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끼며(시,서,화)

[초상화] 조영복 초상

Gijuzzang Dream 2007. 12. 4. 20:37

 

 

 

 

 개결한 선비화가의 자유로움

 

 

경기도립박물관에는 영조 때 도승지와 한성부 우윤을 지냈던

조영복(趙榮福, 1672-1728)의 초상화가 두 폭 소장되어 있다.

 

공복본(公服本) 당시 유명한 화원인 진재해(秦再奚, 1691-1769)가 그린 것이고,

연거복본(燕居服本)은 조영복의 동생이자 사대부화가인

관아재 조영석(觀我齋 趙榮祏, 1686-1761)이 그린 것이다.

 

이들 초상화를 그리게 된 사연은 조영석이 후자의 그림에 자세히 적어 놓았다.

 

"이것은 내 형님인 이지당(二知堂) 조영복의 54세 초상화다.

이전 1724년에 나는 이지당이 영춘(영춘)에 적거할 당시 만나 뵙고 초본을 그렸다.

다음해인 1725년 이지당이 조정에 돌아오게 되자 간단하게 채색을 하고

화사 진재해에게 부탁하여 별도의 공복본을 제작하게 하고, 내가 이 본을 그렸다."

 

조영복은 이 그림을 그린 조영석의 맏형이다.

조영복은 1721년 승지가 되었으나, 신임사화 때 소론에 배척당하여

벼슬자리에 물러나고 귀양살이를 한다. 선산에 유배되었다,

다시 서울에 보다 가까운 단양 영춘으로 옮겨졌다.

영춘에서 귀양살이를 하던 1724년, 조영석은 형님을 만나고 그의 초상화 초본을 그린다.

 

다음해 1월 노론의 집권으로 귀양에서 풀려나면서,

다시 참의로부터 시작하여 승지, 경상감사 등 연이어 벼슬길에 오른다.

이 때 조영석은 형을 만나 초상화 초본에 간략하게 채색을 해둔다.

 

그러고 나서 4년 뒤인 1743년,

그가 세상을 떠난 형의 초상화를 모시기 위해

공복본(公服本)은 진재해에게 부탁하고 연거복본(燕居服本)은 자신이 직접 그린다.

공복본은 관복을 갖추어 입은 모습을 그린 것이고,

연거복은 캐주얼 차림처럼 편한 복장을 입고 그린 그림이다.

 

 

이때 조영석은 진재해에게 자신이 전에 그려두었던 초본을 보여준다.

그래서 진재해의 초상화와 조영석의 초상화의 얼굴이 한사람의 그림처럼 닮은 것이다.
비록 당대 최고의 화원이 그렸지만,

공복복은 일정한 틀이 있는데다 사후에 조영석의 초본을 그린 것이라

개성이 충분히 발휘되지 못하였다.

 

반면, 연거복본은 자연스러운 조형세계를 추구하는 조영석이

자신의 형을 실제 보고 그린 그림이고

조영복이 귀양살이로 어떤 격식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상황을 그린 그림이라서

우리에게 훨씬 실감나게 다가온다.


 

도판 1  '조영복초상' 조영석, 보물 제 1298호, 1743년,
           120X76.5cm, 비단에 채색, 경기도박물관 소장.

   도판 2  '조영복초상' 진재해, 보물 제 1298호, 1743년,
              154X80cm, 비단에 채색, 경기도박물관 소장.

 

 

이 초상화의 매력은 연거복에 걸맞은 자연스러운 표현과 품격 높은 선묘에 있다.

약간 오른쪽으로 틀어 미묘한 각도를 이룬 몸의 자세와 옷의 펑퍼짐한 윤곽선에서는

기교를 뛰어넘는 아취가 느껴진다.

여기에 매듭이 굵은 양손과 가슴의 홍세조와 거기에 매단 부채가 이루는 선적인 흐름은

매우 자연스러우면서도 장식성이 두드러진다.

또한 옷을 묘사한 필선은 전혀 세련되거나 기교를 부리지 않았다.

그저 질박하면서도 격조가 느껴지는, 매우 자연스러운 선이다.

아마 세상의 화려함과 번거로움에서 벗어나 귀양살이하는 조영복의 실상을

그대로 보여주기 위한 배려일 것이다.

여기로 그리는 선비화가의 그림은 같은 대상을 그리는 화원의 그림과 이렇게 다르다.

그가 형의 초상을 통해서 드러내고자 한 것은 바로 자연스러움과 기품인 것이다.

 

이 초상화는 조정에서 임금에 의하여 거론될 만큼 유명했다.

조관빈이 어진을 모사하는 작업을 당대의 묘필인 조영석에게 맡기자고 제안하자

영조는 조영석이 그린 그의 형 초상화를 본적이 있는데 그

그림이 실물과 흡사하다며 흔쾌히 허락한다.

 

이에 영조가 조영석에게 붓을 잡고 모사하겠느냐고 묻자,

조영석은 기예로써 임금을 섬길 수 없다며 거절한다. 개결한 선비의 기개다.

 

우승지 이성중은 조영석이 외람되다며 중한 벌로 추문을 할 것을 요구하나,

영조는 추문하지 말라고 지시한다. 역시 성군다운 아량이다.

 

이 사건은 후대에 전해져, 추사 김정희는 조영석을 다음과 같은 선비화가로 평했다.

"사대부로서 그림 그리는 이 지금은 맥이 끊어져, 조영석 떠난 뒤로 백십 년이 내려왔네." 

 

- 정병모 (경주대학교 문화재학부 교수)