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끼며(시,서,화)

조선시대 초상화

Gijuzzang Dream 2007. 11. 28. 17:22

 

   

- 다시 보는 우리 초상화 세계 -
 

   

 

국립문화재연구소(소장 김봉건)는 2007년 11월 30일(금) 경복궁 국립고궁박물관에서

“다시 보는 우리 초상화 세계”라는 주제로《조선시대 초상화》학술 심포지엄을 개최한다.

이번 심포지엄은

2006년 문화재청이 주관한  ‘전국 소재 초상화 일괄공모 지정조사’시 새롭게 발굴된

조선시대 초상화 자료를 중심으로

당시 조사에 참여했던 전문가들 및 6명의 관련 연구자들의 발표와,

이에 대해 6명의 질의자가 종합적으로 질의 및 토론하는 형식으로 진행된다.

발표 내용은,

특정한 시기와 유형에 국한되지 않고 왕의 초상인 어진(御眞)을 비롯하여

17세기 공신상(功臣像; 공신들의 초상화),

18세기~20세기 사대부 초상화, 고승 영정(高僧 影幀; 승려의 초상화) 등

조선왕조 전반에 걸친 초상화제작의 흐름을 살필 수 있는 종합적인 학술세미나로 구성되었다.

 


조선시대에서는 개국 이래 숭모사상에 입각한 유교적인 의례차원에서

왕실중심 어진의 제작과

진전(眞殿; 어진을 봉안한 전각)이 운영되는 등 초상화 조성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그리고 당시 사회와 이념을 주도했던 사대부 계층은 물론 일반인에게도

祖宗 숭배사상은 널리 확산되어 선조의 초상을 그려 가묘와 영당에 모시는 전통이 있었다.

또한 국가발전에 공이 남달랐던 功臣들의 공을 기리기 위한 공신상과

학덕과 인망이 두터웠던 士大夫들의 초상 제작도 활발하였다.

여기에 승려의 초상화인 고승 영정 역시

스승의 입적 후 제자들이 先師에 대한 경애와 추모의 증표로서 사찰에서 꾸준히 제작되었음을

이번 심포지엄을 통해 초상의 영역을 폭넓게 알 수 있다.


특히, 오랫동안 초상화를 연구한 조선미 교수는

이번 지정조사 시 발굴된 작품을 중심으로 각종 사료를 검토하여

17세기를 전후한 공신상의 제도적 변천사와 양식적 특징을 구명하고

사대부 초상화의 영향관계 등을 종합적으로 고찰하였다.

 

이 가운데 인조반정 후 훈적(勳籍, 신하가 세운 공로를 기록한 문서)에서 삭제되고 불태워져

전할 수 없는 상황에도 불구하고

오늘날까지 이를 지켜낸 후손들의 의지를

<익사공신 임장 상(翼社功臣 任章像)>등의 사례를 들고

공신상이 단순히 예술작품이 아닌‘조상’과 동일한 대상으로 인식된

초상화의 본질적 기능을 소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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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사공신(翼社功臣)

= 1613년(광해군 5)에 임해군옥사를 다스린 공으로

허장(許箴), 김이원(金履元) 등 48명에게 내린 훈호(勳號). 1623년 훈적에서 삭제됨.
 

임장(任章, 1568~1619)

= 1519년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며, 1605년(선조 38)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시강원설서가 됨.

승정원주서, 예문관대교를 거쳐 형조좌랑과 정언을 지냈고, 선조 재위시 당시

소북(小北)) 중 남당(南黨)의 일원으로 인식됨.

광해군의 즉위 직후 정언으로 광해군 형인 임해군(臨海君)과 광해군의 즉위에

비판적인 유영경(柳永慶)을 탄핵함.

그 뒤 부수찬, 지평, 수찬 등을 역임한 뒤 1610년 헌납이 되었고,

이어 이조좌랑과 이조정랑 등 요직에 임명됨.

<선조실록>의 편찬 때 편수관으로 참여하였으나

당색이 다른 형제간의 알력 때문에 파직되었다가 다시 출사함.

1613년 영창대군을 옹립하려 한 혐의로 발생한 박응서(朴應犀)  옥사사건에 관련되어 파직됨.

그 뒤 1618년에 나주목사로 임명되었으나 이듬해 임소에서 졸(卒)하였다.

인조반정 직후인 1623년 임해군의 치죄를 주장하였다는 것으로 파직, 불서용의 처벌을 받음.

 

 

 

 

 

익사공신인 임장(任章, 1568-1619)초상 / 보물 1503호 

 

 

채제공(蔡濟共, 1720-1799)초상 / 보물 1477호 

 

  

사명당(泗溟堂 惟政, 1544~1610) 영정 / 보물 1505호  


 

또한 이태호 교수는 이번 보물로 지정된 <윤증초상>, <채제공초상>을 비롯하여

<이기양초상> 등 18세기 사대부 초상화에서

종래보다 현저히 극대화된 정확성과 사실성은

카메라 옵스쿠라’ 라는 새로운 서양기구의 도입과 사용에 힘입었음을 발표한다.

 

이들 그림들의 초본과 정본을 분석하고,

여기에 정약용의 글 등을 볼 때 카메라 옵스쿠라를 이용해 그려졌고

1780년대 중반 조선후기 초상화에 입체감과 투시도법이 적용될 수 있었다고 새로운 제시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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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메라 옵스쿠라

= ‘어두운 방’이라는 뜻으로, 카메라의 어원을 나타내는 말.

밀폐된 방의 한쪽 벽에 바늘구멍을 뚫으면 바깥경치가 다른쪽 벽면에 거꾸로 비치는데,

서양에서는 16세기 이전부터 이 원리가 알려져 이것을 소형화한 도구가 밑그림을 그리는데 이용됨.

조선에서는 '칠실파려안(漆室玻瓈眼)’ 또는 ‘파려축경(玻瓈縮鏡)'이라고 불렀음.

  

초본(草本)과 정본(正本)

= 초본은 초상화를 그리는데 있어 인물의 형상을 대략적으로 초(抄)를 잡아 그린 것이고,

정본은 초본작업을 통해 완성된 본을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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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 6인의 발표자들을 통해 조선왕실의 어진제도는

17세기 숙종년간을 전후하여 부흥기를 맞이하고,

18세기 영·정조기에 정착되면서 어진이 활발히 제작되어,

이 무렵 일반 사대부 초상화와 고승진영까지 그 영향이 파급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어진과 공신도는 임시관청인 도감(都監)이 설치되고,

김명국, 김홍도, 이명기, 진재해 등 당대 뛰어난 기량을 보유한 화원을 등용하여

제작함으로써 훌륭하고 정교한 작품이 전해지게 되었다.

이들 제작배경과 과정을 기록한 문헌인 조선왕조실록과

도감의궤(都監儀軌 - 조선 왕실의 행살를 주관한 임시관청인 도감에서 작성한 의궤) 등이 남아있어

조선의 초상화는 역사적, 제도적 면에서 사료로서도 가치가 큰 회화작품임을 밝히고 있다.

여기에 사대부들은 당시 선진문물을 적극적으로 도입하고

그 지식과 기재를 초상화 제작 시 직접 응용함으로써

대상인물의 내면과 인품을 더욱 충실히 담아 작품의 완성도를 높여 나갈 수 있었음을 또한 밝힌다.

국립문화재연구소는 금번 심포지엄 개최를 계기로

지정조사 등을 통해 새롭게 발굴된 문화재를 중심으로

앞으로도 분야별로 본격적인 학술대회를 개최하여 학제간 연구를 촉진하고,

한층 더 심화된 연구성과가 나올 수 있도록 해나갈 예정이다.
- 담당자 : 국립문화재연구소 이난영

- 2007년 11-26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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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시대 초상화 학술 심포지엄 개최

 

 

  

날짜  -  2007년 11월 30일(금)

 

 장소  -  경복궁 국립고궁박물관 

 

 

 

 

 

 

 <심포지엄 일정표>

 

10:00~10:15 개회사 김봉건(국립문화재연구소장)

축사 유홍준(문화재청장)

 

사회 : 박정혜(한국학중앙영구원)

 

 

10:15~11:00 조선 후반기 어진의 제작과 봉안

발표 조인수(한국예술종합학교)

토론 이수미(국립중앙박물관)

 

11:00~11:45 17세기 공신상에 대하여

발표 조선미(성균관대학교)

토론 이원복(국립전주박물관)

 

11:45~12:30 18세기 초상화풍의 변모와 카메라 옵스쿠라

발표 이태호(명지대학교)

토론 박은순(덕성여자대학교)

 

12:30~14:00 중식

 

 

사회 : 홍선표 (이화여자대학교)

 

14:00~14:45 19~20세기 사대부 초상화

발표 진준현(서울대박물관)

토론 정석범(덕성여자대학교)

 

14:45~15:30 조선후기 고승영정

발표 정우택(동국대학교)

토론 김정희(원광대학교)

 

15:30~16:15 조선 임진왜란 삼화상(三和尙) 진영 연구

발표 이은희(국립문화재연구소)

토론 김창균(동국대학교)

 

휴식 16:15~16:40

 

 

종합토론 16:40~18:00

좌장 : 안휘준(문화재위원장․ 명지대학교 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