다. 그는 유실될 뻔했던 윤동주 시인의 묘소를 중국 지린(吉林)성 룽징(龍井)에서 찾아낸 윤동주 연구자다.

또한 광복 이후 단절된 남북한 문학을 수십년 동안 등거리에서 연구해온 유일한 학자다.

 

그는 ‘백두산 이남에서 현해탄에 이르는 지역에서 살았던, 또는 살아가고 있는 민족이 낳은 문학작품’을 직접 만나기 위해 지난 50년 동안 그 먼 길을 걸어왔다.

수시로 찾는 남북한 외에도, 중국의 조선족 문학작품을 연구하기 위해 화가 부인과 함께 지린성에서 1년 동안 머물기도 했다.

 

 

오무라 마스오(大村益夫 · 75) 와세다대 명예교수.

백발성성한 노교수의 ‘조선문학 순례’는 지금도 계속된다.

이쯤에서 “왜?”라는 의문부호가 나오지 않을 수 없다.

한국인도 아닌 일본인이 한국문학을 대상으로 ‘미치지 않고는 원하는 곳에 도달할 수 없다

(若汝不狂 終不及之)’는 말을 온전히 실천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지금부터 꼭 50년 전인 1958년 3월, 25세 오무라 청년이

조선어와 한글을 배우려고 찾아간 도쿄 소재 조선회관에서 만난 300여 명의 조선인 또한

“일본인이 왜 조선어를 배우려 하는가?”라고 하지 않았을까?

 

실제로 청년 오무라는 강당 정면에 김일성 사진이 커다랗게 걸려 있던 조총련계 학교에서

끊임없이 의심받는 외톨이였다. 입학허가도 간신히 받아냈다고 한다.

처음에는 그를 창씨개명한 한국인으로 의심하다가, 그게 아니란 것이 밝혀지자

이번에는 괴짜 취급을 했다. 나중에야 그는 자신이 간첩으로 의심받은 걸 눈치 챘다고 한다.

그러나 정작 그 학기 초급반에서 마지막까지 남은 학생은 그를 포함해 세 명에 불과했다.

 

 

불쌍한 일본인, 꼴 보기 싫은 일본인

 

그런데 이를 어쩌랴. 그로부터 50년 하고도 반년이 더 지난 2008년 9월20일

‘조선문학 순례 50년’이라는 타이틀로 시드니에서 열린 오무라 교수 초청 문학세미나에서

“무슨 이유로 한평생을 바쳐서 한국문학에 천착하느냐?”는 질문이 또다시 나왔으니.

 

오무라 교수는 잔잔하게 미소 지으면서 답변을 머뭇거렸다. 그러다가 아내 쪽을 바라보았다.

이심전심인가. 아키코(74 · 화가) 여사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불쌍한 일본인을 위해 내가 대신 답변하겠다”는 농담을 시작으로

다음과 같은 답변을 이어갔다.

 

아래의 글은 문학세미나 현장에서 채록한 답변이다. 그러나 정확하게 채록할 수 없었던

부분을 10월6일 호주-일본 간의 국제전화 인터뷰를 통해 보충한 것임을 밝혀둔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와세다대 대학원 석사논문을 쓰다가 접한 조선문학의 우수성과

풍부함에 반했다. 오무라 교수는 애초에 구한말 개화기의 신문학을 연구했지만,

본격적으로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와

각종 소품문(단상, 일기, 편지글 등 짧은 산문) 등을 접한 다음부터다.

그는 조선을 빼고는 동아시아를 제대로 이해하기 힘들다고 생각했다.

세계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청일전쟁과 러일전쟁도 한반도를 계기로 발발하지 않았는가.

게다가 불교와 유교를 연구하면서 조선을 빼면

동아시아 전체의 사상을 파악하기 힘들다고 판단했다. 

 

1953년에 와세다대에서 중국 근대사와 문학을 공부하던 오무라는

아시아 문화와 역사가 새로운 관점에서 연구돼야 한다는 생각에 조선을 연구하기로

마음먹었고, 이를 위해 조선어부터 배웠다. 거기서 ‘불쌍한 일본인’의 역사가 시작됐다.

 

1964년부터 와세다대 중국어 담당 전임강사였던 오무라 선생은

1978년부터는 아예 한국어 담당 교수로 활동했다. 주변에서 만류하는데다, 일본에서

조선문학을 연구하는 학자가 거의 없다는 불리함도 있었지만 그의 결심은 견고했다.

운이 좋았던지 오무라 교수가 조선문학 연구과정에서 큰 업적을 이루자,

이번에는 ‘꼴 보기 싫은 일본인’ 소리를 들어야 했다.

그 소리를 가장 많이 들은 곳이 한국이지만,

정도 차이가 있을 뿐 일본과 중국에서의 처지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오무라 교수의 조선문학 연구는 갈수록 활기를 띠어,

1985년에는 중국 조선족 문학을 연구하기 위해 와세다대 연구원 신분으로

옌볜대학에서 1년 동안 연구에 몰두했고,

고려대 교환 연구원 신분으로 2년 동안 한국에 머무르기도 했다.

2004년 와세다대를 정년퇴직한 다음

인하대 초빙교수로 동아시아 비교문학을 강의하는 기회도 가졌다.

그 과정에서 오무라 교수가 40년 동안 잊힌 윤동주 시인의 묘소를 최초로 찾아낸 사실과,

단절된 남북한 문학을 50년 동안 연구한 유일한 학자라는 평가는

과분한 영예이기도 했지만 무거운 짐으로 작용한 경우가 더 많았다.

 

뭔가 중요한 연구업적을 발표할 때마다 ‘꼴 보기 싫은 일본 놈이 또 한 건 하는군’이라는

비아냥거림이 환청으로 들려올 정도였다.

실제로 논문을 발표하는 학회에서 그런 수군거림을 들은 적도 있다.

 

오무라 교수와 그의 부인 아키코 여사.

아키코 여사는 3년 전 뇌경색으로 마비증세가 온 뒤 귀가 어두워진 오무라 교수를 대신해 조선문학을 설명하는 평생 동지다.

“그건 일본인의 관점 아닌가?”라는 말도 수없이 들어야 했다.

정작 오무라 교수는 제3자적 관점보다는 ‘내재적 연구 방식’을 택하고 있는데 말이다.

 

특기할 것은, 그런 말에 상처를 받아 의욕상실에 시달리기는커녕, 일본 학자에게 선점당한 한국 학자들의 당연한 반응이라는 생각과 함께 더욱 분발해야 한다는 각오를 다지곤 했다는 점이다.

 

지금도 제주도 시인들의 작품을 일역하고 있으며, 이기영의 소설‘고향’을 일어로 번역 중이다. 물론 보수가 거의 없는 고단한 작업이다.

 

아내인 나 또한 ‘불쌍한 일본인’ 신세를 면할 길이 없다. 아니 포기했다(웃음).”

 

국제전화로 아키코 여사의 얘기를 들으면서,

문득 명심보감에 나오는 ‘심청사달(心淸事達)’이라는 사자성어가 스쳤다.

‘마음이 맑으면 모든 일이 잘 이루어진다’는 뜻이다.

오무라 교수가 한국문학을 연구하면서 다른 학자 같으면 하나도 이루기 힘든 업적을

대여섯 가지나 이룰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마음이 시종 명경지수처럼 맑았기 때문은 아닐까.

 

 

‘한국인이 왜 일본인한테 절하나’

 

아키코 여사는 시드니 문학세미나에서 주제발표가 끝난 후

위트가 거의 없는 오무라 교수를 대신해 청중의 질문에 재치 있는 답변을 했다.

 

“이번에 오무라 교수를 호주로 초청한 분이

한국문학 연구에 일생을 바친 오무라 교수의 업적을 칭송하면서

‘절하고 싶은 일본인’이라는 내용의 e메일을 보내오자 호주 방문을 취소하겠다고 말했다.

‘왜 한국인이 일본사람한테 절을 하나’라면서 매우 부담스러워했다.

오무라 교수가 워낙 고집이 센 분이라서 호주 방문이 거의 취소된 상태였다.

그러다가 그 분한테서 온 다음 메일에서 ‘세미나를 이세돌 기사의 누나 이세나 아마6단이

운영하는 ‘시드니기원’에서 열 예정’이라는 구절을 읽고는

‘그러면 가야겠다. 가서 지도대국도 받고…’ 하면서 비행기 티켓을 예약했다.

  

막상 시드니에 도착해보니 절을 하겠다던 분이 지난 50년 세월을 꼬치꼬치 따져 물었다.

‘그건 일본인의 관점이 아니냐’는 어깃장 질문도 나왔다.

오오, 불쌍한 일본사람은 어딜 가나 어쩔 수가 없었다.(웃음)

 

어디 그뿐인가, 세미나가 끝나자마자 달려간 시드니기원에서 한국 프로기사 안영길 6단에게 바둑알을 까맣게 깔고도 대패를 당했으니, 이래저래 불쌍한 일본인의 여행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오무라 교수는 바둑 초급자로 큰 영광을 얻었다며 싱글벙글 웃었다.”

오무라 마스오 교수의 인간적인 면모를 엿보게 해주는 대목이었다.

 

9월19일부터 24일까지 6일 동안의 짧은 방문 중 오무라 교수는

윤동주 시인의 유일한 혈육인 윤혜원(86 · 22년 동안 시드니 거주) 여사를 만나고,

세미나와 방송출연, 호주문학 기행을 하는 등 바쁜 일정을 보냈다.

 

앞에 거론된 문제의 메일을 보내면서 오무라 교수를 초청한 당사자인 필자는

그들 부부가 시드니 공항에 도착해 일본으로 돌아갈 때까지 거의 전 일정을 동행하면서

밀착취재했다. 그런데 오무라 교수는 다정다감한 성격과는 달리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

나중에 부인을 통해 알게 된 사실이지만, 워낙 말수가 적은데다

3년 전 뇌경색으로 가벼운 마비증세가 온 후 귀도 어두워지고 말수도 더욱 줄었다고 한다.

부인이 항상 함께 다니면서 대변인 노릇을 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그럼에도 부인의 답변을 유심히 듣던 오무라 교수는 잘못된 증언이 나오면 바로바로

수정해주었다. 운전과 가이드를 겸해 6일 동안 인터뷰를 진행하다 보니 오무라 교수와

아키코 여사가 조선문학을 공동으로 연구하는 동반자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실제로 아키코 여사는 윤동주 시인의 무덤을 발견한 1985년에도 현장에 함께 있었고,

윤 시인의 육필원고를 유족이 아닌 사람으로서 처음 접할 때도 함께 있었다.

특히 봉분이 사라질 정도로 망가진 윤 시인의 무덤을 단장하고 나서

첫 제사를 지낼 때도 아키코 여사가 두만강에서 잡은 생선을 제사상에 올렸다.

심지 굳은 사람의 신념은 뿌리 깊은 나무와 같다.

자기가 추구하는 궁극적인 본질에 닿기 위해 단 한 번뿐인 생애를 아낌없이 바친다.

그로 인해 ‘시대의 바보’가 되는 걸 주저하지 않는다.

 

 

조선의 혼을 찾아서

한 번뿐인 생애를 바쳐

 

오무라 교수의 조선문학 연구는 구한말 개화기의 ‘신문학’에서부터 시작됐다. 그는 한국, 중국, 일본을 포함한 동아시아 전체의 문학구도와 역사를 꼼꼼하게 탐사했다. 그 과정에서 조선의 문장형태가 문어체에서 구어체로 바뀌는 걸 보았을 것이다.

 

연암 박지원으로부터 출발한 실사구시(實事求是) 형태의 글쓰기가 자리를 잡아갈 즈음에 일제 강점기가 시작됐다.

오무라 교수가 한글을 배운 동기 중 하나가 박지원의 ‘열하일기’를 원문으로 읽고 싶어서였다고 한다. 그는 태어나지도 않은 아기의 이름을 ‘지원’으로 지을 정도로 연암을 흠모했다.

 

경술국치로 불리는 한일강제합방 2년 전, 육당 최남선이 ‘해에게서 소년에게’라는 시를

발표하여 ‘신체시(新體詩)’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조선의 근대문학이 거기에서 출발한다.

한국의 시인들은 이날을 ‘시의 날’로 정해서 기념한다.

올해가 바로 신시(新詩) 100년을 맞는 해다.

 

오무라 교수는 일제 강점기의 조선 근 · 현대문학을 개괄하면서,

그 안에서 소용돌이쳤던 카프문학(KAPF ·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과

일제 말기의 친일문학을 선입관 없이 다루었다.

마치 신비평(New Criticism) 방식처럼 작가의 삶이 아닌 작품 자체에 초점을 맞췄다.

그리하여 그는 암울했던 시대의 상처와 아픔을 풀어내는 문학의 씻김굿을 하듯,

시대의 사생아처럼 태어난 일제 강점기의 조선문학을 소중하게 보듬어 안는다.

 

오무라 교수는 일제 강점기에 조선문학의 중요한 거점이 되었던 옛날 만주지역의 문학 또한

심도 있게 다뤘다. 당시 그곳에는 최남선, 유치환, 염상섭, 안수길, 김달진, 박영준, 박팔양, 이태준, 손소희, 강경애 등 쟁쟁한 작가들이 활동하고 있었다.

가곡으로 작곡된 ‘선구자’를 쓴 윤해영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

 

  

오무라 교수는 윤동주 시인에 대해 “그의 시는 그의 생애와 마찬가지로 청렬(淸冽)하고 우아한 혼을 지닌 동시에 민족의 운명을 짊어지고 있었다”고 말한다.

죽어서 시인이 된 윤동주

 

한국인이 7만여 명 거주하는 시드니는 언제부턴가 가장 큰 규모로 윤동주 추모행사를 여는 도시가 됐다. 3남1녀의 장남이었던 윤 시인의 형제 중 유일한 생존자인 윤혜원 여사가 22년 동안 시드니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윤 여사는 윤동주 시인의 바로 아래 동생으로 시인이 서울과 일본으로 유학하는 동안 고향으로 편지를 보낼 때 주된 수신인이었다.

 

윤 여사의 증언에 따르면, 윤 시인은 죽을 때까지 시인으로 대우받지 못했다고 한다. 그렇게 소망했던 시집도 펴내지 못했다.

후쿠오카 감옥에서 옥사하여 한 줌의 재로 돌아온 손자를 북간도에 묻은 다음 할아버지가 ‘시인 윤동주의 묘’라는 비석을 세워놓아 비로소 시인이 됐다.

 

1945년 타계 이후 윤 시인은 고향 룽징과 옌볜에서 철저하게 잊힌 인물이 됐다.

1984년에 재미동포 의학자 현봉학 박사(2007년 작고)가 그곳에 찾아갈 때까지

그곳 사람들은 윤동주가 누구인지, 심지어 시인이었는지조차 몰랐다.

 

현 박사는 윤동주 사후에 룽징을 처음으로 찾은 외부인이었다.

70세 노인이 될 때까지 윤동주를 전혀 몰랐던 그는 1984년 봄에

우연히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초간본을 읽고 크게 감동을 받아서 그해 8월에 중국을 방문,

옌볜지역의 유지들과 자치주 정부에 윤동주의 묘를 찾아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아무도 윤동주를 모르고 관심도 갖지 않아 현 박사의 윤동주 묘지 찾기는 실패로

돌아갔다. 마음이 상한 그는 윤 시인이 룽징이 배출한 위대한 애국시인임을 역설했다고 한다.

현 박사는 의사직업을 은퇴한 후 오직 윤동주 추모사업에 헌신하다가 타계했다.

 

한편 1984년 여름, 윤 시인의 동생 윤일주(1984년 작고 전 성균관대 교수)가

일본에 가 있던 중 오무라 교수를 찾아가 “윤동주의 묘소가 동산 교회묘지에 있으니

찾아달라”고 부탁했다. 어렵사리 와세다대에서 1년짜리 교환 연구교수 허가를 받아낸

오무라 교수는 1985년 4월12일 옌볜에 도착했다.

 

오무라 교수는 공안당국의 허가를 받아 5월14일 옌볜대 교수진을 포함한 일행과 함께

작은 동산의 교회묘지에서 윤동주의 묘를 찾아냈다.

묘비 앞에서 찍은 가족사진을 가지고 간 덕분에 묘지를 찾을 수 있었다.

그러나 40년 만에 윤동주의 무덤을 발견했을 때,

주변은 온통 잡초로 뒤엉켜 있어 오무라 교수는 아주 비감했다고 한다.

 

크리스천이었던 윤 시인의 가족은 광복 직후 남한으로 내려왔고

남아 있던 어른들도 모두 세상을 떠났다.

너무 어려서 남겨두었던 막내동생 윤광주도 30세 젊은 나이에 요절했다.

아무도 윤동주 시인의 무덤을 돌볼 수 없었던 것이다.

 

오무라 교수는 1년 동안 옌볜에 머물면서, 윤동주가 태어나고 성장하면서 고등학생 때까지 공부했던 모든 유적을 발굴하고 영구보존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이 소식을 윤일주 교수에게 전하고 싶었지만 그는 이미 세상을 떠난 다음이었다.

 

묘지의 첫 개수 작업은 1988년 6월에 이루어졌다.

묘지 발견 소식을 듣고 달려온 미국의 현 박사를 주축으로 미중한인우호협회가 비용을 대고,

룽징중학교 동창회가 참여하여 수선했다. 2003년에 두 번째 개수 작업이 이뤄졌다.

호주에 거주하는 윤혜원 · 오형범 부부의 주도로 두어 달간 공사가 진행됐다.

그런데 현재 성역화되다시피 한 윤동주 시인의 무덤에 대한 오무라 교수 부부의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특히 부인은 마치 왕릉(?)처럼 보수한 걸 두고 분노가 치민다고 말했다.

윤 시인이 절대로 그런 분이 아니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중국 조선족 공산당 간부들의 몰지각한 한탕주의가 낳은 불행이라는 견해를 조심스럽게

피력하기도 했다. 특히 윤 시인의 묘를 더 크게 단장하기 위해 옆에 있던 무덤 3기가

없어지다시피 훼손당했다면서, 윤 시인이 무덤에서 걸어 나오고 싶어할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런데 그런 일들을 지적하면 “꼴 보기 싫은 일본 놈” 소리가 또 나올 것 같아

속으로만 애를 태운다고 털어놓았다.

 

 

조선의 혼(魂)을 찾아서

 

오무라 교수는 한글로 쓴 수많은 논문과 6권의 저서를 출간했다.

또한 한국문학 작품 다수를 일어로 번역해 7권의 번역서가 있다.

2007년 5월에는 일본 ‘홋카이도신문’과 ‘니시니혼신문’에 연재한 칼럼(소품문)을 한국어로

번역해 묶은 ‘조선의 혼을 찾아서’(2007, 소명출판)를 펴냈다.

 

한편 오무라 교수는 9월19일 시드니 도착 당일

호주공영 SBS라디오 한국어 프로그램에 윤혜원 여사의 부군 오형범 씨와 함께 출연해

지난 50년 동안 조선문학을 연구해온 과정과 성과를 들려주었다.

 

 

다음은 방송 인터뷰를 포함해 호주 체류 6일 동안 취재한 오무라 교수와의 일문일답이다.

 

▼ 오무라 교수는 ‘한국문학’이라는 용어 대신 ‘조선문학’이라고 표현하는데

특별한 이유가 있나.

“한반도는 불행하게도 광복과 동시에

대한민국(한국)과 조선민주주의공화국(북한)으로 분단됐다.

그런 연유로 한국문학이라고 칭하면 남한문학에 국한돼 북한문학이 배제될 수밖에 없다.

나는 지난 50년 동안 구한말부터 현재까지의 근·현대 조선문학을 연구하고 있기 때문에

‘조선문학’으로 칭한다.”

 

▼ 이번에 호주를 방문한 동기와 목적은?

“첫째는 윤동주 시인의 혈육인 윤혜원 여사께서 많이 편찮으셔 문안을 드리고 싶었고,

이런저런 말씀도 듣고 싶었다. 그리고 윤 시인 50주기와 60주기에 맞춰

‘윤동주 추모 문학제’를 개최한 재(在)호주 문인들을 만나고 싶었다.

아울러 시드니에 윤동주 시비 건립을 준비하는 호주 작가들의 소식도 듣고 싶어서 찾아왔다.”

 

▼ 윤혜원 여사는 처음 만나는 것인가.

“아니다. 그동안 여러 차례 만나 윤동주 관련 증언도 듣고,

중국 옌지(延吉)에서 추모사업도 함께 했다.

잘 알려진 대로 윤혜원 여사와 오형범 장로 부부는 1948년 북간도에서 남한으로 내려오면서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윤동주 시인의 시 원고 80여 편을 가슴에 안고 온 분들이어서

만날 때마다 가슴이 두근거린다.”

 

 

 

“오무라를 죽이고 싶다”

 

항일 애국시인 윤동주의 묘를 다른 사람도 아닌 일본인이 발견했다는 사실은

한국인들에게 커다란 충격이었다.

발견 당시 한국과 중국이 아직 국교를 수립하기 이전이어서 한국인 학자들의 접근이

쉽지 않았다는 정황만으로 위안을 삼을 수는 없었다.

윤동주가 누구인가. 그 문학적 성취에 대한 평가는 유보하더라도,

국민적 애송 시인으로 항상 첫 손가락에 꼽히는 이가 아니던가.

오무라 교수는 윤동주의 묘를 발견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 1985년 5월14일, 윤동주가 북간도 룽징에 묻힌 지 40년 만에 무덤을 찾아냈는데

당시 소감은 어떠했는가.

“윤 시인은 죽을 때까지 시인으로 대우받지 못했다.

후쿠오카 감옥에서 옥사하여 한 줌의 재로 돌아온 손자를 북간도에 묻은 다음

할아버지가 ‘시인 윤동주의 묘’라는 비석을 세워놓아 비로소 시인이 됐다.

그런 시인의 무덤을 찾아냈다는 사실에 가슴이 벅찼다.”

 

▼ 무덤의 상태가 아주 나빴을 것으로 상상되는데.

“봉분이 허물어져서 편평할 정도였다.

5월이었는데도 새싹은 돋지 않았고, 잡초만 무성해서 황량하기 그지없었다.

발견 당시에 묘비가 넘어져 있었다고 알려졌는데 그렇지 않다. 묘비는 제대로 서 있었다.”

 

윤동주 시인의 형제(3남1녀) 중 유일한 생존자인 윤혜원 여사와 오형범 장로 부부. 윤 여사는 시인의 손아래 동생으로, 20년 넘게 시드니에 살고 있다.

▼ 윤동주의 무덤을 일본인이 발견했다고 섭섭해 하는 한국 문인이 많다.

“섭섭해 하는 정도가 아니라 ‘오무라를 죽이고 싶다’고 말한 평론가도 있었다.

나와 친하게 지내는 김윤식 서울대 교수가 애석한 마음에서 그렇게 표현한 것인데 그 정도로 한국 문인들에게 충격이 컸던 것 같다.”

 

▼ 윤동주 묘지 발견 소식을 맨 처음 보도한 동아일보도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썼는데.

“그 정도는 점잖은 표현이었다.

어느 국문학자는 ‘하필이면 일본인이 발견하다니’라며 발을 동동 굴렀고, 어떤 심포지엄에서는 ‘일본인이 발견했다고 그를 미워해서는 안 된다’고 나를 옹호하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나 또한 부담이 컸지만, 실제로는 중국 조선족 문인과 학자들이 함께

찾았기 때문에 공동발견이라는 말이 정확하다.”

 

▼ 중국 조선족 문인과 학자는 누구였나.

“옌볜대학 권철 부교수, 조선문학 교연실 주임, 이해산 강사, 룽징중학의 한생철 교사 등이다.

발견한 며칠 뒤인 5월19일 예볜민속박물관에서 전통제기를 빌려서 제사를 지냈는데,

두만강에서 잡은 생선을 제상에 올렸다.”

 

 

‘조선문학-소개와 연구’

 

마침내 광복이 되었고 삼팔선이 그어지면서 조선문학도 남과 북으로 나뉘었다.

서로를 인정하지 않는 일방통행식 분단문학이 60년 넘게 이어지고 있다.

‘백두산 이남에서 현해탄까지’로 조선문학 연구영역을 설정한 오무라 교수는 혼란스러웠다.

그 와중에 그는 독특한 방식의 광복 후 조선문학 연구방법론을 창안했다.

‘남북한 문학 등거리 연구’다.

 

오무라 교수는 분단 이후 남북한 문학의 발달과정을 객관적인 시점에서 대승적으로

연구했다. 그가 양쪽 문학을 접할 수 있는 일본인이고 대학교수였기에 가능했던 작업이었다.

‘남북한 문학 등거리 연구’는 ‘윤동주 사적 발굴’과 더불어

오무라 교수가 이룩한 많은 업적 중 하이라이트다.

 

오무라 교수는 호주를 방문하면서 남북한 작품을 함께 게재하는 최초의 무크지

‘통일문학’ 창간호(2008년 1월)를 가져왔다. 그는 필자에게 잡지를 선물하면서

감회가 깊은 표정을 지었다. “많이 늦었지만 여기부터가 출발”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통일문학’의 목차를 보니 북한에서 최초로 썼다는 윤동주 문학평론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미학’이 실렸다.

북한의 평론가 박종식은 윤동주의 ‘서시’와 ‘비애’ 등을 분석하면서

“그의 시가 매력을 끄는 것은 서정성이나 언어구사의 정교성도 있겠지만, 그보다 그의 시에 우리의 심혼에 물결쳐오는 인간적인 그 어떤 견인력과 넋의 외침이 있기 때문”이라고 썼다.

 

객쩍은 얘기지만, 필자 또한 호주문학을 연구하는 입장이어서 외국문학을 연구한다는 것이

얼마나 지난한 작업인지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다.

필자는 이민 직후부터 ‘호주문학 200년 연구’를 20년 가까이 이어오고 있다.

30대 초반에 시작한 작업이니 내 인생의 황금기를 몽땅 쏟아 부은 셈인데,

부끄럽게도 그 결과가 너무나 미미하다.

필자는 수년 전에 ‘신동아’ ‘현대시학’ 등에 윤동주 관련 르포기사를 쓰다가

우연히 오무라 마스오 교수가 쓴 ‘윤동주와 한국문학’이라는 책을 읽게 됐다.

책을 읽으면서 그의 열정과 논리정연한 실증적 연구에 압도당했다.

거기에다 그 겸양과 꼿꼿한 정신이라니.

그런 연유로 “오무라 마스오 교수에게 절하고 싶다”라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든 것이다.

 

28년 짧은 생애를 살다간 윤동주 시인이 아직 살아 있다면,

두 사람이 서로 닮은 삶을 살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오무라 교수에게 윤동주 시인이 좋아했다는 들꽃 몇 송이 드리고 싶었던 것이다.

- 윤필립 在호주 시인 phillipsyd@hanmail.net

- 2008.12.01 신동아, 통권 591호(p488~4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